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회사 경영실적도 하락세였다. 매킨토시에서 쓸 수 있는 소프트웨어의 가짓수가 적다는 이유로 소비자는 매킨토시를 외면했다. 매킨토시 판매가 1984년 들어 월 1만대 이하로 떨어졌다. 스티브와의 갈등으로 유능한 엔지니어들은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1985년에는 그와 함께 애플을 창업했던 워즈니악마저 떠났다.  


결국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의 진원지는 애플의 이사회, 그중에서도 1983년 스티브가 직접 펩시콜라에서 영입한 마케팅 전문가 존 스컬리였다. 이사회는 스컬리를 애플의 CEO로 임명하고 스티브에게는 ‘프로덕트 비저너리(Product Visionary)’라는 이상한 직함을 줬다. 실질적 권한은 없는 명목뿐인 직함이었다.  


뒤늦게 반란을 눈치 챈 스티브는 사태를 되돌리기 위해 온 힘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사회 멤버들은 스티브의 독선과 아집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1985년 5월28일, 스티브는 회사 내 유일한 친구인 마케팅 이사 마이크 머리에게 전화를 걸어 이사회가 자신을 축출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지만 머리는 스티브가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가구 하나 없는 스티브의 집은-지금도 스티브는 집에 가구를 거의 들이지 않고 살고 있다- 어둠에 싸여 있었고 스티브는 매트리스 위에 누워 울고 있었다. 머리가 다가가 그를 안아주자 스티브는 한 시간 동안 말없이 눈물만 쏟았다. 아무리 천재 기업가라도 해도 스티브는 갓 서른의 청년이었다. 그는 10년 동안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지켜온 회사를,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스티브는 유럽으로 갔다. 이탈리아와 스웨덴을 자전거로 돌면서 머릿속을 떠도는 상념들을 모두 잊으려고 애썼다. 그는 막 시작된 민간인 우주왕복선 탑승을 NASA에 신청하는가 하면, 정치인이 되기 위해 정치 컨설팅 회사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여의치 않았다. NASA는 챌린지호에 탈 최초의 민간인으로 여교사인 크리스타 매콜리프를 선발했다(아이러니하게도 매콜리프가 탑승한 챌린지호는 1986년 1월28일 발사 73초 만에 폭발했다).  


유럽을 떠돌던 여름, 스티브는 불현듯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무엇을 제일 잘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뛰어난 인재로 작은 팀을 구성해서, 그들과 함께 새롭고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 파는 일, 이것이 내가 제일 잘하며 또 즐기는 일이다. 바로 애플II나 매킨토시를 만들 때처럼.” 새로운 영감이 떠오르자 눈앞을 가리고 있던 장막이 걷혔다. 스티브는 ‘뉴스위크’에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서른 살이다. 아직 뒤에 물러나 선생 노릇 할 때는 아니다. 나는 물건을 만드는 게 꿈이다. 애플에 그런 일을 할 자리가 없다면 내가 그런 자리를 찾아야 한다…. 애플에서 보낸 10년은 내 삶에서 최고의 날이었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내 인생을 살고 싶을 뿐이다.’ 스티브는 컴퓨터 회사 ‘넥스트’를 설립하고, 컴퓨터 애니메이션 제작 스튜디오를 조지 루카스 감독에게서 인수해 ‘픽사(‘픽셀Pixel의 동사형)’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음’이라는 뜻인 ‘넥스트’라는 이름이 의미심장하다. 그에게 ‘처음’은 언제나 애플이었다.  


이후 10년간, ‘넥스트’는 고전했지만 ‘픽사’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스티브는 정말 중요한 것은 컴퓨터의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사용자에게 꿈과 감동을 주는 ‘콘텐츠’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픽사’를 인수했던 것이다. 최초의 CG 애니메이션인 ‘토이 스토리’가 개봉된 1995년까지 스티브는 파산 직전의 상황까지 몰리며 천문학적인 자금을 ‘픽사’에 쏟아 부었다. 1991년 디즈니와 후원계약을 맺지 않았다면 픽사는 진작에 파산했을 것이다.  


1995년 ‘토이스토리’가 개봉됐을 때 스티브의 자금상황은 최악이었다. 빚잔치를 하기 위해서는 ‘토이스토리’가 최소 1억달러는 벌어주어야 했는데, 본격적인 영화도 아닌 애니메이션이 그 같은 수익을 올린다는 건 영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개봉된 ‘토이스토리’는 3억5800만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이후 개봉된 픽사의 애니메이션 ‘벅스’‘몬스터 주식회사’‘니모를 찾아서’‘인크레더블’은 차례차례 전작의 흥행기록을 갱신해나갔다. 창조성과 기술을 결합하겠다는 스티브의 과감한 투자가 대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픽사는 2006년, 74억달러의 가격으로 디즈니에 매각됐다. 스티브는 디즈니 주식의 7%를 보유해 디즈니의 개인 최대 주주로 올라섰다).  


왕의 귀환, 애플로 돌아오다  


오 헨리의 작품 중에 ‘인생은 회전목마’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이 말은 스티브의 인생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스티브의 승승장구에 반비례하듯, 애플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1995년, 즉 스티브가 애플을 떠난 지 10년 후 애플은 컴퓨터업계 시장점유율 8%의 초라한 기업으로 전락했다.  


1997년 ‘타임’에 ‘스티브 잡스의 임무: 애플을 살려내는 것’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애플 내에서도 ‘위기에 빠진 회사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잡스뿐’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티브는 애플의 요청을 거절하고 애플 주식 150만주를 팔아치운다. ‘나는 애플에 미련이 없다’는 제스처를 취한 셈이다. 그러나 속마음은 다르지 않았을까? ‘첫사랑’인 애플을 스티브가 버릴 수 있을까? 애플 CEO였던 길 어밀리오는 1998년 출간된 회고록 ‘애플에서 보낸 500일’을 통해 스티브가 이미 1995년 자신을 찾아왔다고 털어놓았다. 스티브가 어밀리오에게 자신이 애플에 복귀할 것이라며, 이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여론에 떠밀렸던 것인지, 아니면 3년에 걸친 치밀한 계획의 결과였는지는 미지수지만(어쩌면 둘 다였을지 모른다) 스티브는 1997년 ‘임시(Intern) CEO’라는 직함을 달고 애플에 복귀했다. 그리고 스티브는 다시 한 번 미다스의 손을 움직인다. 영원한 라이벌로 여겨졌던 마이크로소프트의 후원계약을 이끌어낸 데 이어(이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맥에 탑재되었다), 컬러풀한 차세대 컴퓨터 ‘아이맥’, 디지털 음악네트워크 ‘아이튠’, 음악재생기기 ‘아이팟’ 등을 연달아 개발해냈다. 이를 통해 한물간 기업 애플은 디지털 시대의 총아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스티브가 복귀한 지 3년 만에 애플 주가는 여덟 배 이상 상승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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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입양, 대학 중퇴  


잡스는 1955년생으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전 회장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러나 빌 게이츠의 부모가 변호사와 대학 이사라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데 비해 스티브의 환경은 딴판이었다. 원래 스티브를 입양하기로 했던 변호사 부부가 막판에 마음을 바꾸는 바람에 스티브는 해안경비대원 출신인 폴 잡스와 클라라 부부에게 갈 수밖에 없었다. 폴은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스티브의 생모는 무척 화를 냈다. 입양을 성사시키기 위해 폴과 클라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스티브를 대학 교육까지 시키겠다”고 약속해야만 했다. 

 
스티브의 친부는 시리아인이다. 친부 압둘파타 잔달리는 훗날 시리아에서 정치학과 교수가 됐다. 스티브의 친부모는 대학원을 마친 뒤 결혼했으나 딸 하나를 낳고 이혼했다. 이들의 딸(스티브의 여동생) 모나 심슨은 소설가가 됐다. 스티브는 성공한 후에 친모인 조안 쉬벨과 여동생 모나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친모를 어머니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에게 부모는 이미 세상을 뜬 폴과 클라라 잡스뿐이었다. 폴과 클라라 부부는 툭하면 집안의 전자제품을 망가뜨리는 스티브를 전혀 말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이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무엇이든 부수고 맞추도록 내버려두었던 것이다.  


스티브는 고교 시절 자신이 입양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친부모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그렇지 않아도 반항적이고 집요한 스티브의 성격은 더욱 강해졌다. 그는 자신이 가치 없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확실하고 대단한 일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부모에 대한 공허함과 슬픔을 잊기 위해 스티브는 컴퓨터를 파고들었다.
‘취미로 컴퓨터를 조립하는’ 천재 엔지니어 스티브 워즈니악을 만난 것도 이 때쯤이었다. 워즈니악이 잡스보다 다섯 살 위였지만 ‘두 스티브’는 곧 공통분모를 확인하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워즈니악 역시 대학 홈페이지를 해킹하다 콜로라도대에서 퇴학당한 괴짜 중의 괴짜였다. 훗날 스티브는 워즈니악을 설득해 자신의 집 창고에서 ‘애플’을 창업하게 된다.  


캘리포니아 쿠페르티노에서 성장한 스티브는 꼭 시애틀의 리드 대학교(Reed College)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이 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스티브는 1학년 1학기만 마치고 자퇴하는데, 그 이유에 대해 스티브 본인은 이렇게 말한다. “대학교 등록금은 굉장히 비쌌고, 그 때문에 부모님은 평생 모은 저축 대부분을 써야 할 형편이었다. 굳이 그같이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 학교 강의를 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결정을 내리게 된 데에는 자신이 잡스 부부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 작용했을 것이다.  


스티브는 20대의 전반을 히피 생활로 보냈다. 게임제작업체에 취직해서 돈을 모아 인도 여행을 떠나는가 하면, 마약에 손을 댄 적도 있었다. 그는 인도와 히말라야 일대를 돌아다니다 옴에 걸리기도 하고, 마른 개울바닥에서 모래구덩이를 파고 잠을 자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스티브는 내면에서 들끓는 열정과 공허함, 친부모에 대한 상실감을 메우고 싶었을 것이다.  


인도를 떠돌던 스티브는 삭발한 머리에 노란색 법복을 입고, 맨발에 샌들을 신은 차림새로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은 스티브의 나머지 인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스티브는 불교도이자 엄격한 채식주의자가 돼 있었다. 억만장자임에도 그리 크지 않은 집에서 살고 늘 검은 티셔츠와 리바이스501 청바지, 맨발에 캔버스 운동화를 고집하는 그의 절제된 생활은 이 같은 젊은 날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간결하고 금욕적인 삶의 방식은 그의 생활뿐만 아니라 아이맥과 아이팟 등 디자인 철학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75년 가을, 워즈니악이 컬러 화면을 구동할 수 있는 회로기판을 만들어 스티브에게 보여주었다. 회로기판을 본 순간,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어 팔면 장사가 되겠다는 직감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는 워즈니악을 꼬드겨 1976년 자신의 집 창고에서 컴퓨터 회사 ‘애플’을 창업했다. 그즈음 스티브는 오리건 주의 사과농장에서 선(禪) 애호가들과 자주 참선수양을 했는데, 이 때문에 회사 이름이 자연스럽게 ‘애플’이 됐다. 그러나 회사 이름 때문에 스티브는 자신이 광적으로 좋아하는 비틀스의 ‘애플 레코드’와 오랫동안 상표 분쟁을 벌여야만 했다.  


아무튼 스티브는 이렇게 해서 젊은 시절의 방황을 접었다. 입양, 대학 중퇴, 열정적이고 충동적이며 집요한 성격, 어디로 보나 스티브는 비뚤어지기 쉬운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선불교와 동양사상, 그리고 컴퓨터에 의해 스티브는 첫 번째로 찾아온 인생의 위기를 벗어났다. 
 

회사가 설립되고 워즈니악이 개인용 컴퓨터 ‘애플I’과 ‘애플II’를 만들어내자, 스티브는 놀라운 마케팅 능력과 시장을 읽어내는 혜안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애플I과 애플II의 개량 버전들이 계속 출시되며 ‘개인용 컴퓨터’, 즉 PC의 시대가 열렸다. 1980년 12월, 창업 4년 만에 애플은 증시에 상장되었고, 상장 하루 만에 주가는 32% 상승했다. 4년 전까지 맨발에 샌들을 신고 다니던 히피 청년 스티브는 나이 스물다섯에 2억5000만달러 이상을 보유한 억만장자가 됐다.  


애플을 잃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애플은 10년 만에 직원 두 명인 회사에서 종업원 4000명에 20억달러 규모의 회사로 성장했다. 애플은 최고 걸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다, 나는 막 서른이 됐고, 그리고 해고당했다.” (2005.8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 중)
첫 번째의 위기가 개인적인 문제였다면, 두 번째 위기는 좀 더 심각하고도 복잡했다. 애플은 스티브를 이사회 결정을 통해 축출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스티브는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누구보다 새로운 비전을 일찍 알아차리고, 놀라운 마케팅 능력을 갖고 있지만 스티브는 너무도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한 CEO였다. ‘포천’ 표현대로라면 그는 ‘벤츠를 거리낌 없이 장애인 주차지역에 주차하는’ 사람이었다. 완벽주의자인데다 타협을 모르는 경영 스타일을 구사하는 잡스는 신제품 개발의 하나하나를 다 챙기며 직원들을 가혹하게 독촉했다. 사내에선 점점 그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82년 스티브가 ‘타임’ 신년호 표지모델로 실렸다. 불과 스물 여섯 살의 청년에게는 대단한 영광이었다. 그러나 ‘타임’ 지를 펴본 스티브는 경악했다. 기사 도처에 가시가 돋친 말들이 박혀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직원은 스티브에 대해 “프랑스 왕이 됐으면 잘할 사람이다”라고 빈정거렸고, 죽마고우이자 공동창업자인 워즈니악마저 “스티브는 회로판 하나, 코드 하나도 직접 만들지 않았다”고 그를 비난했다. 기사 속 스티브는 뛰어난 엔지니어들을 교묘하게 조종해서 떼돈을 벌어 챙기는 사기꾼 같은 인상을 주었다. 스티브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스티브는 고집스럽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고치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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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아 출신으로 대학을 중퇴했다. 스무 살, 집 창고에 ‘애플’이라는 이름의 컴퓨터 회사를 차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억만장자가 됐다. 서른 살,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마흔둘, 다시 CEO로 복귀해 아이팟, 아이폰을 연달아 내놓으며 애플을 세계 최고의 우량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창조와 혁신의 대명사, 스티브 잡스 애플 CEO의 이야기다.

 
 






지난 1월14일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스티브 잡스가 건강 문제로 6개월 동안 병가를 냈다는 뉴스가 발표되자 애플 주가는 8% 이상 추락했다. 이후 ‘애플이 잡스의 건강상태에 대해 사전에 공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주들이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등의 소식이 잇따라 보도됐다. 잡스는 2004년 7월 췌장암 수술을 받았다. 그 후 한동안 건강해 보이던 그가 지난해 초췌한 모습으로 공식석상에 나타나자 암 재발설을 비롯한 각종 루머가 난무했다.
‘애플’은 미국의 자존심이다.  

지난해 4/4분기에 매출이 101억달러, 순익이 16억달러(약 2조원)에 달했다. 이 기간 250만대의 매킨토시와 2,270만대의 아이팟, 430만대의 아이폰을 팔았다. 경제전문지 ‘포천’은 2008년에 이어 2009년에도 ‘가장 존경받는 기업’ 1위로 애플을 선정했다.  


최우량 기업 애플 주가가 ‘CEO의 병가’라는 이유로 폭락했던 이유는 뭘까? 잡스가 ‘단순한 한 사람의 CEO’가 아니기 때문이다. 2007년 기준으로 애플의 브랜드 가치는 110억달러에 달하는데(‘비즈니스위크’ 평가), 이 브랜드 가치의 절반 이상이 스티브 잡스 한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누구나 안다. 이 남자가 놀라운 창조성과 혁신의 주인공이며, 타협을 모르는 완벽주의자, 프레젠테이션의 귀재인 동시에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를 동시에 평정했다는 점을. 스무 살에 애플을 창업해서 25세에 2억5000만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유했으며 스물여섯 살에 ‘타임’ 지 표지모델로 등장했고, 서른 살에 애플에서 쫓겨났다. 마흔 살에 세계 최초의 100%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를 제작했고 마흔둘에 애플의 임시 CEO로 복귀해 회사 주가를 스무 배 이상 올려놓았다.  


스티브 잡스라는 ‘신화’  


애플은 스티브 잡스 주도로 아이맥, 아이팟, 아이폰, 아이튠 등 시대를 선도하는 컴퓨터와 통신기기, 디지털 플레이어, 온라인 음악스토어를 탄생시켰다. 픽사는 ‘토이 스토리’에 이어 ‘벅스’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인크레더블’ 등의 애니메이션을 히트시키며 디즈니에 버금가는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부상했다. 스티브 잡스는 컴퓨터, 할리우드에 이어 음악 산업까지 리드하는 시대의 아이콘이다. 
 

그는 또 냉혹하고 인정사정없는 협상의 달인이다. 애플사 직원들이 행여 그와 마주칠까봐 그와 겹치는 시간대에 사내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그는 독재자형 보스이기도 하다. ‘유능하고도 무서운 폭군’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스티브 잡스의 전부일까? 물론 잡스는 천재적인 혜안과 통찰력을 가졌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인생에서 여러 번의 위기를 겪었다. 그리고 다른 평범한 사람과는 달리, 그 위기를 기회로 탈바꿈시켰다.  

아마도 이것이 스티브 잡스의 ‘가장 남다른 점’일 것이다.
잡스는 언론과의 접촉을 꺼린다. ‘포천’ 등 오래전부터 그와 ‘특별한 관계’를 구축해온 몇몇 언론사를 빼놓고는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는다(이 때문에 애플 직원들은 기자들과 만날 때 대체로 익명을 요구한다. 심지어 잡스에 대해 찬사를 보낼 때도 마찬가지다). 이런 ‘은둔자 잡스’가 자신의 지난날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2005년 8월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장에서다. 졸업식 연사로 나선 잡스는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오늘이 내가 대학 졸업식장에 가장 가까이 온 날이다”라고 말문을 열면서 자신의 살아온 날들을 ‘세 개의 이야기’로 요약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자신이 블루칼라 가정의 입양아로 자라다가 대학을 중퇴한 사연이다. 두 번째는 애플을 창업해 승승장구하다 서른 살에 애플에서 축출된 사연, 그리고 마지막으로 애플에 복귀해 보란 듯이 성공하지만 췌장암 선고를 받고 회복되기까지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방법으로 이 세 가지 위기를 벗어났을까?
“생모는 미혼의 대학원생이었기 때문에 나를 입양 보내기로 결정했다. 생모는 내가 꼭 대졸 학력 부모에게 입양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래서 태어나기 전까지 나는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기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내가 막 태어나기 직전, 변호사 부부는 마음을 바꾸어 여자아기를 원한다고 말했다.”(2005.8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 중)  



스티브 잡스
● 195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출생
● 1972년 리드 칼리지 입학, 입학 후 한 학기 만에 중퇴
●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과 컴퓨터회사 ‘애플’ 설립
● 1980년 애플, 미국 증권거래소 상장
● 1985년 애플 이사회 스티브 잡스 CEO직에서 축출. ‘넥스트’ 설립
● 1986년 루카스 필름의 컴퓨터그래픽 파트 인수해 ‘픽사’로 개명
● 1991년 스탠퍼드 대학 MBA 과정에 재학 중이던 로렌 파월과 결혼
● 1995년 ‘토이스토리’ 개봉, 1995년 최다 흥행수익 영화로 기록됨
● 1997년 임시 CEO 자격으로 애플 복귀
● 1998년 애플, ‘아이맥’ 출시
● 2001년 애플 정식 CEO로 임명됨
● 2004년 스탠퍼드 대학 부속병원에서 췌장암 수술 받음
● 2007년 애플, ‘아이폰’ 개발로 휴대전화 시장에 진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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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말년
2000년 대통령선거 기간 부시와 체니 후보의 연설을 주의 깊게 들으면서, 클린턴은 공화당이 집권하면 8년간 자신과 민주당이 추진해온 정책들이 원점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어두운 예감에 사로잡혔다. 특히 경제, 환경, 국제 문제에 대한 부시 당선자의 보수적인 관점은 클린턴과 너무도 달랐다. 클린턴의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부시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부유층을 중심으로 한 큰 폭의 세금감면을 실시했고 세계 곳곳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벌였다.  

클린턴이 5590억달러까지 끌어올려놓았던 재정흑자는 8년 만에 1조달러가 넘는 재정적자로 급선회했다. 또 부시 행정부의 무모한 패권주의로 인해 미국과 전세계 국가들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클린턴의 예상대로 모든 것은 원점으로, 아니 원점보다 더 나쁜 상태로 되돌아갔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며 클린턴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나 클린턴의 업적이 모두 원점으로 되돌아간 것은 결코 아니다. 현재 오바마 행정부가 총력을 기울이는 의료보험 개혁 프로그램은 16년 전 클린턴이 추진하다 좌절되었던 의료보험 개혁안과 상당부분 비슷하다. 또 국무장관으로 입각한 힐러리를 비롯해 과거 클린턴의 행정부에서 일했던 각료들 중 상당수가 오바마 행정부에 다시 기용되었다. 마이너리티를 배려하고 갈등과 대결보다는 대화와 통합을 중시하는 오바마의 국정철학은 분명 클린턴과 닮은꼴이다. 클린턴은 강대국 미국 호(號)를 8년간 성공적으로 조종한 훌륭하고도 명민한 정치가였다.  


클린턴은 퇴임 후 아칸소 주 리틀록에 ‘클린턴 도서관’을 세웠고 에이즈 퇴치, 지구온난화 방지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는 윌리엄 J 클린턴 재단의 대표로도 활약하고 있다. 폴라 존스와의 소송비용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던 빚도 강연과 저술 수입으로 다 갚았다는 후문이다.  


8월5일, 귀환하는 여기자들을 맞은 버뱅크 공항의 환영 인파 중에는 ‘커런트 TV’의 설립자이자 클린턴의 러닝메이트였던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이 있었다. 8년간 미국의 대통령과 부통령이었던 ‘왕년의 사나이들’은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뜨겁게 포옹했다. 세월의 흐름과 상관없이 그들은 여전히 멋졌다. 조금 지친 표정이었지만, 막 어려운 임무를 끝낸 클린턴은 몹시 만족스럽고 또 행복해 보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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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에서도 클린턴 캠프는 공화당을 앞섰다. 클린턴 캠페인의 세 가지 핵심 공약, 즉 ‘변화 / 문제는 경제다 / 의료보험을 기억하라’는 1990년대 초의 미국인들에게는 심각하고 현실적인 문제였다. 반면 조지 부시 후보는 걸프전 승리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김으로써 지지 기반을 급격하게 상실했다. 선거 결과는 변화를 원하는 미국인들의 갈망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클린턴은 43%의 지지율로 37.4%의 표를 얻은 조지 부시, 18.9%의 로스 페로 후보를 꺾고 미국 제 4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불과 마흔여섯 살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존 F 케네디에 이어 미국 역사상 세 번째로 젊은 대통령이 된 것이다.  


섹스 스캔들, 또는 우익의 음모  


1998년, 클린턴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로 한창 궁지에 몰려 있을 때, 힐러리는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것은 우익의 음모’라고 맞받아쳤다. 실제로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가 진행한 4년간의 조사는 클린턴 개인을 옭아매려는 공화당의 음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국민 대다수는 백악관의 인턴을 데리고 불장난을 한 클린턴의 처신을 비난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이 탄핵을 당할 만큼 심각한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모니카 르윈스키의 증언에 따르면, 국방부 인턴이던 르윈스키는 1995년 11월부터 1997년 3월까지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에서 클린턴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자신의 친구인 린다 트립에게 전화로 이런 이야기를 했고, 트립은 이 전화 내용을 녹음해서 스타 검사에게 전했다. 이 와중에 클린턴의 정액이 묻은 르윈스키의 드레스가 증거물로 등장해 미국인을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클린턴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인턴과 성관계를 했다’는 것이 위법일 수는 없다. 스타 검사 측이 탄핵의 이유로 내세운 것은 클린턴이 성관계를 하고도 관계가 없었다고 위증했으며, 르윈스키에게도 위증을 하라고 지시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대통령 탄핵감으로는 지나치게 가벼운 문제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오히려 범죄라면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4년 동안 4000만달러의 예산을 쓴 스타 검사 측이 더 많은 범죄를 저지른 셈이다. 예를 들면 스타 검사가 린다 트립에게 면책특권을 약속하고 르윈스키와의 대화를 녹음해 22시간 분량의 테이프를 만든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익의 음모’라는 힐러리의 공격은 분명 일리가 있다. 국민 대다수는 당연하게도 클린턴 개인의 도덕성보다는 의료보험이나 교육, 실업률, 총기 규제 등 실생활에 연관된 정책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이 같은 문제에서 클린턴 행정부는 대부분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더욱이 집권 2기를 맞고서도 클린턴의 젊고 신선한 이미지가 여전히 어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화당은 더더욱 클린턴 끌어내리기에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공화당원들이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을 중심으로 하원에서 클린턴의 탄핵 동의안을 통과시킨 것은, 이 문제를 질질 끌고 감으로써 국민들에게 “어휴! 이제 클린턴이라면 지긋지긋해”라는 혐오감을 부추기기 위한 것이었다. 어차피 대통령 탄핵은 상원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야 하는 문제였다. 상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공화당의 ‘클린턴 흠집내기’는 성공한 셈이다. 2000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를 누르고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가 당선되었으니 말이다. 텍사스 출신의 부시 후보는 매우 보수적이고 도덕적인 성향의 후보였고, 이런 면모는 클린턴의 ‘리버럴함’에 신물난 유권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고어의 선거운동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 클린턴은 고어에게 “선거운동에 도움이 된다면 내가 ‘워싱턴 포스트’ 사옥 앞에서 당신에게 채찍으로 맞아도 좋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대체 왜 클린턴은 르윈스키와 위험천만한 불륜을 저질렀던 것일까? 이미 그는 민주당 후보 시절 제니퍼 플라워스와의 스캔들로 한번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몇 년째 끌고 있던 폴라 존스와의 성희롱 소송 재판으로 인해 재산의 반 이상을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그는 또다시 르윈스키와 2년에 걸친 밀회를 즐겼던 것이다. 일부 언론은 클린턴이 힐러리와 결혼한 직후부터 외도를 시작했으며, 그가 불륜관계를 맺은 여성이 100여 명에 달할 것이라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정신분석학자인 제롬 레빈 박사는 ‘클린턴 신드롬’이라는 책을 통해 클린턴이 일종의 섹스중독증, 즉 섹스를 통해서 자신의 성공을 확인하려 하는 정신병적 증상을 보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으나 정신적인 고독을 채우지 못한 중년 남성들이 모험적인 섹스에 집착함으로써 이 허전함을 잊어버리려고 한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이 책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자들의 섹스중독증은 ‘클린턴 신드롬’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채울 수 없었던 아버지의 빈 자리  


그렇다면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클린턴 신드롬’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클린턴은 출생 직후부터 다섯 살 때까지 부모가 아닌 외조부모의 손에서 컸다. 아버지는 아예 없었고,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간호사가 되기 위해 아이를 떼어놓고 간호학교에 다녔다. 외조부모 역시 야채가게를 운영하느라 늘 바빴다. 다섯 살 때 생긴 양아버지는 폭력을 일삼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클린턴은 자서전 ‘빌 클린턴: 마이 라이프’에서 “나는 열 살 때까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다”라고 쓰고 있다.  


10대의 클린턴은 존 F 케네디와 마틴 루터 킹, 로버트 케네디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아 정치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그는 미국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꿈을 이룸으로써 자신의 롤 모델들 못지않게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인생의 롤 모델이라는 것이 과연 외형적인 성공만을 가르쳐주는 사람일까? 그에게는 함께 축구나 낚시를 하고 수학문제를 풀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줄 아버지가 없었다. 케네디나 킹 목사는 훌륭한 롤 모델이었지만, 그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함께 살을 맞대고 때로 어깨를 기댈 수 있는, 따스하고 든든한 아버지의 존재였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클린턴은 대단한 독서가다. 특히 문학과 역사책을 좋아해서 조지타운 시절 강의 시간에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다가 들키기도 했다. 옥스퍼드와 예일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역사와 문학서적을 읽었고 신혼여행길에도 읽을 책을 여러 권 가져갔다. 명민한 남자 클린턴은 분명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있었고, 책을 통해 그 문제에서 벗어나려 애썼던 것이다. 그러나 한 아이의 어린 시절에 드리워진 문제는 때로 그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심각하고 결정적이다. 클린턴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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