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망치 - 2005년 일본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 블랙 캣(Black Cat) 10
기시 유스케 지음, 육은숙 옮김 / 영림카디널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8.8 






 기시 유스케의 <유리 망치>는 흔히 '역대급 밀실 살인'이란 키워드로 종종 회자되곤 한다. 이 시리즈에서 처음 등장한 변호사 아오토 준코와 방범 전문가이자 도둑인 에노모토 케이는 이후에 '방범 탐정 에노모토' 시리즈에 등장하며 숱한 밀실 살인을 해결한다. 작품의 주인공이 도둑인 터라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도덕관이나 권선징악적인 결말과는 다른 결의 결말을 선보이는 게 어떻게 보면 밀실 트릭보다 더 인상적인 시리즈인데, <유리 망치>도 범인이 구사한 트릭보다 그 트릭을 쫓아갈 때 두 주인공이 내놓은 가설,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케미, 그리고 범인 나름대로의 절박한 동기와 그 동기를 은유한 '유리망치'라는 단어가 더 인상적이었다. 

 아무래도 트릭이 워낙에 획기적인 지라 10년 전에 읽었음에도 생생히 기억나 두 번째로 읽는 요번엔 전과 같은 신선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좋은 추리'소설'은 고작 트릭의 놀라움만으로 작품의 완성도가 결정되지 않는다. 아쉽게도 트릭을 파악해가는 과정이 아주 흡입력이 있다고 할 순 없었지만 캐릭터의 매력과 기시 유스케의 취미와 집요한 취재가 녹아든 설정들, 그리고 첨예하게 그려낸 설전 덕분에 그리 지루하진 않았다. 밀실 트릭을 주로 다루는 본격 추리소설은 아무리 작가가 실감나게 설명해줘도 그림이 없으면 와 닿지 않는데, 이 작품이라고 그런 단점에 완벽히 자유롭진 않았으나 오히려 이야기의 핵심은 1부의 트릭 간파가 아닌 2부의 범인 이야기란 것이 이 작품의 독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인 터라 이 단점도 그리 대수롭지 않은 단점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의 제목 '유리망치'가 단순히 범인의 트릭을 직접적으로 가리킨 단어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나는 트릭의 내용은 기억이 났어도 이 트릭으로 하여금 작가가 풀어낸 주제의식은 까먹고 있었다.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주제의식이었거늘! 유리가 주는 반투명함과 불완전함, 보이지만 반대쪽으로 넘어갈 수 없고 애매하게 단단한 탓에 깨졌을 때 더욱 위험해지는 유리의 특성을 범인의 이야기에 결부시키는 솜씨는 정말 감탄했다. 1부 내내 트릭만 간파하다가 2부부터 상당히 공을 들인 문장의 향연이 펼쳐져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실 범인의 사정이 나름대로 절박하긴 해도 완전히 동의하긴 힘들었고 철저한 계획 범죄임에도 변호사 아오토 준코가 너무 온정적으로 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시 유스케의 걸작 <푸른 불꽃>에도 정말 절박한 사정의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그 작품과 비교하자면 <유리 망치>의 범인은 그 사연이 짧고 임팩트 있게 다뤄졌다는 걸 제외하면 <푸른 불꽃>의 절박함이나 치밀함엔 한참 못 미쳤다. 까놓고 말해, 자기합리화 좀 작작 하라고 말을 하고 싶었다. 


 나 같은 독자들의 불만을 예상했는지 작품 최후반부엔 꽤나 첨예한 설전이 다뤄진다. 설전 끝엔 결국 언젠가 출소할 범인이 교화됐길 마음 속 깊이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개인이 범죄자로 전락하기까지 국가나 사회의 책임이 없다고도 할 수 없고 누구에게나 두 번째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는 논지에서 말이다. 내 입으로 말하니 참으로 빈약하게 들리는 근거가 아닐 수 없는데, 아무래도 내가 범인의 사정에 진정으로 공감하지 못한 탓이 아닐까 싶다. 뭐, 범인도 세상 사람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지만, 꼭 누군가에게 용서받아야 하는가 하고 자기합리화를 했으니 나한테 이런 시선을 받는 것도 자업자득이라 생각되지만 말이다. 

 다만 확실히 공감하는 것은 꼭 흉기가 아니더라도 유리로 이뤄진 뭔가는 그 자체로 존재할 때보다 깨졌을 때 배로 위험해진다는 사실이다. 유리가 흉기 모양으로 됐을 때 위험하다고 깨부수기보다 시간이 걸려도 녹여서 안전한 형태로 만드는 것이 안전하고 합리적인 해결법일 것이다. 그 방법이 무척 까다롭고 전문성을 요구한다는 것이 문제지만... 그러니 '기도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닐 터다. 가히 기적에 가까운 난이도와 발상에서 비롯된 트릭을 실현한 범인이니 좋은 방향의 기적 역시 잘 실현하길 바랄 뿐이다. 아, 그러려면 준코의 말마따나 주변 환경부터 잘 바꿔놔야겠구나. 이제야 비로소 그녀의 주장이 이해되는 듯하다. 

어딘가에서 돌파구를 찾아내야 한다.

그것이 결론이었다. 벽 이쪽을 골백 번도 더 기어다녀 봤자 아무데도 다다를 수 없다. 그렇다면 벽을 부수고 바람구멍을 내든가, 극소수의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문을 찾아내어, 여기서 저편 세계로 탈출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자기 인생은 영원히 공중에 매달린 채 있게 된다. - 287p



젊은이란 어느 시대에도 어쩔 수 없는 모순 덩어리이지요.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으리만큼 폭발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는데도 몹시 상처받기 쉬워, 어른이라면 견딜 수 있을 어렵잖은 일로 바스러져 버리기도 하죠. ......마치 유리로 만든 흉기처럼.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나 문제는 유리로 된 망치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겁니다. - 460p



유리로 만든 망치가 진짜로 위험한 흉기가 되는 것은 부서진 후입니다. - 461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일곱 살의 털 사계절 1318 문고 50
김해원 지음 / 사계절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 






 이 책의 뒤표지엔 사계절문학상 심사위원의 말이 적혀 있는데 이 소설을 이상한 작품이라 말한다. 별로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작품인데 이상하게도 재밌기 때문이라고 한다. 확실히 적어도 내 세대까지 두발 검사 이야기는 하등 특별할 것이 없는 이야기였다. 지금 학생들은 잘 모르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두발 검사는 이제 군대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지 학교에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나는 두발 규정이 아주 강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통학했다. 나는 반항적인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머리 기르는 것에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귀찮아했던 편이라 두발 규정에 꽤 순응하며 지냈다. 대다수의 학생들도 나처럼 머리 기르는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 어른들이 워낙에 머리 기르는 학생을 안 좋게 보기도 하고 그 문제 하나로 목숨을 걸 만큼 대단한 사안도 아니라 생각했는지 공부에 집중하며 얌전히들 학교에 다녔다. 불만이 없는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 작품의 주인공 일호처럼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학생은 없었다. 


 일호는 참 대단하고 공감 가고 독특한 주인공이다. 이발사인 할아버지를 둔 덕에 새로 입학하는 고등학교의 두발 규정을 가뿐히 통과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교사들로부터 새로이 단정한 머리 모델로 선정되고 모범생으로 대우받기까지 한다. 정작 일호는 이 모든 호들갑이 부끄러울 뿐이고 또래 친구들의 비웃는 듯한 시선이 미치도록 괴롭다. 평범한 주인공이었다면 학교 생활이 눈치 보여서 괴로웠다고 이대로 끝이 났겠지만 일호는 자신이 순응적인 모범생이 아님을 전교생에게 보여주는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시작은 일호가 아닌 체육선생 매독(mad dog)의 과도한 체벌이었다. 머리 길이만 봐도 싹수가 보인다는 전근대적 가치관으로 학생을 패고 담뱃불로 머릴 지지려 한 미친 놈인데 주인공 일호는 뭔가에 홀린 듯 매독의 팔에 달려든다. 일호가 유달리 용기가 있는 것도 있지만, 이발사 할아버지의 가치관인 '모든 머리카락은 함부로 떨어져선 안 된다'는 철학이 부정당하는 광경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 크다. 

 결국 일호는 일련의 사고로 인해 문제아로 낙인 찍히고 홀로 외로운 싸움을 펼친다. 하지만 일호는 생각지도 못한 아군을 만나면서 학교는 종국엔 전근대적이기 짝이 없는 두발 규정을 철폐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은 직접 읽어보시길. 모든 캐릭터가 개성적이고 매력적이며 이야기는 현실적이고 날카로운 구석이 있어 통쾌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머리카락에 대한 이 작품의 깊은 사유다. 설마 학교 두발 규정에 대해 얘기하면서 조선 말기 신체발부수지부모부터 언급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데, 우리 근대사에서 이발의 의미가 상당히 중요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시각으론 머리카락은 그저 머리카락일 뿐이지만 예전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먼 과거엔 머리카락이 부모가 물려주셔서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라면 비교적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머리카락을 기른다는 것은 반체제적인 행위나 다름없었다. 학교와 군대의 힘이 막강했던 시대엔 그 두 곳이 밀어버리려는 머리카락을 애써 자르지 않고 기르는 것은 충분히 불순하게 여길 만했다. 대체 언제 적 얘기인가 싶지만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시대에 머리카락은 머리카락일 뿐이다. 기르는 게 더 어울리는 사람은 기르는 거고, 길게 기르더라도 겨우 머리카락일 뿐이니 학업에 지장이 생길 리 만무하고, 애당초 짧게 자르는 것만으로 갑자기 잡생각이 사라지고 성적이 향상될 리도 없다. 군대에서 삭발을 시키는 이유는 반체제적 이유 이전에 그래도 조금은 합리적인 이유가 있지만 학교에서 두발 규정을 한다는 것은 이젠 정말 옛날 얘기다. 

 그렇기에 심사위원의 말은 이제는 틀린 말이 됐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은 이상하지 않은 작품이다. 특별함으로 가득한 옛날 옛적 이야길 하고 있으니 재밌게 읽힐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나라 학교가 두발 규정이 사라졌다곤 해도 학생이 탈색을 하거나 레게 머릴 하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긴 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모욕하거나 때리진 않을 것이다. 교문 앞에 붙잡아서 바리깡으로 밀지도 않을 것이고 엎드려뻗쳐 시키지도 않을 것이고 하물며 담뱃불로 머릴 지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지금은 교권이 추락하면 추락했지 학생 인권이 더는 만만해지지 않은 시대다. 오히려 촉법 소년이 더 골치이거늘... 아, 이 얘긴 다른 작품 포스팅 때 해야겠다. 


 하지만 이 소설은 비록 옛날 이야기임에도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의 울림은 여전하다. 더는 머리카락을 미는 시대는 아니지만 머리카락으로 상징되는 자유는 10년 전과 비해 월등히 보장받는 시대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그 자유란 국가 차원에서 알아서 보장해주는 자유일 수 있지만 내 스스로 쟁취하려 노력하는 자유라고도 할 수 있다. 아무리 불이익을 받더라도 외롭고 서러워도 쟁취해내야만 하는 가치를 나는 학창시절에 찾지 못했다. 찾으려면 머리카락이나 다른 부당한 일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겠지만 용기가 없었는지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지금은 어떤 일에 부당함을 느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어쩌면 그렇기에 내가 지금 학교를 졸업한 지 꽤 됐음에도 자유가 충분치 않다고 느끼는지 모르겠다. 머리카락은 고작 머리카락일 뿐이지만 그건 지금 이야기고 당시엔 그렇게 넘기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좀 더 예민하게 작금의 부당함을 감지했어야 했다. 머리카락은 머리카락일 뿐이라고 10년도 훨씬 전에 외쳤더라면 지금의 내 인생은 아주 많이 달라졌을 텐데... 그 후회로부터 일찌감치 자유롭게 된 주인공 일호의 학창 시절이 정말 눈물나게 부러웠다. 이 작품을 처음 읽을 때나 다시 읽을 때나 이 감상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사람에게 빛깔이 있다...... 아마 그 빛깔은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건지도 모르지. - 215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이, 차별, 처벌 - 혐오와 불평등에 맞서는 법
이민규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5 






 저자가 차별을 조심스럽게 접근한 것처럼 나 역시 이 책에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싶다. 어느 순간부터 차별에 대한 책은 존재 자체만으로 부담스럽게 다가오곤 한다. 그렇기에 작가의 후기가 무척 진솔하게 다가온 듯하다. 저자 스스로 밝히길 자신은 딱히 드라마틱하게 차별을 당한 적도 없고, 오히려 차별을 당하기 힘든 외적 조건을 누려왔음에도 차별의 부당함에 대해 얘기할 자격이나 있는지 토로하는데 그렇기에 본문의 글을 고민하고 고민하며 쓴 흔적이 엿보이는 후기였다. 개인적으로 서문 못지않게 후기 역시 내가 지금껏 읽은 차별에 관한 책 중 가장 인상 깊게 읽혔다. 

 더군다나 본문도 상당 부분 동의하며 읽었다. 책의 분량이 짧아 혹여 수박 겉 핥기에 그친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었는데, 반대로 말하면 길게 얘기한다고 해도 무조건 좋은 글이냐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닌 지라 분량과 깊이는 다른 개념이라 여기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가령 이 작품은 외모 차별을 자주 언급하고 뉴욕 차별금지법 소송 전문 변호사라는 저자의 약력에 걸맞게 미국의 사례를 예시로 많이 든다. 이 책이 종종 받는 지적 중 하나가 들고 있는 예시의 범위가 비교적 좁다는 걸 들 수 있고 나 역시도 어느 정도 합당한 지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외모 차별이 모든 차별을 대표할 만한 차별이 아니라고 쳐도 작가가 외모 차별을 예시로 들면서 차별의 핵심을 제법 괜찮게 짚어내고 있어 한정된 예시가 과연 깊이가 부족하다고 꼬집을 만한 단점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기서 외모는 단순히 아름다움과 추함의 개념만이 아닌 피부색이나 비만의 유무 등을 포함하고 있으며 저자는 주로 외모로 인해 같은 선에서 출발할 기회의 평등조차 주어지지 않는 불평등을 지적한다. 그런데 흥미로웠던 부분은 고용주가 외무를 차별하게 되는 입장도 살펴본 것인데, 저자의 논지를 모두 긍정하긴 힘들어도 우리가 차별을 이야기하느라 간과하는 현실적 요인을 다시 짚어볼 수 있던 것만으로 꽤 의미 있는 접근이지 않은가 싶었다. 예를 들어 카페 점주라면 아무래도 용모 단정한 직원을 뽑길 원하고 그러한 카페 점주의 영업 방침에까지 차별 금지법을 들이댄다면 그것 역시 다른 의미에서 자유를 침해하는 것과 같다는 논지는 솔직히 공감이 많이 갔다. 

 한편으로 샘 오취리를 비롯해 한국인으로서 바로 와 닿기 힘든 차별 이슈에 대해 언급하는데, 차별이라는 개념이 지적하는 입장의 논리만 듣고 바로 법에까지 적용하기엔 인식의 문제나 입장의 문제, 그리고 차별적인 언행을 했다고 지적당한 당사자의 의도성을 고려 않고 엄벌을 놓기에도 까다로운 등 차별적 언행에 대한 처벌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쉽지 않음을 저자는 현실적인 차원에 입각해 강조한다. 읽고 있노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무척 다양한 가치관이 충돌하고 이 모든 가치관을 수용하기란 꿈만 같은 일이며 어쩌면 그 꿈은 꿈속에서도 이루기 쉽지 않다는 비관에 이르게 된다. 그만큼 쉽지 않은 세상이다. 


 난 저자의 의도가 이렇게 읽혔다. 인정해야 할 것은 인정하자. 차이와 차별은 다르고 모두 제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기회의 평등이 아닌 결과의 평등을 제공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불평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무엇보다 차별은 나쁘고 차별을 당했다는 당사자의 얘기에 경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얘기를 일일이 다 들어주면 자가당착에 빠지거나 산으로 갈 수 있다. 즉 도의적으로 잘못됐다고 여기는 것과 법적인 처벌 사이엔 간극이 크며 차별적 언행이 곧 법적인 처벌로 이어지도록 하려면 차분한 태도로 심사숙고하며 다각도로 접근해야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법조인이기에 할 수 있는 냉정한 태도가 아니었나 싶다. 

 책의 제목에 무려 처벌이 들어가서 차별하는 자는 무조건 처벌하자는 논지의 책인 줄 알았는데, 도리어 그런 논지와는 거리가 먼 책이라 의외기도 했고 생각 이상으로 흥미로운 독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차이와 차별의 근본적인 차이를 가늠해볼 수 있던 것도 흥미로웠고 차별을 처벌하는 미국의 사례를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던 것도 적잖이 유익했다. 가끔 차별에 대해 얘기하다보면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가는 솔직하되 감정적으로 굴지 않아 끝까지 차분하게 읽혔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저자의 이러한 태도가 진정 멋있게 다가왔다. 

이처럼 인간은 타인에 대해 충분히 알아보고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생성되어 있는 사회적 고정 관념과 연결해, 타인을 판단하는 ‘예측 출발‘을 범한다. 물론 육상 경기와는 달리 아무도 이를 부정 출발로 간주하지 않는다. - 50p



기회와 결과의 평등을 실현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행복과 만족의 측면에서는 영원히 평등할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 점에서 만큼은 우리 모두 평등하다. - 92p



정리하자면, 부당한 차별을 구별할 때는 그 발언이나 행동에 의도가 있는지, 대상과 주체가 누구인지, 그리고 적절한 상황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 132~133p



문제는 차별금지법의 대상의 범위가 늘 일정하게 유지되는가가 아니다. 핵심은 그 판단 기준이 늘 일괄적으로 적용되는가이다. - 145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간인 통제구역 1
OSIK 지음 / 고트(goat)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 






 이 작품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어쨌든 군대를 배경으로 한 스릴러이기에 어쩔 수 없이 모든 독자를 아우르기가 힘드리란 점이다. 내가 아무리 군대 고증이 출중하고 개인적으로 <D.P.>보다 오싹하고 심금을 울렸으며 이게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정말 놀라울 정도의 완성도를 지닌 작품이라 해도 어필이 잘 되지 않을 듯하다. 

 <민간인 통제구역>은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일컬어지는 GP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작품으로 등장하는 군인들은 모두 GP병들이다. GP병이라... 잘은 몰라도 정예 중에 정예들이며 엄청 빡센 군생활을 보내리라 짐작만 할 뿐이지 정확히 어떤 군생활을 보내는지 모른다. 나는 비교적 후방에 배치된 부대에서 자대생활을 했는데 누가 후방 아니랄까봐 참으로 긴장감도 없이 느슨하기 짝이 없는 부대였으나, 선임들은 그러한 무료함을 달래려고 온갖 부조리와 똥군기로 후임을 괴롭히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랬던 지라 신병이었던 나는 '정작 최전방은 근무가 빡세서 후임이고 부조리고 신경쓸 겨를 없이 나라만 지킬 텐데' 하고 푸념을 해댔었는데, 이 작품 <민간인 통제구역>을 읽다보면 그런 푸념도 참 순진한 생각이지 않았나 싶다. 정예고 최전방이고 상관없이 어차피 군대고 사람들 모이는 곳이라면 부조리와 폭력이 만연하고 그 안에서도 폐급과 쓰레기가 넘쳐나는 법. 작품 초반부터 초대형 사고를 기가 막힌 방식으로 은폐하는 부대의 꼬라지, 특히 간부들의 꼬라지를 보면서 정말 군대는 어느 분과나 다를 바가 없다는 확신이 생겼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 작품의 주요 배경인 GP는 여느 부대보다 사회와 격리되고 북한이 코앞이라 그것만으로도 긴장감이 넘친다는 점, 그리고 내부에도 적이 있음을 더욱 강조하는 효과도 낳는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내가 접한 군대 창작물 중 개인적으로 가장 응원하게 된 주인공 조충렬 일병이 겪는 수난을 그린 압도적인 흡입력 있던 스토리, 흑백이고 거의 남자 캐릭터만 등장함에도 명확하게 캐릭터성과 심리를 파악할 수 있던 그림체, 그리고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고 끝에는 일종의 열린 결말로 연출돼 여운 또한 남았다. 무엇보다 최초에 조충렬 일병을 시작으로 수많은 캐릭터들이 저지른 크고 작은 잘못이 맞물려 이 사달이 비롯된 것이란 작품 비극의 자초지종은 내 마음을 가슴 아프게 어지럽혀 놓는데 이 점도 어떻게 보면 남달리 매력적인 부분이었다. 만약 톱니바퀴 하나만 잘못 돌아갔더라면 최악의 사태만은 면했을 텐데... 군대에선 작은 일이라도 가벼이 넘겨선 안 된다는 사실을 충고하니까 말이다. 

 <민간인 통제구역>은 본래 네이버 웹툰으로 먼저 접한 작품이고 완결까지 접한 다음 단행본도 바로 구입했다. 두 권에 600페이지씩, 총 5만 원이라는 가볍지 않은 가격대였으나 후회되지 않는다. 비록 단행본만의 외전이나 특전은 없지만 본편이 워낙에 훌륭해 불만거리로 삼을 수 없는 부분이고, 흑백이긴 하나 종이의 질과 펼쳐서 읽을 때의 느낌이 아주 부드럽고 훌륭해 높은 가격이 전혀 아깝지 않다. 그리고 진짜 여담이지만 마침 책의 출간일이 내 생일과 가까워 '나에게 주는 선물'이랍시고 의미 부여할 수 있었기에 참으로 애착이 가는 책이다. 뭐, '선물'이라기엔 너무 무겁고 슬픈 작품이지만, 이토록 완성도 있는 비극이라면 기꺼이 환영이다. 여성 독자에겐 얼마나 와 닿을지 감이 안 잡히지만, 나는 자랑스럽게 어지간하면 실패하기 힘든 작품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데뷔작이 이 정도라니... 작가의 다음 작품이 무척 기다려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른 살에 스페인
최지수 지음 / 참좋은날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3 






 내가 마침 서른 살이기도 하고, 올해 3월에 진지하게 스페인 여행을 생각했었기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던 책이다. 일러스트레이터인 저자의 온갖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화풍이 완벽하게 녹아든 20일간의 스페인 여행기였는데, 비록 그림에 비해 인문학적 깊이는 떨어진 건 아쉬웠으나 오히려 그런 부족함이 개성으로 작용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꼭 남들 다 가는 여행지, 역사적 의미가 큰 관광지가 아니라, 꼭 극적인 전개가 아니더라도 크게 멋부리지 않은 - 멋부린 것은 오직 그림뿐 - 일상적인 여행기였던 터라 참 편하게 읽혔다. 내가 과연 다음에 해외여행을 간다면 이렇게 여유롭게 여행을 즐길 수 있을까? 어느 나라가 됐든 해외의 공기가 적잖이 갈증났던 만큼 뽕을 뽑으려고 마구 돌아다니려고 할 것 같다. 처음 해외여행에 재미를 붙였던 20대 초반과는 달리 체력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 

 책을 다 읽은 직후엔 특별히 '서른'이란 나이가 주는 느낌을 잘 살리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일찍이 서른을 경험한 작가가 그 나이대의 여행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20대 초반엔 '다음은 없다'는 생각에 몸을 혹사시켜서라도 돌아다녔지만 서른에 가까워질수록 조금은 여유롭게 일정을 짜고 언젠가 다시 오겠지 란 생각에 오히려 지금 놓친 것을 다음 여행을 위한 일종의 계기로 여기곤 했다. 아까 말했듯 해외여행을 가지 못한 지 3년째라서 다음 해외여행 때 이런 태도가 그대로 유지될는지 미지수지만... 전보다 여유롭고 서두르지 않는 여행법을 고수하게 될 듯하다. 어쩌면 다시는 그곳에 가지 못할 지라도 말이다. 


 이 책을 읽은 어떤 독자는 나처럼 텍스트와 깊이의 부족함에 아쉬움을 표했지만, 한편으론 스페인이란 나라를 표현하는 일에 있어서 그림의 힘을, 시각 매체를 활용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일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스페인에 가고 싶은 사람보다 스페인에 가본 적 있는 사람에게 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책인 듯하다. 그림으로 설명하는 게 백 번 효과적인 나라라니, 그전까지 미술관이나 요리에 더 관심이 갔었는데, 이젠 아예 스페인이란 나라의 풍경 그 자체에 관심이 가기 시작한다. 참 안타까운 것은, 풍경이란 내 경험에 의하면 TV나 인터넷을 거쳐서 간접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성질의 요소가 아니란 것이다. 현장감. 그 현장에 직접 있어야 비로소 체감할 수 있는 것이기에 언젠가 꼭 스페인에 가서 직접 풍경을 봐야겠다. 그날이 왠지 이젠 머지않아 보이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으련다. 

흑인 아이의 얼굴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해 만든 테이블이 있다. 정성껏 만들었다는 점이 그 테이블을 더 낡아 보이게 했다. 창작물은 시간의 흐름을 붙잡아 놓는다. 그 점이 무섭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다시 돌아본 내 작업도 어딘가 부끄러운 꼴을 할 것이다. 늘 염두에 두고 있지만, 어렵다. - 29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