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망치 - 2005년 일본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 블랙 캣(Black Cat) 10
기시 유스케 지음, 육은숙 옮김 / 영림카디널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8.8 






 기시 유스케의 <유리 망치>는 흔히 '역대급 밀실 살인'이란 키워드로 종종 회자되곤 한다. 이 시리즈에서 처음 등장한 변호사 아오토 준코와 방범 전문가이자 도둑인 에노모토 케이는 이후에 '방범 탐정 에노모토' 시리즈에 등장하며 숱한 밀실 살인을 해결한다. 작품의 주인공이 도둑인 터라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도덕관이나 권선징악적인 결말과는 다른 결의 결말을 선보이는 게 어떻게 보면 밀실 트릭보다 더 인상적인 시리즈인데, <유리 망치>도 범인이 구사한 트릭보다 그 트릭을 쫓아갈 때 두 주인공이 내놓은 가설,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케미, 그리고 범인 나름대로의 절박한 동기와 그 동기를 은유한 '유리망치'라는 단어가 더 인상적이었다. 

 아무래도 트릭이 워낙에 획기적인 지라 10년 전에 읽었음에도 생생히 기억나 두 번째로 읽는 요번엔 전과 같은 신선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좋은 추리'소설'은 고작 트릭의 놀라움만으로 작품의 완성도가 결정되지 않는다. 아쉽게도 트릭을 파악해가는 과정이 아주 흡입력이 있다고 할 순 없었지만 캐릭터의 매력과 기시 유스케의 취미와 집요한 취재가 녹아든 설정들, 그리고 첨예하게 그려낸 설전 덕분에 그리 지루하진 않았다. 밀실 트릭을 주로 다루는 본격 추리소설은 아무리 작가가 실감나게 설명해줘도 그림이 없으면 와 닿지 않는데, 이 작품이라고 그런 단점에 완벽히 자유롭진 않았으나 오히려 이야기의 핵심은 1부의 트릭 간파가 아닌 2부의 범인 이야기란 것이 이 작품의 독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인 터라 이 단점도 그리 대수롭지 않은 단점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의 제목 '유리망치'가 단순히 범인의 트릭을 직접적으로 가리킨 단어라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나는 트릭의 내용은 기억이 났어도 이 트릭으로 하여금 작가가 풀어낸 주제의식은 까먹고 있었다.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주제의식이었거늘! 유리가 주는 반투명함과 불완전함, 보이지만 반대쪽으로 넘어갈 수 없고 애매하게 단단한 탓에 깨졌을 때 더욱 위험해지는 유리의 특성을 범인의 이야기에 결부시키는 솜씨는 정말 감탄했다. 1부 내내 트릭만 간파하다가 2부부터 상당히 공을 들인 문장의 향연이 펼쳐져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실 범인의 사정이 나름대로 절박하긴 해도 완전히 동의하긴 힘들었고 철저한 계획 범죄임에도 변호사 아오토 준코가 너무 온정적으로 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시 유스케의 걸작 <푸른 불꽃>에도 정말 절박한 사정의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그 작품과 비교하자면 <유리 망치>의 범인은 그 사연이 짧고 임팩트 있게 다뤄졌다는 걸 제외하면 <푸른 불꽃>의 절박함이나 치밀함엔 한참 못 미쳤다. 까놓고 말해, 자기합리화 좀 작작 하라고 말을 하고 싶었다. 


 나 같은 독자들의 불만을 예상했는지 작품 최후반부엔 꽤나 첨예한 설전이 다뤄진다. 설전 끝엔 결국 언젠가 출소할 범인이 교화됐길 마음 속 깊이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개인이 범죄자로 전락하기까지 국가나 사회의 책임이 없다고도 할 수 없고 누구에게나 두 번째 기회는 주어져야 한다는 논지에서 말이다. 내 입으로 말하니 참으로 빈약하게 들리는 근거가 아닐 수 없는데, 아무래도 내가 범인의 사정에 진정으로 공감하지 못한 탓이 아닐까 싶다. 뭐, 범인도 세상 사람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지만, 꼭 누군가에게 용서받아야 하는가 하고 자기합리화를 했으니 나한테 이런 시선을 받는 것도 자업자득이라 생각되지만 말이다. 

 다만 확실히 공감하는 것은 꼭 흉기가 아니더라도 유리로 이뤄진 뭔가는 그 자체로 존재할 때보다 깨졌을 때 배로 위험해진다는 사실이다. 유리가 흉기 모양으로 됐을 때 위험하다고 깨부수기보다 시간이 걸려도 녹여서 안전한 형태로 만드는 것이 안전하고 합리적인 해결법일 것이다. 그 방법이 무척 까다롭고 전문성을 요구한다는 것이 문제지만... 그러니 '기도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닐 터다. 가히 기적에 가까운 난이도와 발상에서 비롯된 트릭을 실현한 범인이니 좋은 방향의 기적 역시 잘 실현하길 바랄 뿐이다. 아, 그러려면 준코의 말마따나 주변 환경부터 잘 바꿔놔야겠구나. 이제야 비로소 그녀의 주장이 이해되는 듯하다. 

어딘가에서 돌파구를 찾아내야 한다.

그것이 결론이었다. 벽 이쪽을 골백 번도 더 기어다녀 봤자 아무데도 다다를 수 없다. 그렇다면 벽을 부수고 바람구멍을 내든가, 극소수의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문을 찾아내어, 여기서 저편 세계로 탈출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자기 인생은 영원히 공중에 매달린 채 있게 된다. - 287p



젊은이란 어느 시대에도 어쩔 수 없는 모순 덩어리이지요.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으리만큼 폭발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는데도 몹시 상처받기 쉬워, 어른이라면 견딜 수 있을 어렵잖은 일로 바스러져 버리기도 하죠. ......마치 유리로 만든 흉기처럼.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나 문제는 유리로 된 망치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겁니다. - 460p



유리로 만든 망치가 진짜로 위험한 흉기가 되는 것은 부서진 후입니다. - 4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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