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유대인
슐로모 산드 지음, 김승완 옮김, 배철현 감수 / 사월의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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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민족 만들기에서 '유대인 매트릭스'를 만들 이론이 준비되었다면, 이제 이를 뒷받침해 줄 역사적 당위성을 장착할 차례다. 그것이 제2장 역사가 된 신화-하느님이 만드신 민족이다. 이번에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 중 하나라는 '싸움'이 들어있다. 물론 치고받는 건 아닐지라도 식자들의 말싸움도 그에 못지않은 재미를 제공해 주니 밤새워 읽기에 충분하다. 


신의 섭리가 행한 초자연적인 일이 갑자기 진실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는데도 이 초자연적 사건과 밀접하게 엮인 인간의 이야기는 어찌하여 역사적 진실로 계속 남을 수 있었을까? (137p) 


그것은 바로 역사학자들의 피, 땀, 눈물 덕분이다. 최초의 유대인 역사서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부터 시오니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크하츠 베어의 <갈루트>까지 어떻게 '신화역사'라는 장르가 탄생했는지를 추적한다. 


히 재미있는 부분은 최초로 유대민중을 발명한 하인리히 그레츠, 반유대주의를 학문적으로 정당화하려 한 하인리히 트라이치케, 시민적 민족주의를 주장한 테오도르 몸젠의 3파전을 다룬 내용이다. 이들은 '푈키쉬'한 역사관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인종적 의미의 민족적'인 역사관으로, 훗날 나치가 그럴듯하게 써먹은 역사관이라고 한다. 


이 세 학자는 각자의 주장은 노선을 달리했을지라도 모두 푈키쉬를 내재하고 있었다. 그 시작점에서 선민사상(그레츠)이 등장했고, 이것이 게르만족의 정체성을 위협한다며 너네 꺼져라고 비난했으며(트라이치케), 그들이 너무 격화되자 근대 민족은 다양한 문화의 혼합된 결과물이니 이왕 같은 영토에서 사는 거 사이좋게 지내자는 시민적 민족주의(몸젠)까지, 1930년대의 독일은 유대인과 게르만족의 종족주의가 상당히 격화된 시기였다. 


이를 적당히 버무려 다독다독 살면 좋았을 것을 이크하츠 베어라는 유대 역사학자가 1936년 <갈루트Galut, 히브리어로 '해방'>라는 에세이를 발표, '우리가 태어났지만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라는 시오니즘 최기 주장의 길을 닦았다. 하지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1930년대의 독일은 경제적 불황이 심각했고, 그들은ㅡ여전히 지금도 그러하듯ㅡ그 책임을 (종교적, 인종적) 소수자에게로 돌렸다. 거기다 <갈루트>가 발표된 1936년은 독일에서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고 하니 <갈루트>는 억세게 눈치 없는 저작물이었던 것이다. 


영토 기반이 없던 유대인이 의지할 곳은 이제 '성경' 뿐이었다. 추상적이고 신화적인 기록에 불과했던 성서는 그들을 이끄는 '종족적 표지'가 되었다. 그들은 우리의 선조가 그리스도를 거부했기에 유랑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고, 이민족으로부터 박해를 당한다는 괴상한 신화역사를 드디어 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서의 따뜻한 품은 그 초자연적이고 전설적인 특성에도 불구하고 (또는 바로 그런 특성 때문에) 그들에게 기나긴 정도를 넘어 거의 영원한 소속감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 (2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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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유대인
슐로모 산드 지음, 김승완 옮김, 배철현 감수 / 사월의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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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영화 <매트릭스: 레저렉션>을 보았다. 4편을 보고 나니 문득 잊고있던 그 생각들이 떠오르면서 <만들어진 유대인>을 읽고 있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영화는 매트릭스라는 견고한 틀 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에 추호의 의심도 갖지 않고 생활하는 가상 인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 토머스 앤더슨(이름도 어찌나 흔한지)도 '네오'가 되기 전엔 그저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니 어찌나 '유대인의 서사'를 떠올리게 하든지... 일단 한 번 그런 쪽으로 받아들여지다 보니 도무지 방향 수정이 잘 안됐다. 그래서 4편도 역시 유대인 서사의 연속성으로 볼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 이 책과 연관 지어 기록해 두는 것도 꽤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다.


<매트릭스>에는 자신이 가상 인간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자신의 세계가 현실이고, 그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평범한 시민들 말이다. 하지만 그중 모르피어스와 트리니티를 비롯해 일찍이 매트릭스의 정체를 알게 된 소수의 '반항군'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인간들을 무지몽매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해 수십 년째 구세주 '네오'를 찾고 있다. 그리고 시스템에는 스미스처럼 지독하리만큼 그들을 추적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내던지는 자도 있고(4편의 스미스는 상당히 독특한 캐릭터로 변화하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오라클처럼 그들을 도우려는 매트릭스 내부자도 있다. 자, 우선은 여기까지. 이제 이 부분을 대입해 보자.


매트릭스는 세계다. 그리고 매트릭스의 안락함에서 추방당해 멸망한 지구를 떠도는 모르피어스 일행은 디아스포라를 겪은 유대인이다. (시온에 살면서) 모르피어스 일행을 괴롭히는 망명자들은 팔레스타인 아랍인이다. 그리고 모르피어스 일행의 최종 목표는 인류의 마지막 도시 '시온(자이온)'을 지키는 것이다. 아마 여기까지만 설명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금방 눈치챌 것이다.


<만들어진 유대인>의 제1장 민족 만들기에는 모르피어스 일행(유대인)이 매트릭스를 파괴하고 시온으로의 회귀가 어떻게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지에 관해 참고할 만한 이데올로기에 관한 글들이 담겨 있다. 저자인 슐로모 산드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므로 '제우스'인 시오니스트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읽으면 읽을 수록 슐로모 산드의 후속작을 과연 읽을 수 있을 것인가 걱정이 앞선다.


어떤 계급이 오래도록 통제력을 유지하려면 눈에 보이는 권력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윤리적이고 법적인 규범들을 생산할 필요가 있다. 이럴 때 식자층이 나서서 계급 구조를 받쳐주는 헤게모니에 대한 옹호 논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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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유대인
슐로모 산드 지음, 김승완 옮김, 배철현 감수 / 사월의책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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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아비브에서 라리사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파리에서 지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친 교수, 엘리베이터 설치기사인 마흐무드의 친구이자 팔레스타인의 민족시인이 된 마흐무드(동명이인)의 친구, 바르셀로나 출신의 아나키스트 베르나르도의 사위, 그리고 우치의 공산주의자 슐렉의 아들ㅡ이 모든 정체성은 한 사람이 지닌 것이다. 이 책 <만들어진 유대인>의 저자 슐로모 산드 말이다. 


우리는 슐로모 산드의 짧은 가족과 지인의 이야기를 통해 유대인에 관한 몇 가지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민족주의'와 '종교공동체'ㅡ슐로모 산드가 '진정한 유대인은 없다'라고 주장하는 내용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이데올로기다. 


이들의 이야기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없다. 그리고 동일한 영토에서 사용하는 '모국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 유대인은 왜 스스로 민족과 종교라는 굴레를 택하게 되었을까? 왜 그들은 '동행'이 아닌 '분리'를 주장하는 걸까? 그들이 과연 '이스라엘'이라는 국토의 주인임을 주장할 자격은 있는가? 왜 그들은 그토록 '유대인의 이스라엘'을 원하는가? 이 책의 후속작인ㅡ하지만 국내 출판은 앞선 (2017년, 훗)ㅡ<유대인, 불쾌한 진실>에서도 그랬었지만 애잔함과 분노가 동시에 느껴지는 기묘한 책이다. 


'유대 역사'만 있을 뿐 '이스라엘의 역사'는 없다. (13p) 


'나'라는 인간이 그들이 말하는 내가 아니라면, 나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 배철현 (감수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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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아편 세창클래식 14
레몽 아롱 지음, 변광배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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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레몽 아롱(1905-1983)은 사르트르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철학자이자 정치사상적인 면에서는 양 끝에 위치했던 유명한 학자라고 한다. 책의 제목에 대해서도 잠시 말해보자면, 마르크스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는) 지식인의 아편'이라 빗대어 지은 것이라 한다. 


<지식인의 아편>은 '공산주의는 어떻게 이데올로기의 광신도를 만들어 내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정치, 역사, 지식인들의 삶 속에 침투하여 스스로 종교가 된 사상에 대한 비판이며, 또한 이러한 사상을 올바른 비판 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광신적 좌파에 대한 비판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하기 전, 18세기 대혁명의 여파로 프랑스는 혼란스러웠다. 정책은 정권을 잡는 자에 따라 부화뇌동하고, 귀족과 대지주에 대항하며 혁명을 일으킨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해야만 했다. 하지만 사상적 기반이 불충분했던 그들이 택한 것은 결국 '공포'와 대항하여 파괴하고자 했던 '계급의 구분'이었다. 


산업 혁명 후, 대혁명의 원인이 되었던 농민-귀족계급은 노동자-고용주라는 새로운 불평등의 관계로 재정비되었다. 그들이 그토록 외치던 계급의 평등과 소득의 분배는 10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요원한 일이었던 것이다. 노동자라는 새로운 계급은 100년 전 농민 못지않게, 아니 오히려 노예에 맞먹을 정도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런 혼란의 와중에 '노동자들의 지상낙원'을 약속한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는 어떻게 이데올로기를 넘어 종교에 가까운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을까? 종교에 내포된 '예언'은 주로 현재의 상황을 비판하고, 이 상황으로 벌어질 미래를 보여주고, 선택된 개인이나 집단이 빛나는 미래를 약속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천년지복설을 가져올 구세주로 스스로 신이 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 정작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단지 신도화된 인텔리겐치아만이 있었다. 


인텔리겐치아는 자신들의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또 다른 폭력과 공포를 선택했다. 이 교조주의를 포기하지 않은 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 '진정한 좌파'는 없을 것이다. 


레몽 아롱은 서문에서 이 책을 통해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할 것이라 밝힌다. 그중 나 또한 진정으로 알고 싶었던 것은 '경제 발전이 마르크스의 예언을 뒤엎은 나라인 프랑스에서 대체 어떤 이유로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하는가?'에 대한 답이었다. 지금의 러시아나 독재국가, 공산국가들의 상황을 여러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될 때면,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세력이 아직도 존재하며, 덜떨어진 주장을 펼칠 때마다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아편>은 레몽 아롱의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마르크스주의보다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닐까 싶다. 여러 나라로 이뤄진 유럽 대륙의 특성과 공산주의를 직접 겪어 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이 책에 담긴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솔직히 무리였지만, 공산주의가 종교화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제3부 지식인들의 소외편은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고, 공산주의도, 모든 이데올로기도 그때와는 다를 것이다. 또한 같은 이데올로기라도 국가와 민족에 따라 지향점은 분명히 다르다.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판단을 내려야 할 때 우리는 그들처럼 자신의 무오류성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보편성이 결여된 이데올로기는 우리에게도 아편이나 다름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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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아편 세창클래식 14
레몽 아롱 지음, 변광배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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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지식인들의 소외에서는 지식인, 즉 인텔리겐치아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그들의 정치와 이데올로기에 관한 이야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전후 민주주의 국가에서 교육을 받은 그들은 왜 그런 사회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거나 또는 불만은 가진 것처럼 말을 하는 걸까? 


이러한 혁명적 좌파 이데올로기를 레몽 아롱은 '지식인의 이반(離叛)'이라 표현하고 있다. 주로 상황에 기인하는 이러한 현상은 '자신들에게 당연히 돌아와야 할 몫을 차지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라며 다소 격하게 비난한다. 인텔리겐치아 사이에서도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보니 결합은 물 건너 간 거란 말이겠지. 


미국, 영국, 프랑스의 지식인을 비교하는 부분도 꽤 흥미로웠는데, 아무래도 다국적으로 이루어진 대륙인 '유럽'의 특수성을 체감하지 못하다 보니 저자와 나의 생각이 바탕부터 다른 듯하다. 그런 걸 보면 지식인 되기도 힘들겠고, 제멋대로 뻗어가는 회색 뇌세포의 활동에 갈팡질팡하며 방황하는 지식인들의 삶도 참 고돼 보인다. 역시 아무나 지식인이 아닌 것이야. 


든 것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만사를 승인하는 것이다. 현재의 사회나 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회와 분리될 수 없는 불의들과 개인들에게 책임이 돌아갈 수 있는 비리들 사이의 어디에 한계선을 그어야 하는가?



*네이버 독서카페 리딩투데이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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