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결코 새로운 주제가 아니라, 적어도 16세기 이래 ‘근대세계 체제‘의 역사를 통해 구성돼온 권력의 기본적인 레토릭이다.
‘라스 카사스/세풀베다 논쟁‘은 500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윌러스틴은 이렇게 권력에 의해 왜곡된 보편주의를 ‘유럽적 보편주의‘라고 부르고 여기에 진정한 보편주의, 즉 ‘보편적 보편주의‘를 대치하자고 주장한다. 동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 일본은 근대 이후, ‘문명화(유럽적보편주의)‘를 구실로 삼아 자기중심적 국가주의(초개별주의)에 입각한 침략을 거듭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적 보편주의, 즉 천황제를 최고 가치로 하는 세계 질서를 그들은 ‘팔일우- (온천하가 하나의 집이라는 뜻)‘라고 칭했다. 중국과 조선 등아시아 민족은 이러한 보편주의에 따라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피지배민족의 독립 요구를 ‘민족주의적 편견‘으로 취급하며 탄압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근본적으로부정당해야 마땅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천황제가 존속되었듯, ‘일본적 보편주의‘ 또한 살아남았던 것이다. 코스타리카 대학 강연에서 나는 이 점을 지적했다.
코스타리카를 떠나기 전날, 우리 부부는 C교수의 안내로 수도산호세 근교의 이라수(razi 화산을 보러 나섰다. 화산국가 일본
에서 온 우리에게는 특별히 새로운 구경거리는 아니겠지만 코스타리카를 찾은 관광객에게는 반드시 안내하는 코스라고 했다.
눈이 부실 만큼 활짝 갠 열대다운 날씨였다. 표고 1200미터가넘는 고산지대라서 그리 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운전사가 가이드를 겸해 도중에 여러 가지 설명을 해주었다. 일찌감치 지쳐 있던 우리는 설명을 흘려듣곤 했지만 어떤 한마디가 마음에 걸려 귀를 기울였다.
‘죽음의 산‘이라는 말이 들려왔던 것이다. 차를 갓길에 세운 운전사가 계곡 쪽을 가리키며 "저기가 죽음의 산이에요."라고 말했다. 파나마로 통하는 도로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가 많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고 했다. 희생자는주로 자메이카에서 건너온 흑인 노예였다. 카리브해 제도의 기후에 익숙해 있던 그들은 한랭한 고산기후와 중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깊숙한 아프리카 대륙에서 대서양 건너로 끌려온 뒤 카리브해 지역에서 다시 이 깊은 산속으로 연행되다시피하여 목숨을 빼앗긴 셈이다.
햇빛이 드는 아름다운 마을을 품은 분지 저편으로 첩첩이 이어지는 산맥이 보였다. 나는 그 산줄기가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저 멀리 일본 규슈나 홋카이도까지 이어지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도와 광산에서 힘겨운 강제 노동에 쓰러진 조선인의 유해가
묻힌 죽음의 산까지 말이다. 지구 도처에서 식민주의의 폭력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원통함과 분함 속에 묻혀간 죽음의 산이 이어지고 있다.
코스타리카에서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가 진행되어 공화당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자리를 굳혔다. (2017년 1월, 트럼프는 미합중국 제4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트럼프는 이민에 대한 과격한 중상모략을 반복했고, 특히 멕시코 이민자 중에 마약밀매자나 강간범이 섞여 있다고 비난했다. "멕시코인 대부분은 범죄자이니까 벽을 세워 범죄자가 들어오지 않도록 조치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강간범과 다름없다." 트럼프가 내뱉은 일련의 배외주의적 발언은 미국 내에서 비판받기는커녕 오히려 인기를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뉴욕 거리를걷고 있으면 여러 인종과 문화가 혼재하여 도시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이 다양성을 억지로 파괴하고 단일문화사회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불가능한 프로젝트를 굳이 실행한 것이 나치 독일이었다. 결과는 ‘홀로코스트‘라는 대재앙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역사로부터 배움을 얻지 못했다. 똑같은 일이 미국에서 재현되지 않으리라고 안심
할 이유는 없는 셈이다. 게다가 나치 독일의 잔학함과 냉혹함을그 증거로 내놓는다 해도 지금은 누구도 진심으로 충격을 받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치 패망 이후에도 이와 동등한 잔흑과 냉혹함이 세계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의 소음 뉴욕으로 돌아온 후 나는 30년 전에 방황하듯 걸었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 구겐하임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 프릭 컬렉션, 모마를 트럼프의 악몽이 다가옴을 느끼며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우울한 심정으로 돌아다녔다. MET의 상설 전시만으로 꼬박 이틀이 걸렸지만, 그래도 전부를 꼼꼼히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광산왕이라 불렸던 솔로몬 R. 구겐하임Solomon R. Guggenheim의 컬렉션을 기반으로 1939년 뉴욕 맨해튼에 개관했다가 1949년 현재의 5번가로 이전했다. 1943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Frank Lloyd Wright(1867~1959)에게 설계를 맡겨 1959년에 건물이 완공되었다. ‘소라껍질‘로 일컬어지는 구조여서 관람자는 먼저 엘리베이터로 건물 맨 꼭대기로 올라가 나선형 통로의
벽면에 걸린 작품을 보면서 자연스레 계단을 내려오게 된다. 내가 아이였던 1960년대, 이 미술관은 최첨단 건축 디자인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어린이 대상 사진 잡지에서 그 모습을 본 뒤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일이 기억난다. 물론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나 모딜리아니의 작품 같은 뛰어난 소장품도 보고싶었지만, 이에 못지않게 건축사의 문제작인 이 미술관자체를 보고 싶다는 바람을 오랫동안 가져왔다. 염원은 1986년 뉴욕을 찾았을 때 이루었지만 그때는 혼자 떠난 길이었다. 이번은 동행한 F에게 이 미술관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앞서 말한 독특한 미술관 구조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와 F는 잠깐 사이에 서로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넋을 잃고 작품을 보는 데 빠져있던 F를 신경 쓰지 않은 채, 등 뒤를 지나쳐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버렸던 것이다. 혼자 나를 한참 기다려야 했던 F는 매우 화가 났고 그렇게 뉴욕미술관 구경은 시작부터 삐걱댔다. 그래도 이번 여행에서 인상에 남았던 전시 몇 개를 소개한다. 독일 오스트리아 근대 회화를 전시하는 노이에 갤러리에는 처음 가보았는데. 매우 충실한 작품으로 구성된 뭉크 EdvardMunch (1863~1944)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나와 F는 빈풍으로 꾸민갤러리카페에서 커피와 달콤한 과자를 먹었다. !
모마의 특별 전시는 ‘드가‘였다. 무희의 모습을 즐겨 그렸던19세기 인상파의 거장이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던 새로운 측면, 이른바 드가의 어두운 측면을 볼 수 있었다. 드가는 당시 파리에서 번성했던 매춘굴과 거기서 생활하는 여성에게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암울한 색조를 가진 드로잉을 많이 남겼다. 여성을 심미적으로 관찰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 자연주의 문학이 주는 정동이 그의 드로잉에서 느껴진다. 드가에게 이런 어두운 면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지 못했다.
얼마 전 이전하여 새롭게 단장한 휘트니 미술관 꼭대기 층에서는 로라 포이트러스Laura Poitras (1964~)의 대규모 개인전 ‘우주의소음 Astro Noise‘을 볼 수 있었다. 여성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포이트러스는 미국 국가정보국 내부정보를 폭로한 후 당국에 쫓기는 몸이 되어 모스크바로 망명한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과 연락을 취해 인터뷰를 나눴고, 이를 「시티즌포」라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그 역시 미국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지금까지 몇 번이나 구속당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도 ‘감시사회‘를 문제화한 내용이었다. 「베드 다운 로케이션Med Down Location」이라는 제목이 붙은 설치작품은 관객이 방 중앙에 설치된 넓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
려다보는 방식으로 감상한다. 거기에는 수없이 많은 별이 반짝이는 예멘이나 파키스탄의 밤하늘이 비친다. 하지만 점차 날이 밝고 해가 떠오르자 하늘은 무인공격용 드론으로 가득 메워진다.
가장 큰방에서는 대형 스크린에 다양한 사람의 얼굴이 슬로모션으로 흐른다. 모두 아연실색하여 말을 잃은 듯한 표정,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다. 아마 9.11 직후 그라운드 제로를 바라보는사람들인 듯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 장면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스크린 뒤로 돌아 들어가면 거친 화질의 흑백 영상이 흐른다. 헛간 같은 방에 끌려온 남자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다. 미국병사인 듯한 인물이 남자를 향해 라이플 총구를 들이대며 "너 알카에다지?"라고 심문한다. 남자가 아니라고 하자 병사는 "파키스탄 정부에 연락해서 네 아내를 잡아넣을 수도 있어!"라고 위협한다. 아무래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용의자를 심문하는 실제 장면인 것 같다. 등장한 용의자 세 명은 그 후 관타나모 수용소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지적이며 도발적인 작품인가!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작품을 만드는 아티스트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를 뉴욕 한복판에서 공개하는 미술관이 있다. 미국에도 아직은 기대할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언어공동체로부터 다른 언어공동체로 건너간 그/그•녀들은 이들 복수 공동체의 틈새에서 경험하는 수많은 고뇌와 얼마 되지 않는 환희를 말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들 중 대다수는 아직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그녀들은 새롭게 찾아간 공동체에서 항상 마이너리티의 지위에 있기에 자신들의 모어와는 다른 언어를 구사해야 하며, 경제적 곤궁이나 법적지위의 불안정으로 지식과 교양을 축적할 조건 자체를 빼앗겼기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수많은 곤경을 넘어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일이 가능해졌다고 해도, 이번에는 들어줄 독자를 구해야 하는 가장 큰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 독자가 될 다수자는 대부분 자신이 단일한 공동체에 귀속한다는 신화 속에 안주해 있다.(이 표현이 껄끄럽다면, 신화에 ‘구속‘되어 있다고 바꿔 말해도 좋다.) 한편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는 항상 다수자의 안주를 위협하며(구속으로부터 ‘해방‘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때때로 다수자가 의심 없이 누려오던 기득권에 뾰족한 가시와도 같은 불편한 의혹의 눈길을 던진다. 과연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맘 편히 나누며 즐길 수있을까. 그리하여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는 소수만 이해하는 채로 고립되거나, 또는 판타지나 환상으로서 ‘노마드적 삶‘을 동경하는 다수자에게 소비되고 만다.
디아스포라 문학은 이렇게나 성립하기 어렵지만, 그중에서 매우 예외적인 성공사례가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이다. 이책은 인류사의 현시점까지 나온 디아스포라 문학의 최고 걸작이라고나는 확신한다. 팔레스타인 아랍인, 프로테스탄트 기독교도, 게다가 아버지세대부터 미합중국의 국적 보유자인 사이드는 예루살렘, 베이루트, 카이로를 연결하는 지역을 오가며 성장했고 인생 후반기를 미국에서 보냈다. 그리고 지금은 ‘거기서 삶을 마쳤다."라고 덧붙여야만 한다. 책의 첫머리를 조금 인용해보자.
하지만 항상 무엇보다도 먼저 떠오른 것은 마땅한 어떤상태로부터 내 자신은 언제나 벗어나 있다는 감각이었다. ‘사이드‘라는 누가 봐도 명백한 아랍계 성에 무리하게 이어 붙인, 우스울 만큼 영국풍인 이름 ‘에드워드: 내가 여기에 순응하기까지, 아니 정확히는 그다지 불쾌감을 느끼지 않게 되기까지는 50년 정도의 세월이 필요했다.(「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 빈티지, 2000년(초판 1999년), 한국어판은 김석희 옮김, 살림. 2001년)
저런 감각이 나는 너무 잘 이해된다.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수긍할 정도로, 자신의 성과 이름에서 느낀 위화감을 토로하는사이드를 보며 나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로 각인된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산‘이라는 처지에 직면한 벗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 다수자 중 어느 정도가 이 느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잠시 내 이야기를 하자면 어릴 적 우리 가족은 일본 이름을 썼다.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형들의 강한 주장을 받아들여 ‘조선‘ 식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지만 그 시점에서는 나는 ‘서라는너무나도 명백한 조선계 성과, 거기에 억지로 이어 맞춘 ‘다다시‘ 라는 어색한 일본 이름으로 불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1965년 한일기본조약 성립 이전이라서 내 존재는 한국 호적에는기재되지 않은 상태였고, 일본식 이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후 한국의 호적에 올리는 수속을 할 때, 고향 마을의 어르신에게 조언을 받고 ‘경식‘이라는 진짜 조선인 이름을 새로 갖게 되었다. 그런 절차를 밟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조선식 성씨와 일본이름, 말하자면 역사상 피지배자의 성과 지배자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식민 지배의 기억 그 자체라 말할 수 있는 어색한 성명을 써야만 했을 것이다.
사이드는 실로 포스트콜로니얼 시대를 살아가는 복합적 아이덴티티의 모범 사례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과 그 결과 발생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역 부당 점령을 계기로 스스로를 ‘팔레스타인인‘으로서 뚜렷이 자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사이드가 복수의 자기 아이덴티티 가운데 스스로 선택한 것, 다시 말해 ‘선택된 아이덴티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자의적으로 선택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미합중국국민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선택했다면, 학자라는 편하고 안락한 삶으로 평생을 보내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이드는 ‘팔레스타인인‘의 일원이라는 편하지도 안락하지도 않은 ‘아이덴티티‘를 선택한 셈이다. 앞서 인용했던 인터뷰에서 사이드는 "제게 정말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사이드는 내면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응답했던 것이다. 그가 말하는 ‘선택된아이덴티티‘란 이런저런 아이덴티티를 옷가지처럼 입고 벗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선택된 아이덴티티‘란 오히려 ‘강제된 아이덴티티‘에 대립하는 개념이며,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자기를 해방하기 위한 자유로운 선택이라는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리라. 이런 의미에서 사이드는 사르트르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