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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입문을 위한 최소한의 동양 철학사 : 인물편 - 요즘 세대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동양 대표 철학자 17인
신성권 지음 / 하늘아래 / 2024년 4월
평점 :
그 제자백가의 대표적인 사사이 바로 유가, 도가, 법가이다.
유가를 창시한 공자는 이(仁) 과 의(義) 로써 사회질서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5-)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애쓰지 않으므로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다. 장자는 헛된 성공을 좇아 자신을 괴롭히는 자를 자신의 그림자를 피해 달아나는 사람에 비유했다. 그는 자기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더욱 힘차게 다리지만 결국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지쳐 쓰러지고 만다.만약 그가 처음부터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있었더라면 그림자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66-)
한비자는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라고 보았다. 하지만 한비자는 인간의 어두운 면에서 절망하기보다는 난세를 바로잡을 희망을 발견했다. 인간이 이기적이고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면 그것을 반영한 제도를 구축함으로써 천하를 다스릴 수 있을 터, 그것이 바로 상과 벌로 이루어진 법치(法治) 라는 것이다.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이고 이익과 손해의 경중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라며 무거운 처벌 앞에서 함부로 범법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다. (-82-)
이황은 인간은 존귀하고 선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선한 마음의 단서인 4단을 이(理) 가 움직여서 생기는 마음으로, 불완전한 마음인 7정을 기(氣) 가 움직여서 생기는 마음으로 규정했다.인간의 본성은 선한데, 그 선한 4단의 마음을 제대로 발현하는 사람을 군자로, 7정에 휘둘려서 본래의 선함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을 소인배로 본 것이다. 이처럼 이황은 '이(理)'의 존엄성과 절대선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다. (-149-)
최한기가 활동했던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은 세도정치로 인해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가혹한 수탈로 백성들의 삶이 궁핍했으며, 외교적으로는 쇄국 정책으로 서양 문물이 들어오지 못하여 나라의 발전이 지연되고 있었다. 최한기는 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야 시대 흐름에 뒤쳐지지 않을 수 있다고 보았다. (-196-)
책 『철학 입문을 위한 최소한의 동양 철학사 (인물편)』에는 17명의 동양 철학자가 등장하고 있다. 공자, 맹자, 순자, 노자, 장자, 한비자, 고타마 싯다르타. 원효,지눌, 주자, 왕양명, 이황, 조식, 이이, 정약용, 최한기, 최제우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정치,문화,경제,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고대 중국의 혼란스러운 제자백가시대 상황을 종식시킨 철학자 한비자의 사상을 눈여겨 볼 수 있다.
서양에 마키아벨리가 있다면, 동양에 한비자가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생전에 명예를 얻었다면, 한비자는 살아생전 자신의 법가 사상을 인정받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이다.진시황이 한비자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나라를 통치하면서,한비자의 사상이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그의 철학은 동양 사상에서, 유가 사상, 법가사상, 도가 사상,이 세가지 중에서, 법가사사의 핵심가치를 완성할 수 있었으며,현대인의 법의 토대인 법철학의 출발점이 될 수 있었다.
동양처학에는 인(仁) 에 대해서 말한다.책에는 공자, 맹자, 순자, 노자,장자가 인(仁)에 해당되는 철학자다. 이들이 추구하는 철학는 나라를 다스릴 때, 인(仁)에 근거하여, 사람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상과 벌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즉 우리가 생각하는 선과 악에 대해서, 기준점이 되는 것이 인(仁)이다. 맹자가 강조했던 성선설과 순자가 강조했던 성악설, 이 두가지 가치를 인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정약용과 최한기,그리고 이황과 이이.이들는 서로 짝을 지어서, 설명할 수 있다. 이황과 이이는 성리학을 완성하는 대학자로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학을 조선의 정치 철학에 심었으며, 유가 사상을 성리학에 내재하는데 성공하였다. 조선이 기록의 나라이며, 성리학을 중시하며,인의예지와 충효를 강조한 나라로 기틀을 세울 수 있었던 이유도 , 이황과 이이가 추구한 성리학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유배형에 처했던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자신의 사상을 완성하였으며,실학의 출발점이 정약용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정약용은 조선시대 책을 가장 많이 쓴 동양사상가이다. 하지만 엄청난 독서력을 추구하였던 최한기는 정약용을 넘어서는 저술을 해왓으며, 그가 추구하였던 학문적 가치에 대해서, 기측제의(氣測體儀) 를 통해서 우주만물의 본질을 알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