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라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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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성찰이 없는 삶으로 돌아가고, 죄책감 없이 메이지를 제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감사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P 332 에서

 

 

이 문장은 다섯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마이클 비어드가 첫 번째 아내로부터 결별 통보를 받았을 때, 여우의 눈물을 흘리며 내심 쾌재를 부르는 장면이다. 이 묘사에 한 인물의 인성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자기반성이 요구되는 삶에는 진저리를 치며, 어떠한 책임감도 갖지 않으려 하고, 성적 충동의 실현에 아무런 제한도 없어야 하는 그야말로 자기애와 이기심만으로 똘똘 뭉친 거짓말쟁이이자 바람둥이다.

 

소설은 이처럼 화려한 지성의 권위 이면에 위장된 진실, 그 위선의 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업이다. 결코 결합될 수 없을 것 같은 노벨물리학상과 실종된 도덕, 지구 온난화에 대처하는 권위와 돈벌이처럼 지성이란 허울 좋은 가면 속에 감추어진 탐욕과 추오의 모순된 융합의 현실을 거닐게 된다. 그런데 작가가 이언 매큐언이다. 문장의 섹시함으로 현존하는 소설가중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사람이 썼으니 뇌를 척척 감싸 핥아대는 그의 혀 놀림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끔찍한 아버지가 될지 일찌감치 간파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로부터 탈출한 네 명의 전처에 이어 맞바람을 피우는 열여덟 살 연하인 다섯 번째 아내 퍼트리스에 대한 뒤늦은 갈망, 그리고 수치심으로 안달하는 나르시시스트,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에 무임승차한 융합이론으로 노벨상을 거머쥔 후 돈벌이와 섹스상대를 물색하는 데 여념이 없는 인물의 묘사로 소설의 문장은 시작된다. 노벨상의 권위에 올라타 여기저기 이름을 걸어놓고 들어오는 수입이 왠지 부족하고, 그래서 그럴듯한 공직을 찾던 중 온난화 대처를 위한 신생기술개발에 국가의 관심이라는 명분을 위해 설립된 재생에너지 연구기관의 첫 책임자로 부임한다.

 

기후변화에 대해서는 손톱만큼도 관심 없는, 더구나 지구라는 범인류적 차원의 대응과 같은 인류애적 연민에는 더더욱 혐오의 말을 뱉어내기까지 하는 인간이 신생에너지 연구 책임자가 되었으니, 또한 퍼트리스와의 가정사로 골몰을 앓는 인간으로서 이것이 얼마나 허위에 찬 현실인지는 굳이 여타의 설명이 필요치 않으리라. 연구 과제를 선정해야 하는 책임을 안은 마이클 비어드는 가정용 풍력터빈 개발이라는 현실성이라고는 없는 제안을 하고, 이것이 곧 연구소의 핵심과제가 되기에 이른다. 여기에 더해 성과에 편승해 귀족 작위만을 노리는 연구소 실무책임자라는 문외한인 정부파견의 고위관리에 일을 떠맡기곤 직위의 명예와 높은 연봉과 대우를 향유하며 열심히 국가예산을 소비한다.

 

실패할 프로젝트임을 뻔히 아는 인물은 공사(公私)의 지리멸렬함, 그 권태를 떨쳐내려던 중, 그럴듯한 초대장을 손에 넣는다. 지구온난화를 몸소 확인하러 간다는 명분을 안고, 극적으로 녹아내리는 빙하 탐사 파견단에 합류한다. 얼음조각가, 소설가, 화가 등 예술가와 단 한명의 과학자로 구성된 북극 기후변화 탐사단의 실체는 조롱을 넘어선다. 탐사선이 정박한 항구를 향해 스노모빌을 타고 달려가는 마이클 비어드의 과장된 고난의 자기 묘사는 이 작품의 여느 해학과 풍자의 전경 중 단연 압도적이다. 파안대소라 할까? 터져 나오는 웃음과 눈물로 잠시 읽기를 멈추어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극한 추위에서 벌어지는 101쪽의 해프닝을 읽다보면 기승을 부리는 폭염도 어느새 잊어버리리라.

 

집에 돌아온 비어드는 그에게 식물의 광합성을 이용한 태양광 에너지의 개발을 제안하던 연구원 톰 올더스를 발견한다. 아내 퍼트리스와 정사를 마치고 맨 몸에 자신의 잠옷을 걸친 젊은 녀석. 변명과 광자에너지 개발의 집요한 요구를 외면하고 돌아서는 비어드를 향해 달려오던 올더스는 대리석 계단에 머리를 부딪치곤 사망하고 만다. 여기서는 어지간한 미스터리 저리가라 할 만큼 치밀한 비어드의 조작이 빛을 발한다. 아내와 바람난 남자에게 살인죄를 덮어씌우곤, 아무런 죄책감도, 도덕적 책임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일타 쌍피의 횡재에 발길이 가볍기만 하다.

 

죽은 연구원의 인공광합성을 이용한 태양광개발 연구 자료를 손에 넣은 비어드는 부지런히 자신의 연구논문으로 바꿔버리고, 수십 개의 특허권을 자기 소유화하며,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온난화를 일거에 해결하는 혁신적인 태양광자발전의 실현을 목전에 두기에 이른다. 거짓과 도둑질, 탐식과 도착으로 비대해진 기형적 인성을 지닌 지성, 아마 이러한 괴물들을 처리하는 것은 매큐언식 코미디만이 가능했을 것이다.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한 기후변화에 대한 인류의 대처는 비어드란 인물만큼이나 추하고 난삽한 본성을 지닌 것이라고, 인류가 지닌 그 긴장감을 이 작품으로 조금이라도 해소하라는 위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정말 폭력적으로 재미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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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30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첩보 스릴러물이라는 <스윗 투스>가 먼저 출간될 줄
알았는데 <솔라>가 선수를 쳤네요.

어제 교보에 가서 보고는 살까말까 망설였죠.
아마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만 하지 않았어도 샀을
텐데 말이죠.

이언 매큐언 출간작을 모두 읽었는데 숙제가 하나
더 늘었네요.

필리아 2018-07-30 17:47   좋아요 0 | URL
폭염을 잊기 딱 좋은, 이야기꾼 다운 작품이란 느낌입니다.
설원을 질주하는 자기애 그득한 에피소드에서부터, 각종 탐욕의 메뉴가 망라된 주인공의 행동들....
게다가 명예의 후광에 안주한 과학지성의 위선과 거짓들에 이르기까지 재미에서는 단연 독보적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