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 가족 안에서의 넘어섬이 없다면
과연 다른 울타리에서
무엇을 넘어설 수 있을까 생각한다.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 아니라면
한 인간의 
자유와 선택을 
제약할 근거는
누구에게도 없다.

오냐, 뭐가 나오냐? 
내가 평생 벌어다 준 돈을 
네 엄마가 그리 허망하게 쓰고 
맨날 성당 간다 쪼르륵 나가고. 
아니, 평생 죽도록 돈 벌어 먹여줬으면 
나를 챙겨야지, 뭔 성당 청소며 레지오며......."
내가 큰 소리로 따박따박 아버지께 말했다.
"아버지, 이혼당하려고 그래요? 아버지 재산 그거 딱 반은 엄마 거예요. 
거기에 종교적 핍박으로 위자료도 받아낼 수 있어요. 
그러지 말아요. 
왜 늙어서 엄마를, 
하느님 믿는 순한 엄마를 핍박해요. 
이젠 편하게 기도하게 해줘요."

그간 그렇게 바른 말 하는 내가 시끄러웠다던 엄마는 거실에 앉아 내가 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언니들이 말렸다.
"야, 그만해. 아버지가 엄마 없이 혼자 밥 드시는 것 서운해서 그렇지. 엄마를 사랑해서 말이야."

"알지, 아버지가 엄마 사랑하는 건 나도 알지. 그러니까,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걸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헤아려야지, 왜 엄마를 핍박하냐고. 
종교의 자유는 법으로 보장된 거야. 
아버지 조상이 다시 살아나 엄마에게 성당 가지 마라 해도 
엄마가 가고 싶으면 가는 게 
종교의 자유인데, 
왜 아버지가 
엄마 영혼을 구할 수도 없으면서 
가지 마라 하느냐고"

아버지는 헛헛하게 웃었다. 
내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 생각해봐요. 내 남편이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저를 이리 핍박하면 제가 참고 살아야 돼요? 
제가 일이 있어 나가야 된다고 하는데, 
남편이란 사람이 내 밥 차려야 하니 못나간다 하면 
옳다구나 하고 제가 그러고 살아야 돼요? 

그런소릴 듣고 제가 살고 있다면 
아버지 마음이 좋겠어요? 
평생 순종한 엄마도 
남의 집 귀한 딸이었어요. 
그렇게 아빠 편한 대로 하시면 안 되죠. 
그러지 마세요. 
엄마가 아버지를 너무 사랑하니까 이제까지 참고 산 거예요. 
너무 사랑해서
그걸 몰라요?

"하긴 그렇지. 엄마가 아버지를 너무 사랑하지."
듣고 있던 언니들도 맞장구를 쳤다.

엄마는 늘 아버지에게 순종했다. 
시부모님을 공경하며, 평생 머리를 낮추고 공손히 시부모를 모셨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타지에 나가 힘들게 벌어온 돈을 한 푼이라도 아끼려 
엄마는 늘 변변한 옷 한 벌 사 입지 못하고, 

우리 다섯 형제자매 대학 교육을 시키고, 근검절약을 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거스른 단 한 가지는 신앙생활이었다. 
결혼 초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버지의 "아편 같은 종교라

는 독한 말을 듣고서도 
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멈춘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신앙 안에서 힘든 현실의 고통을 하느님과 함께 견뎌왔다.

엄마에게 신앙생활은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외할머니와 단둘이 오손도손 살던 엄마가 선을 넘어 새롭게 들어온 바닷속 같은 시집 생활에서 
유일하게 숨을 쉬는 시간이 
일요일 오전미사였던 것인데, 
그마저도 아버지는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엄마는 삶에서 타협할 것과 타협할 수 없는 것을 보여줬다.

어떤 이에게는 종교일 수도, 일일 수도, 생각의 자유일 수도있는 고유한 무엇은 절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생을 걸고 내게 보여줬다. 
아버지는 엄마의 종교를 없애고 싶어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내 도리를 다하고 인내하고 검소하게 사는데, 일주일에 몇시간 주님을 못 만나게 하는 게 사람이야?"라며 엄마가 아버지께 하던 말이 떠오른다. 
엄마는 유교 문화의 선을 넘지 못한ㅈ채 시부모와 남편에게 순종했지만 자신의 종교는 끝까지 지켰다.

육지에서 살다 바다로 들어간 고래 같은 삶을 산 엄마를 생각하면 숨이 차다. 
그렇지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은 삶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살다 보면 고래 숨쉬기 같은 시간이 있다. 
누구에게나 인생에서는 그런 시간들이 있고, 그런 시간들을 견뎌내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다. 

엄마는 삶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켜내며, 원하는 바를 쟁취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엄마는 고래같이 크고 단단했다. 
못 배운엄마가, 순한 외할머니와 뜨개질하고, 봄이면 산나물 캐기를 좋아해 이산저산 나물 바구니를 들고 다니던 소녀가 
고래처럼 깊은 숨을 쉬며 우리들은 편안히 선을 밟고 넘고 살게 해주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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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난 의류 업체를 다니며 대학 강의를 하게 됐다. 새로운 일을 할 때였고, 기회를 얻고 만들어 잡을 때였다.
시부모님은 대학 강의를 하게 됐다는 말에
 "강의만 하고 들째 가질 준비는 안 하면 어떻게 하냐?" 했다. 
일에 치여 아이를 낳지 않을까 봐 전화 통화 때마다, 딸과 함께 시댁을 올라갈 때마다
 ‘애 가질 적기‘와 ‘애 낳을 때‘ 타령을 하셨다.

 친정엄마도 "몸이 너무 힘들면 애가 서겠니? 터울이 너무 지면 힘들다. 키우기도 어렵고, 너도 어렵고 했고, 
친정아버지는 "시집을 갔으면 대를 이어야지. 그게 첫 번째 의무고 도리다. 다때가 있으니 놓치지 마렴" 했다. 
양가 어른들은 이구동성으로
‘애 낳을 때‘를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부모님들이 하신 말씀은 자식을 걱정해서 한 말들이었지만, 

그 말들 속에는 가부장제 문화의 폭력성이 기세등등하게 살아 있었다. 

‘애 낳을 때‘건 ‘일할 때‘ 건 최적의 조건은 ‘내가 하고 싶을 때‘ 인데, 
어른들은 그렇게 조바심을 냈다.

가끔 서른 된 조카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너는 언제 결혼하려고 그러니, 그러다 때 놓친다"라고 말해놓고 스스로 놀란다.

문화는 무섭다. 부지불식간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은 정말 무섭다. 

내가 여태껏 내 때는 내가 정하는 거라고 속으로 다짐하며 그분들의 매 이론‘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놓고는,
이제 와서 내가 때 타령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느 미래에 딸과 아들에게 일할 때, 아이 낳을 때를 말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생각을 조심하고, 말을 조심하고, 나의 과거를 조심해야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딸아
무엇이든 너희들이 하고 싶을 때가 최적의 시기이니 그 때를 잘 찾았으면 하는구나.

나의 세대는 가족의 의무, 엄마의 희생과 사랑이란 미명하에 힘든 직장 생활에도 힘든 육아에도, 애 낳을 때와 대를 이어야 한다는 재촉에 
내가 원하는 때를, 일을 버려야 할 것 같은 정신적 고통을 겪으며, 
나는 희생정신 없는 엄마.
도리를 다하지 않는 며느리인가 하는 죄의식을 가슴속에 키우며 살았으니 말이다.

아들은 할머니도 문화의 피해자였고, 그 문화 피해자인 할머니가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는 구조에 있었으니 단지 교육자였던 할머니를 탓한다 하여 무엇이 해결될 것인가 내게 묻고 있는 것이었다.


아들이 할머니 손을 잡고 기차 여행을, 자동차 여행을 할 것인지는 나중 문제지만, 
최소한 할머니 시대의 문화적 규정 속에서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없었던 할머니의 안타까운 생각과 행동을 아들이 이해하고 있어 감사했다. 

그날 저녁, 나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 딸이 눈물을 뚝뚝 흘리던 모습과 아들을 안고 그리 예뻐하던 시어머니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나는 내 마음속 나의 할머니와 시어머니가 동시에 안타까웠다.

아들 말대로 나의 할머니도, 나의 엄마와 남편의 엄마도 문화에 충실하여 남성을 언제나 삶의 기준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충실한 혜택을 한껏 받은 사람은 쉽게 문화적 폭력을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대정신에 깔린 사람들, 외면당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만이 그 문화를 부수고 변화시킬 수 있음을 젊은 아들과 얘기하며 깨달았다.

문화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거대 담론의 옳고 그름에 수반

되지 않는다. 최소한 내게는 말이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말을 시부모에게 대놓고 하며 손자, 손녀를 그리 대하면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수많은 소소한 행위들과 기득권을 움켜쥘수 있는 사안들에서 부모들은 끝없이 여성이자 딸의 권리를 제한하고 침해하고 조정해서 결국 아들 손에 쥐여줬다. 

그리 생각하면 삶은 사상이 아닌 생활이고, 하루하루가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무수한 딸들의 하루가 모여, 
딸들의 양보와 선의가 모여 
조상들은 남성 중심 문화를 형성했다. 

여성들이 하루의 양보를 허락하지 않고 살았다면, 지금의 문화는 달랐을 게다. 
하루하루를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사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별거 아닌데, 이것 하나는 그냥 내가하지" 하는 수많은 양보들이 쌓여 
남성에게 기득권을 안겨주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삶은 사상이 아닌 생활이고,
하루하루가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무수한 딸들의 하루가 모여,
딸들의 양보와 선의가 모여조상들은 남성 중심 문화를 형성했다.
여성들이 하루의 양보를 허락하지 않고 살았다면,
지금의 문화는 달랐을 것이다.


아버지와 엄마는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무서웠을까? 강렬하게 쏟아지는 소나기가 맹렬하게 소리 지르던 천둥이, 악마가 눈을 뜨듯 작렬하던 번개가 무서웠을까? 
아마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 칠흑 같은 원두막에 혼자 있을 내가 걱정되어그랬을 것이다.

낮과 밤은 계절에 따라 그저 우리에게로 올 뿐인데 어른들은 여자라는 딸이라는 이유로

 밤을 두려움의 시간으로, 어둠을 경계해야 하는 시간으로 가르치고 규정시켰다. 

언뜻 생각하면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 하겠지만, 밤의 아름다움을 진정 볼 수 없다면, 밤에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다면, 밤에 다녀야할 길을 나서지 않는다면 
여자이자 딸인 우리는 하루의 반을 스스로 집 안으로 한정시킬 수밖에 없다. 

부모에게는 여자와 딸이 밤에도 잘 돌아다닐 수 있도록 사회를 바꾸고 환경을 개선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는데, 먹고살기 바쁜 세상에서 그들은 그저 딸들에게 돌아다니지 말고, 조심하여 위험을 피하라고만 가르칠 뿐이었다.

딸이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나는 봄부터 가을까지 딸을 찾아 아파트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딸이 친구 집을 말도 없이가거나 다른 아파트 놀이터로 놀러 나가면, 나는 딸을 찾다 찾

다 밤 9시가 넘으면 아파트 안내 방송을 부탁했다. 
딸은 늘 볼빨간 모습으로 해맑게 들어왔고, 나는 딸의 얼굴 속에서 나의 어린 시절을 봤다. 

내가 "말을 해야지. 늦게까지 놀아도 되는데, 어디서 논다고 말을 해줘야 걱정을 안 하지!" 하면, 딸은
"엄마, 걱정했어요?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요. 놀다 보니 시간이 확 갔네요. 다음엔 안 그럴게요" 했다. 

딸은 그저 노느라 바빴을 뿐이었다. 아이들을 돌봐주시던 시어머니는 "계집애가 밤늦게 돌아다녀서 어쩌냐? 밤 무서운 줄 모르고" 하며 혀를 찼고, 나는 어린 딸을 꾸중하던 시어머니의 질책을 내 등으로 받았다. 

나는 나의 딸이 밤을 무서워하고 어둠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자라길 원치 않았다. 

밤을 직시해야 어둠 속에 빛나는 것들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딸을 키우며 "왜 밤에 돌아다니냐, 일찍 집에 와라‘ 소리를 하지 않았다. 늦게 들어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부모가 동행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흔쾌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함께해 주었다.

세상엔 어두워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어둠 속에서만 찬란하게 빛나는 것들이 있다. 자식을 사랑하여 생기는 부모의 두려움은 부모의 몫일 뿐이다. 
나의 몫을 어린 딸들에게 돌리

지 말고, 딸들이 어둠 속이나 어느 곳에서나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내 책임을 다하지 않고, 내 두려움과 걱정으로 딸들의 발을 묶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두려움은 생명처럼 자라난다. 딸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심어주고 겁을 한껏 심어, 딸의 발을 집 안에 잡아두고 싶지 않았다. 

두려움의 자리는 마음속에 있고, 그 두려움을 키우는 것도 마음이니 말이다.

나는 나의 딸이 밤을 무서워하고
어둠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자라길 원치 않았다.
밤을 직시해야 어둠 속에 빛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딸들이 어둠 속이나
어느 곳에서나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의사 선생님이 영양실조라며
달걀을 하루에 한 개씩 반숙해주라 했었잖아요! 그래서 한달을 엄마가 아침마다 작은 스텐 그릇에 계란 반숙을 해줬잖아.
기억나요?"
내가 말하니 엄마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 기억나지, 정수리에 100원짜리 동전 크기로 머리가 빠져 놀랐지. 그래서 계란 한 판 사서 너만 반숙해줬지. 여자아이가 탈모가 뭐냐? 그래도 금방 좋아져서 다행이었지!"

나 스스로는 강한 성격이라 생각하며 살았지만, 원형 탈모를 겪던 시기는 추억이 많지 않다. 그때 의사 선생님이 영양실조라 하니 그런가 보다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영양실조가 아닌 심한 스트레스에 의한 탈모였다.

뼈가 부러지고 피가 흘러야만 폭력에 노출된 게 아니다. 

일상적 언어폭력과 반복적 면박과 쥐어박음이 겹겹이 쌓이면 어린아이는 손톱을 뜯거나, 머리카락을 먹거나, 머리가 빠지거나, 새치가 잔뜩 올라오거나, 특정 부위 몸을 떨며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몸으로 표현한다. 

어린 나는 할머니의 차별과 오빠의 소소한 폭력에 몸으로 아픈 증상을 표현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소소한 폭력들이 일상으로 벌어지던 시절이었으니, 엄마도 어린아이 장난 같은 남매의 주먹다

집에 탈모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엄마가 아침마다 정성 들여 반숙란을 해준 그 시절, 머리카라이 빠졌어도 행복했다. 

아침 밥상에 떡하니 놓인 반숙란은 엄마의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몸으로 말하고 있었을 때 엄마의 사랑이, 엄마가 정성껏 아침마다•챙겨준 달걀 반숙이 내가 받은 세상 어디에도 없던 강력한 치유제였다. 
엄마의 반숙을 먹고, 학년이 올라가고, 오빠가 타지로 유학을 가고, 날 구박하던 할머니가 앓아 누우며 다행히 내머리는 쑥쑥 자라났다. 

어린아이는 그저 사랑을 먹고 자랄 뿐이다.

내가 박사 과정으로 바쁜 일상을 보낼 때, 
4학년 딸이 손톱을 뜯었다. 딸의 앙증맞은 손톱들이 작은 이빨에 뜯겨 손끝이 붉어져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딸이 바쁜 내게 말도 못하고,
할머니에게 소소한 차별을 받으며 사랑받고 싶은 어린 마음을 혼자 손톱을 뜯으며 삭이고 있었다. 

딸의 붉게 뜯긴 손톱이 내 마음을 할퀴었다. 한동안 딸을 자주 안아주고, 얘기를 들어주고, 손을 자주 잡았다. 

손톱을 왜 뜯냐고 닦달하거나 혼내지 않았다. 딸이 내게 보내는 신호를 닦달한들 무엇 하겠나. 3개월이 지나니 딸은 손톱을 뜯지 않았다. 딸뿐이랴! 군산에 직

장을 잡고 주말 부부로 지내던 시절, 아빠와 대전에서 지내던 2학년 아들이 문구용 커터 칼로 가죽 소파를 여기저기 그어놓아, 아들을 불러 소파에 앉아 한참을 안아줬더랬다. 

내가 아들을 안고서 "아들! 칼이 잘 드는지 확인하고 싶었구나! 이 소파가 너랑 나이가 비슷한데 네가 이 소파에 오줌도 싸고 과자도 흘리고 먹던 걸 토하기도 했었는데, 그래도 소파는 언제나 네 엉덩이를 잘 받아주고 소파에서 통통 뛰는 널 잘 견뎌줬는데,
이제는 네가 자라 칼로 긋기까지 하니 소파 인생도 험난하구나! 그치?" 했다. 

아들은 겸연쩍게 웃으며 "다시는 안 그럴게요" 했다. 아들과 가능한 한 많이 눈을 마주치고, 자주 안아주며 시간을 보냈다.


어려서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차별이나 폭력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아이는 저도 모르게 자기 마음속에 스트레스 방을 만들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응축된 고통을 몸으로 표현한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걸 벗기 위해선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어른들이 보기엔 별것 아닌 소소한 행위들이 성장하는 아이들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가 된다. 
나의 성장기를 돌아봐도, 내 아이들의 성장기에서도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차별과 소소한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픈 갈망이 저도 모

르게 행동으로 표현되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아이이거나 어른이거나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인간이다. 정수리 머리털이 한 움큼 빠져 지극한 엄마 사랑을 받아본 나는 안다. 자식에게 부모 사랑이 가장 강력한 치유제임을 말이다.

강력한 치유제를 마음속에 간직한 딸들에게엄마는 자식을 사랑하는 존재이지 신이 아니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지만 실수하고, 잘못 보고 어리석을 수 있다.
아이가 정서 불안을 겪는다면 전부 부모 잘못이라 할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아이는 고통받는 피해자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스트레스로 손톱을 물어뜯고, 온갖 곳에 낙서를 하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별것 아닌 일에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내뱉는 아이도 그냥 사랑받고 싶어 하는 아이일 뿐이다.

여름 성경 학교, 친구들과의 여름 여행, 겨울 여행........
여자가 집 밖에서 자면 큰일 난다며 언니들은 하루의 외박도 허락받지 못했지만, 나는 나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언니들은 내게 "야! 우린 한번 혼나면 그냥 포기했는데, 너는 도대체 포기란게 없어서 늘 집이 시끄러워" 하며 입을 내밀었다.

나는 오롯이 내 삶을 살려면 아버지의 생각과 규범을 깰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남자인 오빠는 언제나 자유롭게 자신의 스케줄대로 여행도, 외박도, 늦은 시간 친구와의 만남도 했지만 여자인 언니들은 외박도, 여행도 금지였다.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아버지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 가족 안에서의 넘어섬이 없다면 과연 다른 울타리에서 무엇을 넘어설 수 있을까 생각한다.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 아니라면 한 인간의 자유와 선택을 제약할 근거는 누구에게도 없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해서 최대한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여자의 삶을 살라고 했지만,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 방법이 내게는 최선임을 아버지에게 생각으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내가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한다면, 더 험할 울타리 밖 세상 속에서 나는 무엇을 일구고 쟁취할 수 있겠는가! 
결혼 후 직장을 다니며 독박 육아를 할 때 아버지는 "집에서 아이나 잘 키

우지, 사서 고생이다" 하셨다. 

아이 둘을 두고 박사 과정에 들어가니 "늦었지만 공부를 한다 하니, 하다 보면 뭔가는 할게다" 하셨다. 
아이 둘을 두고 밀라노로 혼자 유학을 간다 하니 아버지는 사위인 남편을 보고 "재가 내 말을 들은 적이 없네.
간다고 했으니 갈 거고, 온다고 했으니 올 걸세. 자네가 힘들겠지만 평생 내 말을 안 들은 애네. 그래도 결국은 뭐가 되든될 걸세" 했다. 
서른여덟에 나를 얻은 아버지는 평생 이기지못할 싸움을 막내딸인 나와 한 후, 내가 뭐가 되든 될 거라 믿었다.

제아무리 부모가 많은 지원과 자유를 줘도 자식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고, 
부모가 아무리 높은 담을 쳐도 자식이 넘어서려 하면 말릴 수 없다. 

나는 운이 좋았다. 
한국의 전형적인 고집 센 아버지가 내 투쟁력을 높여줄 때, 엄마는 마음 졸이며 선 밖으로 나를 밀어주고 응원해 줬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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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너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너의 선택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건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란 걸 분명히 알아두렴.


네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육아와 집의 화목을 이유로,
남편의 일과 딸같이 여긴다는 시부모의 권유로
너의 선택이 침해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란다.

엄마가 왔다. 겨울방학이란다.
난 엄마가 와서 너무 좋다.
그런데 동생은 엄마를 알아보지 못했다.
걱정이다. 엄마를 몰라보다니!

딸은 동생이 엄마를 몰라봤다는 사실에 걱정하며 그림일기를 썼다. 누굴 걱정할 나이도 아닌데, 그저 엄마가 와서 좋다고만 말해도 될 나이인데. 남편은 "나도 안 한 걱정을 아이가했네" 하며 한참이나 딸의 그림일기를 쳐다봤다.

내가 유학 간 1년 동안 딸은 바쁜 아빠와 동생, 할머니와함께 지냈다. 내가 밀라노에서 돌아와 우리 가족이 다시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을 즈음 딸이 물었다.
"엄마! 할머니는 동생을 더 예뻐하는데, 엄마도 그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딸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마음은 잘 모르겠지만, 먼저 태어난 아이는 나중에 태어난 아이보다 엄마랑 더 많은 시간과 기억을 갖잖니. 그래서 어른들이 작은 애를 더 아끼게 되는 것 아닐까? 

넌 일찍 태어난 그만큼 엄마와 시간을 더 함께했으니, 언젠가 엄마가 이세상을 떠나도 어찌 됐든 동생보다는 더 많은 걸 기억하게 되잖아. 그것만 생각하렴!"

그러자 딸은 고개를 끄덕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동생은 엄마랑 아주 잠깐 떨어졌는데도 엄마를 다 잊어먹었으니까. 
맞아요! 난 영원히 동생보다는 5년 더 엄마랑 함께하네요."

유독 손자만 예뻐하던 할머니와 지내는 동안 딸은 싫은 소리를 번번이 들어야 했다. 
그런 딸에게 나는 ‘남녀가 아닌 인간의 시간‘으로 대답했고 딸은 만족해했다. 내 첫 아이로 태어나 동생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부모와 더 많은 추억을 갖는다는것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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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나도 이런 것을 만들고 싶다.
‘이런 것‘이 뭔지 그때는 몰랐다. 적어도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아닌 건 확실했다. 
소설이어야 한다거나 글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아마 형식조차 분명하지 않은, 추상적인 무언가였을 것이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혹은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 출렁이게 하고 확 쏟아버리게 하는 것. 뒤늦게 다시 주워 담아보지만, 더는 이전과 같지 않은 것.

이야기를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근원에 있는 마음을 묻게 될 때 나는 가로등 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 돌아오던 열여덟 살의 밤을 생각한다. 
눈은 잔뜩 부었고 내일의 피로는 예정되어 있지만 마음은 행복감으로 차 있었다. 

사실 나는 그영화의 내용을 많이 잊어버렸다. 정확히 어떤 장면과 대사에 울고 웃었는지 세부 사항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의 기분만큼은 기억한다. 무언가가 너무 좋아서 이런 것을 만들고 싶다는 갈망이 뭉게뭉게 생겨나던 순간을 어떤 이야기와 사랑에 빠질 때의 그 기분, 그것을 재현하고 싶다는 바람이 나의 ‘쓰고 싶다‘는 마음 중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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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비숙련직의 큰 장점은 엄청나게 다양한 기술과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같은 일을 한다는 점이다. 

화이트칼라 직종은 비슷한 교육을 받고 관심도 비슷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동료들이 어느 정도 비슷한 재능과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 

경비원의 세계에는 이런 문제가 없다. 메트가 새로운 경비를 고용할 때면 기본적으로 ‘와서 면접보세요‘라는 내용의 짧고도 명료한 광고를 낸다(예전에는 《뉴욕타임스》, 요즘은 온라인예), 경비 담당 부서에서 찾는 사람은 이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건강한 사람이고 그들은 이 일에 적합한 다양하고도 방대

한 인력풀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 결과 외국 출생인 사람이 거의 절반에 달하는 경비팀은 인구학적으로만 다양한 것이 아니라 모든 축에서 각양각색이다.

미술관 경비가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출발하는 특별한 부류는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수없이 많은 형태의 사람들이 이직업을 택하며 각자 서로 다른 동력을 가지고 일에 임한다.

 <뉴요커》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일을 시작한 동료들은 엘리트 사립학교 출신이었고 대부분이 출판계에서 다른 일을 하다가 온 사•람들이었다. 

메트의 경비팀에서는 벵골만에서 구축함을 지휘했던 사람, 택시를 몰던 사람, 민간 항공사 파일럿으로 일한 사람,
목조 가옥을 짓던 사람, 농사를 짓던 사람,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사람, 순찰을 돌던 경찰, 그런 경찰들의 활동을 신문에 보도하던 기자, 백화점 마네킹의 얼굴을 그리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전 세계 오대양 육대주와 뉴욕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다.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다. 열의가 넘치는 사람도 있고 매사에 뾰로통한 사람도 있다.
경비 전문가들도 있고 어쩌다 보니 이 일을 하게 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포인트에 서서 그들 중 어느 누구와 이야기를 나눠도 혼란스럽지 않다. 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화의 물꼬는 이미 튼 셈이다.

여학생 하나가 입술의 튼 부분을 뜯으며 그리스인들은 분명히 신을 믿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당연하지, 아니, 주위를 둘러봐. 그렇지 않아? 이상하긴 하지만... 그러고는 어깨를으쓱한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있던 남학생은 그것을 의심한다.
그는 그리스인들에게 신이란 아마도 악마 같은 존재에 더 가까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악마가 있다고,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그냥 이야기라고 생각하잖아? 그 대목에서 두 학생은 말 없는 신들과 여신들을 멍하니 둘러보며 교착상태에 빠진 듯하다.

그들이 결국 ‘어느 정도‘처럼 책임감 없는 답변으로 생각을타협해버릴까 걱정돼 조심스럽게 개입하기로 한다. 
"저기, 너희들, 도움이 필요하니?" 그들은 순간 내 근무복을 보고 깜짝 놀라 자신들이 뭔가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차분한 표정을 본 그들은 곧 안심하며 도와주면 고맙겠다고 말한다. 

나는 작문에 쓸 만한 단어 하나를 알려준다. 그리스어 단어 ‘에피파니(piphany‘는 원래 ‘신의 방문‘을 뜻하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신의 계시와도 같은 깨달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나는그리스인들은 꿈속에서나 깨어 있을 때나 끊임없이 에피파니를경험했다고 알려준다.
그러고는 지금은 유실된 고전기 그리스의 조각가 페이디아스(서양 고대 최고의 조각가 혹은 건축가로 평가받는 인물.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파르테논신전을 재건한 것이 최대 업적으로 꼽힌다-옮

긴이)의 작품을 모사한 <메디치 아테나Athena Medici>ici) (고대 그리스 아테네 파르테논신전의 황금과 상아로 만든 아테나 대신상을 로마 시대에 이르러 모방한 작품-옮긴이)라고 불리는 로마 시대의 두상 쪽으로 학생들을 데려간다(이 모작도 몸통은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함께 평온하고 무표정하지만 굳거나 얼어붙지는 않은 여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혈색이 돌고 유연한 지혜의 여신은 바로 이렇게 생겼을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다. 강인하고 힘이 넘치는 아름다움이다.
"아테나는 특별한 유형의 지혜를 관장하는 여신이었어" 학생들에게 말한다.
 "오디세이」 읽어봤니? 읽어봤다고? 좋아, 『오디세이」에서 아테나는 오디세우스가 자신감과 영감을 회복해야할 때마다 나타나. 그런 느낌 있잖아... 상태가 별로인 채로 돌아다니는데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고, 조금 전까지는 불가능하다고 느꼈던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와 용기가 생기면서 정신이 또렷해지는 느낌. 

오늘날 우리는 그 변화가 인간의 내부에서 생겼다고 생각하겠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믿지 않았어. 
그들에게 힘이란 모두 외부로부터 비롯한 것이었고, 그 힘은 강력하고, 예측 불가능하고, 운명을 좌지우지하듯 사람의 감정을 뒤흔드는 힘이었어. 
아테나는 마음을 꿰뚫고 변화시키는 방식 때문에 ‘가까움의 여신‘이라고도 불렸어."

나는 여신의 얼굴을 가리킨다. "아마 마음을 좋은 쪽으로 바꿔놓는 경우가 많았겠지. 그녀를 좀 더 들여다봐. 그리스인들이

지혜가 어떻게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너희도 아테나가 기분을나아지게 해주는지 한번 보렴."
내 비위를 맞추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두 학생은 내가 하는 말이 옳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두상 주위를 돌며 노트에 이것저것 필기를 한다. 그러고 나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이라고 인사하고는, 또 다른 신,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두 번째 에피파니를 만나기 위해 떠난다. 
멀어져가는 그들을 보며 나는 기운이 난다.

 너무 많은 방문객들이 메트를 미술사 박물관이라고 생각하면서 예술에서 배우기보다는 예술을 배우려 한다. 또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는 모든 정답을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있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이 감히 작품을 파고들어 재량껏 의미를 찾아내는 자리가 아니라고 넘겨짚는다. 

메트에서 시간을보낼수록 나는 이곳의 주된 역할이 미술사 박물관이 아니라는걸 더욱 확신하게 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관심 영역은 하늘 높이 솟았다가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지하 무덤까지 내려가고, 그 둘 사이의 세상에서 사는 것이란 어떤 느낌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거의 모든 측면과 맞닿아 있다. 그런 것에 관한 전문가는 있을 수 없다.

 나는 우리가 예술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가까이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비로소 예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믿는다. 저 아이들이 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그러기 위한 좋은 출발을 한 것 같다.

마음을 어떤 합일점에 고정하기 위해 고안된 종교의식에 하루에 다섯 번씩 참여하는 건어떤 느낌일지 상상해본다.

 ‘종교migon‘는 ‘묶음igature‘과 마찬가지로
ligio‘라는 이근을 갖고 있다. 
기본형일 때 ligio는 연결 혹은 이떠한 공동체가 인식하는 근본적인 진실에 다시 집중하고 교감합을 뜻한다. 
나는 특정한 종교적 전통을 섬기지는 않지만 종종어딘가에 소속되어 사소한 걱정들 대신 더 근본적인 것들과 교감할 필요를 느낀다. 독실한 숭배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찬미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미흐라브를 응시한다.

이슬람 전시관에서 일하는 즐거움 중 하나는 이 구역의 정규 감독관인 하다드 대장과 친해지는 것이다. 하다드 씨는 165센티미터 정도 되는 키에 왕족 같은 몸가짐을 하고 있다. 사실상 그가 하는 모든 말이 예리한 데다 재미도 있지만 그는 엷은 미소이상으로는 절대 웃지 않는다. 한번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한 방문객이 우리의 대화를 방해하며 하다드 씨의 뚜렷한 외국인 억양이 어디서 온 것인지 물었다. 

대장은 무표정한 채로답했다. "워싱턴 하이츠(맨해튼 북쪽 지역을 일컫는다. 미국에서 억양을 지적하며 누군가를 토박이와 구분 짓는 것은 차별적 발언에 해당한다. 이에 하다드 씨는 자신이 뉴욕에서 자란 것을 밝히며 간결하게 대

그림 속 주인공은 주황색 망토와 독특한 골무 모양의 모자를 쓰고 땅 위에 낮게 웅크려 있고 시선은 구부리진코의 능선을 타고 아래를 향한다. 손에 들린 염주는 신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기 위해 매일 의식처럼 행하는 그의 노력을 상기시킨다. 

쿠란은 신이 우리의 경정맥보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고 조언한다. 수피즘의 사상이란 이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예술 작품 앞에 ‘앉아 있다니, 너무 좋다! 그림에 적힌 아랍어 문구를 번역한 캡션을 찬찬히 읽는다.


그렇다면 나는 왜 내게 영혼을 준 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바로 그 영혼을 고통스럽게 하는 슬픔의 원천을 하늘이 내 안에 만들었는데도.


신을 향한 이 비난에 얼마나 날이 서 있는지 믿기지 않아 문장을 두세 번 반복해서 읽는다. 
반대로 그림은 너무 절제되고 웅장해서 더비시의 애처로운 말투가 나의 허를 찌른다. 
초상화의얼굴에서 이제야 발견한 침울함이 내가 고민하던 몇 가지 질문들을 인간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나 뚜렷하게 느껴지는 이 남자의 번뇌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출퇴근길의 지하철에서 수피즘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내가찾은 가장 적합한 책은 13세기의 신학자 이븐 아라비가 쓴 것이

자연은 단순함보다 대담하고 강한 것을 선호한다. 그런 것들은 아름답긴 하지만 항상 예술적이거나 명료하지는 않다. 

경험상 내 삶도 그렇다.
이제 단순한 삶은 끝났다. 그러나 아기 덕분에 이제 내 삶도 더아름답고 강건해지는 여정을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임금을 거의 받지 못한 3개월의 육아 휴가 동안 내 일터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 3층이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한 번에 담당하는 구역보다 작은 공간이었다. 
고요하고 말끔한전시실 대신 고물상 같은 방들이 내 일터가 되었다. 
하지만 7만평이 넘는 메트에서보다 20평짜리 이곳에서 할 일이 훨씬 많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다.

 지금까지는 사소한 것에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그 삶에서는 내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세상을 그냥 둘러보기만 하면 됐다. 
그러니 부모 노릇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수없이 많은 사소한 일을 해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가 받았을 충격을 상상해보라. 

산더미 같은 빨래, 계속되는 병원 출입, 끝없이 반복해서 기저귀 가방을 쌌다 풀었다 해야 하는 일상. 

나는 농부들이 느꼈을 법한 기분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노동이 너무 고단해서 그 결실을 음미할 여유조차 없는 느낌 말이다.

어느 날 오후, 도박을 해보겠다 결심한다. 싸다 만 기저귀가방을 들쳐 메고 아기를 원숭이처럼 한 팔로 안고 드넓은 세상으로 용감하게 나섰다. 5번가의 멕시코 음식점들과 언덕 위에 자

광선 모양의 천사, 기쁘게 몸을 곧추세우고 있는 천사들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퀼트의 기하학적 패턴뿐만 아니라 그 불완전함에 감동한다. 살짝 헤매는 듯한 구불구불한 선,
복잡하지 않고 간결한 바느질 자국, 즉흥적으로 구성된 재료들.
거기에는 근면성과 영감을 비롯해서 예술의 위력 중 가장 희망을 주는 것들이 넘치도록 들어 있다.

혼자 생각에 잠긴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처럼 세계적으로 장대한 곳에서 얻는 깨달음치고는 좀 우습긴 하지만, 바로 
의미라는 것은 늘 지역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은 자신의 상황에 갇힌사람들이 아름답고, 유용하고, 진실된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조각조각 노력을 이어 붙여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교훈까지 말이다. 

미켈란젤로 시대의 피렌체, 심지어 미켈란젤로 시대의 로마마저 이런 면에서는 로레타 페트웨이가 살던 시절의 지스 벤드와 다르지 않다. 이제 더 이상 전성기 르네상스와 같은 개념을빌어 생각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새로 만든 회반죽을 바르고, 거기에 그림을 그리고, 회반죽을 조금 더 바르고, 거기에 그림을 조금 더 그리는 한 사람을 생각할 것이다.

그는 그냥 그곳에 가서 편히 자리를 잡고 앉았고 나는 다른 작품들을 둘러보러 갔다.
"다 보고 와. 나는 여기 계속 있을게." 그가 말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내가 돌아가서 이제 다른 곳으로 좀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묻자 그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믿을 수 있겠어? 진심에서 하는 말인데 여기, 이 그림 앞에서 말라빠진 빵 조각이나 먹으면서 2주일 정도 앉아 있을 수만 있으면내 명을 10년은 단축해도 좋을 것 같아." 그러다가 마침내 그가일어섰다. 하는 수 없지." 그가 말했다. "여기 영원히 있을 수는없는 일이잖아. 그렇지?"

그렇다.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은 위안을 준다.
힘이 나게 한다. 그리고 순수하다. 

빈센트의 <붓꽃>을 보고 있자면 가난과 자신을 괴롭히는 상념들에서 벗어나 그 생기 넘치는단순함 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화가의 염원이 느껴진다. 

그러나 몸을 돌려 우리 앞에 놓인 것을 직면해야 하는 시간은 오고야 만다. 

빈센트의 이야기가 슬픈 것은 그가 삶을 살아내는 능력을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보다 운이 좋다는 사실에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감사하다. 내 이야기는 행복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더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이제 조셉이 자리로 돌아와서 자신과 나의 미래에 관해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

그곳을 맡은 포스터 씨의 근무 구역 절반을 내가 맡겠다는 협상을 한다. 전시실 한 곳은 그가 지키고 다른 한 곳은 내가 맡는 식이다. 그렇게 하면 메트 전체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그림이라고 마음속으로 정한 작품을 다시 한번 볼 기회도 누릴수 있을 것이다.

미술관 경비원으로서 수행한 마지막 임무는 바로 맨 처음 미술관에 갔을 때 배운 일이었다. 

20여 년 전, 어머니는 톰형과 미아와 나를 시카고 미술관에 데리고 가서 각자 제일 마음에 드는작품 하나씩을 고르기 전에는 전시실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그렇기에 메트에서 10년을 일했는데 내가 어떤 작품을 제일 좋아하는지 모르는 채 떠날 수는 없는 일이다. 
몇 달 동안 공책에 후보들을 적고 리스트를 만든 다음 가차 없이 숫자를 줄이는 작업을 반복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메트 소장품들을 개인적인 컬렉션으로 축소했다. <쿠로스 대리석 조각상>, <은키시 주술상>,
<시모네티 양탄자>, <곡물 수확>・・・ 너무 많이도, 너무 적게도 고르고 싶지 않다. 내가 품고 갈 수 있는 숫자 정도면 된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 시금석이 되어줄 작품들. 옛 거장 전시관에서 내가 제일 필요로 하는 그림은 15세기 이탈리아 수사 프라 안젤리코F-a Argelico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내가 가진 편견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오래된 작품이 좋다. 단단한 나무판 위에 입혀진 템페라의 느낌도, 자디잘게 금이 간 금박 아래로 붉은 진흙

베이스가 살짝 얼굴을 내미는 것도 좋다. 
옛 기독교 예술품과 거기에 깃든 빛을 발할 정도로 선명한 슬픔이 좋다. 너무도 고통스럽지만 이 그림이 톰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 

예수의 몸은 태풍에 요동치는 배의 돛대에 못 박힌 것처럼 보인다. 그를 중심으로 나머지 세상이 흔들리며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우아하면서도 부서진 몸은 뻔한 사실을 다시 상기시킨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 고통 속의 용기는 아름답다는 것, 상실은 사랑과 탄식을 자극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림의 이런 부분은 성스러운 기능을 수행해서 우리가 이미 밀접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불가해한 것에 가닿게 해준다.
그러나 안젤리코 수사가 묘사한 것은 예수의 몸뿐만이 아니다. 그는 십자가의 발치에 뒤죽박죽으로 모여 있는 구경꾼 한 무리를 상상했다. 옷을 잘 갖춰 입은 사람, 말을 타고 있는 사람 등등 꽤 많은 구경꾼들의 얼굴에는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반응과 감정들이 떠올라 있다. 
침해하는 사람들,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 지루해하는 사람들, 심지어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있는사람들도 있다. 옛 거장들의 그림에서 자주 보이는 리얼리즘이다.

 W. H. 오든의 시 「뮤제 데 보자르Musee des Beaux Arts・Arts(미술관)」에도 나와 있듯 "끔찍한 순교"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창문을 열고, 별생각 없이 그 옆을 걸어간다." 나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가운데 부분이 혼란스러운 일상생활을 제대로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디테일로 가득하고, 모순적이고,

가끔은 지루하고 가끔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일상. 

아무리 중차대한 순간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기저에 깔린 신비로움이 숭고하다 할지라도 복잡한 세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그림 하단이 있다. 그곳에서 그림의 톤은 다시 한번 변화한다. 거기에는 슬픔에 겨워 쓰러진 어머니를 돌보는 연민 가득한 사람들이 있다. 수동적인 구경꾼들과 달리 그들의 마음은 같은 방향, 즉 선행으로 향하고 있다. 

그림의 이 마지막 부분은 따르고 싶은 모범이다. 내 앞에 펼쳐진 삶에서 나를 필요로하고, 내가 필요한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다른 이들도 나를 위해 그렇게 해줄 것이라는 게 나의 희망이다. 

이제 형은 세상에 없다. 나는 그 상실을 느낀다. 형은 그림에서 성모 마리아를 돌보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린 채 몸을 굽히고 있는, 칭찬받아 마땅한 현실적인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지금도 형의 초상화, 티치아노가 그린 듯한 밝고, 솔직한 형의 얼굴이 선명하게 살아 있고, 그 모습에서 나는 위안을 찾는다. 이 그림이라면 확실히 내가 메트 바깥으로 품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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