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주 특별한 도둑
매튜 딕스 지음, 노은정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9.9
이사카 코타로는 어느 작품에선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를 순 있어도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성추행을 저지를 순 없지 않느냐고 했다. 같은 범죄자라 할지라도 범죄의 성질이나 정도에 따라 사람들의 평가는 갈리는 법. 반면에 같은 종류의 범죄임에도 범인의 가치관이나 행적에 따라 평가가 극명히 갈리는 경우도 있다. 돈 없는 사람들이 쉽게 도둑질을 범하는 걸 보면 어째 좀스럽게 느껴지다가도 도둑질을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얘길 들으면 내가 다 기분이 착잡해지며 홍길동이나 괴도 뤼팽 같은 의적을 보면 – 현실에 이런 도둑이 얼마나 있을까 싶지만 말이다. - 생각이 또 달라진다.
의적. 사전을 뒤져보니 탐관오리의 재물을 훔쳐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의로운 도적이라고 한다. 탐관오리 운운하는 걸 보니 옛날부터 이런 도둑이 몇 있었는가 보다. 어쨌든 도둑질이고 범죄임엔 틀림없지만, 의적이란 단어를 들으면 도둑질에는 분명 다른 범죄에서는 풍기지 않는 매력이라는 게 있지 않나 싶다. 반드시 도둑이 될 것이라고 부르짖는 사람은 없지만 도둑의 행적이 멋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많은 –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도둑들>이 이를 어느 정도 반증하리라. - 듯하다. 굳이 의적에 한하지 않더라도 뉴스에서 접하는 기상천외한 도둑들을 보면 순수한 마음에서 대단하다고 감탄하지 않던가? 물론 그 감탄 뒤에는 ‘저 머리로 다른 일을 했더라면….’ 이라고 혀를 차곤 해도 말이다.
가끔 집을 정리하다 보면 어떤 물건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착각을 했던가 하며 넘기곤 한다. 그런 착상에서 떠오른 게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 마틴이다. 마틴은 아주 특별한 도둑 – 이 작품의 원제는 <Something missing>이다. 원제나 우리나라 제목이나 거기서 거기다. - 으로 치밀하면서도 무해無害에 가까운 도둑질을 행사한다. 마틴은 현장에 15분 이상 시간을 할애하지 않으며 절대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물론 사람이 하는 일인 이상 흔적은 알게 모르게 남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틴이 훔치는 물건의 성격상 절대로 그 흔적이 들춰질 일은 없다.
마틴이 훔치는 물건은 가령 예를 들면, 냉장고에 넣어 놓고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홈쇼핑 음식이나 두루마리 휴지 몇 개나 서랍장 구석에 있는 오래된 접시 같은 것들이다. 있었는지 아예 인식도 못하는 물건이나 설령 없어진 걸 알았다고 해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만한 것들, 그 이전에 설마 이런 걸 누가 훔칠까 싶은 것들… 마틴은 이 맹점을 파고들어 자그마치 9년이란 시간 동안 완전 범죄를 성사시킨 프로 중의 프로다.
저런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훔침에 있어 어쩜 그렇게 치밀하고 만전을 기하는지 읽고 있으면 한심스럽다가도 푹 빠져든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도둑질임에도 불구하고 무지 진지하고 또 스릴 있게 해내고 있어 허투루 읽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자고로 이 작품의 스릴로 말할 것 같으면 홍길동, 뤼팽을 읽는 것에서부터 PS2 게임 <슬라이 쿠퍼>를 플레이하는 재미에 비견될 정도로, 독자를 동심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로망 또한 겸비하고 있었다.
도대체 마틴은 왜 이런 도둑질을 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이렇게 규칙적인 도둑인 마틴이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될까? 어떤 사건을 통해 충동에 가까운 심정으로 도둑이 된 마틴은 그 유별난 가치관 덕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도둑질을 수행해냈다. 그렇게 자신의 기술에 익숙해지는 한편 지나치게 고독한 직업(?)의 특성상 알게 모르게 매너리즘에 빠지는 마틴은 어느 날 전에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화장실에서 작업하다 고객 – 마틴은 자신이 들어가는 집의 주인을 고객이라 부른다. 이 고객을 선정하는 기준이 무척 까다로운데 여기서부터 빵터지고 시작된다. - 의 칫솔을 실수로 뚜껑 열린 변기에다 떨어뜨려버린 것이다.
이게 무슨 대수일까 싶지만 마틴에겐 더없이 중대한 사고였다. 자신의 완전 범죄를 위한다면 그냥 칫솔을 털고 원래 자리에 놓는 게 상책일 것이다. 하지만 결벽증에 가까운 위생 관념과 더불어 마틴이 고객에 대해 품고 있던 일종의 인간적인 존중은 그로 하여금 차마 균 덩어리 칫솔이 고객의 입에 들어가는 것을 방관할 수만은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칫솔을 처분했다간 고객이 의심을 품을지 모를 일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이 고객과 가졌던 지금까지의 관계를 청산해야만 한다.
결국 마틴은 자신이 변기에 떨어뜨린 칫솔과 똑같은 모델의 칫솔을 사오기로 했고 우여곡절 끝에 똑같은 모델의 칫솔을 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칫솔을 칫솔 꽂이에 넣었으니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데 주인이 집에 벌컥 들어온다. 양심과 도둑질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갈등했던 마틴은 일단 소파 뒤에 숨으면서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지 고민하다 뜻밖에 고객의 고민을 엿듣게 된다.
보기보다 대단한 경지에 달한 소설이었다. 마틴처럼 선과 악이 분명치 않은 캐릭터를 구현하는 것은 자칫 잘못했다간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애매해질지 모른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다보면 마틴 같은 도둑이 우리 집에도 좀 와줬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게 된다. 그만큼 매력적이고 단연 빠져들 수밖에 없는 캐릭터였다.
주인공이 도둑임에도 하는 행동들이 자극적이기는 커녕 웃음을 유발하고 그러면서도 스릴이 있었다. 또 마틴이 우연히 고객의 고민을 듣게 되면서 그들의 삶에 개입해 행복을 선도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한낱 도둑에 불과했던 마틴이 자연스럽게 선행을 베푸는 전개가 지극히 자연스러웠고 종국에는 자기 자신도 행복을 찾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양심과 도덕적 가치관을 우선했을 때 가질 수 있는 쾌감을 간접 체험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이 유치하지 않으면서도 제법 교훈적이었다.
읽는 내내 작중에서 마틴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정신적 고양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는데 인물에 대한 몰입과 더불어 마틴과 같은 안티 히어로의 떳떳하지 못한 입지를 명쾌하게 짚어내 이래저래 감상할 부분이 다분했다. 어떻게 보면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다가올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p.s 혹시 <바쿠만>이라는 만화에서 주인공 아시로기 콤비의 만화 <P.C.P>를 읽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정말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상의 만화에 가장 가까운 작품이다 .
마틴은 제아무리 값진 고가의 모포를 손에 넣었을 때도, 한 송이 장미꽃과,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말로 표현하는 것을 지나치게 번번이 잊어버리는 남자가 직접 손으로 쓴 카드를 보았을 때보다 더 흐뭇하지는 않았다. - 225p
네 불법적인 활동을 탈세라고 생각하자. 알았지? 그런 건 눈감아 줄 수 있다. 단 네가 그걸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 355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