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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은 왜 읽는가? 라는 질문이 빈번하다. 그리고 왜 쓰는가? 라는 의문도. 그래서 당연히 어떤 의지가 작동하고 목적이 분명하며, 가능한 답변이 있으리라는 명령에 굴복해 이러저러한 답변들을 쏟아내고, 그것들이 그럴듯한 의미로 포장되어 ‘책 읽는 법’, ‘책 쓰는 법’ 따위의 제목을 달고 마치 다 알고 있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냥 뱉어내어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질문에 딱히 대답할 무엇이 없었고 제아무리 구실을 찾으려 해도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그저 책을 읽는 것이 좋다는 것이고, 그 순간만큼은 외부의 소음과 차단되어 평온해졌다는 것 정도이다. 그렇다. 읽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고 목적 자체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이유를 갖다 붙여야 한다는 말인가!
이 책의 저자는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고 누구도 부하로 두고 있지 않다.”라고 자유로운 정신의 실천가임을 선언하고 있다. 즉 외부의 기준이 아무것도 없는 발가벗은 형태의 읽기를 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오직 자신의 무의식을, 욕망을 텍스트에 직접 접속하는 고독한 읽기를 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자체인 즐거움을 누리면서. 이렇게 해서 그가 체득한 것은 무엇일까? “읽고 쓰는데 필요한 모든 문학적 학식 일반”이 바로 넓은 의미의‘문학’이요, 그 문학이 세상을 변혁시켜왔다는 주장이다. 분명 책이 세상의 형식을 변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데 동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저자가 지적하는 ‘중세 해석자 혁명’이라는 12세기 르네상스나, ‘대혁명’이라 지칭하는 루터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개혁이 바로 문학, 책으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에.
책을 읽고 쓰는 것, 문득 펼쳐본 미미한 책 한 줄이, 누군가의 조용한 서재 안에서 나온 철학적 개념이 한 문명을 파괴해버리는 일이 가능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문학과 혁명’에 관한 얘기이다. 여기서의 문학은 오늘의 소설이나 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학의 어원으로부터 시작해서 문학이란 텍스트 일반, 성서, 법률서, 협의의 문학, 철학을 포함하는 총체이다. 이것들이 인간의 사고와 습속, 문명적 패턴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것의 예가 교황혁명 또는 중세해석자 혁명이요, 종교개혁이요 대혁명이다. 이 혁명이 지금 우리들이 체감하는 문명의 전환이자 초석이 되었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혁명이란 폭력혁명으로서가 아니라 이처럼 다른 형식, 문학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물론 인류 문명의 대전환을 만들어낸 이들 혁명이 문학혁명이 우선이고 폭력은 보충적이거나 사후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전적인 동의를 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혁명을 완성하는 것, 즉 이전의 사회적 인식과 질서를 새로운 인식과 질서로 바꾸는 힘에 있어서 과연 폭력이 항상 후발적이고 보완적 역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저자의 구구절절한 사실(史實)의 나열에 불구하고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내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다.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비로소 실현시킨 프랑스 대혁명이 민중의 폭력행사 없이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저자는 이와는 달리 이 역시 선행한 법률과 철학, 소설 등 문학이라고 말한다. 이 진실을 과연 누가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 저자의 자유정신은 모순에 들어간다. 세계에 대한 전문가, 지식인들의 이론을 “자신을 하나의 우뚝 솟은 전체의 모습을 제시하려는 비참한 팔루스(Phallus)적 향락”이라고 비판하던 저자 자신이 바로 이러한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향락이 없는 책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잘 난체 하는 것, 내가 깨우친 것, 내가 발견 한 것을 쓰는 것이 비록 동의 받지 못하거나 허접 쓰레기에 불과한 들 그것들은 나쁜 지(知)요, 내 문학만이 좋은 지(知)라고 하는 것은 독선이 되고 만다.
다만, 문학과 혁명에 대한 저자의 관점만큼은 우리가 왜 책을 읽어야 하고 써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제공한다. 루터의 소위 종교혁명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라는 측면에서 민중의 졸렬한 언어에 지나지 않았던 독일어를 근대 독일어로 정착시키고 확산시킨 성서의 해석, 다시 말해 성스러운 법을 속된 법으로 이관시키기 위한 무수한 번역작업과 세속화 작업이라는 대대적인 출판행위를 포착한 것이다. 루터 이전의 세상을 지배하던 성(聖)의 속(俗)으로의 변화는 이렇게 텍스트의 확산이 이루어낸 혁명이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저자는 혁명은 폭력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며, 폭력을 가진 자만의 의지로 되는 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 역시 많은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루터만큼 강력한 권력으로서의 폭력을 가진 자가 있었을까라고 묻는다면 텍스트의 선행과 폭력의 후행은 단언하기 어려운 국면에 빠져들고 만다. 지나치게 나아간 것 아닐까? 문학이, 책이 혁명의 저변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혁명의 다른 형식이 바로 문학이라 말하는 것은 미흡하다.
중세 해석자 혁명(12세기 르네상스) 역시 문학이라는 로마법을 주입받아 고쳐 쓰인 교회법의 텍스트를 갱신하고 체계를 이루어 근대국가의 원형을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복됨으로써 인간의 신체에 각인되고 주입되는 것의 기반이 문학이라고 만 말하는 것은 과도한 도약이 아닐까? 폭력은 인간에게 그보다 오래되고 근본적인 의례가 아닌가? 아무튼 텍스트가 인류의 문명을 뒤바꾼 대혁명의 결정적인 토대였음을 새롭게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어주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책을 읽고 쓰는 것이 혁명의 초석이 되고, 세상의 문제와 결별하고 변혁될 새로운 세상을 이루는 힘이 될 수 있음에 동의한다. 그래서 어설픈 이들이 지금 세상에서는“철학이 끝났다!”, “문학이 끝났다!”라고 하는 단언의 목소리는 맹랑하고 터무니없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미래가 마냥 낭만적인 것일 수는 없다. 누구나 죽음으로 끝내는 것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즉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고 해서, 병든 세상에 종말론적 시각을 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게다. 그만큼 오늘의 세상은 병들었다. 볼 수 없다고 해서, 알 수 없다고 해서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질병적 세상바라보기에 대해 지극히 혐오감을 가진 낭만적 미래관을 가진 저자의 또 하나의 편협한 독단론을 마주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시간이 아니다. 이웃 나라의 젊은 철학자의 독선에 쓴 웃음을 짓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