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나는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김장우와 결혼하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한 그것, 그것을 나는 나영규에게서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이모가 그토록이나 못 견뎌했던 ‘무덤 속 같은 평온‘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귀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이야기‘와 ‘감동‘을 젖혀놓고 행해지는 소설에 관한 모든 논의에 무관심하며 또한 회의적이다. 
마찬가지로 단지 이야기만주장한다거나, 분석해서 얻어지는 감동만을 주장하는 논의 역시도 믿을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이론들에는 작가의 자리가 없다. 작가의 자리가 없는 소설, 혹은 작가의 정신이 없는 소설 논의는 일시에 소설이란 장르의 탄생을 무화시켜 버리고 만다.

일상의 남루를 벗겨주고 상실감을 달래주는 작가의 자리에 대해, 요즘 나는 다시 생각하고 있다.

6
하나의 소설이 쓰여지고 그것이 책으로 묶였다고 해서 소설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읽는다는 행위가 없으면, 읽기를 통해 독자와 소설이 생생히 교감하는 순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소설은 여전히 미완성인 것이다. 긴 시간 소설을 쓰면서 작가가 열렬히 소망하는 오직 하나는 독자를 통해 비로소 소설이 완성되는 그 순간의 교감이다. 
그 소망 하나에 기대어 작가는 세상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침잠하여 소설을 쓰는 것이다.
진지하고 우호적인 형태이든, 혹은 거칠고 과격한 형태이든 간에 미리

유포되는 전문독자들의 독후감은 소설에 대한 선입견을 조장한다. 그런선입견은 자칫 작가에게는 소망을, 독자에게는 감동을, 소설 그 자체에는완성의 기회를 앗아가는 적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모순을 쓰면서 이 소설을 읽는 모든 사람이 전부
‘첫 독자이길 꿈꾸었다. 

소설에 관해 유포된 어떤 독후감에도 침범당하지않은 순수한 첫 독자의 첫 독후감들을 많이 만나고 싶었다.

7
소설의 제목을 정하면서 많이 망설였다. 『모순이라는 추상적 개념어를 가장 구체적인 현실을 다루는 소설의 제목으로 삼기에는 좀 무겁다는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생각을 바꾸었다. 우리들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모순투성이였다. 이론상의 진실과 마음속 진실은 언제나 한 방향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모순』은 무엇을 따라도 모순의 벽과 맞닥뜨려지는 인간과 삶에 관한 진술이었다. 세상의 일들이란 모순으로 짜여있으며 그 모순을 이해할 때 조금 더 
삶의 본질 가까이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 이상 구체성을 띤 제목은 없을 터였다.

8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레 변해버린 요즘, 불안하고 당황스럽기만 한 시절에, 소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용기를 잃고 주저앉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 이 소설을 시작했으나, 모순으로 얽힌 이 삶은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1998년 여름
양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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