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비숙련직의 큰 장점은 엄청나게 다양한 기술과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같은 일을 한다는 점이다.
화이트칼라 직종은 비슷한 교육을 받고 관심도 비슷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동료들이 어느 정도 비슷한 재능과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
경비원의 세계에는 이런 문제가 없다. 메트가 새로운 경비를 고용할 때면 기본적으로 ‘와서 면접보세요‘라는 내용의 짧고도 명료한 광고를 낸다(예전에는 《뉴욕타임스》, 요즘은 온라인예), 경비 담당 부서에서 찾는 사람은 이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건강한 사람이고 그들은 이 일에 적합한 다양하고도 방대
한 인력풀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 결과 외국 출생인 사람이 거의 절반에 달하는 경비팀은 인구학적으로만 다양한 것이 아니라 모든 축에서 각양각색이다.
미술관 경비가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출발하는 특별한 부류는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수없이 많은 형태의 사람들이 이직업을 택하며 각자 서로 다른 동력을 가지고 일에 임한다.
<뉴요커》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일을 시작한 동료들은 엘리트 사립학교 출신이었고 대부분이 출판계에서 다른 일을 하다가 온 사•람들이었다.
메트의 경비팀에서는 벵골만에서 구축함을 지휘했던 사람, 택시를 몰던 사람, 민간 항공사 파일럿으로 일한 사람, 목조 가옥을 짓던 사람, 농사를 짓던 사람,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사람, 순찰을 돌던 경찰, 그런 경찰들의 활동을 신문에 보도하던 기자, 백화점 마네킹의 얼굴을 그리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전 세계 오대양 육대주와 뉴욕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다.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다. 열의가 넘치는 사람도 있고 매사에 뾰로통한 사람도 있다. 경비 전문가들도 있고 어쩌다 보니 이 일을 하게 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포인트에 서서 그들 중 어느 누구와 이야기를 나눠도 혼란스럽지 않다. 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화의 물꼬는 이미 튼 셈이다.
여학생 하나가 입술의 튼 부분을 뜯으며 그리스인들은 분명히 신을 믿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당연하지, 아니, 주위를 둘러봐. 그렇지 않아? 이상하긴 하지만... 그러고는 어깨를으쓱한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있던 남학생은 그것을 의심한다. 그는 그리스인들에게 신이란 아마도 악마 같은 존재에 더 가까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악마가 있다고,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그냥 이야기라고 생각하잖아? 그 대목에서 두 학생은 말 없는 신들과 여신들을 멍하니 둘러보며 교착상태에 빠진 듯하다.
그들이 결국 ‘어느 정도‘처럼 책임감 없는 답변으로 생각을타협해버릴까 걱정돼 조심스럽게 개입하기로 한다. "저기, 너희들, 도움이 필요하니?" 그들은 순간 내 근무복을 보고 깜짝 놀라 자신들이 뭔가 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차분한 표정을 본 그들은 곧 안심하며 도와주면 고맙겠다고 말한다.
나는 작문에 쓸 만한 단어 하나를 알려준다. 그리스어 단어 ‘에피파니(piphany‘는 원래 ‘신의 방문‘을 뜻하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신의 계시와도 같은 깨달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나는그리스인들은 꿈속에서나 깨어 있을 때나 끊임없이 에피파니를경험했다고 알려준다. 그러고는 지금은 유실된 고전기 그리스의 조각가 페이디아스(서양 고대 최고의 조각가 혹은 건축가로 평가받는 인물.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파르테논신전을 재건한 것이 최대 업적으로 꼽힌다-옮
긴이)의 작품을 모사한 <메디치 아테나Athena Medici>ici) (고대 그리스 아테네 파르테논신전의 황금과 상아로 만든 아테나 대신상을 로마 시대에 이르러 모방한 작품-옮긴이)라고 불리는 로마 시대의 두상 쪽으로 학생들을 데려간다(이 모작도 몸통은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함께 평온하고 무표정하지만 굳거나 얼어붙지는 않은 여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혈색이 돌고 유연한 지혜의 여신은 바로 이렇게 생겼을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다. 강인하고 힘이 넘치는 아름다움이다. "아테나는 특별한 유형의 지혜를 관장하는 여신이었어" 학생들에게 말한다. "오디세이」 읽어봤니? 읽어봤다고? 좋아, 『오디세이」에서 아테나는 오디세우스가 자신감과 영감을 회복해야할 때마다 나타나. 그런 느낌 있잖아... 상태가 별로인 채로 돌아다니는데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고, 조금 전까지는 불가능하다고 느꼈던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와 용기가 생기면서 정신이 또렷해지는 느낌.
오늘날 우리는 그 변화가 인간의 내부에서 생겼다고 생각하겠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믿지 않았어. 그들에게 힘이란 모두 외부로부터 비롯한 것이었고, 그 힘은 강력하고, 예측 불가능하고, 운명을 좌지우지하듯 사람의 감정을 뒤흔드는 힘이었어. 아테나는 마음을 꿰뚫고 변화시키는 방식 때문에 ‘가까움의 여신‘이라고도 불렸어."
나는 여신의 얼굴을 가리킨다. "아마 마음을 좋은 쪽으로 바꿔놓는 경우가 많았겠지. 그녀를 좀 더 들여다봐. 그리스인들이
지혜가 어떻게 생겼다고 생각했는지. 너희도 아테나가 기분을나아지게 해주는지 한번 보렴." 내 비위를 맞추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두 학생은 내가 하는 말이 옳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두상 주위를 돌며 노트에 이것저것 필기를 한다. 그러고 나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이라고 인사하고는, 또 다른 신,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두 번째 에피파니를 만나기 위해 떠난다. 멀어져가는 그들을 보며 나는 기운이 난다.
너무 많은 방문객들이 메트를 미술사 박물관이라고 생각하면서 예술에서 배우기보다는 예술을 배우려 한다. 또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는 모든 정답을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있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이 감히 작품을 파고들어 재량껏 의미를 찾아내는 자리가 아니라고 넘겨짚는다.
메트에서 시간을보낼수록 나는 이곳의 주된 역할이 미술사 박물관이 아니라는걸 더욱 확신하게 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관심 영역은 하늘 높이 솟았다가 지렁이가 기어다니는 지하 무덤까지 내려가고, 그 둘 사이의 세상에서 사는 것이란 어떤 느낌이고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거의 모든 측면과 맞닿아 있다. 그런 것에 관한 전문가는 있을 수 없다.
나는 우리가 예술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가까이에서 이해하려고 할 때 비로소 예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 믿는다. 저 아이들이 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그러기 위한 좋은 출발을 한 것 같다.
마음을 어떤 합일점에 고정하기 위해 고안된 종교의식에 하루에 다섯 번씩 참여하는 건어떤 느낌일지 상상해본다.
‘종교migon‘는 ‘묶음igature‘과 마찬가지로 ligio‘라는 이근을 갖고 있다. 기본형일 때 ligio는 연결 혹은 이떠한 공동체가 인식하는 근본적인 진실에 다시 집중하고 교감합을 뜻한다. 나는 특정한 종교적 전통을 섬기지는 않지만 종종어딘가에 소속되어 사소한 걱정들 대신 더 근본적인 것들과 교감할 필요를 느낀다. 독실한 숭배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찬미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미흐라브를 응시한다.
이슬람 전시관에서 일하는 즐거움 중 하나는 이 구역의 정규 감독관인 하다드 대장과 친해지는 것이다. 하다드 씨는 165센티미터 정도 되는 키에 왕족 같은 몸가짐을 하고 있다. 사실상 그가 하는 모든 말이 예리한 데다 재미도 있지만 그는 엷은 미소이상으로는 절대 웃지 않는다. 한번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한 방문객이 우리의 대화를 방해하며 하다드 씨의 뚜렷한 외국인 억양이 어디서 온 것인지 물었다.
대장은 무표정한 채로답했다. "워싱턴 하이츠(맨해튼 북쪽 지역을 일컫는다. 미국에서 억양을 지적하며 누군가를 토박이와 구분 짓는 것은 차별적 발언에 해당한다. 이에 하다드 씨는 자신이 뉴욕에서 자란 것을 밝히며 간결하게 대
그림 속 주인공은 주황색 망토와 독특한 골무 모양의 모자를 쓰고 땅 위에 낮게 웅크려 있고 시선은 구부리진코의 능선을 타고 아래를 향한다. 손에 들린 염주는 신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기 위해 매일 의식처럼 행하는 그의 노력을 상기시킨다.
쿠란은 신이 우리의 경정맥보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고 조언한다. 수피즘의 사상이란 이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예술 작품 앞에 ‘앉아 있다니, 너무 좋다! 그림에 적힌 아랍어 문구를 번역한 캡션을 찬찬히 읽는다.
그렇다면 나는 왜 내게 영혼을 준 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바로 그 영혼을 고통스럽게 하는 슬픔의 원천을 하늘이 내 안에 만들었는데도.
신을 향한 이 비난에 얼마나 날이 서 있는지 믿기지 않아 문장을 두세 번 반복해서 읽는다. 반대로 그림은 너무 절제되고 웅장해서 더비시의 애처로운 말투가 나의 허를 찌른다. 초상화의얼굴에서 이제야 발견한 침울함이 내가 고민하던 몇 가지 질문들을 인간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나 뚜렷하게 느껴지는 이 남자의 번뇌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출퇴근길의 지하철에서 수피즘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내가찾은 가장 적합한 책은 13세기의 신학자 이븐 아라비가 쓴 것이
자연은 단순함보다 대담하고 강한 것을 선호한다. 그런 것들은 아름답긴 하지만 항상 예술적이거나 명료하지는 않다.
경험상 내 삶도 그렇다. 이제 단순한 삶은 끝났다. 그러나 아기 덕분에 이제 내 삶도 더아름답고 강건해지는 여정을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임금을 거의 받지 못한 3개월의 육아 휴가 동안 내 일터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 3층이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한 번에 담당하는 구역보다 작은 공간이었다. 고요하고 말끔한전시실 대신 고물상 같은 방들이 내 일터가 되었다. 하지만 7만평이 넘는 메트에서보다 20평짜리 이곳에서 할 일이 훨씬 많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다.
지금까지는 사소한 것에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그 삶에서는 내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세상을 그냥 둘러보기만 하면 됐다. 그러니 부모 노릇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수없이 많은 사소한 일을 해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가 받았을 충격을 상상해보라.
산더미 같은 빨래, 계속되는 병원 출입, 끝없이 반복해서 기저귀 가방을 쌌다 풀었다 해야 하는 일상.
나는 농부들이 느꼈을 법한 기분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노동이 너무 고단해서 그 결실을 음미할 여유조차 없는 느낌 말이다.
어느 날 오후, 도박을 해보겠다 결심한다. 싸다 만 기저귀가방을 들쳐 메고 아기를 원숭이처럼 한 팔로 안고 드넓은 세상으로 용감하게 나섰다. 5번가의 멕시코 음식점들과 언덕 위에 자
광선 모양의 천사, 기쁘게 몸을 곧추세우고 있는 천사들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퀼트의 기하학적 패턴뿐만 아니라 그 불완전함에 감동한다. 살짝 헤매는 듯한 구불구불한 선, 복잡하지 않고 간결한 바느질 자국, 즉흥적으로 구성된 재료들. 거기에는 근면성과 영감을 비롯해서 예술의 위력 중 가장 희망을 주는 것들이 넘치도록 들어 있다.
혼자 생각에 잠긴다.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처럼 세계적으로 장대한 곳에서 얻는 깨달음치고는 좀 우습긴 하지만, 바로 의미라는 것은 늘 지역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은 자신의 상황에 갇힌사람들이 아름답고, 유용하고, 진실된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조각조각 노력을 이어 붙여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교훈까지 말이다.
미켈란젤로 시대의 피렌체, 심지어 미켈란젤로 시대의 로마마저 이런 면에서는 로레타 페트웨이가 살던 시절의 지스 벤드와 다르지 않다. 이제 더 이상 전성기 르네상스와 같은 개념을빌어 생각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새로 만든 회반죽을 바르고, 거기에 그림을 그리고, 회반죽을 조금 더 바르고, 거기에 그림을 조금 더 그리는 한 사람을 생각할 것이다.
그는 그냥 그곳에 가서 편히 자리를 잡고 앉았고 나는 다른 작품들을 둘러보러 갔다. "다 보고 와. 나는 여기 계속 있을게." 그가 말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내가 돌아가서 이제 다른 곳으로 좀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묻자 그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믿을 수 있겠어? 진심에서 하는 말인데 여기, 이 그림 앞에서 말라빠진 빵 조각이나 먹으면서 2주일 정도 앉아 있을 수만 있으면내 명을 10년은 단축해도 좋을 것 같아." 그러다가 마침내 그가일어섰다. 하는 수 없지." 그가 말했다. "여기 영원히 있을 수는없는 일이잖아. 그렇지?"
그렇다.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은 위안을 준다. 힘이 나게 한다. 그리고 순수하다.
빈센트의 <붓꽃>을 보고 있자면 가난과 자신을 괴롭히는 상념들에서 벗어나 그 생기 넘치는단순함 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화가의 염원이 느껴진다.
그러나 몸을 돌려 우리 앞에 놓인 것을 직면해야 하는 시간은 오고야 만다.
빈센트의 이야기가 슬픈 것은 그가 삶을 살아내는 능력을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보다 운이 좋다는 사실에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감사하다. 내 이야기는 행복한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더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이제 조셉이 자리로 돌아와서 자신과 나의 미래에 관해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
그곳을 맡은 포스터 씨의 근무 구역 절반을 내가 맡겠다는 협상을 한다. 전시실 한 곳은 그가 지키고 다른 한 곳은 내가 맡는 식이다. 그렇게 하면 메트 전체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그림이라고 마음속으로 정한 작품을 다시 한번 볼 기회도 누릴수 있을 것이다.
미술관 경비원으로서 수행한 마지막 임무는 바로 맨 처음 미술관에 갔을 때 배운 일이었다.
20여 년 전, 어머니는 톰형과 미아와 나를 시카고 미술관에 데리고 가서 각자 제일 마음에 드는작품 하나씩을 고르기 전에는 전시실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그렇기에 메트에서 10년을 일했는데 내가 어떤 작품을 제일 좋아하는지 모르는 채 떠날 수는 없는 일이다. 몇 달 동안 공책에 후보들을 적고 리스트를 만든 다음 가차 없이 숫자를 줄이는 작업을 반복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메트 소장품들을 개인적인 컬렉션으로 축소했다. <쿠로스 대리석 조각상>, <은키시 주술상>, <시모네티 양탄자>, <곡물 수확>・・・ 너무 많이도, 너무 적게도 고르고 싶지 않다. 내가 품고 갈 수 있는 숫자 정도면 된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 시금석이 되어줄 작품들. 옛 거장 전시관에서 내가 제일 필요로 하는 그림은 15세기 이탈리아 수사 프라 안젤리코F-a Argelico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 내가 가진 편견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오래된 작품이 좋다. 단단한 나무판 위에 입혀진 템페라의 느낌도, 자디잘게 금이 간 금박 아래로 붉은 진흙
베이스가 살짝 얼굴을 내미는 것도 좋다. 옛 기독교 예술품과 거기에 깃든 빛을 발할 정도로 선명한 슬픔이 좋다. 너무도 고통스럽지만 이 그림이 톰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
예수의 몸은 태풍에 요동치는 배의 돛대에 못 박힌 것처럼 보인다. 그를 중심으로 나머지 세상이 흔들리며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우아하면서도 부서진 몸은 뻔한 사실을 다시 상기시킨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 고통 속의 용기는 아름답다는 것, 상실은 사랑과 탄식을 자극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림의 이런 부분은 성스러운 기능을 수행해서 우리가 이미 밀접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불가해한 것에 가닿게 해준다. 그러나 안젤리코 수사가 묘사한 것은 예수의 몸뿐만이 아니다. 그는 십자가의 발치에 뒤죽박죽으로 모여 있는 구경꾼 한 무리를 상상했다. 옷을 잘 갖춰 입은 사람, 말을 타고 있는 사람 등등 꽤 많은 구경꾼들의 얼굴에는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반응과 감정들이 떠올라 있다. 침해하는 사람들,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들, 지루해하는 사람들, 심지어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있는사람들도 있다. 옛 거장들의 그림에서 자주 보이는 리얼리즘이다.
W. H. 오든의 시 「뮤제 데 보자르Musee des Beaux Arts・Arts(미술관)」에도 나와 있듯 "끔찍한 순교"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어떤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창문을 열고, 별생각 없이 그 옆을 걸어간다." 나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가운데 부분이 혼란스러운 일상생활을 제대로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디테일로 가득하고, 모순적이고,
가끔은 지루하고 가끔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일상.
아무리 중차대한 순간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기저에 깔린 신비로움이 숭고하다 할지라도 복잡한 세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그림 하단이 있다. 그곳에서 그림의 톤은 다시 한번 변화한다. 거기에는 슬픔에 겨워 쓰러진 어머니를 돌보는 연민 가득한 사람들이 있다. 수동적인 구경꾼들과 달리 그들의 마음은 같은 방향, 즉 선행으로 향하고 있다.
그림의 이 마지막 부분은 따르고 싶은 모범이다. 내 앞에 펼쳐진 삶에서 나를 필요로하고, 내가 필요한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다른 이들도 나를 위해 그렇게 해줄 것이라는 게 나의 희망이다.
이제 형은 세상에 없다. 나는 그 상실을 느낀다. 형은 그림에서 성모 마리아를 돌보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린 채 몸을 굽히고 있는, 칭찬받아 마땅한 현실적인 사람들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지금도 형의 초상화, 티치아노가 그린 듯한 밝고, 솔직한 형의 얼굴이 선명하게 살아 있고, 그 모습에서 나는 위안을 찾는다. 이 그림이라면 확실히 내가 메트 바깥으로 품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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