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살의 털 사계절 1318 문고 50
김해원 지음 / 사계절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 






 이 책의 뒤표지엔 사계절문학상 심사위원의 말이 적혀 있는데 이 소설을 이상한 작품이라 말한다. 별로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작품인데 이상하게도 재밌기 때문이라고 한다. 확실히 적어도 내 세대까지 두발 검사 이야기는 하등 특별할 것이 없는 이야기였다. 지금 학생들은 잘 모르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두발 검사는 이제 군대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지 학교에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나는 두발 규정이 아주 강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통학했다. 나는 반항적인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머리 기르는 것에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귀찮아했던 편이라 두발 규정에 꽤 순응하며 지냈다. 대다수의 학생들도 나처럼 머리 기르는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변 어른들이 워낙에 머리 기르는 학생을 안 좋게 보기도 하고 그 문제 하나로 목숨을 걸 만큼 대단한 사안도 아니라 생각했는지 공부에 집중하며 얌전히들 학교에 다녔다. 불만이 없는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 작품의 주인공 일호처럼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학생은 없었다. 


 일호는 참 대단하고 공감 가고 독특한 주인공이다. 이발사인 할아버지를 둔 덕에 새로 입학하는 고등학교의 두발 규정을 가뿐히 통과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교사들로부터 새로이 단정한 머리 모델로 선정되고 모범생으로 대우받기까지 한다. 정작 일호는 이 모든 호들갑이 부끄러울 뿐이고 또래 친구들의 비웃는 듯한 시선이 미치도록 괴롭다. 평범한 주인공이었다면 학교 생활이 눈치 보여서 괴로웠다고 이대로 끝이 났겠지만 일호는 자신이 순응적인 모범생이 아님을 전교생에게 보여주는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시작은 일호가 아닌 체육선생 매독(mad dog)의 과도한 체벌이었다. 머리 길이만 봐도 싹수가 보인다는 전근대적 가치관으로 학생을 패고 담뱃불로 머릴 지지려 한 미친 놈인데 주인공 일호는 뭔가에 홀린 듯 매독의 팔에 달려든다. 일호가 유달리 용기가 있는 것도 있지만, 이발사 할아버지의 가치관인 '모든 머리카락은 함부로 떨어져선 안 된다'는 철학이 부정당하는 광경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 크다. 

 결국 일호는 일련의 사고로 인해 문제아로 낙인 찍히고 홀로 외로운 싸움을 펼친다. 하지만 일호는 생각지도 못한 아군을 만나면서 학교는 종국엔 전근대적이기 짝이 없는 두발 규정을 철폐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은 직접 읽어보시길. 모든 캐릭터가 개성적이고 매력적이며 이야기는 현실적이고 날카로운 구석이 있어 통쾌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머리카락에 대한 이 작품의 깊은 사유다. 설마 학교 두발 규정에 대해 얘기하면서 조선 말기 신체발부수지부모부터 언급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데, 우리 근대사에서 이발의 의미가 상당히 중요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시각으론 머리카락은 그저 머리카락일 뿐이지만 예전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먼 과거엔 머리카락이 부모가 물려주셔서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라면 비교적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머리카락을 기른다는 것은 반체제적인 행위나 다름없었다. 학교와 군대의 힘이 막강했던 시대엔 그 두 곳이 밀어버리려는 머리카락을 애써 자르지 않고 기르는 것은 충분히 불순하게 여길 만했다. 대체 언제 적 얘기인가 싶지만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 시대에 머리카락은 머리카락일 뿐이다. 기르는 게 더 어울리는 사람은 기르는 거고, 길게 기르더라도 겨우 머리카락일 뿐이니 학업에 지장이 생길 리 만무하고, 애당초 짧게 자르는 것만으로 갑자기 잡생각이 사라지고 성적이 향상될 리도 없다. 군대에서 삭발을 시키는 이유는 반체제적 이유 이전에 그래도 조금은 합리적인 이유가 있지만 학교에서 두발 규정을 한다는 것은 이젠 정말 옛날 얘기다. 

 그렇기에 심사위원의 말은 이제는 틀린 말이 됐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은 이상하지 않은 작품이다. 특별함으로 가득한 옛날 옛적 이야길 하고 있으니 재밌게 읽힐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나라 학교가 두발 규정이 사라졌다곤 해도 학생이 탈색을 하거나 레게 머릴 하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긴 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모욕하거나 때리진 않을 것이다. 교문 앞에 붙잡아서 바리깡으로 밀지도 않을 것이고 엎드려뻗쳐 시키지도 않을 것이고 하물며 담뱃불로 머릴 지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지금은 교권이 추락하면 추락했지 학생 인권이 더는 만만해지지 않은 시대다. 오히려 촉법 소년이 더 골치이거늘... 아, 이 얘긴 다른 작품 포스팅 때 해야겠다. 


 하지만 이 소설은 비록 옛날 이야기임에도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의 울림은 여전하다. 더는 머리카락을 미는 시대는 아니지만 머리카락으로 상징되는 자유는 10년 전과 비해 월등히 보장받는 시대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그 자유란 국가 차원에서 알아서 보장해주는 자유일 수 있지만 내 스스로 쟁취하려 노력하는 자유라고도 할 수 있다. 아무리 불이익을 받더라도 외롭고 서러워도 쟁취해내야만 하는 가치를 나는 학창시절에 찾지 못했다. 찾으려면 머리카락이나 다른 부당한 일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겠지만 용기가 없었는지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지금은 어떤 일에 부당함을 느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어쩌면 그렇기에 내가 지금 학교를 졸업한 지 꽤 됐음에도 자유가 충분치 않다고 느끼는지 모르겠다. 머리카락은 고작 머리카락일 뿐이지만 그건 지금 이야기고 당시엔 그렇게 넘기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좀 더 예민하게 작금의 부당함을 감지했어야 했다. 머리카락은 머리카락일 뿐이라고 10년도 훨씬 전에 외쳤더라면 지금의 내 인생은 아주 많이 달라졌을 텐데... 그 후회로부터 일찌감치 자유롭게 된 주인공 일호의 학창 시절이 정말 눈물나게 부러웠다. 이 작품을 처음 읽을 때나 다시 읽을 때나 이 감상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사람에게 빛깔이 있다...... 아마 그 빛깔은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건지도 모르지. - 215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