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이 두 권의 소설집을 읽었다. 처음 접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장편소설을 다 봤었기 때문에 좀 안다고 생각했었던 작가의 단편집들이 굉장히 뜻밖이고 기대 이상이다. "나쁜 여자가 성공한다", "남자를 휘어잡는 80가지 이유"따위의 책들 사이에 놓여있는 알랭 드 보통의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를 만난 그런 느낌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자전적 소설 <삼풍 백화점>은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를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소설에 대한 내 생각에 충격도 많이 주었다. 충격의 이유에는

 

1. 이런 사소한 이야기가 전혀 어색함 없이 소설의 옷을 입고 있어서

2. 이런 사소한 이야기가 심지어 문지(!)에서 출판되어서

3. 이런 사소한 이야기가 전혀 안사소하게 그려져서

4. 이런 사소한 이야기가 나를 울려서

 

를 들 수 있다. 아니, 배경부터 서울 강남 한복판이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져서 사람이 죽었는데, 그래서 주인공이 변했는데, 이런게 사소하면 뭐가 소설감이냐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건 기존의 내 기준에서 확실히 사소했다. 왜냐면 내 진짜 삶과 비슷하니까.

 나는 날 때부터 서울에서 태어나, 초중고, 대학교까지 서울에서 다니고 있는 서울촌년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까지 '나름 강남'에 살았다. 우리 집은 절대 타지역 사람들이 생각하는 강남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쨌든 강남에 살아서 주인공이 할 일이 없어 삼풍백화점을 돌아다니듯, 학교 끝나면 놀 곳이 없어 코엑스몰을 배회했다. 주인공과 그  친구처럼, 내가 나온 고등학교엔 타워팰리스에서 나와 등교하는 친구와, 아파트촌 옆의 비닐 하우스에서 나와 등교하는 친구들이 함께 다녔다. 이런 나의 일상이 내겐 진지하게 고민이었다. 가십걸, 사립학교 아이들 따위의 소설말고 내가 좋아하는 소설쪽에서는 이런 이야기는 안 다루니까. 게다가 나는 '특별한' 경험이 없었다. 보통 작가들 보면 찢어지게 가난하거나 부모님 한쪽이 안계시던데, 아니면 전쟁같은 걸 겪었던데, 나는 너무나 행복한게 평범한 게 고민이었다. 정말 부끄러운 얘긴데 초등학교 5학년 쯤부터 시작되서 대학교 1학년 때까지 지속적으로, 그것도 진지하게 한 고민이었다. 내가 천재도 아닌데, 경험조차 없어. 난 안 될거야. 심지어 이 서울촌년은 보고 자란 게 없어서 풀떼기 이름 같은 것을 알 턱이 없다. 초록색이면 풀이고 빨가면 장미일 뿐. 너무 존경하는 이청준, 황순원 작가님 작품을 감동에 겨워 읽으면서 또 한편으로 생각했다. 아, 나는 자연 묘사는 커녕, 자연 묘사부분만 나오면 집중도 떨어지고, 이번 생에 작가는 못되겠다 라고. 그리고 지방에서 태어난 엄마는 인간관계에서 내가 하는 나름의 배려들을 항상 인정머리 없음의 예시들로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독서란 참 좋은 것이라서 나의 이런 어리석은 고민이 어느 순간 '아,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구나. 다 관점의 차이일 뿐이야.'라는 깨달음과 함께 반쯤 날아갔다. 관점을 새로이 해도 내 지나온 인생에는 당최 소설'거리'가 없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이현은 아주 태연스럽게 내 일상, 내 알바 경험, 나와 엄마의 대화를 소설에다가 옮겨 놓은 것이다. 심지어 내가 늘 고민하던 부분들을 말끔히 날려보내준다. 백화점에서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이기만 했던 서먹한 친구를 봤을 때 일단 외면하는 태도는 "도시사람의 당연한 배려"로, 풀 사진을 보고 그 이름이 뭔지 모르는 것은 "사대문 안에서 나고 자랐다"는 말로 지극히 당연하게 서술되면서 나는 새삼 "뼛속부터 도시사람"이라는 근사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로 여느 전쟁통 이야기 못지않은 감동을 받고서 문득 의문이 하나 들었다. 아, 이거 근데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다른 사람들한텐 안 통하는거 아닐까? 그러나 잘 지어낸 100이야기가 하나의 진실을 못 이긴다고, 진짜 이야기의 힘을 내가 간과했던 것 같다.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일수록 가장 깊은 곳까지 침투할 수 있음을 말이다. 그래서 <삼풍백화점>은 한번도 가본적도 없는 정릉에 왠지 모를 아련함을 느끼게 한, 나는 기억의 습작을 듣던 세대가 아닌데도 전람회 노래만 어디서 나오면 아련해지게 한, 나는 그런 첫사랑이 없는데도 보고나서 오랫동안 먹먹하게 했던 영화 <건축학개론>이 자꾸 떠오르게 되는 단편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