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씨남정기 재미있다! 우리 고전 16
하성란 지음, 이수진 그림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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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씨남정기를 읽기 전에 정이현의 소설을 먼저 읽어서인지 앞부분의 결혼 과정 장면이 눈에 띄었다. 고전소설인 사씨남정기에서는 매파의 중매로 결혼을 하게 되고, 21세기의 소설인 정이현의 단편소설 <홈드라마>에서는 연애하던 남녀가 결혼을 준비하게 되면서 겪는 이야기들이었다. 중매와 연애라는 큰 시작점의 차이가 있는데도 한국에서의 결혼 과정이 나오는 두 소설의 전개가 심히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유는 부모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나는 처음에 유한림 아버지가 둘째부인이라도 들이는 줄 알았다. 정이현의 소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른들의 입김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결국 문제들을 해결해주고 파혼을 막게 해주는 것도 양가 어른들이다. 결혼 당사자들이 연애를 했던, 결혼 이전에 통성명도 안했던 간에 결혼으로 넘어오면 어른들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라는 말, 사람 하나 들이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한 번 결혼했다가 잘못되면 이혼을 하든 안하든 얼마나 사태가 심각해지는 지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왜 그렇게도 큰일이고 한평생 같이 살아야할 인연을 만드는 데에 남들이 나서는 걸까? 실수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른이라고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닌데, 어린애 취급하면서 과하게 부모권력(?)을 휘두르는건 아닐까. 유한림과 사씨는 13살에 결혼한 것이니 어려서 그럴 수도 있는 걸까? 아내감 분별도 못할 정도로 어리면 결혼을 왜 벌써 시키는걸까! 결혼할 만큼 성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분별못하는 어린애 취급하는 것이 참 이중적이다. 그런데 그러한 어른들의 모습이 정이현 소설에도 그대로여서, 그 소설을 보면서 내가 배 잡고 웃었던 이유가 처음 듣는 내용이 아니라 내 주위 사람들이 했던 이야기들을 제대로 풍자했기 때문임이 슬프다.

 그리고 유한림의 아버지가 사씨를 시험하는 과정도 조금 아이러니했다. 실제로 그랬던 것인지 양반이 글을 써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만, 똑똑하지만 덕성이 나쁜 사람이 유한림과 결혼하고자 맘만 먹었다면 그 정도 연기는 아주 쉬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문득 고3 때 수능 준비하면서 사씨남정기를 읽었던 적이 있는데 그 때는 교씨가 나쁜 짓하기 전까지의 내용은 너무 재미없어서 힘겹게 진도 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실은 정이현의 영향이 아니라, 내게 결혼이 남 일 같지 않게 다가오는걸까!

 또한 이전에는 나쁜 교씨와 헛똑똑이 같은 유한림에 분개했었는데 이번에 가장 흥미로웠던 사람은 사씨였다. 뭐하는 사람일까? 사람일까 교과서일까? 겸손도 정도껏해야지, 어려서 아비를 잃고 어머니한테는 사랑만 많이 받아서 배운 것이 하나도 없으니 잘 가르쳐달라니... 효를 중시하면서 또 겸손의 표현으로 ‘엄니한텐 배운게 없슈’식이라니... 고전 소설이니 이해하자 늘 다짐해도 이런 부분들은 정말 답답하다. 시집 온 첫날부터 저렇게 남다른 싹을 보이더니 결국 사씨는 자기 팔자를 알아서 꼬기 시작한다. 시집 온지 10년이 지났는데 애가 안들어서자, 한림이 싫다는데도 첩을 구하는 것이다. 열셋에 시집왔으면 아무리 생리를 빨리 했어도 열여섯부터나 임신 가능했을 텐데, 거기다 조선시대에 공부하는 선비랑 결혼했으니 합방을 해봤자 한달에 몇 번이나 했을까 싶은데 뭐가 그리 급해서 첩을 구할까! 그런 쪽으론 무지한가보다 싶었는데 두부인의 진실된 충고에도 고집을 부리며 뜻을 굽히지 않는 것을 보니 인간 교과서임이 확실해진다. 심지어 스스로의 뜻으로 인간 교과서가 되었다는 것까지 밝혀진다. 두부인의 만류에, 원래 시집와서 10년간 애를 못낳으면 소박맞는데 안쫓겨나는 것만도 어디요, 첩이 와도 나는 투기를 부리지 않을테요 라고 한 것이 그 증거다. 지와 덕을 갖춘 교과서이면 무얼하나, 현실을 모르니(알고 싶은 의지도 없는 것 같다!) 인생은 팍팍해질 뿐이다. 본인만 덕성 있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닌 게 인간관계 아닌가. 게다가 그냥 인간관계도 아니라 처첩 관계인데 말이다. 내가 교씨여서 그 첩 자리고 갔으면 나도 교씨와 비슷하게 굴었을 지도 모른다. 애초에 첩자리가 얼마나 입지 불안한 자리인가. 그 자리에서는 정실 부인이 악하면 나를 괴롭히니 힘들고, 착해도 문제다. 정실부인이 현숙한데다 착하기까지 하면 나랑 얼마나 비교가 되며, 소박 맞을 일도 없을테니 나는 만년 첩 아닌가. 아, 제도가 잘못되면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 죄악시 되는 좋은 예가 첩제도 같다. 그냥 사람으로써 한 남자의 인정받는 아내가 되고 싶은데, 내 자리가 첩이라서 그걸 바라는 것이 죄가 된다. 홍길동 뺨치는 비극 아닌가. 떳떳한 아내가 될 수 없음이라니. 교씨가 악역이 아니라거나, 상황이 만든 안타까움이라고 그녀의 악행을 합리화할 생각은 없지만 이 모든 비극이 사씨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한림은 여전히 맘에 들지 않지만 모든 면에서 똑똑하고 사람 참 괜찮은데 남녀문제만 가면 이상해지는 남자를 많이 봐서 그냥 현실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사씨남정기는 그대로인데 교씨의 악행에 분노하던 내가 이 모든 비극의 씨앗은 사씨가 뿌렸다는 생각을 하게되다니 너무 찌든 것이 아닌가 반성도 조금 된다. 그러나 사실 나는 사씨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사씨보단 업그레이드형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어쨌든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교과서, 현실과 교과서의 충돌에서 생기는 역경에서도 현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의 교과서를 더욱 수양해서 현실까지 바꾸려는 태도가 비슷한 것 같다. 그런 생각에서 조선 시대에는 사씨가 타의 모범이라도 되었지만, 현대 사회에서도 그런 칭송을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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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 -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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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 라이즈>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읽게 된 결정적 계기는 평론가들이 뽑은 2000년대 최고의 작품 리스트에 있기 때문이었다. 다크나이트도 주위사람들의 뜨거운 반응에 솔깃해서 극장으로 갔었다. 처음 한동안 적응 못하고 헤맨 것도 비슷하다. 책에선 처음 접하는 한강 작가의 문체나 인물들에 익숙해지기가 어려웠다. 이 비현실적인 인물들은 무엇이며, 독백은 또 왜 이럴까... 시작부터 그 지나친 가라앉음과 차가움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오글거림으로 평론가들은 왜 이런 것만 좋아하는 걸까, 평론가들만 원망하며 읽어나갔다. 다크나이트도 초반엔 그냥 졸았다. 원래부터 놀란 감독이 이야기를 구렁이 담 넘어가듯 풀어가는 이야기꾼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심각하게 그가 말하고픈 것, 상징과 상징 사이에 이야기적인 대형구멍들이 보였고 상징을 위한 설정들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나와 맞지 않는 듯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책과 영화 모두 중간을 넘어가자 모든 불평불만을 그치고 빠져들기 시작했고, 클라이막스 부분을 접하면서 그 작품에 대한 내 감정이 모두 바뀌었다. 책을 읽고 있을 땐, 진부한 표현이지만 너무 얼얼하고 누군가 가슴을 강타한 것 같아서 잠시 책을 덮어놓고 진정시켜야 했고 -그런데 사실 그 40년전의 일 자체가 매우 현실적이거나 혹은 미학적이여 보이지는 않는다. 어떻게 보면 아침드라마처럼 막장스럽고, 내가 쉽게 납득할만큼 현실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부분에 이입해서 읽어냈고 정말 그 때 같이 있었던 사람처럼 생생하게 그 추위와 분위기 등을 느낀 기분이 드는 건 앞에서 불평했던 그 문체 때문인 것 같다. 내게 욕을 먹어가면서도 계속해서 그 분위기 과도하고 감상적인 문체를 써온 덕분에- , 영화를 볼 땐 영화관에서 육성으로 억소리가 나와 그 뒤로 눈 깜빡이는 걸 아까워하며 끝까지 지켜봤다. 이렇게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지만 무엇보다 내게 이 책을 생각하면 연관어로 다크나이트 라이즈가 떠오르게 된 이유는 중요하나 매력 없는 인물들의 존재 때문이다.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삼촌’은 중요한 역할이다. 아픈 그의 존재감은 어느 정도 40년전의 그 일이 있기까지의 계기 중 하나로 작용되었을 법하고, 그의 존재와 죽음은 그 뒤의 인주와 나에게까지 깊은 영향을 끼친다. 한마디로 40년 전의 이야기와 지금을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를 만나게 해주는 하나의 문인 것이다. 그리고 그 자체도 피가 멈추지 않는 희귀병(혈우병 아닌가..?)의 보유자, 그 병으로 인해 형성된 듯한 매사에 조심조심하는 성격, 그만의 독특한 작업 방식 등등. 상당히 독특하다. 그러나 정말 매력 없었다. 그야말로 문학 속에서만 존재할 인물. 문학 속에서나 예쁘게 봐줄 인물. 영화에선 하이라이트라고도 볼 수있는 반전을 위해 마리온 꼬띨라르 분의 한 여자가 등장한다. 반전이 밝혀지기 전까진 무매력이었다. 영화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듯하고, 감독이 이거 배트맨 시리즈 마지막이라고 올스타전마냥 자기가 선호하는 배우 다 나오게 하려고 만든 캐릭터 아냐 하고 의심할 정도. 그러나 그 막판 반전을 위해선 꼭 필요한 캐릭터였다. 그러나 반전이 밝혀지기 전까진 내 졸음의 한 몫을 차지했다.

 마지막으로, 한강 작가의 책은 이게 처음이라 작가 스타일까지 평할 순 없겠지만 이 작품만 읽고서 나는 흔치 않은 한국 문단의 탐미주의적 작가가 아닌가 생각했다. 40년 전 그들의 관계도, 현재에서의 관계에서도 물론 치기 어린 사랑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그건 에로스 적인 사랑이 아니라 미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집착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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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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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에서 내 별명은 ‘짐승돌’이다. 온 집안을 울부짖으며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내 방에서 레포트를 쓰다 울부짖고, 화장실에서 제모하다 피나서 외마디 비명, 배가 고프면 내 방에서 부엌까지 가는 내내 배고프다고 외쳐댄다고, 강심장을 비롯한 온갖 예능 프로를 섭렵해 조권이, 택연이는 본인 자식 얘기하듯 하시는 엄마가 지어주신 별명이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짐승돌 노릇을 할 때마다 나를 보는 엄마의 표정이 이상하다. 말은 혼내는 말투지만, 표정이 뭔가 이상하다. 그리고 이 이상한 표정은 우리 엄마만 짓는 게 아닌 모양이다. 천명관 작가의 <고령화 가족>에서 오인모는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동시에 충무로에서 폐기처분되면서 십년 가까이 폐인으로 살다가 결국 엄마의 연립주택으로 기어들어간 주인공이다. 그런데, 그곳엔 이미 형인 오함마가 똬리를 틀고 있다. 거기다가 며칠 뒤엔 여동생 미연까지 딸과 함께 엄마의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남편 없이 사느라 70살 넘어서까지 방문 화장품 판매를 다니는 엄마는 한마디 싫은 소리 하시질 않는다. 막내 나이가 45살, 모두 나이 먹을 만큼 먹고 사회에서 패배해서 엄마의 낡은 집으로 기어들어오는데 오히려 이럴수록 잘 먹어야 한다며, 밥이 힘이라며 매 끼니 고기를 미친 듯이 구워주시기까지 한다. 그리고 전쟁하듯 먹어대는 자식들을 보는 엄마의 표정에서 인모는 나와 같은 이상함을 발견한다. 그것은 어렸을 때 자식들을 보던 그 표정이다. 어머니에게는 자식들이 사회에서 실패했던 안했던 다 당신이 밥해먹이던 어린 자식일 뿐이고, 오히려 다들 집으로 돌아오니, 싸움이 반이지만, 다들 대화도 하고 오랜만에 온가족이 모여서 부대끼는 모습이 좋은 것이다.

 천명관 작가님의 책을 다 읽었지만, 이 부분에 꽂혀서 <고령화가족>으로 독후감을 쓰게 되었다. 천명관 작가는 이 책전에는 고3 수험생 때 읽은 <고래>가 다이지만 나에게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준 작가다. <고래>를 읽고 완전히 매혹당해서 앞에 붙어있는 저자약력을 보니, 우리 엄마랑 동갑인데(1964년생), 2003년에 등단한 것이다. 이런 타고난 이야기꾼의 등단이 이렇게 늦으면 나는 이번 생애에 등단이 가능은 한 건가! 하는 생각에 크게 절망하고 수험공부에 매진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아마 영화 쪽에서 활동하다 넘어온 게 아닌가 싶다. 고전영화에 대한 지식이 많고 충무로에서의 삶에 대한 통찰이 섞인 문장이 많았기 때문이다. 작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데서 알겠지만 나는 외재적 관점으로 읽기를 즐긴다. 글을 읽으면서 이 부분은 지어냈구나, 이건 본인 경험인가? 하며 온갖 추측을 즐기기 때문에, 읽고 나서는 내 촉의 정확도를 확인하기 위해 검색도 열심히 하는 편이다. 이 책을 읽고서도 검색하다보니 2011년에 이미 연극으로 만들어져서 지금은 앙코르공연 중이란 기사를 읽었다. 생각해보니 연극화하기에 또 괜찮은 설정 아닌가? 엄마의 집이라는 공간적 배경, 돌아온 가지각색의 자식들, 함께 지낼수록 밝혀지는 각자의 막장 스토리. 애초에 연극을 염두에 두어두고 쓴 것인지 궁금했다. 책 읽을 때는 왠지 영화 쪽에 있었던 것 같다고 짐작했는데, <고래> 때 판소리 같은 문체도 그렇고 원래 공연계에 있었던 걸까?

 “행복한 가족의 모습은 하나지만, 불행한 가족의 모습은 가지각색이다.”라는 문장은 가장 공감했던 문장이다. 평소의 내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가족들과 문제가 생기거나, 속을 썩이는 남자친구를 만나면 나는 말이 많아진다. 친구들이 지나가는 말로 요즘 남자친구랑 어때? 라고 한 문장 던지기만 해도 기다렸다는 듯이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죄다 말하고, 조언을 구하고... 그러나 가족들과 평화롭게 지내고, 잘 맞는 남자친구와 만날 땐 친구들이 별 일 없냐고 아무리 물어봐도 길게 할 말이 없다. 가족뿐만 아니라 글쓰기도 그런 것 같다. 평소에 영화나 책을 읽고 짧은 메모라도 남기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나중에 모아서 보면 너무 좋았던 영화평은 몇 줄 되지도 않고 건질 표현도 없는데 비해 별로여서 시간이 아깝던 영화가 글은 더 길고 표현이 참신한 편이다. 마치 비평가 병이라도 걸린 것 마냥 별별 비유를 들어가며, 구석구석 맘에 안들었던 부분을 집어가며 공격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걸 보면서 좋은걸 좋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말로 어려운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책 전반적으로 인물을 소개할 때 얼굴에 ‘비켜’라고 써진 아줌마, 얼굴에 ‘나 순진해요’라고 써진 미용실여자 등의 묘사는 간간히 재밌는 것도 있었지만 좀 치기어린 느낌이었다. 뭐랄까, 선배 개그맨들이 ‘이 개그는 너무 일차원적이라서 안하는 게 낫겠다.’ 고 생각한 개그를 신인 개그맨이 이 웃긴 걸 왜 안하지? 어때! 이거 기발하지 않아? 하면서 터뜨릴 때의 모습같달까? 유쾌한 글쓰기와 치기어린 언어유희는 한 순간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래>때부터 그랬지만, 남성 작가치고는, 페미니즘까지 불러오긴 뭣하지만, 상당히 여성친화적인 모습들이 많이 엿보인다. 엄마의 연애에 대한 태도라던가, 성폭행 문제에 대한 전개를 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지극히 흔한 스타일의 남자주인공이 흔한 남자의 시선으로 시작해서 그것을 가족이란 테두리도 인해 감정적으로 여성의 욕망을, 두려움들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태도로 바뀌는 걸 보면서 여자로써 참 고마웠다. 이것 또한 문학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데, 혹자는 반성하게 되고 혹자는 자신이 알던 무언가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하게 한다. 헤밍웨이를 차용한 것도 기발하고 소설 전개 중 하나의 활력소가 된 것 같다. 헤밍웨이는 인물 자체가 극적인 인물이기도 하지만 그런 그의 인생을 소설 진행 중에 시기적절하게 잘 살려서 인용하는 게 재밌었다. “헤밍웨이는 그 특유의 신파 때문에 비판을 받았지만 그가 미국 남부의 스페인식 저택에 살면서 열 명의 하인을 누렸던 것은 팔할이 그의 신파 때문이었다.” 라는 문장이 참 인상 깊었는데, 대중과 평론을 모두 만족시킨 대부분의 명작들은 그런 것 같다. 작가에게는 수준 높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이상적인 글쓰기를 기대하는 평론가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큰 부를 가져다주는 것은 대중이다. 그리고 대중들은 훌륭한 이야기 속에 어느 정도의 신파를 꼭 필요로 한다. 보통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신파조 추구는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가장 이 책에서 맘에 들었던 것은 오함마가 변하는 계기이다. 오함마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고서 자신이 노인인지 바다인지 정체성을 고민하더니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나 재밌고 옳은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노숙자들에게 책을 읽히기 시작하면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노숙자들은 스스로 인생을 포기한 자들이다. 그래서 기술을 배우려 하지도 않고, 돈을 쥐어주면 그날의 유희에 다 써버린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책을 읽게 했더니 처음엔 저항이 강렬했지만, 스스로 점점 새 책 오는 날을 기다리고, 책을 읽으면서 나도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나도 <갈매기의 꿈>의 조나단처럼 하면서 꿈꾸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떠나서도, 글의 힘을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재치 있는 발상인 것 같다.

 재작년인가, 밤 10시에 집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날따라 아빠도 약속이 있는지 늦으시고, 동생은 학원에 가고 없었다. 엄마만 거실에 불도 안 킨 채 소파에 앉아서 티비를 보고 계셨다. 다녀왔다고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들어왔는데, 엄마가 5분에 한번씩 “야! 티비에 애기 나왔다!”, “어머 저게 왠일이래 지선아 나와서 이것 좀 봐라!”하면서 나를 불러내는 것이었다. 처음엔 급하게 마무리해야할 리포트가 있어서 왜 저러시나 짜증도 났었는데 어느 순간 깨달았다. 엄마는 외로웠던 것이다. 내가 집에 있어봤자 방에 틀어박혀서 같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대화를 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때부터 였던 것 같다, 내 울부짖음의 시작은. 집에는 있지만, 차마 엄마와 대화를 할 여유가 없으면 수시로 소리라도 꽥꽥 질러대는 것이다. 앞부분에선 정확한 실체를 표현할 수 없어서 이상하다고 했지만, 어쩌면 나는 이미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이상한 표정의 이유를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갓난아기들도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귀신같이 알아차린다고 한다. 나도 당연히 이십년 넘게 엄마랑 살면서 엄마가 진짜로 혼내는 건지, 애정이 섞인 것인지는 구별할 수 있다. 막내가 17살인 우리 집에서, 고령화 가족으로 수렴해가고 있는 조용한 우리 집에서 내가 엄마의 20년 전 애기 노릇을 하고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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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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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이 두 권의 소설집을 읽었다. 처음 접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장편소설을 다 봤었기 때문에 좀 안다고 생각했었던 작가의 단편집들이 굉장히 뜻밖이고 기대 이상이다.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 "남자를 휘어잡는 80가지 이유"따위의 책들 사이에 놓여있는 알랭 드 보통의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를 만난 그런 느낌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자전적 소설 <삼풍 백화점>은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를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소설에 대한 내 생각에 충격도 많이 주었다. 충격의 이유에는

 

1. 이런 사소한 이야기가 전혀 어색함 없이 소설의 옷을 입고 있어서

2. 이런 사소한 이야기가 심지어 문지(!)에서 출판되어서

3. 이런 사소한 이야기가 전혀 안사소하게 그려져서

4. 이런 사소한 이야기가 나를 울려서

 

를 들 수 있다. 아니, 배경부터 서울 강남 한복판이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져서 사람이 죽었는데, 그래서 주인공이 변했는데, 이런게 사소하면 뭐가 소설감이냐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건 기존의 내 기준에서 확실히 사소했다. 왜냐면 내 진짜 삶과 비슷하니까.

 나는 날 때부터 서울에서 태어나, 초중고, 대학교까지 서울에서 다니고 있는 서울촌년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까지 '나름 강남'에 살았다. 우리 집은 절대 타지역 사람들이 생각하는 강남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쨌든 강남에 살아서 주인공이 할 일이 없어 삼풍백화점을 돌아다니듯, 학교 끝나면 놀 곳이 없어 코엑스몰을 배회했다. 주인공과 그  친구처럼, 내가 나온 고등학교엔 타워팰리스에서 나와 등교하는 친구와, 아파트촌 옆의 비닐 하우스에서 나와 등교하는 친구들이 함께 다녔다. 이런 나의 일상이 내겐 진지하게 고민이었다. 가십걸, 사립학교 아이들 따위의 소설말고 내가 좋아하는 소설쪽에서는 이런 이야기는 안 다루니까. 게다가 나는 '특별한' 경험이 없었다. 보통 작가들 보면 찢어지게 가난하거나 부모님 한쪽이 안계시던데, 아니면 전쟁같은 걸 겪었던데, 나는 너무나 행복한게 평범한 게 고민이었다. 정말 부끄러운 얘긴데 초등학교 5학년 쯤부터 시작되서 대학교 1학년 때까지 지속적으로, 그것도 진지하게 한 고민이었다. 내가 천재도 아닌데, 경험조차 없어. 난 안 될거야. 심지어 이 서울촌년은 보고 자란 게 없어서 풀떼기 이름 같은 것을 알 턱이 없다. 초록색이면 풀이고 빨가면 장미일 뿐. 너무 존경하는 이청준, 황순원 작가님 작품을 감동에 겨워 읽으면서 또 한편으로 생각했다. 아, 나는 자연 묘사는 커녕, 자연 묘사부분만 나오면 집중도 떨어지고, 이번 생에 작가는 못되겠다 라고. 그리고 지방에서 태어난 엄마는 인간관계에서 내가 하는 나름의 배려들을 항상 인정머리 없음의 예시들로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독서란 참 좋은 것이라서 나의 이런 어리석은 고민이 어느 순간 '아,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구나. 다 관점의 차이일 뿐이야.'라는 깨달음과 함께 반쯤 날아갔다. 관점을 새로이 해도 내 지나온 인생에는 당최 소설'거리'가 없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이현은 아주 태연스럽게 내 일상, 내 알바 경험, 나와 엄마의 대화를 소설에다가 옮겨 놓은 것이다. 심지어 내가 늘 고민하던 부분들을 말끔히 날려보내준다. 백화점에서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이기만 했던 서먹한 친구를 봤을 때 일단 외면하는 태도는 "도시사람의 당연한 배려"로, 풀 사진을 보고 그 이름이 뭔지 모르는 것은 "사대문 안에서 나고 자랐다"는 말로 지극히 당연하게 서술되면서 나는 새삼 "뼛속부터 도시사람"이라는 근사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로 여느 전쟁통 이야기 못지않은 감동을 받고서 문득 의문이 하나 들었다. 아, 이거 근데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다른 사람들한텐 안 통하는거 아닐까? 그러나 잘 지어낸 100이야기가 하나의 진실을 못 이긴다고, 진짜 이야기의 힘을 내가 간과했던 것 같다.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일수록 가장 깊은 곳까지 침투할 수 있음을 말이다. 그래서 <삼풍백화점>은 한번도 가본적도 없는 정릉에 왠지 모를 아련함을 느끼게 한, 나는 기억의 습작을 듣던 세대가 아닌데도 전람회 노래만 어디서 나오면 아련해지게 한, 나는 그런 첫사랑이 없는데도 보고나서 오랫동안 먹먹하게 했던 영화 <건축학개론>이 자꾸 떠오르게 되는 단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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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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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알 배웠습니다.

 배웠다는 것은 정말 중의적인 의미로 쓴 말이다. 참고로 나는 이번에 박범신 작가님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이며, 영화 은교도 보지 않았고, 굳이 따지자면 이 책을 빌려오면서 나름의 기대를 하고 있었다. "늙음이 우리의 죄가 아니듯, 젊음도 너희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나오는 소설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읽고 나니 기대 이상으로,

 잘 배웠다.

 하나 배운 건 시다. 왠지 모르지만 나에게 시집은 수학책보다도 어렵다. 한 편 읽고 곱씹으면서 음미하고, 무슨 의미일까 고민하다 보면 자기 일쑤다. 그렇게 시에 관해선 백치에 가까운 나에게 시를 대하는 태도, 시를 감상하는 법 같은 걸 가르쳐주었다. 역시 무지한 나를 위해 유명 작가들의 좋은 시들을 직접 소설 안에 인용까지 해놓는 정성! 혼자 살짝 음모론을 펼치기도 했다. 이거 혹시 문예창작과 교수님이, 시의 ㅅ자도 모르는 문예창작과 애들한테 시를 구구절절 말로 풀어 설명하자니 짜증나서 이거 보고 깨치라고 쓴 거 아녀?!

 다른 하나 배운 것은 문학인데, 이 배움은 주입식 교육에 가깝다. 작가의 문학관을 막 강요해!

강요의 방식은 두 가지다. 자신이 문학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를, 문학이 얼마나 숭고한지를 강조하는 '매니아의 방법'과 자신에게 오는 비난과 비판을 주인공의 입을 빌려 반박하는 '공지영의 방법'이다. 주인공 이적요, 그리고 가끔은 서지우의 독백을 듣고 있으면 또 굳이 문학이라고 표현하니 쑥쓰럽긴하지만 누구못지 않게 소설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나도, 내가 얼마나 얄팍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문학을 대했던가 싶다. 그리고 앞서 시를 배운 것처럼 그가 문학을 대하는 걸 보면서 문학을 대하는 훌륭한 자세를 배우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매니아들은 함정에 빠진다. 그들은 명백한 아마추어임에도 대상을 너무나 사랑하고 전문가만큼 잘 알기 때문에(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유난을 떨어서 어중간하게 그 대상에 호감을 갖고 있던 사람들, 혹은 별 관심 없는 사람들조차 대상에서 돌아서게 만드는 것이다. 그게 그들이 아마추어인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 문학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마추어의 과도한 사랑은 나에게 부담을 느끼게 한다. 문학과 문학 매니아 커플이 예쁜 커플로 보이지 않고, 세상에서 연애 혼자 하는 것마냥 유난스레 구는 커플로 보인다.

 두번째 일명 '공지영 방법'(이 명칭 내가 지었다. 공지영 작가님 죄송. 근데 없는 소린 안해요.)은 강요 중에서 가장 노골적인 강요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과 비슷한 캐릭터를 자기 소설에 넣고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그 캐릭터의 입으로 말하는 방법이다. 중요한 점은 자기가 공격받은 부분들에 대한 억울함과 해명이 내용의 주를 이루는 점이다. 읽다보면 어느 순간 책만으로 작가를 영접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긴다. 그러나 그 해명이 정말 논리적이고 공감이 되도 중간이 될까말까한 이 기법을 용기있게 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강요에 불과해 참 서로 괴롭다. 표면적으로는 다 공감하는 주장이긴 하나, (문학은 문학 그자체다. 장르로 나누고 비평으로 까불지 마라 같은) 그런 사례도 물론 적잖이 있지만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이런 태도야 말로 같잖은 엘리트주의 아닐까? 사실 이 부분, 글에서조차 쓸데없이 자아가 강하고 강한 자아 때문에 모든 걸 멀쩡히 보면서도 자기 일은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부분이 나와 겹치는 것 같아 강하게 비판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은 내 기대만큼, 소설의 초반부만큼 늙음과 젊음, 욕망, 그리고 서지우와 이적요의 애증상태에 관한 사유가 깊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가끔씩 젊은이들이 누리는 걸 보면서 니들이 지금 자연스럽게 누리는 게 뭔지는 아냐, 내가 어두운 과거 시대에 민주화를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냐는 식의 독백이 나오면 젊은이로써 짜증났다. 꼭 젊음과 늙음을 이분법적으로 나눠서 젊은이를 적대시해야 할까? 어쨌거나 우리는 그 시대 이후에 태어난 젊은이니까 당연히 그 시절을 겪을 수 없었는데 그 비경험으로 인해 언제까지 저런 생색을 받아주며 살아야 하는걸까? 이 정치적 냉소와 견고한 안정의 시대, 노인의 말처럼 모든게 갖춰진 시대의 피 끓는 이들은 그 때문에 차라리 예전 사람들을 부러워한다는 것을 알까? 상대평가 때문에 학점 받기부터 무한경쟁이고 스펙 채우느라 정신없이 살아도 취직이 잘 안되는 우리는 시위 다니느라 학교를 거의 나가는둥마는둥 하다가 대기업 척 붙은 그들이 부러운것을 알까? 시인 자신도 스스로가 피하기 위해 시위에 젊음을 바쳤다고 했듯이 그렇다면 그들은 실제로 얼마나 진실된 마음으로 시위를 했었을까?

 젊은이 하나 하나가 다 은교라는 걸 알아줬으면, 은교라 여기고 마음을 열어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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