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헌터 -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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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녀다. 여인의 머리 쪽에 꽂혀 있는 '은비녀'다. 한 여인과 땅 아래 오랫동안 묻혀 있던 은비녀다. 비녀가 볕을 본 것은 2018년 3월, 67년 만이다. 비녀는 한 다발의 머리카락과 함께 꺼내졌다. 길이는 111.7mm, 두께는 6.3mm다. 어떤 녀석은 88.6mm의 귀이개가 함께 있었다. 여인은 비녀로 쪽을 지고 귀이개도 함께 꽂았다. 귀이개는 왜 꽂았던 걸까. 여인에게는 아이가 있었다. 어떤 비녀는 옥비녀고, 어떤 비녀는 플라스틱 비녀이며, 어떤 비녀는 꽃무늬 비녀다. 여인들은 현대의 귀걸이처럼 취향에 맞는 비녀를 꽂고 거울을 들여다 보았을 것이다. 옥비녀는 갓 결혼한 처자의 것이다. 비녀가 없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여인의 머리 쪽에 붙어 있어야 할 비녀가 이렇게 무더기로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1951년 1월 6일, 설화산 오후 다섯 시에는 온양, 배방, 신창에서 온 86명의 여인이 산을 향해 걸어 가고 있었다. 다수는 기혼이고 비녀를 꽂고 있었다. 여인의 쪽에 함께 꽂혀 있던 귀이개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여인들의 걸음에는 6~9세의 어린 아이도 6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 옆에 총 든 장정 또한 함께 했다.

아이와 여인을 포함한 이백 여 명은 이곳에서 3246점의 뼈로 발굴되었다. 머리뼈, 치아, 등뼈, 손가락뼈, 발가락뼈, 허벅지 뼈.

아이들의 유해는 여인들과 함께 발굴됐다. 아이는 어미의 품에서 죽었을 것이다. 어떤 머리뼈에는 관자놀이에 나무가 꽂혀 있었다. 이렇게 죽임을 당한 여인들의 나이는 18세에서 24세가 가장 많았고 그뒤로 25세에서 29세가 많았다. 이들이 착용하던 반지나 비녀는 꽤 고급스러운 것들로 학살된 이들이 부유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미의 곁에서 함께 학살 당한 아이는 청동으로 만든 장난감, 종, 구슬 등이 있었다. 그들의 최종목적지는 설화산 구덩이었다. 구덩이에는 M1 소총과 카빈 소총의 탄두가 62개 나왔다. 탄피는 80개 가량 나왔다. 이들을 구덩이로 안내한 이들은 누구였으며, 어떤 이유로 그들은 구덩이에서 최후를 맞이 했을까.

이 지역 남자들은 온양 경찰서로 잡혀간 후 며칠간 구금됐다가 집으로 보내졋다. 이후 '속리산 구경'을 시켜줄 테니, 집으로 가서 먹을 것을 준비해오라는 요청이 있었다. 이렇게 여인들은 도시락을 싸고 은비녀를 꽂고 아이의 손을 잡고 설화산으로 갔다. 아이들은 속리산 구경을 갈 생각에 자신이 좋아하는 장난감 몇 점을 챙겨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설화산 수식 금광에 가로 3m, 세로 6.5m에 바닥부터 차곡차곡 다섯 층으로 나누어 마사토와 진흙, 돌, 지푸라기와 함께 포개졌다. 바닥과 4층에는 불에 그을린 뼈들도 나왔다. 이들이 구덩이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이유는 바로 1.4 후퇴다. 부역 혐의자의 가족이라는 혐의다. 시민을 버리고 도망 간 정부가 시민을 부역자로 처벌한 것이다. 쉽게 비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진짜 비극 앞에서 대체로 숙연해진다.

한 아무개는 사망자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숙부, 숙모, 고모가 모두 몰살자 명단에 속해 있으나, 그는 명단에 속하지 못했다. 맹씨 가족이 잡단 처형되는 중에서도 그는 사망자 명단에 속하지 못했다. 73년 전, 그의 가족들과 함께 사망한 그는 누구인가.

1951년 1월 4일. 북한군이 서울을 재점령한 그날, 충남 아산군 배방면에는 그의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숙부, 숙모, 고모, 삼촌 등이 있었다. 이렇게 열한 명은 모산역 곡물 창고에 끌려간다. 창고 안에는 이미 200명의 사람이 있었다. 이들 또한 부역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개'는 왜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을까. 아무개는 수정란 세포로 어머니의 자궁 내벽에 착상된지 36주가 지난 태아였다. 세상에 나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9개월 어느 날, 아무개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함께 생을 마감했다. 태어나기도 전에 국가에 버림을 받은 것이다.

아산군의 중심지인 온양읍을 비롯해 염치면, 탕정면 등에서는 치안대가 조직되어 부역자를 체포했다. 체된 이들은 임시구금시설에 감금되거나 그릇을 굽는 가마에 감금되고 유치장, 경찰서 뒷마당, 인금 양조장에 구금되었다. 이들은 구타와 전기고문이 동원된 조사를 받았다. 이렇게 조사를 마친 주민들은 1950년 10월 중순에 매일 40~50명 씩 트럭으로 옮겨져 배방면 남리 성재산으로 끌려갔다. 그들 또한 설화산 그들과 마찬가지로 최후를 맞이 한다.

이들이 속한 '아산'지역은 1.4후퇴 당시 재점령당하지도 않은 지역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역 혐의를 받고 집단 희생을 당한다. 이 과정에는 '유해진'이 있었다. 그는 온양 경찰서 신창지서 주임이었다. 당시 스물 다섯의 나이였다. 그는 1950년 10월 20일 오후 7시 경, 오목리에 거주하던 옥화를 비롯한 60명을 끌어내 오목리 앞산에서 총살했다. 이틀 뒤 오전 5시에는 시우와 그외 50명을 끌어내 염통산 방공호에서 총살 했으며 1951년 1월 15일에는 구금되어 있던 이중 중빈을 포함한 6명을 의용경찰로 근무하던 경찰관 오씨와 정씨를 시켜 총살 시켰다. 또한 창고 안에 있던 부역자와 그의 가족 30명을 여동산에 연행하고 소총으로 학살했다. 또한 이중 일부에게는 석방금 9만환, 10만환 등을 받고 석방했으며 12월에는 정부보유미 424가마를 불법 횡령하기도 했다.

그는 검찰 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4후퇴 수복 후 신창에 돌아와보니 우익단체에서 부역자 800명을 감금하고 있었는데, 그 중 600명을 인수 받았을 뿐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가만히 보면 가해자도 피해자도 너무 어린 나이지 않은가, 생각한다.

지금이라면 아직 어린애 취급 받을 나이에 너무나 비극적인 일의 주역이 된다는 사실을 보면 너무 안타깝다.

2010년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 '헬조선'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과연 '헬'이라는 말이 100년 전이 아니라 현대에 사용하는 것이 맞을까 싶기도 하다.

고경태 작가의 '본 헌터'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가 묵직하게 내려 앉는 책이었다. 또한 다양한 사건의 중심 인물을 1인층으로 현대와 과거, 또한 발굴자의 과거로 시각이 변화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들도록 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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