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난 의류 업체를 다니며 대학 강의를 하게 됐다. 새로운 일을 할 때였고, 기회를 얻고 만들어 잡을 때였다. 시부모님은 대학 강의를 하게 됐다는 말에 "강의만 하고 들째 가질 준비는 안 하면 어떻게 하냐?" 했다. 일에 치여 아이를 낳지 않을까 봐 전화 통화 때마다, 딸과 함께 시댁을 올라갈 때마다 ‘애 가질 적기‘와 ‘애 낳을 때‘ 타령을 하셨다.
친정엄마도 "몸이 너무 힘들면 애가 서겠니? 터울이 너무 지면 힘들다. 키우기도 어렵고, 너도 어렵고 했고, 친정아버지는 "시집을 갔으면 대를 이어야지. 그게 첫 번째 의무고 도리다. 다때가 있으니 놓치지 마렴" 했다. 양가 어른들은 이구동성으로 ‘애 낳을 때‘를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부모님들이 하신 말씀은 자식을 걱정해서 한 말들이었지만,
그 말들 속에는 가부장제 문화의 폭력성이 기세등등하게 살아 있었다.
‘애 낳을 때‘건 ‘일할 때‘ 건 최적의 조건은 ‘내가 하고 싶을 때‘ 인데, 어른들은 그렇게 조바심을 냈다.
가끔 서른 된 조카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너는 언제 결혼하려고 그러니, 그러다 때 놓친다"라고 말해놓고 스스로 놀란다.
문화는 무섭다. 부지불식간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은 정말 무섭다.
내가 여태껏 내 때는 내가 정하는 거라고 속으로 다짐하며 그분들의 매 이론‘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놓고는, 이제 와서 내가 때 타령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느 미래에 딸과 아들에게 일할 때, 아이 낳을 때를 말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생각을 조심하고, 말을 조심하고, 나의 과거를 조심해야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딸아 무엇이든 너희들이 하고 싶을 때가 최적의 시기이니 그 때를 잘 찾았으면 하는구나.
나의 세대는 가족의 의무, 엄마의 희생과 사랑이란 미명하에 힘든 직장 생활에도 힘든 육아에도, 애 낳을 때와 대를 이어야 한다는 재촉에 내가 원하는 때를, 일을 버려야 할 것 같은 정신적 고통을 겪으며, 나는 희생정신 없는 엄마. 도리를 다하지 않는 며느리인가 하는 죄의식을 가슴속에 키우며 살았으니 말이다.
아들은 할머니도 문화의 피해자였고, 그 문화 피해자인 할머니가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는 구조에 있었으니 단지 교육자였던 할머니를 탓한다 하여 무엇이 해결될 것인가 내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
아들이 할머니 손을 잡고 기차 여행을, 자동차 여행을 할 것인지는 나중 문제지만, 최소한 할머니 시대의 문화적 규정 속에서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없었던 할머니의 안타까운 생각과 행동을 아들이 이해하고 있어 감사했다.
그날 저녁, 나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 딸이 눈물을 뚝뚝 흘리던 모습과 아들을 안고 그리 예뻐하던 시어머니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나는 내 마음속 나의 할머니와 시어머니가 동시에 안타까웠다.
아들 말대로 나의 할머니도, 나의 엄마와 남편의 엄마도 문화에 충실하여 남성을 언제나 삶의 기준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충실한 혜택을 한껏 받은 사람은 쉽게 문화적 폭력을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대정신에 깔린 사람들, 외면당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만이 그 문화를 부수고 변화시킬 수 있음을 젊은 아들과 얘기하며 깨달았다.
문화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거대 담론의 옳고 그름에 수반
되지 않는다. 최소한 내게는 말이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말을 시부모에게 대놓고 하며 손자, 손녀를 그리 대하면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수많은 소소한 행위들과 기득권을 움켜쥘수 있는 사안들에서 부모들은 끝없이 여성이자 딸의 권리를 제한하고 침해하고 조정해서 결국 아들 손에 쥐여줬다.
그리 생각하면 삶은 사상이 아닌 생활이고, 하루하루가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무수한 딸들의 하루가 모여, 딸들의 양보와 선의가 모여 조상들은 남성 중심 문화를 형성했다.
여성들이 하루의 양보를 허락하지 않고 살았다면, 지금의 문화는 달랐을 게다. 하루하루를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사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별거 아닌데, 이것 하나는 그냥 내가하지" 하는 수많은 양보들이 쌓여 남성에게 기득권을 안겨주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삶은 사상이 아닌 생활이고, 하루하루가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무수한 딸들의 하루가 모여, 딸들의 양보와 선의가 모여조상들은 남성 중심 문화를 형성했다. 여성들이 하루의 양보를 허락하지 않고 살았다면, 지금의 문화는 달랐을 것이다.
아버지와 엄마는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무서웠을까? 강렬하게 쏟아지는 소나기가 맹렬하게 소리 지르던 천둥이, 악마가 눈을 뜨듯 작렬하던 번개가 무서웠을까? 아마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 칠흑 같은 원두막에 혼자 있을 내가 걱정되어그랬을 것이다.
낮과 밤은 계절에 따라 그저 우리에게로 올 뿐인데 어른들은 여자라는 딸이라는 이유로
밤을 두려움의 시간으로, 어둠을 경계해야 하는 시간으로 가르치고 규정시켰다.
언뜻 생각하면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 하겠지만, 밤의 아름다움을 진정 볼 수 없다면, 밤에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다면, 밤에 다녀야할 길을 나서지 않는다면 여자이자 딸인 우리는 하루의 반을 스스로 집 안으로 한정시킬 수밖에 없다.
부모에게는 여자와 딸이 밤에도 잘 돌아다닐 수 있도록 사회를 바꾸고 환경을 개선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는데, 먹고살기 바쁜 세상에서 그들은 그저 딸들에게 돌아다니지 말고, 조심하여 위험을 피하라고만 가르칠 뿐이었다.
딸이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나는 봄부터 가을까지 딸을 찾아 아파트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딸이 친구 집을 말도 없이가거나 다른 아파트 놀이터로 놀러 나가면, 나는 딸을 찾다 찾
다 밤 9시가 넘으면 아파트 안내 방송을 부탁했다. 딸은 늘 볼빨간 모습으로 해맑게 들어왔고, 나는 딸의 얼굴 속에서 나의 어린 시절을 봤다.
내가 "말을 해야지. 늦게까지 놀아도 되는데, 어디서 논다고 말을 해줘야 걱정을 안 하지!" 하면, 딸은 "엄마, 걱정했어요?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요. 놀다 보니 시간이 확 갔네요. 다음엔 안 그럴게요" 했다.
딸은 그저 노느라 바빴을 뿐이었다. 아이들을 돌봐주시던 시어머니는 "계집애가 밤늦게 돌아다녀서 어쩌냐? 밤 무서운 줄 모르고" 하며 혀를 찼고, 나는 어린 딸을 꾸중하던 시어머니의 질책을 내 등으로 받았다.
나는 나의 딸이 밤을 무서워하고 어둠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자라길 원치 않았다.
밤을 직시해야 어둠 속에 빛나는 것들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딸을 키우며 "왜 밤에 돌아다니냐, 일찍 집에 와라‘ 소리를 하지 않았다. 늦게 들어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부모가 동행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흔쾌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함께해 주었다.
세상엔 어두워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어둠 속에서만 찬란하게 빛나는 것들이 있다. 자식을 사랑하여 생기는 부모의 두려움은 부모의 몫일 뿐이다. 나의 몫을 어린 딸들에게 돌리
지 말고, 딸들이 어둠 속이나 어느 곳에서나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내 책임을 다하지 않고, 내 두려움과 걱정으로 딸들의 발을 묶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두려움은 생명처럼 자라난다. 딸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심어주고 겁을 한껏 심어, 딸의 발을 집 안에 잡아두고 싶지 않았다.
두려움의 자리는 마음속에 있고, 그 두려움을 키우는 것도 마음이니 말이다.
나는 나의 딸이 밤을 무서워하고 어둠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자라길 원치 않았다. 밤을 직시해야 어둠 속에 빛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딸들이 어둠 속이나 어느 곳에서나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의사 선생님이 영양실조라며 달걀을 하루에 한 개씩 반숙해주라 했었잖아요! 그래서 한달을 엄마가 아침마다 작은 스텐 그릇에 계란 반숙을 해줬잖아. 기억나요?" 내가 말하니 엄마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 기억나지, 정수리에 100원짜리 동전 크기로 머리가 빠져 놀랐지. 그래서 계란 한 판 사서 너만 반숙해줬지. 여자아이가 탈모가 뭐냐? 그래도 금방 좋아져서 다행이었지!"
나 스스로는 강한 성격이라 생각하며 살았지만, 원형 탈모를 겪던 시기는 추억이 많지 않다. 그때 의사 선생님이 영양실조라 하니 그런가 보다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영양실조가 아닌 심한 스트레스에 의한 탈모였다.
뼈가 부러지고 피가 흘러야만 폭력에 노출된 게 아니다.
일상적 언어폭력과 반복적 면박과 쥐어박음이 겹겹이 쌓이면 어린아이는 손톱을 뜯거나, 머리카락을 먹거나, 머리가 빠지거나, 새치가 잔뜩 올라오거나, 특정 부위 몸을 떨며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몸으로 표현한다.
어린 나는 할머니의 차별과 오빠의 소소한 폭력에 몸으로 아픈 증상을 표현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소소한 폭력들이 일상으로 벌어지던 시절이었으니, 엄마도 어린아이 장난 같은 남매의 주먹다
집에 탈모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엄마가 아침마다 정성 들여 반숙란을 해준 그 시절, 머리카라이 빠졌어도 행복했다.
아침 밥상에 떡하니 놓인 반숙란은 엄마의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몸으로 말하고 있었을 때 엄마의 사랑이, 엄마가 정성껏 아침마다•챙겨준 달걀 반숙이 내가 받은 세상 어디에도 없던 강력한 치유제였다. 엄마의 반숙을 먹고, 학년이 올라가고, 오빠가 타지로 유학을 가고, 날 구박하던 할머니가 앓아 누우며 다행히 내머리는 쑥쑥 자라났다.
어린아이는 그저 사랑을 먹고 자랄 뿐이다.
내가 박사 과정으로 바쁜 일상을 보낼 때, 4학년 딸이 손톱을 뜯었다. 딸의 앙증맞은 손톱들이 작은 이빨에 뜯겨 손끝이 붉어져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딸이 바쁜 내게 말도 못하고, 할머니에게 소소한 차별을 받으며 사랑받고 싶은 어린 마음을 혼자 손톱을 뜯으며 삭이고 있었다.
딸의 붉게 뜯긴 손톱이 내 마음을 할퀴었다. 한동안 딸을 자주 안아주고, 얘기를 들어주고, 손을 자주 잡았다.
손톱을 왜 뜯냐고 닦달하거나 혼내지 않았다. 딸이 내게 보내는 신호를 닦달한들 무엇 하겠나. 3개월이 지나니 딸은 손톱을 뜯지 않았다. 딸뿐이랴! 군산에 직
장을 잡고 주말 부부로 지내던 시절, 아빠와 대전에서 지내던 2학년 아들이 문구용 커터 칼로 가죽 소파를 여기저기 그어놓아, 아들을 불러 소파에 앉아 한참을 안아줬더랬다.
내가 아들을 안고서 "아들! 칼이 잘 드는지 확인하고 싶었구나! 이 소파가 너랑 나이가 비슷한데 네가 이 소파에 오줌도 싸고 과자도 흘리고 먹던 걸 토하기도 했었는데, 그래도 소파는 언제나 네 엉덩이를 잘 받아주고 소파에서 통통 뛰는 널 잘 견뎌줬는데, 이제는 네가 자라 칼로 긋기까지 하니 소파 인생도 험난하구나! 그치?" 했다.
아들은 겸연쩍게 웃으며 "다시는 안 그럴게요" 했다. 아들과 가능한 한 많이 눈을 마주치고, 자주 안아주며 시간을 보냈다.
어려서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차별이나 폭력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아이는 저도 모르게 자기 마음속에 스트레스 방을 만들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응축된 고통을 몸으로 표현한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걸 벗기 위해선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어른들이 보기엔 별것 아닌 소소한 행위들이 성장하는 아이들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가 된다. 나의 성장기를 돌아봐도, 내 아이들의 성장기에서도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차별과 소소한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픈 갈망이 저도 모
르게 행동으로 표현되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아이이거나 어른이거나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인간이다. 정수리 머리털이 한 움큼 빠져 지극한 엄마 사랑을 받아본 나는 안다. 자식에게 부모 사랑이 가장 강력한 치유제임을 말이다.
강력한 치유제를 마음속에 간직한 딸들에게엄마는 자식을 사랑하는 존재이지 신이 아니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지만 실수하고, 잘못 보고 어리석을 수 있다. 아이가 정서 불안을 겪는다면 전부 부모 잘못이라 할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아이는 고통받는 피해자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스트레스로 손톱을 물어뜯고, 온갖 곳에 낙서를 하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별것 아닌 일에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내뱉는 아이도 그냥 사랑받고 싶어 하는 아이일 뿐이다.
여름 성경 학교, 친구들과의 여름 여행, 겨울 여행........ 여자가 집 밖에서 자면 큰일 난다며 언니들은 하루의 외박도 허락받지 못했지만, 나는 나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언니들은 내게 "야! 우린 한번 혼나면 그냥 포기했는데, 너는 도대체 포기란게 없어서 늘 집이 시끄러워" 하며 입을 내밀었다.
나는 오롯이 내 삶을 살려면 아버지의 생각과 규범을 깰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남자인 오빠는 언제나 자유롭게 자신의 스케줄대로 여행도, 외박도, 늦은 시간 친구와의 만남도 했지만 여자인 언니들은 외박도, 여행도 금지였다.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아버지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 가족 안에서의 넘어섬이 없다면 과연 다른 울타리에서 무엇을 넘어설 수 있을까 생각한다.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 아니라면 한 인간의 자유와 선택을 제약할 근거는 누구에게도 없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해서 최대한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여자의 삶을 살라고 했지만,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 방법이 내게는 최선임을 아버지에게 생각으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내가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더 험할 울타리 밖 세상 속에서 나는 무엇을 일구고 쟁취할 수 있겠는가! 결혼 후 직장을 다니며 독박 육아를 할 때 아버지는 "집에서 아이나 잘 키
우지, 사서 고생이다" 하셨다.
아이 둘을 두고 박사 과정에 들어가니 "늦었지만 공부를 한다 하니, 하다 보면 뭔가는 할게다" 하셨다. 아이 둘을 두고 밀라노로 혼자 유학을 간다 하니 아버지는 사위인 남편을 보고 "재가 내 말을 들은 적이 없네. 간다고 했으니 갈 거고, 온다고 했으니 올 걸세. 자네가 힘들겠지만 평생 내 말을 안 들은 애네. 그래도 결국은 뭐가 되든될 걸세" 했다. 서른여덟에 나를 얻은 아버지는 평생 이기지못할 싸움을 막내딸인 나와 한 후, 내가 뭐가 되든 될 거라 믿었다.
제아무리 부모가 많은 지원과 자유를 줘도 자식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부모가 아무리 높은 담을 쳐도 자식이 넘어서려 하면 말릴 수 없다.
나는 운이 좋았다. 한국의 전형적인 고집 센 아버지가 내 투쟁력을 높여줄 때, 엄마는 마음 졸이며 선 밖으로 나를 밀어주고 응원해 줬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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