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사 기차역에서 호숫가의 호텔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였다. 오래된 돌 바닥에 캐리어를 끌자 드르륵 캐리어 핸들을 잡은 손 끝으로 돌 바닥의 감촉이 느껴지는 듯 했다. 스위스에도 돌 바닥은 많았지만 이렇게 거친 곳은 잘 없었다. 휴양지라 호수를 바라보는 큰 호텔이 몇 개 서 있었고 다행히 우리 호텔은 기차역에서 걸어갈 때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주 오래된 옛날식 인테리어가 깨끗하게 잘 관리된 그 호텔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짙은 밤색의 목재를 사용하고 샹들리에와 조명은 화려하게, 빛은 주홍빛에 가깝도록 어두운 듯 하며 무겁게. 바닥에는 색이 있는 대리석으로 이런저런 패턴을 만들어 화려하게 연출하고 베란다나 온실쪽은 천장에 작은 스테인드글라스도 만들어 놓았다. 모든 곳에 공을 들인 옛날식 호텔이다. 엘리베이터 마저도 문에 두터운 원목판을 덧댄 옛날식이었다. 동양인 셋이 위풍당당 아이고 힘들다며 캐리어를 끌고 들어서자 분홍피부에 은발의 노인들이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빛의 천으로 싼 로비의 의자에 앉아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거나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백인들이 휴양지로 좋아하는 곳이고 코로나 때문에 동양인 관광객이 거의 없다보니 우리는 마치 장르가 다른 회화속으로 뛰어든 기분이었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우리도 눈이 있으니 예쁜 것 돈 낸만큼 즐기고 가겠습니다...!
체크인을 하며 리셉셔니스트의 외모에서부터 이탈리아에 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 구불구불한 머리카락, 색은 금발이 아니라 짙은 갈색이고 손에는 화려한 매니큐어와 여러개의 반지, 팔찌 또한 여러개이다. 말투도 더 경쾌하다. 우리가 배정받은 방은 방은 가장 높은 층(그래봐야 5층이지만)의 호수를 바로 바라보는 전망이 좋은 방이었다. 오래되었지만 그만큼 귀한, 요즘은 만들라고 해야 만들수도 없는 곡선의 가구들이 들어가 있었고 욕실은 당연히 대리석으로 마감하였고 그리고 욕조도 들어가 있었다. 욕실 바로 옆의 벽에는 색색의 대리석을 손톱만하게 잘라 장미다발 모양을 모자이크 해놓았는데 그런 정성이 너무 좋았다. 단 한가지 조금 아쉬웠던 건 호텔의 침대와 침구인데 아무래도 요즘 유행하는 푹신푹신 침대가 아니라 다소 딱딱한 침대였고 기본 베딩이 딱 봐도 90년대식 무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그 베딩 아래로는 아주 깨끗하고 빳빳한 흰색시트를 깔아 두었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입실할 땐 파랗고 그림같던 호수였지만 빗방울이 듣기 시작하더니 호수와 하늘의 경계가 안개속으로 숨어버렸다. 비가 더욱 거세지고 하늘에서 우루룽 소리도 들려왔다. 우리는 대충 짐을 풀고 호텔의 바에서 고풍스러운 황동색 버켓에 받아 올려준 뜨거운 물로 컵라면을 먹은 뒤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담근 뒤 한국에서 가져온, 최근에 새롭게 출간된 싼마오의 에세이를 읽었다. 뜨거운 물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싼마오의 남편인 호세가 얼마나 속 터지는 인간인지를 에세이로 읽자니 열이 올라 얼굴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이제는 흔한 말이지만서도 남자를 만나지 않아 인생 망친 여자는 없어도 남자를 잘못만나 인생망친 여자는 차고 넘친다. 간단한 셈만 할 줄 알아도 남자는 만나지 않고 사는게 똑똑한 여자들의 현명한 인생살이 방법이련만... 이렇게 하나마나한 생각을 하며 마른세수를 하고 욕실 쪽을 바라보니 어머, 보통의 욕실들과 달리 이 호텔의 욕실에는 세개의 다리를 가진 아주 귀여운 플라스틱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형태도 귀여웠지만 무엇보다 버터색의 색상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나는 욕조에 들어가 있는 그대로 상체를 길게 내밀어 그 의자를 쭈우욱 당겨보았다. 그리고, 뒤집어서 브랜드를 확인했다.
GEDY made in Italy
처음 보는 브랜드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브랜드라면 내가 여기서 하나 사서 가면 되잖아? 너무 멋진 기념품이 될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스마트폰으로 브랜드 이름을 검색하고 이런저런 검색어를 붙어 보았다. gedy stool, gedy trio, gedy chair... 그리 어렵지 않게 내가 본 그 의자가 나타났다. 구매할 수 있는 링크도 몇 개 찾을 수 있었는데, 문제는 일반 상점 링크가 아니라 빈티지샵 링크이고 이미 그 의자들은 수백유로에 모두 판매완료된 상태라는 점이었다...! 조금 더 검색을 해보니 GEDY라는 브랜드는 이탈리아 욕실용품 브랜드인데 70-80년대에 유명한 디자이너들과 협업하여 일부 제품들은 뉴욕의 MOMA에 전시되어 있기도 하고 빈티지 콜렉터들 사이에서는 고가에 거래되고 있었다. 나는 다시 그 의자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이탈리아인가? 일부러 빈티지를 구해서 놓았을리는 없을테고 옛날에 호텔을 오픈하며 들였던 기본 플라스틱 의자가 세월이 지나 빈티지가 되어버리는 그런 곳?
엄마는 모든것이 깨끗하게 정돈된 스위스에서 어수선한 이탈리아로 넘어오자 심란한듯도 했지만 나는 주입시키듯 계속 말했다. "엄마 여기가 더 좋지 않아? 주차도 이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고 한국이랑 더 비슷하다니까." 스위스에서는 노란선으로 된 주차라인은 개인에게 지정된 주차장을 뜻하는데 거기에 주차를 하면 강제 견인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 외에도 자유롭게 주차를 할 곳은 거의 전무하고 호텔에 돈을 내고 주차를 하더라도 주차할 장소가 협소해서 많이 고생을 했다. 반면 이탈리아는 한국처럼 2차선 도로 갓길에 그냥 흰색 선을 주욱 그어두고 아무나 편하게 대고 싶으면 대고 가고 싶으면 가면 된다. 극도의 P형 인간인 나는 이런 이탈리아에서 무한의 편안함을 느꼈다.
동네에서 맛있다는 젤라또 집에 가서 젤라또를 한 컵씩 사서 먹고, 저녁은 조금 동네 외곽으로 걸어나가 구글 맵에서 평점이 좋은 피자 가게를 찾았다. 야외 테이블에는 동네 아저씨들이 앉아 술과 피자를 먹고 있었다.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들이 많은 걸 보자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우리도 야외 테이블에 앉자 주인 아주머니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한 아저씨에게 우리에게서 떨어져 저 멀리 다른 테이블의 아저씨들에게 합석하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아저씨는 조금의 반항도 없이 순순히 자리를 옮겼고... 평소에 알고 지내는 동네 주민들이라 해도 애초에 다른 테이블에 앉은 이유가 있을진데 합석을 하란다고 순순히 하고 또 합석을 받는 입장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그 풍경이 너무....좋았다!!!! 이탈리아어만 적힌 메뉴판과 구글맵 후기에 남겨진 사진을 이리저리 맞춰보며 무엇을 먹을지 정하는 동안 가게 앞 담벼락에는 공사를 마치고 퇴근하는 듯한 작업자들이 두 차 사이의 빈틈에 1톤 트럭을 신묘하게 주차하고는 야외자리의 아저씨들에게 다가가 손을 마주치며 인사를 하고 또 합석을 했다. 우리는 피자를 먹기도 전에 그 뜨수운 분위기에 이미 감화되어 버렸다. 아 이탈리아...! 각박한 스위스에서 치인 마음이 둥글어지는 이탈리아...!
셋이서 배가 부르게 넉넉한 음식에 술까지 먹은 뒤에 나온 빌지에 찍힌 가격은 스위스에서 먹던 파스타 한그릇 값도 되지 않았다. 배를 두드리며 오래된 골목길을 걸으며 나는 외쳤다. "우리 젤라또 또 먹자." 이탈리아에 오기 전에 다짐했었다. 이탈리아에 닿기만 하면 1일 3젤라또를 하겠다고. 오늘 오후에 도착했으니 1일 3 젤라또는 무리더라도 식전 식후로 나누어 젤라또를 먹는 정도는 해야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