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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내겐 자신들과 상호성의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을 부정하거나 억압하기 위하여 악랄하게 자신들이 내면화한 사회이미지의 수준으로 도덕적 정의를 강요하는 정치와 종교 권력에 대한 의심의 정당성을 말한 『의심에 대한 옹호』에 이어‘피터 버거’의 책은 이로써 두 번째의 접촉이다. 그러나 시종 중용의 사회학을 선언했음에도 근대성에 대한 서구의 일방적 시각, 푸코나 들뢰즈 등 일련의 비판 철학에 대한 비하와 극단적 보수주의의 가치관은 저자의 중용을 의심하기에 충분한 인상을 주었기에 이 선입견이 무너지기를 기대하면서 읽었다. 선입견이 확신으로 확인되었지만.

 

이 책은 일종의 지적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학문적 편력 - 대학원 공부, 연구와 논문 출간, 대학 강의 등을 중심으로 하여 종교 사회학자로서의 인생 전반에 대한 소소한 기억을 더듬고 있다. 이들 얘기 속에 자신의 주요 저작물들의 학문적 배경과 의도했던 주장들을 통해 사회학자로서 지향했던 인간적인 의지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자기변호와 주장은 있지만 반성은 어디에도 없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반성과 용서를 빌 것이 없을 수 있을까? 아마 지극히 자기도취적이고 이기심으로 뭉쳐지지 않고서는 가능치 않을 것이다. 결국 저자의 ‘인간주의적 사회학’이란 것에서 진정성을 발견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많은 모순으로 가득하다는 얘기가 된다.

 

사회학자로의 길에 들어서게 한 뉴욕의‘사회조사 뉴스쿨’에서의 학업으로부터 자신의 사회학 방법론의 이론적 기반들과 특히 종교사회학자로서 베버에 대한 영향을 말한다. 그리고 뉴스쿨 쉬츠교수의 지식 사회학을 계승함으로써 인간주의적 인문학과 철학에 방법론상 가깝다고 학문적 배경을 정의하고 있다. 또한 루터의 광신자에서 온화한 개신교도로, 중도 우파 보수주의자라고 자신의 이념적 가치관을 선언하기도 한다. 물론 자신의 평가이고 주장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사실 앞선 그의 저술의 논지들조차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본의를 의심하게 될 정도였으니 ‘중도’니, ‘중용’이니 하는 수식어들이 이 사람으로부터 한없이 초라한 말이 되어버린다.

 

다만 그의 저서에서 반복되는 얘기지만 현대사회에 대한 정의에서‘다원성(Plurality)’에 대한 지적이나 ‘제한된 책임성’을 통해 근본주의의 해악을 주장하는 부분만큼에서는 사회학자로서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일례로 런던탑에 전시된 사형 집행인의 칼에 새겨진“‘내가 너의 목을 베는 것이 아니요, 예수께서 하심이라.’라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며, 단지 신의 도구일 따름이다.”라는 자기기만성이 바로 종교라는 폭로처럼 사악한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것이 사회학이라는 주장은 저자의 사회학이 어떤 부류인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나아가서 개인이 자기 역할 뒤에 숨을 수 있게 해주는 자기기만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인간주의적 사회학이란 것이고, 이것이 인간을 환상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좀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한다는 신념을 보여준다.

 

한편 근대성은 세속화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주장은 다원성과 연결되는데, 오히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는 신들이 늘어난 것이 그 예라고 하는 것이다. 다분히 서양인의 관점이다. 자신이 무지했던 영역을 뒤늦게 알게 됨으로써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마치 없었던 것이 새롭게 발생한 것처럼 얘기되는 것인데, 이러한 오만의 논리는 한국 등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을 후기유교주의문화의 발현이라고 단정하면서 급기야는 자본주의의 도덕적 선과 지고의 가치라고 선언하는 식이다. 현장을 직접 체험하는 사회학적 방법론이 자신의 학문적 무기라고 과시하며, ‘사회학적 관광’이라고 자부하는 그 겉핥기의 관광이 어떤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을 단정케 하는데 이르는 것을 보면 그저 실소밖에 나오지 않는다. 더욱 가소로운 것은 이렇게 신들이 늘어났으니 다원화된 것이고, 곧 세상은 세속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연 이 논리가 타당한 것일까?

 

여전히 계몽주의 이성에 뿌리를 내린 수구적 사유의 종교 사회학자의 아전인수식 관점을 지켜보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푸코의 성 혁명에 대한 이론에서 영성이 넘쳐난다고 왜곡하고, “고대의 음탕한 비밀 주신제를 희한하게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그의 무지라고 넘어가더라도, 한국, 대만, 싱가폴의 물질적 발전을 귀동냥하곤 바로 사회주의 사례는 유토피아적 상상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는 비약에는 그저 혀를 내두를 밖에 없어진다. 학문적 양심이나 사회학이 오물에 처박힌 느낌이다.

 

그리고 자신의 반 페미니즘적 언어 사용의 지적에 대해 ‘right of man'처럼 인권을 표현할 때 남성 명사인 man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총칭어로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항변하면서 페미니즘 수사학을 공박하는 것이나, 담배회사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받은 것에 대한 비난에 대해서는 금연운동의 정치적 오용이라고 말하면서 성공한 운동이란 이데올로기와 이권이 결합하는 것이고, 곧 “사회학은 분석해서 폭로한다!”라며 본질을 학문적 결실로 회피하는 모습은 지식이 얼마나 파렴치하게 동원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만하지 않을까? 소위 지식사회학이라 명명하거나 종교사회학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겐 어떤 참고가 될지 모르겠으나 내겐 기독교 극우 보수주의자의 탐욕스런 인생 편력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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