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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 가정 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주디스 허먼 지음, 최현정 옮김 / 사람의집 / 2022년 6월
평점 :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꽤 오래전 영화 '야곱의 사다리(1993)'를 통해서였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주인공이 후유증에 시달리며 현실과 환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당히 묘한 느낌이 드는 영화였다. 나이가 어려서였나... PTSD는 나에겐 너무도 낯설고 먼 이야기였다.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제목 정도만 기억해왔던 이 영화를, 주디스 루이스 허먼의 <트라우마>를 읽은 후인 지금 다시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세월만큼,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만큼 조금은 다르게 보일까?
'프로이트 이후 출간된 가장 중요한 정신의학서 중 하나(뉴욕타임스)'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있는 <트라우마(Trauma)>는 1부 외상 장애, 2부 회복 단계로 나누어 각각 트라우마의 역사, 증상, 사례, 치유를 위한 노력 등을 담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여성의 히스테리 연구에서 시작된 트라우마의 역사를 통해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히스테리가 얼마나 하찮은 대우를 받으며 이중으로 고통을 주었는지 보여준다. 그 유명하다는 프로이트마저도 히스테리 연구의 한계(남성의 폭력을 동반한 증세를 파헤친다는 것은 당시 사회 분위기와 어긋나므로)를 느껴 포기했다고 하니, 당사자인 여성의 고통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1,2차 세계대전 후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는 군인들을 치료하던 과정에서 '외상(trauma)'은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냈고, 1970년대 무의미한 소모전에 다름없던 베트남 전쟁을 통해 본격적인 트라우마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와 함께 여성주의 운동의 초기 단계에서 여성의 히스테리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결국 사회는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약자의 위치에 놓인 여성과 아동에게 주목하기 시작한다.
<트라우마>의 저자인 주디스 루이스 허먼의 경력 중 20여 년의 기간 동안 여성주의 정신 클리닉에서 근무한 경력으로 인해 이 책은 페미니즘 관점에서 저술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괴상한 ~이즘이 아닌 본래의 페미니즘으로 들여다본 여성에 대한 폭력(주로 성과 관련된)과 아동학대의 세상은 차라리 몰랐으면 싶을 정도로 잔혹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성의 트라우마에 관한 목소리가 나온 것이 생각보다 역사가 짧다는 것이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강간법 개정 운동이 시작되었고, 성학대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하물며 '강간'에 관한 최초 발언을 통해 공론화된 것이 1971년에나 가능했다는 것이다. '강간을 강간'이라 정확하게 호명하는 것이 치료의 첫걸음이라고 하는 걸 보면 아직도 '인정'은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인다.
'이름'은 중요하다. 저자는 이름을 정확하게 부름으로써 현실을 직시하고 파편화되는 정체성을 통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트라우마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인정을 통해 피해자에게 혼자가 아님을, 어쭙잖은 도덕적 중립성이 아닌, '편을 선택하라'라고 한다.
남성의 폭력은 남성에 의한 행동이라는 사실은 자주 잊히곤 한다. (...) 여성의 성격을 통해서 남성의 행동을 설명하고자 했던 어마어마한 노력에 어처구니가 없다. (p.234)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표면적으로만 알고 있던 트라우마의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트라우마>는 성폭력과 아동학대에 관한 뉴스를 접하면서 무관심하게 지나쳤던 나를, 때로는 피해 여성을 비난했던 나를 진심으로 반성하게 하는, '양심의 기록'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마음이 아프다. 너무 아프다. 더 이상 그들을 외면하지 말자.
난 보여주고 싶어요. 나를 강간한 그 남자애가 내 몸을 부서뜨릴 수 있었지만 내 영혼을 파괴하지 못했어요. 절대로 부술 수 없어요! (p.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