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어 알파벳 외에 완벽한 문자 체계를 하나 더 꼽는다면, 혜안을 가진 통치자 세종대왕이 15세기에 창제한 한글을 들 수 있다. 
당시백성들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문자 체계를 배우지 못하는 점을 안타깝게 여긴 세종대왕은 누구든지 글을 배울 수 있도록 구어를 단순하면서도 논리적인 형태로 옮겨 놓은 고도의 규칙성을 가진 알파벳 설계에 착수했다. 심지어 세종대왕의 한글 매뉴얼을 작성한 학자가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아침에 다 배울 수 있고 현명하지 못한 사람도 열흘이면 깨우칠 수 있다.‘라고 설명할 정도였다. 

보다 많은 백성들이 글을 읽고 쓰게 하겠다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목표는 성공적이었다. 한글은 몇가지 중요한 언어학적 특성으로 볼 때 배우기가 매우 쉽다.

첫째, 한국어 구어는 단순 음절과 음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겹자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글자 하나가 곧 음절이 된다. 하지만 그 방식이 매

우 특이하다. 한글에서는 2~4개의 문자화된 음소가 사각의 틀 안에서 합쳐지고 그렇게 합쳐진 글자들은 좌우, 상하. 어느 방향으로든 배열되고 읽힐 수 있다. 
이렇듯 음절이 시각화되기 때문에 아이들은 글을 읽을 때 보다 쉽고 보다 큰(보다 굵은) 언어의 단위를 배우게 된다. 
둘째,
멜버른 대학의 김지선과 크리스 데이비스(Chris Davis)가 자세히 설명한 것처럼 한글은 10개의 기본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음이냐 자음이냐에 따라 형태가 차별화된다. 
셋째, 한글의 자음문자는 조음되는 발음기관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특히 큰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영어와 달리 한글은 문자와 음성이 매우 ‘투명한‘ 대응 관계를 이룬다. 훈민정음(원문에는 ‘한글‘로 되어있음-옮긴이) 창제 당시에는 상징과 말소리 사이에 거의 완벽한 대응관계가 성립했으나 구어가 진화함에 따라 영어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부 단어의 철자에 고어와의 연관 관계가 반영되는 일이 생겨났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특성이 멋지게 결합된 한글은 무엇보다 글을 처음 배우는 이들이 매우 쉽게 학습할 수 있는 문자 체계다.

이제 다시 고대 그리스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 대목에서 인지과학자와 언어학자들이 미스터리로 생각하는 몇 가지 의문이 생겨난다. 그중 하나가 이 장에서 제기하는 두 번째 중요한 질문이다.

소크라테스의 항변, 플라톤의 말없는 반항.
아리스토텔레스의 습관

소크라테스 자신은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설명되어 있는 이유에 따르면,
이 적극적이고 비판적인 이해 과정을 단락()시켜 지혜에 대한 거짓 자만심을 가진제자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누스바아리스토텔레스 대에 이르러 고대 그리스 세계가 구어 교육에서독서의 습관으로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레드릭 케년 경

수수한 옷을 입고 소박하게 살면서 스스로를 그리스라는 이름의 고귀하지만 나태한 말의 잔등을 ‘콕콕 찌르는 등에 (gadfly)‘라고 칭한 남자. 퉁방울눈에 불룩 튀어나온 이마, 독특한 외모를 지닌 그 남자는 안마당에서 제자들에 둘러싸인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 지식 그리고 ‘내성(內省)하는 삶(examined life)‘의 깊은 중요성에 대해 심각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입만 열었다 하면 아테네의젊은이들을 향해 자기 자신을 다 바쳐 평생 동안 ‘진실‘을 성찰해야 한다면서 눈부시게 설득력 있는 훈계를 했다. 이 남자가 바로 그 유명한철학자이자 스승 그리고 아테네의 시민 소크라테스다.
나는 독서하는 뇌의 역사에 대한 글을 쓰면서 2000년도 더 된 그 옛날, 소크라테스가 문식성에 반대하며 제기한 문제들이 21세기 초의 걱정거리와 거의 다를 바 없음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구선 문화가 문자문화로 바뀌면서 특히 젊은이들에게 제기하는 위험성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걱정하던 내용이나 현재의 아이들이 디지털 세계에 몰입해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근심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여기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우리는 현재 매우 중요한 전환기에 놓여 있다. 다만 우리의 경우에는 문자가 디지털 및 비주얼 문화로 옮겨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기원전 5세기와 4세기를 일종의 창이라고 생각한다. 그 창을 통해 들여다보면 우리와 다르지만 우리 못지않게 비범한 또 하나의 문화가 주류 커뮤니케이션에서 다른 새로운 모드로 불확실한 전환을 하는 양상을 관찰할 수 있다. 
21세기의 구술 언어와 문자 언어의 위상을 점검하는 데 우리를 도와줄 사상가로 ‘등에‘와 그 제자들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다. 

소크라테스는 통제되지 않은 문자 언어의 전파를 통렬히 비난했다. 
플라톤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한 입장이었지만 문자 언어를 사용해 역사상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는 구술 대화를 기록했다. 
그리고 세사람 중 연배가 가장 낮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독서 습관‘에 몰입해 있었다. 
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의 명가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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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천막이라는 도상을 통째로 가져와서 매슬로가 욕구단계설이라는 사상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통용되고있다. 
이렇게 무척이나 매력적인 생각의 틀에서 살펴보면 피라미드 모양은 실제로 천막 모양이고, 블랙풋족의 천막에 있는 줄무늬 모양 디자인은 위계질서상의 단계를 반영한다. 

바로 이 때문에 헤비 헤드와 카이나이학의 창시자 나르시스 블러드가 시크시카에서 지냈던 메슬로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살펴본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가설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블랙풋이 자신들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데에 천막을 활용하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였다. 아마도 결정적이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처음에 매슬로는 피라미드모양을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피라미드 모양은 찰스 맥디미드라는 심리학자가 1960년 비즈니스 호라이즌스에 신음 글「돈은 어떻게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가」에 사용하고자 특별히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신 메슬로 아이콘으로 만들어낸 것은 심리학이 아니라 관리 연구 분야였다. 매슬로식 개인의 관리연구 버전은, 공동선에 기여하기보다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한 뒤에야 이상적인 노동자가 되는 작업에 착수할 수있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앞선 장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우리의노동 페르소나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와는 별로 관련이 없다.
무엇을 생산할 수 있는가와 거의 전부 연관이 된다. 프레더릭슬로가 시간을 그 어느 때보다도 작은 단위로 깎아내어 효율성

을 높이겠다는 일념으로 일분 일초를 이리저리 배치했다면, 판리 연구는 매슬로의 위계질서를 이용해서 일터라는 기계에 있는 톱니의 최고의 건강 상태와 생산성을 확보했다. 물론 그 톱니는 바로 우리다.

욕구단계설은 관리 연구 전공 서적으로 건너가면서 독자적인 생명체가 되어서, 서양의 자본주의적 이상의 복합체가 되었다. 매슬로가 만들어내려던 것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관리 연구분야에서는 위계질서를 계단식으로 바라보아서, 인간의 욕구란일종의 컴퓨터 게임과 같다고 생각했다. 한 단계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뒤에 다음 단계로 올라서야 하는 게임 말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욕구단계실을 시험해본 사람들은 행동이란 분석심리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의식적 욕망의 결과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보상이나 강화에 따라 형성되기만 하는 것도 아니며, 내면의 욕구를 충족하려는 욕망에 따라서도 일어난다는 매슬로의 새로운연구를 대단히 높이 샀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며 (다시말해, 1970년에 매슬로가 사망한 뒤로 자본주의는 인간 행동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 결합해 경영학이라는 형태를 갖추었다. 경영학의 목표는 우리 사회의 유용한 일원이 되도록 힘을 실어주는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최대한 많이 일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관리 연구 분야에서 개인이란 보다 광범위한 사회의 대리자다. 한 개인이 자아를 실현하면, 사회 전체가 자연스럽게 이득을

본다. 설령 그 모든 개인이 사회 전반의 집합적인 이익을 위해서는 아무런 행동도 안 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블랙풋족의 철학은 이보다 더 크고 넓다. 블랙풋족의 철학은 사람들을 정해진 역할에 붙들어 놓고 더욱 복잡해지는 사회가 아니라, 누구도 뒤떨어지지 않도록 합심하는 사회와 관련이 있다. 

차를 소유하는일은 뒤처지지 않도록 주변 사람들을 따라잡으면서, 내년에는더 크고 좋은 차를 살 수 있도록 가족이나 친구들과는 동떨어진채 일하는 데에만 온 시간을 쏟는 일이 아니다. 자동차는 이동하는 데 쓰는 물건이다. 서양에서 사회란 개별적이고 고립된 성과가 되었다. 프로이트 같은 서양인들에게 다른 사람들이란 곧 문제였지만, 블랙풋족에게 다른 사람들이란 곧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이다.
블랙풋족은 개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공동체가 개인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였다. 사회철학이라는 관점으로바라본다면, 이들은 전혀 다른 패러다임에 따라 작동하는 사람들이다. 서양은 결핍 모델에 따라 작동한다. 한 사람은 학위를취득하는 것처럼 일종의 사회적인 성과를 보여주거나 또는 재산을 축적해서 사회적인 지위를 획득해야 한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서 노력을 통해 사회 속 위치를 높인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살펴보면 이는 능력주의 사회를 이루는 완벽한 기초인 것만 같다. 모두가 평등한 만큼 열심히 노력하면 그에 따라 성취를 이루고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앞

서 사상이 발전하는 과정을 한 단계 한 단계, 한강 한 장 살펴보았듯이. 서양에서는 결코 모든 것이 평등하지 않다. 우리가 같은 배를 타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주 분명하다. 서양에서 실패하거나. 순응하기를 거부하거나, 사회경제적인 제약 때문에 순응할수 없는 사람들은 열등한 사람 또는 완전한 실패자라는 취급을받는다. 
노숙자들, 장애가 있든, 또는 다른 방식으로 주변화되었든 간에, 문명이라는 게임에서 진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매슬로는 시크시카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가치를 얻어낼 필요가 없는 사회를 보았다. 그 가치는 처음부터 존재한다고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은 ‘자격을 부여받은 상태로 태어났으며, 그기준에 맞춰 살아갔다.

라이언 헤비 헤드는 이렇게 말한다. "제일 꼭대기에 있는 부부인 자아실현을 보면, 이 모델은 거의 들림없이 블래풋 공동체에서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건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매슬로의 생각은 그가 그곳에서 6주를 보내는 동안 바뀌었으며, 남은 인생의 상당 부분을 블랙풋 공동체에서는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이며, 그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관념은 발전시킬 수 있었는지를 파악하는 데에 할애했습니다."
매슬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 되고자 노력한때 가장 행복하다고 주장했다. 적어도 관리 매뉴얼에 나오는 매슬로의 주장은 그렇다. 실제로 매슬로가 얘기한 내용은 달랐는데 관리 매뉴얼에는 이런 내용이 실리지 않았다. 매슬로는 블랙

풋족의 사회와 문화적 지혜를 바탕으로 개인적인 성취는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개인의 만족은 보다 넓은 공동체에기여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위계질서상의 한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 자유롭고 자아를 실현한 개인이되기보다. 개별적인 자아를 초월해서 사람들과 주변 세상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캐나다 토착민인 기트산족의 일원이자 활동가인 신디 블렉스톡은 이렇게 설명한다. "캐나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일곱 세대‘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바탕으로 바라봅니다. 이는 곧 한 사람의 행동은 과거 일곱 세대의경험에 영향을 받으며, 앞으로 일곱 세대에 걸쳐 끼칠 영향을 고러해서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블랙풋족의 세계관에서 개인이 지닌 진정한 힘이란 공동체의 집합적인 힘에 기여하는 것이다.


삭제된 진실

매슬로가 시크시카에서 보내면서 관찰했던 또 다른 점 하나는블랙풋족의 이웃이었던 백인 정착민들의 노골적인 인종차별이있다. 출입이 제한되어 있던 블랙풋족의 땅을 앞서 몇십 년 동안끊임없이 침범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그동안 번성해왔던 블랙풋족의 소 떼를 직접적으로 희생시켰고, 블랙풋족의 영

토를 임대해 백인의 양 방목을 허가하는 새로운 법을 캐나다와 미국 양쪽 모두에서 통과시키며 이득을 보았다. 
매슬로가 보기에이 사람들은 좋은 평판을 듣지 못했는데, 이런 점이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메슬로는 이렇게 썼다. "내가 살면서 마주쳤던사람들 가운데 제일 소름끼치고 엉망인 백인들을 점점 더 알아갈수록 점점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명인이라는 백인들은 그렇게 저열한 행동을 하는 반면에, 이른바 야만인들은 딱 보기에도 정신적으로 발달한 상태에 이른 것이 어떻게 가능했던것일까?
이런 모순은 당사자인 토착민들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점이었다. 예를 들어 라코타의 치료 주술사였던 존 파이어 레임디어는 이 점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백인 형제들이 우리를 문명화하러 찾아오기 전, 우리에게는감옥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범죄자도 없었습니다. 감옥이없는데 범죄자가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자물쇠나 열쇠도 없있고, 그러니 강도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가난해서 말이나선박이나 이불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누군가가 그 사람에게그것들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비문명적이어서 개인의 소유물에 그다지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물건을 가지고 싶어 하는 까닭은 오로지 나눠주기 위해서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돈이 없었으니 돈으로 사람의 가치를 측

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성문법도, 변호사나 정치인도 없었으니 사기를 칠 수도 없었습니다. 백인들이 찾아오기 전 우리는 정말로 나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본적인 것들없이 우리가 어떻게 어울려 지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들은 운명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라는데 말입니다.

매슬로가 블랙풋족에게 받은 영향은 어쩌다 지나가는 말이라든가 기껏해야 각주 외에는 그의 책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매슬로는 어서 자신의 사상의 원천이 블랙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일까? 여러분이 매슬로였다던 이떻게 행동했을까? 몇 세기에 걸쳐 토착민들의 입지는 법적인 시위로 보거나, 할당된 땅으로 보거나, 전반적인 인간성이라는 영역에서나 계속 줄어들었다. 그런 와중에 심리학이라는 진지하고 문명적인 학문에 혁명을 불러일으킨 사상을 블족에게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얘기한다면? 매슬로는 차라리 개와 얘기하다가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매슬로가 자아실현에 관한 아이디어와 시크시카에서 보냈던 시간의 연관성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없애버리기 위해 무척애를 썼다는 생각이 든다. 매슬로가 얘기하는 대로라면, 영감은훨씬 나중에 받았다. 1938년 시크시카가 아니라, 1941년이 끝나가던 무렵에 번개처럼 갑자기 내리쳤다고 말이다.

어느 날 진주만 작전 직후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 길에 사람들이 둘러앉아 인간의 본성과 증오, 전쟁과 평화, 그리고형제애를 이야기하는 평화 협상 테이블을 떠올렸다. 나는 군대에 입대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바로 그 순간, 평화협상 테이블을 위한 심리학을 발견하는 데에 여생을 바쳐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평생을 뒤바꾼 순간이었다. 인간은 전쟁, 편견, 증오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존재라고 증명하고 싶었다.

진보라는 가짜 행진을 멈추고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마거릿 미드의 학생 하나가 문명의 첫 번신호를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지를 질문하자. 한 가지 고고학적 사례를 언급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회복이 된 인간의 대퇴골, 즉 허벅지 뼈였다. 마거릿은 이를테면 문자에서 예술, 민주의에 이르는 이른바 그 모든 문명의 문화적 발전이나 기술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고고학적 기록이 오래전 사람들이 서로를 대했던 방식에 관해서 우리에게 어떤 내용을 알려줄 수 있는지에 주목했다. 어느 동물에게나 부러진 다리는 큰 문제다. 걸을수 없다면 사냥을 하거나, 식량을 채집하거나, 위험한 상황에서도망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다리가 부러졌던 개인이 다리를 치

료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를 고고학적 기록에서 찾아낼 수 있다면, 이는 문명적인 사회의 증거가되는 것이다. 설령 누군가가 그 사회에 필요한 일을 직접 거듭수 없는 경우라도 사람들이 서로를 돌봐주는 사회 말이다.

이 책에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지 아닌지가 명확하지 않은 일화들이 종종 등장한다. 앞서 소개했던 간디의 일화처럼 말이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간디의 일화 같은 이야기들을 자세히따져보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진위 여부를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이런 일화들이 사실이라 단정 짓기 어렵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떤 일화들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놀라울 정도로 계속 회자된다. 이렇게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는 일화들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미드의 일화다. 
이는 어느 정도는 이 이야기가 명백하게 정치적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다. 20세기에 인류학이라는 분야를 새로 쓰려 했던 새로운 세대의 인류학자라는 학술적이고 역사적인 맥락 속에 미드를 데려다 놓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미드는 프랜츠 보이스 곁에서 공부했던 연구자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루스 베네딕트와 함께 작업했고, 빈곤과 인종차별에 반대하며 여성의 권리를 지지했던 대중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대퇴골 이야기는 미드의 이미지와 확실하게 맞아떨어지며, 내가 완전히 동의할 수 있는 세계관이다. 여기에 빠져 있는 것은 과학자로서의 권위다. 이 책 전체를 통해 여러분에

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처럼. 미드가 상대하는 과학계도, 그러니야만인과 문명인 사이의 격차를 점점 더 공고하게 만들어나가던 인종 과학이라는 과학계도 마찬가지로 정치적이었다. 그저 정치적이지 않은 척을 했을 따름이었다.

미드는 또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사려 깊고 헌신적인시민 소수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점을 결코 의심하지 말라. 실제로 늘 일어났던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 말은 미드가 했든 다른 사람이 했든 상관없이 옳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두루 고려한다면, 이 변화가 더 나은 모습을, 그리고 공동선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조금 더 분명히 밝혀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매슬로부터 아이티 사람들, 역사에 남을 만한 베냉왕국의 금속공학자들과 예술가들, 최초의 오스트레일리아인들,
하우데노사우디와 잉카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 등장한 사람들의 수많은 생각은 문명으로 가는 길에 잃어버렸던 강력한 생각들이었다. 어떤 비용을 치르는지는 패널지 않은 채, 성장과 진보라는 이상을 밀고 나아가는 길에 잃어버린 생각들이었다. 만약이 기트산족이 그랬던 것처럼, 향후 일곱 세대에 어떤 영향을 씨실지를 우리가 고려했더라면 아인슈타인의 생각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핵폭탄을 개발하는 일을 막을 수가 있었을까?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서양에서는 진보의 행진, 그리니까 문명의발전이 시스템 안에 너무나 깊숙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퀀텀(양자)‘에 대한 고정관념이 많지 않다. 200년쯤

전에는 퀀텀에 관한 생각은 고사하고,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지만 퀀텀이 아니라 사람들을 다룰 때면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놓치기가 훨씬 쉽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나그들의 생각에 대해서는 확실한 고정관념을 품고 있다. 특히 문명이 비합리적이라 여기는 비서구인들의 경우에는 말이다. 어떻게 하면 앞선 일곱 세대가 지금 세상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있을까? 그러려면 거의 두 세기 정도를 거슬러올라가, 프랜시스 골턴. J. G. 프레이저, 존 러버, 휴 블레어, 토머스베빙턴 매콜리, 그리고 그 모든 다른 이들이 한 일을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이 사람들을 매일 떠올리지는 않겠지만, 심지어는 이 사람들의 이름조차도 모르겠지만, 이들의 생각은 여전히폭발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우리 겉이 넘쳐난다.
헤비 헤드가 짚어주었듯이, 매슬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자전혀 다른 연구자가 되어 시크시카를 떠났다. 다른 숱한 학자들처럼, 그리고 심지어는 아주 살짝 더 젊었을 시절의 자신처럼 사회적 지배라는 개념에 더 이상 전착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서로조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적인 성숙함이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는 이 두 세계관의 핵심적인 차이란 변화의가능성을 어떻게 그리는가‘라고 느껴진다. 매슬로가 인종차별적인 백인 이웃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블랙에게 물었을때, 블랙풋족의 원로들은 그 사람들이 완전히 발달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 백인들은 니타피타피niitedpicapi가 아니었다. 헤비 헤

드는 이 말이 "완전히 발달한 사람, 또는 도착한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블랙족이 맥인 이웃들을 발달하지 못했다"
라고 설명한 것을. 일부 사람들은 문명화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문명화되지 않은 다양한 단계에 있다는 서양 인류학의 개념을 미러링한 것이라고 단순히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한 블랙풋족의 철학은 사람들을 단 한 가지 발전 단계에 못 박하두지 않는다. 

됨됨이는 나면서부터 결정되지 않는다. 변화는가능하다. 매슬로 덕분에 사람들을 우리 사회의 개인들을 파도위에서 하릴없이 표류하는 것처럼 여기지 않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도중에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심지어는 매슬로 본인마저도 자신이 고안한 중요한 개념을 완전하게 파악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사회적 지배라는 낡은 세계관으로 돌아가 프렌시스 골턴을 연상케 하는 우생학적인 생각들을 뱉어냈다(비록개인적으로 공책에 써둔 내용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요즘에는 ‘개인주의‘라는 말과 ‘만연하다‘라는 말이 흔히 같이 붙어서 쓰인다. 이런 표현법의 함의는 바로 우리의 자기중심성이 우리의 삶의 방식이나 전반적인 사회에 일종의 위협이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고개를 숙이고 노동하는 자본주의의 생신적인 부품이 되는 편이 낫다. 운명에 따라 정해진 대로 말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행복해질 것이며, 안전하고 문명적으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연히 이런 생각에 이르지는 않았

다. 어떤 식으로든 간에 이른바 서양의 진보와 발전이라는 환상너머를 보아야 하며, 세상을 사고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방식을 향해 눈을 떠야 한다. 그저 자기 자신만 바라보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내용을 바탕으로 삼아 자기 자신에게 점점 더 좁은 한계를 설정하기보다는 무언가 더 크고 나은 것의 일부가 되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를 상상하기 시작해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이 되어라. 그렇지만 공동체와 주변 사람들이라는 맥락 속에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어쩌면 그렇게 해야 문명과 같이 우리를 가르는관념에서 벗어나,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일에 초점을 맞춰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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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는 원래 짐승을 통째로 구워 신전에 바치는 유대교의 제사인 전번제소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제 이런 의미는 사라지고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의한 유대인의 대학살을 뜻한다. 이런 의미의 홀로코스트를 다룬 글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마텔은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글들이 사실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한 데 주목하고, 홀로코스트 이야기에 상상력과 창조적인 비유를 더해 『베아트리스와 버질을 써냈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 홀로코스트는 나치의강제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계화된 자본주의 현상을홀로코스트적 관점에서 보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분명 홀로코스트를 진하게 떠올리게 한다.
마텔은 홀로코스트에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질 만한 뚜렷한 이유가없다. 그는 유대인도 아니고 동유럽인도 아니다. 독일계도 아니다.
그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한 철저한 아웃사이더지만, 역사가 예술로표현되지 않는다면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질 수 있다고 믿는 까닭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소설을 써야 한다는 작가로서의 의무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게 좁은 의미에서만 읽을 것이아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헨리가 ‘모든 것을 홀로코스트적 관점에서 보려고 애썼다‘라고 말하듯이 시야를 넓혀야 한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홀로코스트적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보일까?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상징적인 의미의 홀로코스트가 자행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저자가 소설의 배경을 특정한 도시로 삼지 않은 이유에서도 밝혀진다. 

저자는 "소설의 배경을 특정한 도시로 한정하지 않은 이유는……내가 사는 도시에도 끔찍한 사건에 가담한 사람이 있고, 나는매일 그 사람과 만나면서도, 그 사람이 어떤 짓을 했는지는 모르고살아간다"라고 말한 바 있다.
베아트리스와 버질』에서도 「파이 이야기」처럼 많은 동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살아 있는 동물이 아니라 박제된 동물이다.

박제. 요즘엔 듣기 힘든 단어다. 박제는 껍데기다. 속은 사라지고 없거나 완전히 감추어진 것이다. 왜 박제된 동물을 등장시켰을까?

왜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 베아트리체(영어식 이름은베아트리스)와 베르길리우스(영어식 이름은 버질)라는 이름을 동물들에게 붙여주었을까? 박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비유일지모른다. 속내를 감추고 겉으로만 반듯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들끓고, 어쩌면 우리 자신도 그런 모습인지 모른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껍데기만 인간을 닮은 존재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는, 올바른 인간성을 찾기 위해서는 신곡에서처럼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를 안내자로 삼아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여행하는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홀로코스트와 세상을 정확히 보려면 그런 안내자가우리에게 필요하다. 마텔은 당나귀 베아트리스와 원숭이 버질을 그

런 안내자로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렇다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두 동물이 나누는 대화, 지독히 상징적인 대화와 소설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우리 스스로 방향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희곡의 인상적인 첫 부분에서 베아트리스와 버질은 배에 대해서긴 대화를 나눈다. 배를 본 적도 없고 먹어본 적도 없는 베아트리스를 위해 버질은 배의 모양과 빛깔과 촉감, 향과 맛과 식감 등 다양한면을 설명하고, 베아트리스가 익히 아는 개념, 사과와 바나나와 아보카도를 끌어들여 비교한다. 

흔한 과일인 배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이렇게 어려울진대, 그 주제가 홀로코스트나 인간 삶이라면 어떻겠는가. 

베아트리스와 버질이 자신들이 겪은 일을 말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과 개념을 고안하고 반짇고리에 기록하듯, 독자 역시스스로의 경험과 말이라는 한정된 도구를 통해 이 소설을, 그리고이 세상을 읽어나가게 될 것이다.

설령 마텔이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더라도 그 방향은 마텔의 방향일 뿐이다. 우리가 굳이 그 방향을 선택해야 할 이유는 없다.

 "내생각에 믿음은 햇살을 받으며 지내는 것과 비슷한 거야. 햇살을 받고 있을 때 그림자를 만들지 않을 수 있어?・・・・・・ 그림자는 의심을 뜻해. 햇살을 받고 있는 한 네가 어디를 가든 그림자는 따라다녀. 그런데 햇살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라는 버질의 말처럼 세상에는 빛과 어둠, 확신과 의혹이 동시에 존재하지만, 흑과 백 둘 중하나만 선택하는 데 길들여진 우리는 이 둘을 동시에 포용하기가 힘

들어 항상 구체적인 답을 요구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답은 우리를들에 가두기 마련이다. 우리 스스로 구속복을 입는 셈이다. 올바른길을 걷기 위해서는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텔은 그 방법의 하나로, 소설의 끝에 구스타브를 위한 게임을 제시했다. 한결같이 고민스러운 질문들이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질문들이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은 빈칸으로 남겼다. 그것은 결국 이 세상은 어떤식으로든 우리 각자가 채워가야 하는몫이라는 뜻이 아닐까?
충주에서 강주헌

「파이 이야기」 이후 9년, 얀 마텔의 신작 장편소설

모든 것이 끝나는 어느 날,
우리가 겪은 일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겁에 질린 당나귀 베아트리스와 고민 많은 원숭이 버질이 시골길을 걸어간다.
그들은 배가 고프고 몹시 지쳐 있다. 버질은 등이 아프고, 베아트리스는 목이 아픈데다 한쪽 다리를 전다.
저물어가는 빛줄기는 그들이 보는 풍경에 세로줄무늬를 만들어낸다.
그들이 걷고 있는 곳은 ‘셔츠‘라는 나라의 등허리 지역이다.

의문의 희곡 「20세기의 셔츠」를 둘러싼우아하고 잔혹하고 환상적인 소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채로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이름을 붙일 수도 없거니와 불처럼 뜨겁고 무시무시하며재앙이자 혼란인 그것에 대해. 하지만 그들은 마치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처럼, 영혼과 혀를 갈가리 찢긴 것처럼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한다.
도대체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감춰진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발견한 진실을 잊지 않기 위해,
역사는 이야기로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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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관찰한 것이면 무엇이든, 블래풋족이 자신에게 공유해주려 하는 내용이면 무엇이든 기록했다. 사실상 다른 문화가 지닌 복잡한 면모를 당사자의 관점에서기록하는 아주 보애스적인 기법을 채택했던 것이다. 

제인 리처드슨과 또 이 여정에 함께한 제3의 구성원인 루시엔 행크스가 담배 농사와 연관된 기술, 상징주의 철학을 주의 깊게 기록하는동안, 매슬로는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을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가 관찰한 한 가지는 바로 전달 의례ransfer ceremony였다. 전달 의례는 블랙풋족 달력에서 중요한 시기에 일어나는 의례였는데, 여러 가족이 한 해 동안 축적한 새로운 것들을 펼쳐놓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자리였다. 매슬로 입장에서는 설명하기 불가능하다시피 한 의례였다. 만약에 브루클린에있는 자기 집에서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모든 것을 잃고 얻는것은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그렇지만 시크시카에 있는 블랙풋족에게는 개인적인 이득은 아무런 문화적인 가치가 없었다. 매슬로가 그 밖에 또 크게 놀랐던 점은, 바로 물질적인 부도 없고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가 아니었음에도 자신이 만난 거의 모든 블랙풋 사람들은 자아 안도감 수준이 높다는 사실이었다.
매슬로는 자존감이 사회적 우월성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상태를 이룩할 수 있었는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블랙풋족이 아

이를 양육하는 방식에서 설명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양인들과 달리, 블랙풋족은 아이들을 업신여기거나 이용하지 않고 아이들을 존중해주었다. 아이들은 이르면 열 살부터 블랙풋족의 의례에 동참했으며, 귀중한 물건들을 맡았고, 공동체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매슬로가 관찰한 또 다른 내용은 바로 블랙풋족이 킴마피이피트시니 kimmapilyipitsini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매슬로는 이를 블랙풋식 이타주의라고 옮겼다. 물론 헤비 헤드는 블랙풋족의 언어에는 이타주의에 해당하는 직접적인 번역어가 없다는 사실을 짚어주고 있지만 말이다. 

이 단어는 이타주의라기보다는 서로를 향해 습관적인 동정심과 친절함을 베푸는 행동을 가리킨다.
이를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는 테디 옐로 플라이라는 남성이었다. 그는 이 부족의 카리스마 있는 젊은 지도자로, 오타와에 있는 캐나다 정부와 협상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테디 옐로 플라이는 시크시카에서 자동차를 소유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이 차를 공동체 전체와 공유했다. 어딘가 가야 할 일이 생기면,
옐로 플라이가 직접 태워다 주거나 아니면 자동차 열쇠를 넘겨주었다. 그러다 옐로 플라이가 공개 행사 자리에서 바로 다음 주에 자신의 소를 거세하고 낙인을 찍을 예정이라고 알리자, 젊은 남성들 무리가 도우러 나서서는 일이 마무리가 될 때까지 아무런 돈을 받지 않고 일했다. 이것이 킴마피이피트시니였다. 

테디옐로우 플라이는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관대해질 수가 있었으며, 이런 도움은 그의 관대함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었다. 시크시카의 공동체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깎아내려 일부 사람들을 높이 추앙하는 것보다는 집합적인 선을 더 중시한다는 점을 바탕으로 단결했다.

매슬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시크시카를 떠났다. 그해 9월, 그는 브루클린 칼리지에서 인간의 규범적인 행동이라는 새로운 강의를 연다. 꽤나 놀랍게도 여기서 말하는 규범은 매슬로가 블랙풋족과 함께 지내며 보았던 전통, 실천, 신념들이었다. 
또 그는 10년에 걸쳐 집필한 ‘좋은 인간의 노트 God Human BeingNotebooks‘를 쓰기 시작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학문 공동체에매슬로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과학적인 방법과 실증적인 접근법으로 인간의 심리학을 탐구하던 시기는 끝났다는 메시지였다. 대신 그는 오로지 블랙풋족을 그렇게나 자신감 넘치고 친절한 사람들로 만들어준 이유를 밝히겠다는 목표를 품고보다 직관적인 기법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매슬로의 연구는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진 욕구단계로 귀결된다.
왜곡으로 태어난 자아개념블랙풋국의 천막은 옆에서 보면 피라미드 형태에 가로 줄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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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글

오전에는 물리학을, 오후에는 문학 창작을 가르치는 저자가 쓴 글이라니! 이 책에서 제일 먼저 시선을 끌었던 부분은저자의 독특한 이력이었다. 예외 없는 법칙이 지배하는 우주를 연구하는 물리학, 이성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불합리한 인간사를 다루는 문학, 이 둘의 접목은 마치 둥그런 네모와 검은 백조처럼 모순된 조합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사실 창조는모순돼 보이는 것들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함께 뒤섞일 때나오는 법이다. 문학적 감수성은 과학 분야에서 무척 중요하다. 위대한 과학적 개념이 세상에 등장할 때마다 그 전개와 검

증은 냉정한 논리를 통해 이루어졌을지 모르나 개념의 출발점에는 어김없이 한순간의 통찰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통찰은 문학적 감수성을 통해 얻어진다.
뉴턴에게 문학적 감수성이 없었다면 과연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며 만유인력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문학적 감수성이란 서로 관련이 있어 보이지 않는 다른분야에서 그 ‘다름‘을 관통하는 ‘같음‘의 패턴을 찾아내는 능력을 일컬으며, 우리는 바로 그 통찰의 순간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이 책에서는 누구보다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과학자앨런 라이트먼이 현대물리학의 이모저모를 바라보며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준다. 물리학의 이야기를 문학에서 느끼는 가슴 뭉클한 감동과 함께 전달하는 것이다. 이 책이 과학 서적이면서도 한 편의 수필집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2016년 초인류 대표 바둑기사 이세돌을 꺾은 알파고AlphaGo를 보며 어느새 인간의 지력을 넘보는 인공지능을 기대와 우려가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래도 이 직관적통찰만큼은 아직 인공지능이 넘볼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이아닐까 생각한다. 기계가 신문기사도 쓰는 세상이지만 아직

은 인공지능이 쓴 소설을 읽고 싶은 생각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옮긴이의 글을 쓰고 바로 그다음 날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있다는 기사를 접하고 소설을 읽었다. 과연 인간의 개입 없이 어디까지가 순수하게 인공지능의 창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요즘 들어 인공지능에게 자꾸만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다.)앨런 라이트먼은 이 책에서 7가지의 우주를 소개한다. 이우주들을 통해 그는 최근 물리학과 우주론에서 이루어진 발견들이 인류가 오랫동안 품어 왔던 질문에 어떻게 답하고 있는지 탐구한다. 이 우주에는 우리만 살고 있는가? 과학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 종교적 경험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을까? 우리는 왜 영원을 갈구하는가? 앨런 라이트먼은 과학자이자 소설가로서의 재주를 살려 물리학을 씨실 삼고, 인문학을 날실 삼아 이런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짜나간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개념 중 아무래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1장 「우연의 우주에 나오는 다중우주다. 이것이 요즘 SF소설이나 영화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을 보면 다중우주라는 개념 자체에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요소가 들어있는 듯하다. 사실 이 개념은 철학적으로 무척 중요하다. 이론

물리학자들은 오랫동안 우주의 모든 존재가 소수의 법칙과매개변수에 의해 유도되는 ‘필연적인 우주‘를 꿈꿨다. 하지만다중우주의 개념은 우리 우주,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우리라는 존재가 우연에 의해 나왔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더한다. 심란한 것은 그런 주장이 맞는지 틀리는지조차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오늘날 인간이 파악하는 우주는 태양계를 벗어나지 못하던 초보적인 수준에서 우리 은하, 다른 은하계, 가시우주를 넘어 다중우주에 이르기까지 어마어마한 속도로 넓어지고 있다. 우주의 실제 팽창속도가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인간이 파악하는 우주의 팽창 속도에 비하면 새발의 피일 것이다. 하지만 7장 「분리된 우주」에서 앨런 라이트먼은 기술의빠른 발달로 세상이 그 어느 때보다 넓어지고 있다는 환상을갖게 되었지만 오히려 우리가 진정으로 접촉하는 세상은 좁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앨런 라이트먼은 이 책을 통해 과학자이자 작가로서의경력, 그리고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경험을 살려 세상의 다양한 모순을 살펴보고 있다. 우리는 왜 유한한 삶을 살면서도영원을 꿈꿀까? 왜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자녀를 보며기뻐하면서도 다 큰 자식을 보면서 어린 시절의 모습을 그리

워할까? 그는 자신은 분명 무신론자이고, 물리적 우주의 모든 속성과 사건들이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그 법칙들이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과학의 핵심 교리를 100퍼센트 믿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애써 부정하려 드는 과학자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과학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존재하는 공간을 인정한다. 그는 이 작지만 작지 않은 책을 통해 과학과 종교, 영성, 예술, 문학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이 책은 ‘과학의 결‘과 ‘인문학의 결‘을 어긋남 없이 살갑게어울렀다. 이것이 바로 물리학과 인문학을 아우르고 있는 저자의 힘이 아닌가 싶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서 이런 인문학적 소양이 아쉽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우리는 학생 시절부터분명한 답이 존재하는, 그것도 단 하나의 답만 존재하는 문제를 푸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인지 물고기가 물이 없는 세상에는 생명체가 살 수 없으며 모든 세상은 반드시 물로 채워져야 한다고 우기는 것처럼, 모두 자신의 우주가 이 세상의 유일한 우주라 주장하고 우긴다. 하지만 ‘다름‘을 관통하는 ‘같음‘을 바라볼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존중하고 화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 여러분도 이 책에 소개

된 일곱의 우주 옆에 자기만의 우주를 하나씩 마련해서 서로를 초대해보면 어떨까. 나와 다른 우주를 바라보며 삶을 관통하는 ‘같음‘을 통찰해보자.
2016년 4월김성훈

아름답고 정제된 언어로경이로움의 불꽃을 일으키는 귀중한 과학 저자다산북스에서 출간하는 앨런 라이트먼의 책

초월하는 뇌

인간의 뇌는 어떻게 영성, 기쁨, 경이로움을 발명하는가앨런 라이트먼 지음 김성훈 옮김앨런 라이트먼이 뇌과학, 철학, 심리학을 넘나들며 파헤친 인간의 의식과 영혼의 비밀. 지금껏 한 번도 속 시원하게 해결된 적 없는 까다로운 질문, "물질적인 뇌가 어떻게 자아, 영혼 같은 비물질적이고 초월적인 경험을 가능케 하는가"에 대해 응답한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데카르트,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의식과 경험에 관한 인류최고 지성의 사유와, 과학의 최전선에서 최신 이론을 만들어내는 동시대 과학자들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과학적 세계관과 인간의 초월적경험 사이에 이 둘이 양립할 수 있는 새로운 자리를 개척한다.

과학이 세상을 바꾼 순간

인류의 삶을 바꾼 22가지 과학 혁명의 순간들앨런 라이트먼 지음 박미용 옮김 이성렬, 김경순, 김창규 논문 옮김앨런 라이트먼이 집대성한 20세기 과학사. 과학사에서 가장 위대한발견을 이끌어낸 천재 과학자들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그들을 가장잘 보여주는 기록인 원전 논문을 다룬다. 막스 플랑크의 양자 발견부터 프랭클린 • 왓슨. 크릭의 DNA 구조 발견을 거쳐 폴 버그의 인공 생명체까지. 현대 과학 최고의 발견과 그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한 권의책으로 소개한다. 현대 과학의 제반을 설명하고, 그 발견을 이룬 천재들이 어떻게 사고했는지 탐색하는 이 책은 창의성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지극히 거대한 공간 속 작은 존재로서
우리는 우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MIT 천재 물리학자이자 인문학 교수,
앨런 라이트먼이 들려주는 인간 존재와 우주의 신비


"이 세상에는 분명 우주에 관한 서로 다른 수많은 관점이 존재한다. 이책은 그중 7가지 관점을 탐험할 것이다. 이 탐험을 통해 우리는 과학과 종교 사이의 대화, 영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욕망과 자연의 덧없는 본질 사이에서 빚어지는 충돌, 인간의 존재가 그저 하나의 우연에 불과할 가능성, 현대 기술이 우리가 세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도록 단절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나아가 거대한 공간 속에 서 있는 작은 존재로서, 우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_시작하는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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