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인 사람 나를 죽인 사람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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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류>를 읽고 푹 빠진 작가 히가시야마 아키라의 다른 작품 <내가 죽인 사람 나를 죽인 사람>을 읽었다. 그것도 무려 작품의 주요 배경인 타이베이 여행 때 읽었다. 삼총사가 브레이크댄스를 연마했던 시먼과 셋이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방문하곤 했던 룽산사 근처에 숙소를 잡아놨는데, 덕분에 소설의 내용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다. <류>와 비교하자니 아무래도 2% 부족했지만 현지에서 읽었기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작품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작가 스스로도 이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연쇄살인범을 미화하는 것으로 읽힐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요즘 너무나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이해해서도 안 되는 범죄 때문에 세상이 전보다 흉흉해졌구나 느끼는 와중이라 이와 같은 작품의 색채는 다소 거부감이 들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것이다' 하고 밀고 나가는 작가의 태도에 결국은 수긍하게 되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교훈을 준다기보단, 혹은 통쾌한 반전이나 인과가 딱 맞아떨어지는 스릴러도 아니지만, 삼총사의 우정과 그 우정이 뒤틀리게 되는 사건과 아이러니한 결말 등은 적잖은 여운을 안겨줬다. 다시 말하지만 <류>에 버금갈 정도는 아니나 두 작품을 다른 순서로 읽었다면 다른 인상을 받았을 수도 있다.


 정체성에 큰 혼란을 겪는 주인공이 일본과 중국으로 가서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던 <류>와 비슷한 듯 다른데, 이 작품에선 그 이상의 심각한 외상을 입은 주인공이 대만에서 미처 해소하지 못한 문제를 엉뚱하게 미국에서 풀어버리는 양상을 띄고 있다. 현실과 픽션을 막론하고 항상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범죄의 이면을 접할 때면 늘 범죄자들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번지수를 잘못 찾았도 한참 잘못 찾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특히 이 작품의 경우엔 특정 인물에게 과거의 어떤 사건의 인과나 책임을 따지기 까다로워 어떻게 하면 범인이 살인자로 전락할 수 없음을 방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에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아 더욱 답답하다. 작품을 다 읽은 지금도 이 작품이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임은 부정하기 어렵고 살인범의 딱한 과거를 살펴보고 연민을 유발하는 것에 성공한 작품인 건 인정하겠으나, 딱 거기까지인 작품이었다. 여운은 있지만 교훈은 없는, 요즘처럼 이해 못할 살인이 범람하는 세상에선 약간은 공허하게 다가올 마무리였다.


 작가의 작품이 국내에 <류>와 함께 딱 두 작품만 소개됐는데 앞으로도 더 소개되길 바란다. 소개되는 텀이 길어 조금 불안하지만 문장력과 분위기가 압도적인 작가인 터라 앞으로 소개될 작품도 기대된다. 대만 여행을 계기로 아주 좋은 작가를 알게 돼 기쁘기 그지없고 다음에 대만에 여행갈 때 이 작가의 책을 또 가져갈 생각이다. 역시 소설의 실제 배경 속에서 읽으니 더 몰입이 잘 되더라. 흔치 않은 분위기와 배경, 그리고 작품 세계를 가진 작가이기에 간만에 여행 중임에도 호텔이나 비행기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모든 실패와 모든 후회가 탄생한 빛나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열세 살로, 브레이크댄스와 도둑질의 연장선 위에는 살인도 있었다. - 1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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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추락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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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흔히 중국인은 무슬림과 더불어 가장 현지화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런데 한편으론 중국인은 그 수가 어마어마해 가장 일반화해선 안 된다고 보는 시선도 있다. 사회주의의 강력한 통제로도 20억에 근접한 중국인 모두가 한마음 한뜻일 리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차피 중국인들은 거기서 거기, 그놈이 그놈이라 단언하는 사람도 적잖다. 아니 대부분이다.

 <멋진 추락>을 집필한 작가 하진은 본래 미국에 유학 목적으로 입국했다가 자국의 천안먼 사태에 절망하고 그대로 타향살이를 하게 됐다고 한다. 작가의 다른 저서 <자유로운 삶>에선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겼다면 이 소설집에선 작가가 직간접적으로 접했을 다종다양한 중국인 이민자들의 애환이 그려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에서의 애환은 미국이 이민자들한테 행하는 부조리가 아닌 같은 중국인들끼리 벌어지는 경우뿐이란 것이다. 중국 본토에 있는 가족이, 때론 같은 고향 사람이, 미국으로 함께 건너온 조부모나 시어머니가 중국인 이민자들의 가장 큰 적으로 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각각의 수록작에선 놀라울 만큼 미국보다 중국을 향한 부정적인 시선이 가득하다.


 수록작 대부분의 갈등이 기성 세대의 유교적 사고나 사회주의 국가 출신다운 쓸데없고 허황된 자부심에 아래 세대가 신음하면서 비롯된다.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한국 독자들한테도 공감 섞인 탄식을 유발할 만큼 꼰대들이 많이 나오는데 어떤 작품에선 블랙 유머로, 어떤 작품에선 비극적으로 갈등이 해소돼 묘한 여운이 남는다. 작가의 담백하면서 깊이 있는 문장력 덕분인지 해피엔딩조차 해피엔딩으로 머물지 않거나 새드엔딩도 마냥 새드엔딩이 아닌 경우가 있다. 확실한 건 타국에서 생존이 걸린 문제 앞에서 같은 국적, 고향의 사람은 동지이거나 원수이거나 둘 중 하나인데, 대체로 후자인 경우가 많고 특히 가족은 그보다 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내일의 희망도 갖기 힘든 노동자부터 승려, 창녀, 학비를 벌어야 하는 대학원생이나 가방끈 긴 학자 등 다양한 처지의 등장인물들이 뉴욕 퀸즈에 있는 플러싱을 배경으로 각각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4년 전 미국에 여행 갔을 때 마지막 숙소가 플러싱 근처여서 이번에 다시 읽은 <멋진 추락>의 분위기가 보다 실감나게 다가왔다. 그 동네는 작품에서 묘사된 것 이상으로, 정말 미국이 아닌 아예 중국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건물부터 공기까지 중국인 천지인 거리였다. 이처럼 폐쇄된 공간이기에 엄연히 기회와 자유의 나라인 미국 안에 있음에도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까지고 중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란 인상을 지울 수 없었는데, 소설에서도 그때 받은 인상을 배신하지 않는 묘사가 일관적으로 나와 어딘지 뿌듯하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거두기가 힘들었다.


 나는 인구가 10억을 넘어가면 국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일 수도, 하나의 선입견으로 일반화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럼에도 중국인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선입견을 고수하는 사람이 많다. 어떤 중국인들은 그 선입견에 화를 내기보단 문제시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 선입견을 공고히 하고자 노력하기까지 한다. 어떤 중국인들은 외국에서 힘겹게 살아가지만 그래도 나는 중국인이다 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그들만의 망상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중국인은 자신의 출신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자신을 둘러싼 중국 본토와의 연결고리에서 벗어나고자 애쓰기도 할 것이다. <멋진 추락>은 많든 적든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지닌 주인공들이 등장하며 작가 역시 본인이 직접 보고 들었을 부끄러운 중국인들의 면모를 솔직히 그려냈다. 이거야말로 멋진 추락이 아닌가. 표제작 '멋진 추락'에서 추락은 그런 의미로 사용되지 않지만 돌이켜보면 그 작품의 결말이 가장 희망적이라 표제작으로 선정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공통적으로 주인공들이 무엇이 됐든 '중국적인 것'에서 벗어나 결과적으로 의도와 무관하게 중국의 위신을 추락시키는 이미지가 강렬하게 그려져 책의 제목이 퍽 어울리지 않나 싶다. 추락이 어울리는 제목이라니,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중국만큼 추락이 절실한 나라가 없잖은가... 자존심을 세우느라 추해질 것인가 자존심을 세우지 않음으로 인해 비로소 멋있어질 것인가. 작품의 모든 수록작이 그렇게 단순한 주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지만 한 번쯤은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책의 악당들에게,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숭배해마지않는 중국이란 나라를 향해.


 이 작품의 이야기가 비단 중국 이민자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터지만 이번만큼은 중국에 박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건 어째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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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크라티아 5
마세 모토로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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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8.8


 <헤드>와 <이키가미>로 독보적인 작풍을 선보인 마세 모토로 작가의 신작 <데모크라티아>는 작가의 여느 작품처럼 절판됐던 지라 어렵게 찾아 읽었다. 아무래도 작풍이나 그림체가 어둡고 작가가 묻지마 범죄나 방구석 폐인 등 인간의 추악하고 찌질한 민낯을 자주 그려서 대중성과는 동떨어진 편이긴 한데 그래도 신작을 찾아 읽으려는데 절판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씁쓸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전작 <이키가미>보다 화제성은 떨어질는지 몰라도 개인적으론 그 작품보다 진일보한 측면이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일단 분량과 속도가 그렇다. 다소 반복적이었던 <이키가미>에 비해 이 작품은 전개도 시원시원하고 결말까지 금방 도달한다. 물론, 화제성이 없어서 연재 종료를 '당한 것'일 테지만 그런 것치고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수습하지 못한 설정도 없다. 조금 뜬금없는 반전이 있긴 했지만 주제의식의 측면에선 필요한 반전이었다고 본다. 인간의 집단지성이 어떤 한계를 갖고 있고, 붕괴 직전인 집단지성이 어떻게 무너지지 않을지 작가 나름대로 고민한 흔적이 보여 생각 이상으로 결말이 산뜻하기까지 했다. 개인적으로 난 답이 없는 캐릭터가 일련의 사건을 통해 개심하여 결정적인 한 방을 보여주는 전개가 참 좋더라. 만약 악인을 악인인 채로, 선인을 선인인 채로 끝까지 규정한 채 진행했더라면 지금처럼 여운이 남지도 않았을 것이다.


 불특정 다수가 민주주의 방식으로 휴머노이드를 작동시켜 최대한 선한 일을 도모한다는 설정도 참신하고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마찰, 휴머노이드가 마주하는 사회의 문제들도 흥미롭지만 사건의 규모 하나하나가 스케일이 작고 일부 캐릭터가 너무 비호감인 작품이라 영상화가 이뤄진다거나 이 이상 회자되긴 힘들 것 같다. 작가가 <이키가미> 이상의 작품을 내놓지 않으면 작가의 모든 작품이 묻히게 생겼는데... 대중성과 거리가 먼 작품만 그리지만 반대로 그렇게 꾸준한 개성을 지닌 작품을 그리는 작가도 흔치 않아서 부디 머징낳아 작가의 신작을 또 접할 수 있길 바란다.


‘다수결‘로 선별된 인류의 집단지성이 ‘궁극의 인간‘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처음부터 허황된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본디 인간은 개개인의 존재 자체가 이미 기적이며 ‘궁극‘이니까. - 5권 3rd season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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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흩날리는 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4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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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기리노 나쓰오의 데뷔작 <얼굴에 흩날리는 비>를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탐정으로서 퍽 유능하지 않아도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는 무라노 미로가 첫 등장하는 작품이자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해 나름대로 이름을 떨친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작가의 풋풋함을 엿볼 수 있었으나 전매특허인 날카로운 칼날 같은 문장력이 아직 덜 벼려진 즈음이라 상대적으로 흡입력이 떨어졌다.

 작품의 반전도 마찬가지다. 사실 반전이라기엔 다소 뻔한 측면이 없잖았으나 어쨌든 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미로가 열심히 머릴 굴리고 발품을 팔았으니 반전이라 부르고 싶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읽고도 감흥이 덜한 건 참 아쉬운 일이다. 일이 크게 벌어진 것에 비해 실상은 여러 우연이 겹친 결과였고 진상에 접근하기 위해 지나치게 돌아가는 면이 있어 집중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미로의 친구 요코가 르포라이터로서 보인 행적이 어딘지 현실감이 떨어진 구석이 있던 탓인 것 같은데... 차라리 요코의 글을 원본으로 직접 읽을 수 있었거나, 아니면 가능한 한 많은 챕터를 할애해 요코의 시점에서 쓴 글이 병렬식으로 전개됐으면 내가 요코의 내면에 집중하고 공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통일된 독일의 혼란스런 상황이나 BDSM조차 귀엽게 보일 만한 엽기적인 취향(이라 쓰지만 병세로 판단하는 것이 타당함)을 가진 사람들을 작가가 묘사하는 방식도 그렇게 와 닿지 않았다. 다분히 흥미 위주의 무책임한 묘사는 아니었으나 엽기적인 결말을 위해 채택된 엽기적인 설정이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굳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고, 요코가 베를린에서 겪은 일은 흥미롭지만 분량이나 비중이 미묘해 궁금증이 생기다 말았다. 이 부분이라도 더 집중했더라면 작품 전체의 인상이 달라졌을 수도 있는데. 그럼 작품이 좀 더 무겁고 깊이 있게 다가올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은 남편과의 과거가 발목을 붙잡고 있는 미로가 감정적이고 미덥지 못한 인물인 것은 작품의 흥미를 깎아먹는 요소라고도, 혹은 시리즈의 고유한 매력이라고 볼 수 있는 요소라고 볼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그대로 묻힐 뻔한 사건을 재구성해 해결하기까지 했으니 그만하면 유능하지 않나 싶겠지만, 하라 료의 사와자키나 다른 하드보일드 작품의 탐정에 비하면 프로패셔널함과는 어딘지 거리가 멀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봐야 했다.


 이런 미덥지 못한 탐정 무라노 미로가 등장하는 작품은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물의 잠, 재의 꿈>, <로즈 가든>, <다크>까지 얼마 되지 않는데 일단 다 찾아 읽어볼 생각이다. 그녀가 이후 어떤 탐정으로 성장할는지 궁금한데 작품마다 평가가 들쑥날쑥해 불안하다. 뭐, 결국 직접 봐야 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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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
야마구치 마사야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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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이 소설은 어떤 사람에겐 독특한 설정을 잘 살린 이색 추리소설로 읽힐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에겐 죽음에 대한 철학이 진지하게 녹아든 무게감 있는 소설로도 읽힐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매력적인 도입부 제시와 분량 조절에 실패한 벽돌 소설로 다가올 것이고 완독에 성공하는 경우도 제법 드물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분량이 제법 되는 소설은 어지간히 흡입력이 있지 않은 이상 읽는 이의 컨디션에 작품 만족도가 크게 좌우되는 것 같다. 이 소설처럼 분량 못지않게 내용의 무게감이 강조된 작품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설령 완독하더라도 이 소설에 만족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의문도 든다.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0주년 결산에서 이 작품이 1위했으며 수많은 추리소설 팬들의 극찬의 이유를 확인하자는 게 아니라면 <살아 있는 시체의 죽음>은 완독을 하고 싶은 동기부여가 매력적으로 이뤄지는 작품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소설이 결말에 도달할 지점인 300페이지 중반 즈음에서야 본격적으로 사건다운 사건이 터지고 이후의 전개는 그간의 느릿한 전개와 달리 재빠르게 흘러가지만 오히려 그러한 속도감의 변화 때문에 당혹감을 느낄 독자도 있을 듯하다.


 그전까지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지탱하다시피 했던 죽음에 대한 철학도 작품 이해나 '갑자기 살아나는 시체들'이란 설정을 해석할 중요한 장치로 기능하진 않아 작품 후반부의 활극이나 끝없이 엎어지고 난무하는 추리들이 갈수록 어찌 돼도 상관없는 내용으로 느껴지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다. 인물들의 사망 여부, 언제 사망했는지 여부가 굉장히 중요하단 점, 그리고 범인의 동기가 독특하고 설득력 있지만, 그것만으로 만족도나 고양감을 느낄 독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

 과거엔 시대를 앞서간 독특함으로 크게 주목을 받은 작품이고 나 역시 10년 전에 읽었을 땐 재밌게 읽었지만, 그 이후에 깊이나 분량면에서 이 작품보다 압도적인 작품을 적잖이 접한 지라 요번에 다시 읽으니 과거에 좋았던 인상마저 빛이 바랬다. 죽음에 대한 흥미로운 사유마저 지금은 아무래도 좋을 형이상학적인 토론으로만 읽혀서... 작품의 6할이 사유라 볼 수 있는데 일주일이 지난 다음엔 특별히 기억나는 내용이 없다.


 내가 컨디션이 별로여서 유독 이렇게 삐딱한 감상을 내놓는 것인지 모르지만, 한편으론 독자의 컨디션에 좌우되는 작품성이라는 것도 요즘 들어선 영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이 취향에 맞았거나 대단히 뛰어난 작품이라 평가한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말밖에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럼에도 이제는 조금 고리타분한 작품이 돼버렸지 않나 싶다.

 작가가 본인이 쓰고 싶은 모든 걸 다 쏟아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경외심이 들지만 딱 그 정도다. 내가 이 소설에 대해 10년 전엔 '죽음이다' 라고 감탄한 어조의 포스팅을 올렸지만 지금에 와선 다른 의미로 '죽음이다' 라고 외쳐야 할 것 같다. 정신줄을 붙잡고, 마치 좀비처럼 퀭한 표정으로 완독해낸 나 자신이 뿌듯하다기보단 독하다고 느끼는 건 어째서일까? 좀비처럼 끝날 듯 끝나지 않은 지겨움 때문이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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