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봐 온 것처럼, 산업화된 국가들의 주당 노동시간은 지난 150년 동안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주목할 만한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이 노동시간 단축의 흐름은 1980년대까지 계속되다가 멈췄다. 
보다 최근에는, 많은 산업화된 국가들에서 생산성 증가는 제자리 걸음인 반면 임금은 인플레이션과 맞물리며 아주 조금씩 겨우 오르는 중이다. 

이런 이유로 (일부에서는) 이미 생산성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노동시간 단축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한편에서는 결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도 나온다. 
우리는 이 양날의 도전 앞에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자동화가 우리를 구해줄까?
한가지 견해는,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인간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감소시킬 로봇공학, 통신, 인공지능 등의 발전과 함께 우리가 새로운 ‘산업 혁명‘의 진통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노동시간 단축에 유리한 새로운 조건이 만들어질 것이다.
게다가 신기술은 화석연료에 덜 의존적이고 이전의 기술들보다 더 깨끗하고 친환경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천연자원 고갈이나 온실가스 증가 - 초창기 생산성 성장의 명백히 치명적 결과할 수 있는 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다. 
이런 경향을 낙관적으로 보는 이들은 에너지와 자원 사용의 측면에서 ‘무중력‘
기술에 대한 투자를 예상하면서 결과적으로 조직이 노동시간을단축함으로써 생태발자국을 줄이면서도 왕성한 생산력에기여하는 만족스럽고 보상이 좋은 노동력을 창출하게 될 것으로예상한다.
듣기에는 좋은 소리지만, 실제 생활에서 상황은 훨씬 - P-1

복잡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동화는 아마도 불평등을 심화하는 양극화 효과와 함께 경제의 서로 다른 분야에•불균등하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자동화가 생산성 향상을 촉진하든 아니든 상관없이, 생산력의 향상만으로 노동자의 임금상승이나 소득과 부의 불평등 감소, 혹은 더 지속가능한 경제를 보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권력이 어디에 있고,
얼마나 알맞게 사용되는가이다.

 20세기에 노동시간 단축이 가능했던 핵심 요인은 
생산성 향상의 결과물을 노동자들도 함께 누릴 수 있게 해준 단체교섭이었다. 
노동조합의 힘은 1980년대 이후로 급격히 감소했고 최근에는 디지털 플랫폼의 증가로 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조직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더 깨끗하고 더 친환경적인 기술만으로 지구의 미래를 위협하는 지구위험 한계선(PB)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다. 

새로운 기술이 생산량을 늘리면 기업에는 더 높은 이윤을, 주주에게는 더 큰 배당을, 그리고 때로는 노동자들에게도 더 나은 급여가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비의 본질이 바뀌지 않고, 보상은 늘 더 많은 개인 소득의 형태로 제공되어야 한다는 기대가 지배적인 상황에서는 어떤 기술적 돌파구도 경제를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어렵다. 

만약 기후 위기를 극복할 기술적 해결책을 겨우 마련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 과정에서 생물다양성과 같은 다른 지구위험 한계선(PB)을 넘어설 위험이 높다.

신기술에 열광하는 기술 낙관론자들이 바라보는 미래는 경제의 작은 부분에만 영향을 미치면서 단지 일부 조직과 일부노동자 집단, 그리고 일부 분야에서만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전반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 규모를 키울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는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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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 앞의 도전들

주당 노동시간 단축은 몇 가지 도전적인 질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는 종종 개인적인 선택에 관한 질문을 받곤 한다. 사람들이 더오래 일하기를 원하면 어떻게 되는가? 같은 질문이다. 
또 어떤이들은 사람들에게 가용 시간이 더 많이 주어지면 정말로 환경피해를 줄일 수 있는 건지 의심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노동시간이 줄어든다는 건 수입이 줄어드는 걸 의미하고 이는 많은 노동자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 이유를 들어 노동시간 단축에 반대하고 
어떤 이들은 노동시간 단축이 생산성 저하와 경제적 실패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노동시간 단축은,
사람들이 선택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가?

자본주의의 원칙 아래서는, 개인의 선택을 방해하는 것이 종종 자유시장 경제의 기능을 방해하는 근본적인 반칙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어떤 선택도 진공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건 없다. 

우리가
‘개인적 선택‘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대부분 문화와 규범, 그리고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자극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는 이런 40주4일 노동이 - P-1

결정요인들을 교란하고 여기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누구나의심하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주당, 혹은 월간이나연간 노동시간에 대해 새로운 기준을 세우려 한다. 개인들은여전히 선택할 수 있지만 이전과는 다른 매개변수의 조합 속에서선택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변화가 단편적이고 자발적인 기반 위에서시작되리란 점을 흔쾌히 인정한다. 이미 그래왔다. 하지만, 오늘날의 아직 개혁되지 않은 경제 구조 속에서 자유선택에만 의존하는 것은 적어도 세 가지 이유에서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우선 노동시간 단축을, 가사 노동을 책임져야 하는 여성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다는 점이다. ‘정상‘이라고 받아들이는 노동시간에 대한 우리의 생각처럼, 우리 선택의 대부분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이유로 구성된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에 비해 선택에 있어 훨씬 더 자유롭다. 우리가 그동안 보아온 것처럼,
여성들은 전통적으로 돌봄과 그 밖의 가사 노동을 떠맡아왔기 때문에 ‘파트 타임‘이나 간헐적인 일자리를 선택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던 반면 고소득자로서 남성들은 더 오랜시간 일해왔기 때문에 성 불평등의 패턴이 고착화되었다.

둘째로, 노동시간 단축이 단지 선택사항일 뿐인 세상에서는 돈뿐만 아니라 시간도 상대적으로 풍족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사람들 사이의 불평등이 심해지면서, 노동시간을 줄일 만한 여유가 있다고 느끼는 더 나은 임금 소득자들이 노동시간 단축을 더 많이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저소득층의 임금과 조건을 개선하는 것 또한 필수적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궁극적으로는 남자든 여자든,
임금이 높든 낮든, 모든 사람이 적절하게 일하고 충분한 소득을 - P-1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또 새로운 표준으로서 주4일 (혹은 연간 시간으로 이에 상응하는)에 가까운 노동시간을 모두가 동등한 조건에서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경쟁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자리가 종종 유급 시간 외에 더 많이 일함으로써 헌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에 따라 좌우된다고 느낀다. 
이런 경우에는 일에 대한 열정(선택처럼)은 자발적이라기보다 강요된 것에 가깝고 자유의 문제라기보다는 야망이나 필수적인 차원의 문제가 된다.

노동시간 단축이 지금의 경제 시스템 속에서 선택사항으로만 남게 되면, 이런 양상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를 위한 노동시간의 법정 한도를 설정하는 것과 더 적은 시간 일할 수 있도록 개별적으로 맞춤형 방법을 마련해주는 것 사이의 신중한 균형이다. 

전체적으로 평균 노동시간을 줄인다는 전략 안에서는, 노동시간 할당 방식에 대해 충분한 유연성이 확보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필요에 맞게 노동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한다.

여가가 더 지속가능한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노동시간 단축의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지속 가능한 삶을 더 쉽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를 들어,
노동시간 단축은 저탄소 활동인 돌봄을 위한 시간을 확보해 준다.
더 많은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사람들은 ‘간편한‘ 쇼핑과 에너지 집약적인 여행을 줄이고 대신 자원을 낭비하지 않는 활동을 더 많이 하게 될 것이다. - P-1

하지만,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여가를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이와 관련해서는 상대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은 방식의 소비 패턴을 가진 고소득층 사이에서 강한 연관성을 보여준다. 
부유한 사람들은 3일의 주말을 스키를 타거나 도심 여행을 즐기기 위해 사용할 가능성이 더 크다.

시골을 산책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지만, 그러기 위해 파타고니아나 포르투갈로 날아간다면 그렇지 않다.

조류 관찰 같은 취미도 있다. 
멀리 바라볼 능력만 있다면 뒷마당이나 동네 공원에서 탄소를 전혀 쓰지 않고도 바로 시작할수 있다. 그다음, 당신은 쌍안경과 카메라를 살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무해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물건의 제조에는 에너지와 자원이 필요하다. 
이제 당신은 곧 삼각대, 줌 렌즈, 전천후 의류,
고급 텐트를 사고 싶어 하게 되고, 그동안 자연보호구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다녔는데 이제는 더 멀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조류 관찰 장소로 가기 위해 SUV 차량에 투자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될지 모른다. 

한 번 진지한 탐조가가 되고 나면 이제 1년에 수천 마일을 운전하거나 심지어는 희귀한 새들이 떠나기 전에 발견하고 싶어서 이국적인 장소를 찾아 비행기에 올라 탈지도 모른다. 
이렇게 단순한 자연 애호가는 막대한
‘생태발자국‘을 남기는 탐욕스러운 쾌락 추구자로 변해간다. 

영국 왕립 조류보호협회(RSPB)의 니콜라스 밀턴(Nicholas Milton)이 경고한 것처럼, "만약 RSPB의 백만 명이 넘는 회원 중 대부분이 지금처럼 정원에서 새를 바라보는 관찰자이기를 포기하고 대신 지금보다 훨씬 진지한 탐조가가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기후 대재앙을 초래할 것이다." - P-1

여가를 어떻게 보내느냐는 우리의 소비습관, 우리가관심사와 우선순위를 개발하는 방법,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친구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가 어떤 것이고 쓸 수 있는 돈은 얼마나 있는지 등에 관한 일반적인 규범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것을 감안할 때, 노동시간 단축은 보상의 문화적 초점을 소득에서 시간으로 바꿔주고 ‘간편함‘과 연결되어 있던 소비습관이 변화하도록 도와줌으로써 중장기적으로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보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이는 환경 파괴적 행동을 억제하고 지속 가능한 삶을 촉진하는 다른 정책들과 함께 진행되어야만 한다.

급여는 어떤가?

오늘날의 장시간 노동 문화는 주5일이나 그 이상 일해야만 생존이 가능한 수준으로 유지되는 국가 최저임금 같은 급여율에 의해 강화되어 왔다. 
2020년 10월 이후, 영국의 최저임금은 25세 이상성인을 기준으로 시간당 8.72파운드(2021년 기준 환율로13,590원)였다. 
1년 52주 동안 매주 30시간씩 이 기준으로 일하면 연간 약 13,600파운드(약 2,120만 원)를 벌게 된다. 전국 평균소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연중 딱 2주만 쉬고 매주 67시간 혹은그 이상 일해야만 한다.3 

많은 노동자에게 노동시간 단축에 관한 가장 큰 걱정은 당연히 소득 손실이다.
가장 큰 문제는 낮은 시급이다. 누구라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미 수많은 문서를 통해 확인된 건강과 복지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지나친 장시간 노동을 해서는 안 된다. 
노동시간 단축으로의 전환에는 모든 사람이 실질적 수준의 생활임금을
- P-1

받을 자격이 있음을 명확히 하는 조치가 수반되어야 하고 이는•노동시간 단축에 충분한 수준으로의 전환이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5장에서 다시 설명)동시에 우리는 모두가 자신의 지불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따라 활용할 수 있도록, 더 많고 더 좋은 공공 서비스형태인 ‘사회적 임금‘을 더 향상시키고 확실히 보장하도록 만드는 걸 목표로 삼아야 한다. 

사회적 임금은 재분배 효과가 있고 소득을 보완해준다. 5

그러므로 노동시간 단축이 사람들을 빈곤에 빠뜨릴것이라는 전망은 더 높은 시급과 더 나은 공공 서비스를 위해 싸울만한 좋은 이유가 되고, 주당 노동시간 단축에 반대하려는 섣부르고 동떨어진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가난과는 거리가 멀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노동시간 단축으로 수입이 줄어들까 염려하는 이들은 어떨까?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주당 노동시간 단축으로 전환하는가에 달려 있다. 
우선 우리는 급여가 보장된 상태에서사용할 수 있는 서로 다른 법적 권리들의 조합을, 모두의 휴무를 위해 조금씩 점진적으로 늘려갈 것을 제안한다. 
예를 들면 육아휴직 연장, 돌봄 휴가를 위한 새로운 권리, 법정 연차 연장,
법정 공휴일 1일 추가, 임금피크제와 같은 유연한 은퇴제도,
노동시간 단축 협상권 등이다. 
최저임금의 대폭적 인상과 함께 이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고용주에게도 임금 손실 없이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경험을 쌓게 하고 새로운 ‘정상‘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ㅈ경제가 적응할 수 있게 하면서 신뢰를 구축할 것이다.

전환의 일환으로, 규제 조치와 함께 각 산업별 혹은 기업별 수준에서 점진적 변화가 협상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줄리엣 - P-1

쇼르가 제안한 것처럼‘ 매년 임금 검토와 협상이 이루어지는•조직에서라면 노동자들은 매년 임금 상승률을 조금 낮춤으로써 더 많은 휴무를 얻어낼 수 있다. 
누구라도 조금 덜 인상된•급여를 받으면 직장과 떨어져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추가로 얻을수 있다. 
해마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주당 노동시간을 꾸준히줄일 것이며 아무도 즉각적인 임금 삭감을 경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접근 방식이 어디에서나 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 큰조직과 이미 좋은 수입을 얻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더 적합하다)
그러나 더 많은 곳에서 이런 방식이 채택되면 될수록 노동시간 단축의 경험이 쌓이고, 일의 보상이 어떠해야 하는지 또 ‘성공‘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무엇이 풍요로운 삶을 구성하는지 등에 관한 우리 사회의 만연한 태도를 바꾸는 데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주당 노동시간 단축은 경제에 해로운가?

노동시간 단축이 생산량 감소의 위협이 되며, 따라서 경제 번영을 추구하려는 노력과는 근본적으로 함께할 수 없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된다. 어떤 경우라도 노동시간을 지금보다 더 단축하려면 그보다 먼저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증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로버트 스키델스키 - Robert Skidelsky, 1939년생 영국의 경제사학자, 케인스 전기의 저자로 유명하다; 옮긴이 주)는 노동시간과 생산성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노동시간 단축은 높은 생산성 증가와 연관된다. 높은 생산성 증가는 투자율을 높이고 실질 임금 상승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실질 임금 상승은 노동시간 단축과 연관된다." 우리가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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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20일 뒤, 컴퓨터통신에는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덮어주는 아량도 필요한 것 아니냐. 마지막까지 가면 당하는 사람은 다른 보복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제 그만 좀 해라. 잘못했다고 했잖느냐" 등의 볼멘소리가 이어졌다. 

1996년 6월 <한겨레21> 기사는 그들이 과거에서 멀어지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사건 해결까지 가는 동안에 지켜보는 이들은 피해자를 비난하기도 한다.

1996년 7월 3일 <한겨레>를 보면, 고려대 총학생회는 "이대 쪽이 성폭력 사건으로 규정하는 만큼 관련 학생들을 여성단체에서 자원봉사를 시켜 속죄하도록 하는 게 어떻냐"며 학사징계 대신 자원봉사를 요구했다. 

가해자 쪽에서 입맛대로 처벌을 요청하는 모습은 마치 성범죄를 저지른 가수가 "음악으로 보답하겠다"며분별없이 구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당시 총학생회장이었던 윤민화씨는 6월 20일치 <한겨레21> 인터뷰에서 "학칙에 의거한 처벌을 원한다"고 밝힌 바 있다.

고대생이 이대생에게 가한 12년간의 폭력은 여성을 주체로 보지 않고 쟁취의 대상으로 보던 당시 대학의 남성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부르주아 의식을 교육하겠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여자대학에 난입해 여학생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것은 여성이 언어를 가지고 지식을 쌓는 것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을 반증한다.

- P-1

더 들어가보자. 
여성도 가부장제와 공모한다. 여성이기 때문에 가부장제와 공모하게 된다. 이들은 여성이면서도 여성이 아니었다.

‘민족고대‘로 대표되는 남성문화를 내면화한 상태였다. 약자는 때로 현실의 모순을 직면하는 데 실패해 강자와 공모하게 된다.

약자와의 연대를 통해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마음먹는 일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니 가해자 중에 여학생이 섞여 있었다는 사실은 여성이 남성의 시선을 내면화해 결국 자신에게 내상을 입힐 정도로 가부장제가 복잡하고 강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시 여성위원장이었던 조혜련씨는 고대 여학생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이 일화를 통해 우리는 진짜 주체를 발견하게 된다.

"고대 여학생들로부터 온 편지가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그동안 자신들이 눈감고 있던 문화에 대해 말해줘서 고맙다는 편지를 받았어요. 
고대와 이대의 싸움이라기보다 고대와 이대 여학생들이 남성문화에 대해 저항했던 사례가 아니었나 합니다." (‘슬랩‘ 인터뷰 중에서)

실제로 대학의 주체는 남성으로 대표되었다. 

당시 고대생은 연대생과의 학벌주의에 기반한 경쟁의식 속에서 이대생이 저들을 차별하는 것 같은 피해의식에 휩싸여 있었다. 
고대와 연대로 대표되는 남성 간의 파워게임이 이대를 배경으로 벌어졌던 것이다. 

고대생은 응원가인 <막걸리 찬가> 가사를 다음과 같이 개사해 부르기도 했다. "이대생은 우리 것 숙대생도 양보 못 한다."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이 2017년 10월 16일 <한겨레21> 페미니즘 특강에서 설명한 내용은 이 사건을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남성과 남성의 갈등은 남성의 몸이 아니라 여성 - P-1

의 몸에서 일어난다. 약자의 몸은 늘 강자에게 전쟁터로 제공된다.

청일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난 것처럼. 

미국 남성이 한국 여성을 강간하면, 
한국 남성은 미국 남성과 싸우는 게 아니라 
미국 여성을강간하는 판타지를 꿈꾼다."

그들이 폭력의 대상으로 이대생을 삼은 데에는 이러한 생각이 깔려 있었다.
 (나만큼) 똑똑하고 (나만큼) 배운 (사람) 여자를 견딜수 없다. 

이대라는 여성들의 배움터를 자신들의 싸움터로 상상하고 
연세대로 대표되는 다른 남성과의 경쟁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실감하는 존재감이란 얼마나 작고 무른가.

2017년에는 연세대학교의 응원가사가 논란이 됐다. 다음은<Woo> 가사의 일부다. 
고대의 <막걸리 찬가>와 닮았다. 
"고대 못생겼어 일단 못생겼어/ 계속 못생겼어 고대 이낏/ 이대한테 차이고 숙대한테 차이고/ 여기저기 차이고 차이고 또 차이고" 
연대에 따르면 고대생이 못생겼기 때문에 이대와 숙대 학생들에게 거절당한다는 것인데, 
남대생을 주체로 삼았다는 것이 같다. 
해당 가사는 여성혐오 논란 이후 개사되었다.


2016년 이후 온라인에서 "왜 안 만나줘"는 상징적인 문장이되었다. 여성이 데이트해 주지 않는 것을 억울해하는 남성들의 대표적인 행태가 유머로 소비되기 시작한 것이다. 
연애와 결혼에서 좌절이 예상되는 시기에 남성의 분노는 강렬해진다. 

여성에 대한•후려치기와 여성 간의 구분을 병행하며 ‘내 여자‘가 될 ‘개념녀‘를•찾아다니고 내 여자가 되어주지 않을 여자에게 분노를 쏟아낸다.

그들이 페미니스트를 향해 "남자의 사랑을 받지 못한 여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욕인 이유는 그것이 투사이기 때문이다. - P-1

이대와 고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름을 남겼다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두 학교의 남대생들은 이성의 인청을 통해서 세워지는 자존감을 공유한다. 그동안 고려대와 연세대의 여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누구도 누군가의 애인이 되기 위해 입학하지 않는다. 이성에게 선택받는 것 외의 방식으로 삶의 이유를 찾을 수는 없을까.

그들은 신남성이 되었을까. 

1996년 7월 3일치 <한겨레>를 보던 중, 500여 명의 가해자 사이에 법학과에 재학 중인 스무살 학생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사실은 유독 성범죄에만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한국의 판결들과 연결되었다. 

‘소라넷‘과 ‘엔(N)번방 사건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 세계 최대 아동성착취물 사이트 운영자 손정우에게 내린 1년 6개월의 징역, 아동 대상 성폭력 범죄자인 조두순을 격리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알림을 주어 가해자를 피하도록 하는 결정까지. 

최근 디지털성범죄 관련 양형기준이 조정되기는 했지만 우리나라는 성폭력에 관대하다.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사건을 축소하고 
"좋아해서 그랬다"는 말은 범죄를 장난으로 왜곡한다. 

남성이 중심이 되어온 역사 안에서 
범죄와 처벌이 한데 엉켜 이어지는 것이다. 

사회가 남성의 침범권을 옹호하는 동안 여성은 살아갈 자유를 잃었다.

최근 트위터에서 "24시간 동안 세상에서 남자가 없어지면무엇을 하고 싶냐"고 묻는 말에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밤에 산책, 혼자 산책, 하이킹, 
밤에 잘 때 창문 열어놓기, 
택배 걱정안 하기, 택시 안심하고 타기. 
혼자 여행하기∙∙∙. 

성별 권력의 존재는 
남자에게 침범할 권리를, 
여자에게는 피할 의무를 주고 있다. - P-1

정말인가? 절반은 진실, 절반은 거짓이다. 웬 멍멍이풀 뜯어먹는 소리냐고? 실제로 멍멍이는 풀을 뜯어먹을 뿐 아니라 여린 새싹을 좋아한다. 한국은 변했을 뿐 아니라 불변하기도 했다.

수많은 이들의 힘겨운 노력과 투쟁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침실에 갇혀 있던 성소수자들이 광장으로 나왔으며, 퀴어축제에 가면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즐기는 그들이 보인다. 
사회적 집단으로서 성소수자가 부재하던 시절은 지났다. 
그들은 몇 년 전부터 ‘엘지비티‘의 외연도 넓혀가는 중이다. 
기존의 ‘엘지비티‘에A(Asexual: 무성애자), I(Intersex: 중성 또는 간성), 
Q(Questionary: 성적 지향 혹은 성 정체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를 더해 ‘LGBTAIQ+‘로 명명한다. 

궁극적으로 이성애 중심 세상이 성소수자를 구분하는 것에 불과한 이 모든 경계가 흐려지길 바라면서.

엘지비티 운동의 역사가 게이 중심으로 흘러온 점, 
동성결혼이 전 지구적 이슈임에도 한국에서는 동성혼은커녕 사실혼조차 인정되지 않는 점,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이 여전히 불투명한 점등은 해결해야 할 과제다.

늘 그랬듯, 시간은 진격하고 쟁취하는 자의 편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더 많이 떠들고, 더 많이 나대는 수밖에.

 ‘침묵은 곧 죽음. 퀴어축제의 슬로건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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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잘랄앗던 알루미

인간이란 존재는 여관과 같습니다. 
매일 아침 새 손님이찾아옵니다. 
기쁨, 우울, 비열. 때로 순간의 깨달음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손님.

모두를 환영하고 대접하십시오.
비탄의 무리가 당신의 집을 거칠게 휩쓸고, 가구를 부수더라도, 모든 손님을 극진히 대하십시오. 

그러면 그 손님들이 당신을 새로운 기쁨으로 깨끗하게 씻어줄 것입니다.

어두운 생각, 수치, 원한을 웃음으로 맞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집에 초대하십시오.
누가 오더라도 감사하십시오.

그들 모두는 저 너머로 당신을 안내하고자 찾아왔습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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