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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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에서 내 별명은 ‘짐승돌’이다. 온 집안을 울부짖으며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내 방에서 레포트를 쓰다 울부짖고, 화장실에서 제모하다 피나서 외마디 비명, 배가 고프면 내 방에서 부엌까지 가는 내내 배고프다고 외쳐댄다고, 강심장을 비롯한 온갖 예능 프로를 섭렵해 조권이, 택연이는 본인 자식 얘기하듯 하시는 엄마가 지어주신 별명이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짐승돌 노릇을 할 때마다 나를 보는 엄마의 표정이 이상하다. 말은 혼내는 말투지만, 표정이 뭔가 이상하다. 그리고 이 이상한 표정은 우리 엄마만 짓는 게 아닌 모양이다. 천명관 작가의 <고령화 가족>에서 오인모는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동시에 충무로에서 폐기처분되면서 십년 가까이 폐인으로 살다가 결국 엄마의 연립주택으로 기어들어간 주인공이다. 그런데, 그곳엔 이미 형인 오함마가 똬리를 틀고 있다. 거기다가 며칠 뒤엔 여동생 미연까지 딸과 함께 엄마의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남편 없이 사느라 70살 넘어서까지 방문 화장품 판매를 다니는 엄마는 한마디 싫은 소리 하시질 않는다. 막내 나이가 45살, 모두 나이 먹을 만큼 먹고 사회에서 패배해서 엄마의 낡은 집으로 기어들어오는데 오히려 이럴수록 잘 먹어야 한다며, 밥이 힘이라며 매 끼니 고기를 미친 듯이 구워주시기까지 한다. 그리고 전쟁하듯 먹어대는 자식들을 보는 엄마의 표정에서 인모는 나와 같은 이상함을 발견한다. 그것은 어렸을 때 자식들을 보던 그 표정이다. 어머니에게는 자식들이 사회에서 실패했던 안했던 다 당신이 밥해먹이던 어린 자식일 뿐이고, 오히려 다들 집으로 돌아오니, 싸움이 반이지만, 다들 대화도 하고 오랜만에 온가족이 모여서 부대끼는 모습이 좋은 것이다.

 천명관 작가님의 책을 다 읽었지만, 이 부분에 꽂혀서 <고령화가족>으로 독후감을 쓰게 되었다. 천명관 작가는 이 책전에는 고3 수험생 때 읽은 <고래>가 다이지만 나에게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준 작가다. <고래>를 읽고 완전히 매혹당해서 앞에 붙어있는 저자약력을 보니, 우리 엄마랑 동갑인데(1964년생), 2003년에 등단한 것이다. 이런 타고난 이야기꾼의 등단이 이렇게 늦으면 나는 이번 생애에 등단이 가능은 한 건가! 하는 생각에 크게 절망하고 수험공부에 매진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보니 아마 영화 쪽에서 활동하다 넘어온 게 아닌가 싶다. 고전영화에 대한 지식이 많고 충무로에서의 삶에 대한 통찰이 섞인 문장이 많았기 때문이다. 작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데서 알겠지만 나는 외재적 관점으로 읽기를 즐긴다. 글을 읽으면서 이 부분은 지어냈구나, 이건 본인 경험인가? 하며 온갖 추측을 즐기기 때문에, 읽고 나서는 내 촉의 정확도를 확인하기 위해 검색도 열심히 하는 편이다. 이 책을 읽고서도 검색하다보니 2011년에 이미 연극으로 만들어져서 지금은 앙코르공연 중이란 기사를 읽었다. 생각해보니 연극화하기에 또 괜찮은 설정 아닌가? 엄마의 집이라는 공간적 배경, 돌아온 가지각색의 자식들, 함께 지낼수록 밝혀지는 각자의 막장 스토리. 애초에 연극을 염두에 두어두고 쓴 것인지 궁금했다. 책 읽을 때는 왠지 영화 쪽에 있었던 것 같다고 짐작했는데, <고래> 때 판소리 같은 문체도 그렇고 원래 공연계에 있었던 걸까?

 “행복한 가족의 모습은 하나지만, 불행한 가족의 모습은 가지각색이다.”라는 문장은 가장 공감했던 문장이다. 평소의 내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가족들과 문제가 생기거나, 속을 썩이는 남자친구를 만나면 나는 말이 많아진다. 친구들이 지나가는 말로 요즘 남자친구랑 어때? 라고 한 문장 던지기만 해도 기다렸다는 듯이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죄다 말하고, 조언을 구하고... 그러나 가족들과 평화롭게 지내고, 잘 맞는 남자친구와 만날 땐 친구들이 별 일 없냐고 아무리 물어봐도 길게 할 말이 없다. 가족뿐만 아니라 글쓰기도 그런 것 같다. 평소에 영화나 책을 읽고 짧은 메모라도 남기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나중에 모아서 보면 너무 좋았던 영화평은 몇 줄 되지도 않고 건질 표현도 없는데 비해 별로여서 시간이 아깝던 영화가 글은 더 길고 표현이 참신한 편이다. 마치 비평가 병이라도 걸린 것 마냥 별별 비유를 들어가며, 구석구석 맘에 안들었던 부분을 집어가며 공격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걸 보면서 좋은걸 좋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말로 어려운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책 전반적으로 인물을 소개할 때 얼굴에 ‘비켜’라고 써진 아줌마, 얼굴에 ‘나 순진해요’라고 써진 미용실여자 등의 묘사는 간간히 재밌는 것도 있었지만 좀 치기어린 느낌이었다. 뭐랄까, 선배 개그맨들이 ‘이 개그는 너무 일차원적이라서 안하는 게 낫겠다.’ 고 생각한 개그를 신인 개그맨이 이 웃긴 걸 왜 안하지? 어때! 이거 기발하지 않아? 하면서 터뜨릴 때의 모습같달까? 유쾌한 글쓰기와 치기어린 언어유희는 한 순간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래>때부터 그랬지만, 남성 작가치고는, 페미니즘까지 불러오긴 뭣하지만, 상당히 여성친화적인 모습들이 많이 엿보인다. 엄마의 연애에 대한 태도라던가, 성폭행 문제에 대한 전개를 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지극히 흔한 스타일의 남자주인공이 흔한 남자의 시선으로 시작해서 그것을 가족이란 테두리도 인해 감정적으로 여성의 욕망을, 두려움들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태도로 바뀌는 걸 보면서 여자로써 참 고마웠다. 이것 또한 문학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데, 혹자는 반성하게 되고 혹자는 자신이 알던 무언가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하게 한다. 헤밍웨이를 차용한 것도 기발하고 소설 전개 중 하나의 활력소가 된 것 같다. 헤밍웨이는 인물 자체가 극적인 인물이기도 하지만 그런 그의 인생을 소설 진행 중에 시기적절하게 잘 살려서 인용하는 게 재밌었다. “헤밍웨이는 그 특유의 신파 때문에 비판을 받았지만 그가 미국 남부의 스페인식 저택에 살면서 열 명의 하인을 누렸던 것은 팔할이 그의 신파 때문이었다.” 라는 문장이 참 인상 깊었는데, 대중과 평론을 모두 만족시킨 대부분의 명작들은 그런 것 같다. 작가에게는 수준 높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이상적인 글쓰기를 기대하는 평론가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큰 부를 가져다주는 것은 대중이다. 그리고 대중들은 훌륭한 이야기 속에 어느 정도의 신파를 꼭 필요로 한다. 보통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신파조 추구는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가장 이 책에서 맘에 들었던 것은 오함마가 변하는 계기이다. 오함마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고서 자신이 노인인지 바다인지 정체성을 고민하더니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나 재밌고 옳은 발상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노숙자들에게 책을 읽히기 시작하면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노숙자들은 스스로 인생을 포기한 자들이다. 그래서 기술을 배우려 하지도 않고, 돈을 쥐어주면 그날의 유희에 다 써버린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책을 읽게 했더니 처음엔 저항이 강렬했지만, 스스로 점점 새 책 오는 날을 기다리고, 책을 읽으면서 나도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나도 <갈매기의 꿈>의 조나단처럼 하면서 꿈꾸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떠나서도, 글의 힘을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재치 있는 발상인 것 같다.

 재작년인가, 밤 10시에 집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날따라 아빠도 약속이 있는지 늦으시고, 동생은 학원에 가고 없었다. 엄마만 거실에 불도 안 킨 채 소파에 앉아서 티비를 보고 계셨다. 다녀왔다고 인사를 하고 내 방으로 들어왔는데, 엄마가 5분에 한번씩 “야! 티비에 애기 나왔다!”, “어머 저게 왠일이래 지선아 나와서 이것 좀 봐라!”하면서 나를 불러내는 것이었다. 처음엔 급하게 마무리해야할 리포트가 있어서 왜 저러시나 짜증도 났었는데 어느 순간 깨달았다. 엄마는 외로웠던 것이다. 내가 집에 있어봤자 방에 틀어박혀서 같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대화를 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때부터 였던 것 같다, 내 울부짖음의 시작은. 집에는 있지만, 차마 엄마와 대화를 할 여유가 없으면 수시로 소리라도 꽥꽥 질러대는 것이다. 앞부분에선 정확한 실체를 표현할 수 없어서 이상하다고 했지만, 어쩌면 나는 이미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이상한 표정의 이유를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갓난아기들도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귀신같이 알아차린다고 한다. 나도 당연히 이십년 넘게 엄마랑 살면서 엄마가 진짜로 혼내는 건지, 애정이 섞인 것인지는 구별할 수 있다. 막내가 17살인 우리 집에서, 고령화 가족으로 수렴해가고 있는 조용한 우리 집에서 내가 엄마의 20년 전 애기 노릇을 하고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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