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설 때면 ‘오늘도 신나게, 미친 듯이 놀다 오자’고 해요.
스스로에게든, 남에게든 도움이 되도록 살아야죠”



존재만으로도 흐뭇해지는 사람이 있다. 세계적인 셰프 에드워드 권(권영민). 이른바 7성급으로 통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호텔 수석 총괄주방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그가 몇 달 전 전격 고국행을 택했다. 요리사 그 이상의 행보로 주목을 받고 있는 그는 요즘 제2, 제3의 에드워드 권을 만들기 위한 작업으로 분주하다. 오픈 시간을 앞두고 손님 맞을 준비가 한창인 ‘에드워드 권 한국 1호 레스토랑’ 에디스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편집자 주)



김진세_ 날이 많이 추워졌지요?

에드워드 권_ 네, 평균 기온이 50℃에 육박하는 두바이에 있다가 왔더니 서울이 너무 추워요.

김진세_ 요즘 권 셰프 이야기 많이 들어요. 세계적인 요리사로 권 셰프를 성장시키고 이렇게 행복할 수 있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이 무엇인지 오래전부터 궁금했어요.

에드워드 권_ 이거 무서운데요. 심리전 같기도 하고(웃음). 저는 있는 그대로 얘기를 잘해요. 욕도 막 해요(웃음). 성격상 말을 가려가면서 잘 못해요. 박사님께서 잘 알아서 그 힘을 찾아봐주세요.

김진세_ 한창 출연 중인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 ‘예스 셰프’를 봤거든요. ‘삐리리’ 처리되는 그 부분 말씀하시는 거죠?(웃음)

에드워드 권_ (웃음) 맞습니다. 그래도 굉장히 많이 자제해요. 좋게 말하면 몰입인데, 제가 건성건성 하는 걸 싫어해요. 그렇다 보니 순간적으로 받치면 확 나오는 거예요(웃음). 2, 3회 때까지는 ‘삐리리’ 처리가 정말 많았어요. 시청자 게시판은 별로 신경 안 쓰는데, Q채널 프로그램 중에서는 가장 말 많은 프로그램이라고 하더라고요. 케이블 프로그램치고는 굉장한 시청률이라고도 하고요.

# 에드워드 권을 바꾸는 마법의 흰색 조리복
김진세_ 얼마 전 ‘예스 셰프’가 독립제작사협회로부터 최우수상을 수상하셨죠? 축하드립니다. 예전에 즐겨 보던 ‘헬스 키친’이라는 외국 프로그램보다 훨씬 긴장감이 있더군요.

에드워드 권_ 저희 프로그램은 요리사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내용이에요. 고든 램지의 ‘헬스 키친’은 집단에 임무를 주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나 실수를 끄집어내는데, ‘예스 셰프’는 완벽한 개인플레이예요. 또 도전자들 철저하게 처음부터 자신이 직접 음식을 만들거든요.

김진세_ 제가 보기에도 ‘예스 셰프’는 굉장히 창의적이었어요.

에드워드 권_ 프로그램상에서는 제가 “사막에서 혼자 살아남는 요리사를 만들고 싶다”고 얘기했어요. 어느 시청자가 요리 프로그램인데 휴대용 가스레인지 놓고 조리한다고 지적하셨는데, 제 맘 같아서는 장작불을 지피고 싶어요. 그만큼 도전자 스스로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역량을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제작 여건상 쉽지가 않아요. 일부 시청자들은 프로그램 저변의 뜻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단순히 재미로만 받아들이고 있다는 데 대한 아쉬움도 있고요.

김진세_ 권 셰프가 방송을 통해 지금껏 성장하고 자라온 요리사로서의 과정을 보여주려는 거 같아요.

에드워드 권_ 네, 그렇죠.

김진세_ 프로그램을 보면 도전자들에게 굉장히 엄하시잖아요?

에드워드 권_ 막말로 ‘지랄’ 맞죠(웃음)

김진세_ 집에서 아이들에게도 엄하게 교육하세요?

에드워드 권_ 혹시 평소에는 온화하던 아빠가 운전대만 잡으면 갑자기 늑대로 변하는 공익광고 기억하세요? 제가 정말 그런 성격이에요(웃음). 사복 입었을 때는 털털하게 농담도 하고 장난도 많이 치는데, 조리복만 입으면 날카로워져요. 조리복에 뭔가가 있는 거 같아요(웃음). 옷도 옷이겠지만, 직업적인 마인드 때문이겠죠. 집에서 아이들에게는 온화한데, 잘못을 저지르면 굉장히 엄하게 대하죠. 솔직히 말하면 때릴 때도 있어요. 두바이 있을 때는 아들 엉덩이에 멍이 들어서 학교에 끌려갔다온 적도 있어요(웃음).

김진세_ 정신과 의사 아버지도 아들을 때리는데요, 뭘.

에드워드 권_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자리에서 지적하지 않으면 그 실수를 반복하거든요. 특히 요리가 그런데, 자식 교육도 마찬가지인 거 같아요. 사실 요즘은 아이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어요. 큰아이가 아홉 살, 작은아이가 네 살이거든요. 제가 보통 자정이나 새벽 1시 무렵에 들어가면 아이들은 자고 있죠. 그럼 저는 책 보고 메뉴 작업하다가 새벽 4시 반쯤 잠이 들어요.

김진세_ 그 시간에 주무시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거예요?

에드워드 권_ 보통 7시 30분에서 8시 사이에 일어나요. 두바이 있을 때는 4시간은 잤는데, 한국 오고 나서 2시간 정도로 줄었어요.



김진세_ 그러면 졸리지 않으세요? 건강은 어떻게 관리하시는지.

에드워드 권_ 예전에는 ‘한약발’을 좀 받았는데 요즘은 약 지으러 갈 시간이 없어서 그냥 비타민 C 먹는 걸로….

김진세_ 일을 통해서 에너지를 얻으시는군요.

에드워드 권_ 저는 전형적인 워커홀릭이에요. 밖에 나가 있어도 하루 스무 통씩 가게로 전화를 해서 이것저것 물어봐요. 직원들이 전화 좀 그만하라고, 바빠 죽겠다며 전화를 끊죠(웃음).

김진세_ 이번이 긍정의 힘 열두 번째 인터뷰인데, 인터뷰이들은 하나같이 잠도 못 자고 바쁘게들 사세요. ‘성공하려면 잠을 자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거 같아서 염려될 정도예요. 아까 직원분으로부터 또 다른 레스토랑을 오픈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더 바빠지실 텐데.

에드워드 권_ 네, 한남동에 비스트로 개념의 레스토랑 ‘더 스파이스(The Spice)’를 오픈할 예정이에요. 「레이디경향」을 통해 이름을 처음 공개하네요. 1월 중순 그랜드 오픈에 앞서서 그동안 도움 주신 분들이나 결식아동 등을 초대해서 일주일 정도 무료로 대접하는 행사를 계획하고 있어요.

김진세_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어떤 곳이 될지 궁금해요.

에드워드 권_ 이태원이 인접한 곳이니만큼 서양 음식을 기본으로 하되 한국의 식재료를 활용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참외 하면 우리는 그저 과일로만 알고 먹었잖아요? 그런데 참외에 송로오일이라든가, 버터와 익힌 새우를 넣으면 훌륭한 수프가 될 수 있어요. 메뉴판에도 ‘참외’라고 영문 표기할 거예요. 그럼 이 수프를 맛있게 먹은 외국 관광객들이 대체 참외가 뭐냐고 묻겠죠? 그럼 참외는 ‘코리아 멜론’이라고 가르쳐줄 거예요. 혹시 압니까? 그 사람을 통해 우리의 참외가 수출될 수도 있을지.

# 전문가의 입맛을 가진 아홉 살 아들
김진세_ 한국 음식의 세계화 작업이군요. 내년 1월이 기대되는데요. 권 셰프는 방송에서도 굉장히 멋있어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예쁜 아가씨들이 에디스 카페에 많이 온다는데, 부인께서 걱정 안 하세요?(웃음)



에드워드 권_ (웃음) 집사람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김진세_ 아니, 왜요?

에드워드 권_ 집사람이 유학파 출신이고 사회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그런 데 있어서 굉장히 쿨해요. 대신 “걸리지만 마라. 걸리면 그날로 ‘아작’난다”는 말은 하죠(웃음). 최근 들어서 제가 공인이 되다 보니 오히려 더 안심하는 거 같아요. 더군다나 제가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셔요. 술집에 갈 일이 거의 없고 돌아다니는 곳이 뻔하니까. ‘네가 뛰어봤자 벼룩이지’라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웃음).

김진세_ 결혼 후 일주일 만에 미국으로 가셨다면서요?

에드워드 권_ 제가 집사람과 만나 91일째 되는 날 결혼식을 올리고, 100일째 되는 날 미국으로 갔죠. 신혼여행을 아직도 못 갔어요. 미국에 갈 때는 거짓말로 꼬드겼죠.

김진세_ 2000년, 한국에서 특급호텔 잘 다니다가 샌프란시스코행을 결심할 때 얘기죠?

에드워드 권_ 샌프란시스코에 금문교, 피셔맨스 워프, 앨커트래즈 등등 볼거리가 많으니 신혼여행을 거기로 가자고 했죠. 그렇게 가서 첫째가 태어난 거죠(웃음). 둘째는 W호텔 근무할 당시 한국에서 낳았고요.

김진세_ 미국, 중국, 두바이로 이직하는 동안 내내 가족과 함께 움직이셨군요.

에드워드 권_ “왜 한국에 들어왔느냐”는 얘기를 많이 하시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아이들 교육 때문이에요. 국적 정체성에 시달린다고나 할까요? 그나마 큰아이에게는 9년간 4개국이지만, 작은아이는 네 살이 될 때까지 4개국을 돌다 보니 우리말이 어눌해요. 아이랑 얘기하다 보면 답답하니까, 저도 모르게 영어가 나오더라고요. 이건 아니다 싶어서 두바이에 살 때 한국인 선생님을 붙여서 가나다라를 가르쳤는데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어요. 그런 부분들이 안타까웠죠.

김진세_ 아이들이 강한 아빠를 닮았다면 금방 따라올 거예요.

에드워드 권_ 그래주었으면 좋겠어요. 작은애는 저랑 성격이 굉장히 비슷하고 고집도 있는데, 큰애는 너무 착해서 속상할 때가 있어요.

김진세_ 큰아들은 아빠가 만든 음식을 먹고 평가도 제법 한다면서요?

에드워드 권_ 아유, 무서워요 무서워. 왜냐하면 첫째는 갓난쟁이 때부터 음식 먹으러 갈 때 데리고 다녔어요. 그러면서 얻어 먹은 게 있다 보니 입맛이 보통이 아니죠. 오리고기도 미디엄 레어로 굽지 않으면 안 먹어요. 한국 와서 몇 군데 식당에 데리고 갔는데 맛이 없대요. 자기 입맛에 안 맞는대요(웃음).

김진세_ 아니, 불과 아홉 살인데요?

에드워드 권_ 다른 건 몰라도 음식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지적해요. 맛이 없으면 숟가락을 놔요.

김진세_ 큰아이가 아빠처럼 요리사의 길을 걷겠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에드워드 권_ 만약 큰아이가 그러겠다고 하면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프랑스로 보내겠다고 아내에게도 얘기를 해뒀어요. 현지에 제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셰프들이 많으니까요.

김진세_ 부인은 요리를 하신 분이 아니세요?

에드워드 권_ 경영학을 전공했어요. 취미로 특수분장을 배울 정도로 활동적인 사람이에요. 제가 리츠칼튼 호텔에 근무할 때 집사람은 세일즈 마케팅 파트 매니저였어요. 사람을 굉장히 많이 만나는 일을 한 거죠. 결혼 후 바로 미국에 가서 애 낳고 살다 보니 본인의 색깔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거 같아서 미안하죠.

김진세_ 지금은 사회활동을 하고 싶어 하세요?

에드워드 권_ 무슨 일이라도 시켜달라고 해서 가끔씩 제가 뭘 던져주긴 하는데, 아유 이렇게 얘기하면 전형적인 한국 남자라고 할지 모르지만 어쩐지 와이프가 일을 하면 못 미더운 거 있죠?(웃음)

김진세_ 신혼여행을 아직도 못 가셨다니, 가족 여행은 엄두도 못 내고 살았겠어요.

에드워드 권_ 집사람이 “어떻게 결혼해서 외국에서 살면서 찍은 사진이 열 장도 채 안 되느냐”고 하는데, 그나마도 ‘어머니의 날’ 같은 때 어쩔 수 없이 학교에 가서 다른 사람들한테 휩쓸려서 찍은 사진이에요. 제대로 찍은 가족사진이 없어요. 샌프란시스코에서 5년 가까이 살았는데, 제가 금문교도 못 가봤어요(웃음). 그러니 집사람한테… 많이 미안하죠.

김진세_ 그렇게 바쁘고 정신없게 사시는데, 에드워드 권을 버티게 하는 건 뭔가요?

에드워드 권_ 뭐랄까, 미쳐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나 할까요. 그 힘이 없으면 벌써 하루아침에 맛이 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처럼 제가 미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딱 끊기면, 아마 폭삭 늙고 아플 거예요.

김진세_ 그런 분들의 특징이 일을 계속 만들죠.

에드워드 권_ 그렇죠!(웃음).

김진세_ 권 셰프에게 일이 주는 의미가 워낙 커서 그럴 거예요.

에드워드 권_ 아마 그럴 거예요. 저한테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아니 어떤 때는 꿈에서도 메뉴를 만들어요. 그래서 항상 두통약을 달고 살아요. 박사님은 아시겠지만, 항상 커다란 돌을 가슴에 얹고 있는 것 같고요. 가끔씩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죠. 어젯밤에는 제 블로그에 ‘공인이 되고 난 뒤로 못하는 일이 너무 많아졌다’고 썼어요. 저는 연예인도 아니고 또 연예인이 되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거든요. 그런데 식당에 가면 저를 연예인 취급하세요. 가게에 붙여놓는다며 사인 요청도 하시고요. 저도 제 이름 걸고 식당 하는 사람인데, 남의 식당에서 사인해달라면 뭐라고 쓰겠어요?(웃음) ‘맛있었습니다. 건승하세요. 에드워드 권’이라고 쓰면서 그럼 내 식당에 내가 사인해서 붙여놔야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웃음).

김진세_ 불편한 점이 있으시군요.



에드워드 권_ 네. 공인이 된다는 건 감수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제가 안타까운 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저를 포장하려 들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제가 가끔 정부시책 같은 것을 신랄하게 비판할 때가 있어요. 그건 누구를 탓하는 게 아니라 제가 느낀 점이나 필요한 것에 대해 얘기를 하는 건데 저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해요. 문제는 제가 하는 말을 충고로 듣는 게 아니라 비판으로 받아들이는 분들이에요. 그런 점은 보완이 됐으면 좋겠어요.

김진세_ 공인이 되면 자꾸 덩치가 커지니까 조금 잘못 움직여도 옆에서 깔려 죽는 느낌, 이런 게 있어요.

에드워드 권_ 네. 제가 강해 보이지만, 솔직히 얘기해서 강하지 않아요. 어찌 보면 누구보다도 약해요. 그 약한 걸 보여주고 싶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강해지려고 자꾸 몰아세우는 거죠. 산악인 허영호, 엄홍길씨 같은 분들을 보면, 과연 그분들 자체가 강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일상을 보면 전혀 강하다는 느낌이 없거든요. 그분들도 저처럼 스스로의 약함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극한까지 밀고 가는 게 아닐까, 해요.

# 귀하게 자란 장손, 요리를 위해 칼을 쥐다
김진세_ 어려서는 굉장히 사랑받으면서 자랐을 거 같아요. 장손이시잖아요.

에드워드 권_ 할아버지가 8남매를 두셨는데 집안에서 제가 유일한 손자였어요. 할머니는 거의 저를 신격화하셨고(웃음). 반대로 아버지는 굉장히 엄격하셨어요.

김진세_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왜 그렇게 엄하셨죠?

에드워드 권_ 아버지도 일중독이셨던 걸로 기억해요. 대한통운 지사장으로 정년퇴직하셨는데, 주말에도 일하러 나가셨어요. 그럼 전 아버지를 만나러 회사에 갔었죠. 그런데 가보면 제가 보기에는 다들 놀고 계세요(웃음). 아버지가 일에 빠져 사는 걸 보면서 난 저러지 말아야지 했었죠.

김진세_ 그런데 똑같이 워커홀릭이잖아요?

에드워드 권_ 네. 일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구나, 싶어요. 아버지가 굉장히 열정적이고 다혈질인데다가 표현력이 풍부하셨는데, 일을 하다 보면 저에게서도 그런 면이 나오는 거 같아요.

김진세_ 어머니는 어떠셨나요?

에드워드 권_ 굉장히 조용하셨죠.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어머니가 집에 계시는지조차 모를 정도였어요(웃음). 밥 차려주실 때 빼고는.

김진세_ 무녀독남 외아들이셨어요?



에드워드 권_ 세 살 아래 여동생이 한 명 있는데 외국에 나가 있어요.

김진세_ 혹시 요리와 관련된 일을 하나요?

에드워드 권_ 물리치료사예요. 저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죠. 아, 흰옷을 입는 것 같네요(웃음).

김진세_ 흰옷은 저도…(웃음). 어려서는 신부님이 되고 싶으셨다고요?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어요?

에드워드 권_ 부모님은 괜찮으셨는데, 할머니께서 반대하셨어요. 불교 를 믿으셨거든요. 외가 쪽이 워낙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이세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복에 대한 동경이 약간 있었던 거 같아요.

김진세_ 그런 것도 있지만, 신부님들도 굉장한 권위를 가지고 있잖아요. 감히 누가 범접할 수 없는.

에드워드 권_ 제 성격이 ‘모 아니면 도’ 같은 면이 있어요. 아예 화려하게 살거나, 진짜 제대로 깨끗하게 살거나! 어려서는 영적으로 깨끗하게 사는 신부님들을 봤을 때 정말 멋져 보였어요. 제게 그런 영감을 주신 분이 계세요. 박요왕 신부님의 미사를 듣고 있으면 정말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좋게 말하면 열정적이시고, 나쁘게 말하면 연기력이 뛰어나시다고나 할까. 굉장히 몰입되게 만드는 미사를 하셨어요. 신부님 덕에 신자가 엄청 늘어서 인근에 성당을 하나 더 지을 정도였어요. 그 신부님께서 교황청으로 가시자 신자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김진세_ 연락 한번 해보시죠? 지금의 에드워드 권을 보면 많이 좋아하실 텐데요.

에드워드 권_ 네. 찾아뵙고 싶어요.

김진세_ 학창 시절에는 외향적인 학생이었나요?

에드워드 권_ 자기주장이 굉장히 확실했어요. 항상 리더가 되고 싶어 하는 학생?

김진세_ 싸움도 좀 하시고?

에드워드 권_ 껌 좀 씹었죠(웃음). 지난여름에 출연한 KBS-1TV ‘반갑습니다 선배님’을 본 분들은 저를 ‘고압선’이라고 부르더라고요.

김진세_ 아니, 고압선이 어쨌다고요?

에드워드 권_ 제가 가입했던 불량 서클 이름이 고압선이라서요(웃음). ‘건드리면 죽는다’ 이거죠(웃음).

김진세_ (웃음) 학창 시절에 별명이 있었어요?

에드워드 권_ 이름이 영민이고, 굉장히 말라서 양미리라고 불렸어요. 강원도 동해에 양미리가 많이 나거든요. 그 별명은 중학교쯤 되어서 사라지더라고요.

김진세_ 아, 고압선 덕분에?

에드워드 권_ 제가 싸움을 잘해서가 아니라 조직에 ‘작살’ 날 수 있기 때문에요(웃음). 중학교 때까지는 굉장히 조용하고 공부만 하던 학생이었어요. 신부님이 되고 싶었다고 했잖아요? 보통 가톨릭 신학대를 가려면 고2때 결정을 하고 거의 사제관에서 살아야 해요. 그런데 할머니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막나가기 시작했어요. 초등학교 졸업식 때는 최고상인 도교육감 상도 받고, 강원도 고교 랭킹 3위에 드는 고등학교에 진학했어요. 매년 서울대에 20명 이상 합격하니까 지방 고등학교치고는 대단한 거죠. 그런데 2학년 때부터 완전히 다른 쪽으로 빠졌어요.

김진세_ 할머니와의 갈등이 크게 작용했나 봐요.

에드워드 권_ 거기다가 사춘기까지 겪다 보니 더 그랬죠. 제가 그때 담배를 배웠어요.

김진세_ 신부님 말고 다른 꿈도 있었어요?

에드워드 권_ 꿈이야 많았죠. 경찰, 군인, 정치가… 교수도 되고 싶었고. 최근 제 블로그에 ‘비판하는 사람과 비판받는 사람, 꿈을 이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꿈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에 대한 글을 썼는데, 꿈은 항상 바뀌는 거라 생각해요. 사람들이 저를 성공한 사람으로 얘기하는데, 저는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지금 그 길을 가고 있는 중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좋은 책은 아니지만, 자전적 에세이 한 권을 썼어요.

김진세_ 그 책, 저도 갖고 있어요.

에드워드 권_ 좋은 책은 아니지만, 나름 팔렸고 드라마로도 나와요. 꿈이라는 건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최근에 강릉에서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가 있었어요. 누군가 제게 “네가 선거에 출마하면 당선될 확률이 클 것이다”고 하더라고요. 시민들이 다른 후보는 몰라도 에드워드 권은 안다는 거예요. 제가 2007년 버즈 알 아랍 호텔 수석 총괄주방장으로 들어갔을 때, 대관령 넘어서 강릉으로 진입하는 길 초입에 강릉시에서 플래카드를 붙였대요. 지역사회에서는 이미지 메이킹이 잘 되어 있다는 말이죠.

김진세_ 정치하실 거예요?

에드워드 권_ (손사래를 치며) 전혀요, 전혀. 연기자 출신 정치인도 있다며 “에드워드는 정치 쪽 생각 없냐”고 묻는 분들이 있는데, 전 요리사고 셰프일 뿐이에요. 정치 쪽으로는 전혀 재목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김진세_ 그런데 왜 이름이 에드워드인가요?

에드워드 권_ 저도 권영민이라는 이름을 쓰고 싶어요. 드라마나 순정만화의 멋진 주인공 이름으로도 꽤 쓰인 이름이거든요. 그런데 못 쓰는 거예요. 외국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많은 분들이 저를 에드워드로 알고 있어서 이제 영민으로 바꾸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까요. 아, 그런데 왜 에드워드로 지은지는 아세요?

김진세_ 글쎄요? 무슨 뜻이 있나요?

에드워드 권_ 제가 좋아하는 셰프이자, 멘토인 사비에르가 지어준 거예요. 미국 생활 하려면 평범하게 부를 수 있는 미국 이름을 만들라기에 알았다고만 했는데, 이틀 뒤 스케줄표에 제 이름 ‘영민 권’이 없어졌어요. 대신 에드워드란 이름이! 왜 내 이름이 빠진 거냐고 했더니 “네 이름이 에드워드야”라고 하시더라고요. 우리 주방 전체에 에드워드라는 이름이 없다며. 그럴 줄 알았으면 피터슨이나 니콜라스 같은 멋있고 색다른 이름으로 할 걸 그랬다 싶죠(웃음). 그나마 다행인 게 (세계적인 요리사) 고든이나 제레미가 아니기에 망정이지. 그랬으면 이름까지 흉내 냈다고 댓글에 올라오지 않았을까요?(웃음)

김진세_ 아직 꿈을 꾸고 계시고 갈 길이 멀지만 그동안 가장 행복했던 때와 불행했던 때를 꼽아보자면요?

에드워드 권_ 지금도 매일 최고의 행복과 불행을 넘나들며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가장 행복한 순간은 주방에 있을 때죠. 지금도 제가 천생 셰프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한번 몰래 와서 보세요. 여기 30평밖에 안 되는 공간에서 저 일할 때는 난리도 아니에요. “야 이런 XX야, 이걸 음식이라고 만들어”라고 호통도 치고. 그럼 어떤 손님은 “셰프님, 그만 하세요. 젊은 사람이 안됐어요”라고 하시는데, 그럼 저는 음식을 가리키면서 “이거 손님이 드실 건데요”라고 해요. 그렇잖아요? 자기가 먹을 음식이라면 대충 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김진세_ 에디스 카페에서 안 되는 게 있다면서요? 피클이 안 나온다는!

에드워드 권_ 제 음식 먹으러 오신 거지, 피클 먹으러 온 거 아니잖아요. 피클 찾는 손님들에게는 “셰프님이 이 음식은 피클 없이 드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해요. 피클을 주기 시작하면 레스토랑 색깔이 사라져요. 피클을 드리면 단무지를 찾고, 나중에는 김치를 찾아요. 김치 찾을 거면 외국 식당에 왜 왔느냐는 거예요. 아이러니한 게 우리 음식은 굉장히 짜요. 반면 서양 음식이 조금만 느끼하고 짜면 이걸 어떻게 먹으라고 주었느냐고 하시죠.

김진세_ 외국 사람들은 거꾸로 생각하지 않나요?

에드워드 권_ 그렇죠. 프랑스 요리가 세계화가 됐다? 그만큼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에요. 현지에서 서양 음식을 드시면 굉장히 짜다고 느끼실 거예요. 왜 짤 수밖에 없느냐? 그건 빵하고 같이 먹으면 되는 거예요. 간이 센 음식이 나쁘다? 어떤 소금을 어떤 식으로 썼느냐에 따라 차이가 생기는 거지, 무조건 짜다고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딱 까놓고 얘기해서, 인생 얼마나 산다고요. 전 물어보고 싶어요. 싱겁게 먹는 사람들이 연구결과로는 수명이 길다고 하지만 과연….

김진세_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에드워드 권_ 네. 그래서 셰프의 한 사람으로서 ‘이왕 먹을 거 맛있게, 잘 먹으면서 살자’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김진세_ 그럼 요리할 때가 가장 행복하시고 불행할 때는 피클 찾는 손님 만났을 때?(웃음)

에드워드 권_ 그런 게 아니라(웃음). 하지만 가끔 대놓고 화를 낼 때도 있어요.

# 꿈에서도 메뉴 개발하는, 천생 요리사
김진세_ 권 셰프 같은 워커홀릭의 경우 ‘내가 없으면 뭔가 안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잖아요. 그래서 독수리 5형제가 지구를 못 떠나듯이(웃음).

에드워드 권_ 오죽하면 밖에 있다가도 막 주방으로 들어가서 “야, 너 저리로 가” 하고 제가 프라이팬 잡고 일해요(웃음).

김진세_ 권 셰프가 가장 좋아하는 요리는 뭔가요?

에드워드 권_ 개인적으로 분식을 엄청 좋아해요. 김밥, 떡볶이, 어묵…. 아, 여기 푸드코트에서 파는 어묵이 진짜 맛있어서 하루에 세 번도 가요. 한번 드셔보세요. 요만한 게 2천원이라 비싸긴 한데, 진짜 맛있어요. 저는 음식은 가리지 않아요. 길거리 가다가 떡볶이 팔면 들어가서 잘 사 먹거든요. 얼마 전에는 강남역 근처에서 떡볶이를 먹는데 아주머니가 알아보시고 “에드워드도 이런 음식 먹느냐”고 하셔서 “저도 사람인데요(웃음)”라고 했죠.

김진세_ 그럼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빠의 넘버원 요리는?

에드워드 권_ 큰아이는 제가 만든 떡볶이를 무지하게 좋아해요. 작은아이는 큰아이만큼 먹는 거에 대한 감각이 발달하진 않았지만, 한식을 잘 먹어요. 두 살 때부터 밥, 찌개, 국에 김치 올려서 먹고(웃음).

김진세_ ‘공식 질문’입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긍정의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에드워드 권_ 제가 가지고 있는 힘은… 즐기는 거? 저는 일할 때 논다고 생각하거든요. 집을 나설 때면 ‘영민아 오늘도 나가서 신나게, 미친 듯이 한번 놀다 오자’라고 해요. 그럼 웃음이 나와요. 쉽게 말해 스스로 신난다고 느끼도록 마인드컨트롤을 하는 거죠. 그게 제가 가지고 있는 긍정의 힘이 아닐까 해요. 어차피 시간은 흐르는데 멀뚱하니 있기보다는 스스로에게든, 남에게든 도움이 되도록 살자!

김진세_ 저희 독자들에게도 ‘행복해지려면 이렇게 하라’고 조언해주신다면?

에드워드 권_ 똑같아요. 즐기고 노시라고! 저는 집사람에게도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즐기라고 말해요. 솔직히 말하면 제 또래쯤 되는 분들이 백화점 지하에 마냥 몇 시간씩 앉아 있는 모습이 전 보기 싫더라고요. 모처럼 친구 만나서 한두 시간 밥 먹고 수다 떠는 건 이해하는데, 몇 시간이고 앉아 있는 건, 아유, 용해요(웃음). 자기 자신을 위해 투자하고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김진세_ 외국 생활을 오래 하셔서 변형된 한국인일 거라 짐작했는데, 만나 뵈니 딱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남자가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거네요. 재밌네요.

에드워드 권_ (웃음) 네, 전형적인 한국 남자예요. 그래도 주부들이 좀 놀았으면 좋겠어요. 여자는 전업주부가 되고부터 매너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게, 세상과 단절되잖아요? 세상과의 연결 통로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TV! TV 빼고는 「레이디경향」 같은 주부지밖에 없어서 가끔씩 안타까워요. 친구들끼리 레스토랑에 모여서 식사하는 것도 좋지만, 자연도 보고 미술관과 음악회에도 가셨으면 해요. 그게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요즘은 큰돈 들이지 않고도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많아졌더라고요.

김진세_ 이건 권 셰프를 위해 준비한 질문인데, 행복을 주는 요리법 하나만 알려주신다면요?

에드워드 권_ 행복을 주는 요리라…. 제가 길거리에서 떡볶이 맛있게 먹으면서 “어묵국물 더 주세요”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순간순간 음식을 접할 때 행복하면 그 음식이 행복을 주는 요리가 될 수밖에 없겠죠.

김진세_ 긍정의 힘과 같은 거네요. 그 순간을 즐기면 행복하다고 하셨잖아요. 좋은 말씀이네요.

에드워드 권_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게 의식주(衣食住)라고 하잖아요. 앙드레 김 선생님과 제가 의견 대립이 되는 게, 선생님은 “의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시고, 저는 “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거든요(웃음). 제가 농담 삼아 그러죠. “선생님, 하얀 옷 입지 않고도 살 수 있어요. 하지만 오늘부터 세끼만 굶어보세요. 디자인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요(웃음).” 저는 말 그대로 전 세계인이 요리사라고 생각해요. 아마 박사님도 집에서 혼자 드시기 위해서 요리하실 때가 있을 거예요.

김진세_ 그럼요. 가끔 해 먹죠.

에드워드 권_ 라면 끓여 드세요? 라면 하나에도 본인 스타일이 있을 거예요. 남들보다 파를 더 넣는 사람, 양파나 고춧가루 넣는 사람도 있고요. 달걀 하나도 넣는 방식이 다 달라요. 맨 마지막에 살짝 올려서 먹는가 하면 일찍 넣어서 팔팔 끓여 먹는 사람이 있죠. 왜냐면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 음식을 만들면 다 요리사예요. 라면 하나도 내 입맛에 맞게 정성을 들이듯이 모든 음식을 그런 마음으로 대하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레이디경향」 독자들에게 하고 싶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달걀 안 넣어요. 국물 맛을 죽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웃음).

김진세_ 주부들은 남편이나 아이들 식사는 잘 챙겨도 혼자서는 대충 먹곤 하잖아요.

에드워드 권_ 저도 많이 굶어요. 요리사야말로 굉장히 배고픈 직업이에요. 남의 음식 챙기기에 바빠서 자기 음식을 챙길 수가 없어요. 저도 하루 한 끼 먹기 일쑤죠. 운동도 안 하죠. 끼니를 굶으니 영양분 섭취 거의 못하고 담배 피우고, 게다가 제가 또 콜라를 좋아해요. 어찌 보면 전 세상에 나쁜 건 다 하고 살아요(웃음).

김진세_ 아, 슬슬 레스토랑 오픈할 시간이 되어가네요. 독자들께 더 해주고 싶은 말씀 있으세요?

에드워드 권_ 많은 분들이 요리사가 참 좋은 직업이라고 말씀하세요. 21세기 후반에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망한 직업이라고도 하죠. 제가 하루 평균 80~100통의 이메일을 받아요. 그런데 제가 받는 메일의 80% 이상은 요리사를 꿈꾸는데 부모의 반대에 부딪힌다는 내용이에요. 요리사는 좋은 직업이지만, 내 자식만큼은 이 일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분들이 많다는 거죠.

김진세_ 아직은 그렇군요.

에드워드 권_ 또 이메일 중 상당수가 ‘우리 아이는 성적이 안 돼서 요리라도 시킬까 한다’는 거예요. 공부 못한다고 요리를 시킨다? 그건 아닌 거 같아요. 머리가 나쁘면 요리는 안 하는 게 나아요. 요리를 하려면 똑똑하면서 몸도 빨라야 해요. 순간 판단력도 빨라야 하고 시쳇말로 잔머리도 잘 굴려야 하죠. 순간적인 위기 대처능력도 뛰어나야 하고요. 간혹 그렇지 못한 후배들이 보이면 전 솔직히 “요리하지 말라”고 얘기해요. 상처가 될 수도 있지만 솔직히 인생 선배, 요리사 선배로서 얘기하는 거예요.

김진세_ 와, 벌써부터 손님들이 들어오시는군요. 이제 에드워드 권의 무대가 시작되었네요.

김진세의 에필로그
에드워드 권의 ‘즐거운 카리스마’


어느 날 소년은 가출했다. 권위와 청렴의 상징인 신부가 되지 못한 분을 참지 못해 무작정 집을 나왔고, 우연히 요리를 접했다. 남들보다 2배(그는 하루 4시간만 자고 16시간을 일한다고 하니, 건강한 성인의 정상 수면시간의 반이고 노동시간의 두 배이다)나 열심히 일했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 좋은 요리사가 되는 길을 걸었다. 그리고, 어느 날 세계적인 요리사가 되었다. 정말 동화 같은 이야기다.

물론 이것도 긍정의 힘이다.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정, 기회를 놓치지 않는 영민함, 남다른 근면성, 그리고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학구열. 이 모두 엄청난 긍정의 힘이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다른 에너지가 느껴졌다. 뭔가 범접하기 힘든 에너지, 그 모든 긍정의 힘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 스스로 ‘미쳤다’고 표현하는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에디스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검정 터틀넥 스웨터를 입은 그가 걸어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궁금했었다. 세상에서 가장 요리를 잘하는 사람의 손은 어떨까? 그 손을 잡아보았다. 생각보다는 짧은 손가락과 생각만큼 두툼한 손바닥이었다. 알 수 없는 힘이 전해졌다. 강하다. 날카로운 눈매를 빼고 나면, 미소년의 얼굴을 하고 날씬하다 못해 약간은 가냘파서 강해 보이는 구석이 없는, 이 남자의 손은 강하다.

“난 하얀색 조리복만 입으면 무서워집니다.” 그가 말했다. 순간 뇌리에 스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아, 맞다! 카리스마!’

요즘 장안의 화제인 ‘예스 셰프(Yes, Chef)’를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제2의 에드워드 권을 꿈꾸는 도전자들을 들어다 놨다 하는, 그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강인한 권위가 있다. ‘카리스마’란 다른 사람들을 꼼짝없이 매료시키고 그의 뜻에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렸을 적 동경해 마지않는 신부님과 마찬가지로, 요리사인 그에게는 카리스마적 권위가 있다. 무작정 엄하고 억압적인 것은 아니다. 비록 육두문자를 써가며 사람들을 나무라지만, 결코 사람을 함부로 험하게 다루거나 공격하는 얕은 수의 카리스마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최고의 요리사로 키우기 위한 다그침이었다.

카리스마는 리더십의 중요한 요소이다. 원래 ‘카리스마(Charisma)’란 그리스어(Kharisma)로 ‘신의 축복’을 의미한다. 아무나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리더가 쉽게 나타나지 않듯, 카리스마도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카리스마를 잘못 사용하면 엄청난 혐오감만 불러일으킨다. 사고를 치게 마련이다. 인류를 세계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은 히틀러의 엄청난 카리스마를 잘 알지 않는가.

다행히 그의 카리스마는 즐겁다. 새하얀 조리복을 벗고 주방을 나오면, 소년이 된다. 검은색 스웨터를 입은 그는 손님들이나 직원들과 농담하며 장난스럽다. 앞으로 레스토랑을 수도 없이 만들겠다는 이야기를 할 때, 날카로운 눈매 속에 꿈에 부풀어 한껏 들떠 있는 소년의 눈망울을 보았다. 즐거움이 묻어났다.

카리스마와 소년의 즐거움. 묘하지만 잘 어우러지는 두 가지 속성을 갖고 있는 그는 멋진 사람이다. 독종이라고 불리지만, 그의 음식이 독하지 않은 이유이다. 독하기는커녕, 맛있고 사랑스럽다.
즐거운 카리스마, 그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에드워드 권은…
대학 재수 시절 경양식집 주방 보조를 하며 요리에 대한 소질을 발견한 뒤 영동전문대 호텔조리학과를 거쳐 국내 특급호텔에 입사한 것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글로벌 셰프를 목표로 요리 연구와 영어 공부를 병행한 끝에 2000년 미국으로 무대를 옮겨 리츠칼튼 샌프란시스코 수석 셰프, 쉐라톤그랜드 텐진 호텔 수석 총괄주방장을 거쳐 2007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알려진 두바이의 7성급 호텔 버즈 알 아랍의 수석 총괄주방장에 임명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당신의 요리는 섹스보다 낫다”는 평가는 분명 칭찬이다. 그러나 그 말을 마돈나가 했다면 세계적인 찬사가 된다. ‘스타 셰프’가 고국행을 결심하게 된 건 바로 제2, 제3의 에드워드 권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가 무료 요리학교를 만들 거라는 소식을 들은 수많은 예비 요리사들은 매일매일이 설렌다.



긍정의 힘을 보태는 선물
에드워드 권에게 선물하는 한 권의 책 - 「오늘의 레시피」

맛있는 요리! 너무 좋지요. 아주 유별난 미식가는 아니지만 저도 맛있는 음식을 좋아해서 가끔 주말이면 인터넷 블로그를 살피며 맛집을 찾아다닐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배만 부르다고 사나요? 의복이 최고라는 앙드레 김 선생님과 아무리 그래도 의복이 음식보다는 못하다는 권 셰프는 서로 싸운답니다. 저는 책이 더 좋습니다. 음식만큼 책도 맛있지요.

음식 만드는 데 최고인 그에게 무슨 책이 맛있을까요? 당연히 처음 떠오른 것은 요리책입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요리책은 이사 다닐 때 문제가 될 정도로 많다네요. 그렇다면, 이야기가 맛있는 책을 고르자고 해서, 찾은 책이 「오늘의 레시피좦(다이라 아스코 저)입니다. 일단 선물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셰프가 좋아할 만한 제목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용은 요리책이 아니에요. 음식을 중심으로 정말 유쾌하고 재미있는 짧은 소설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즐거운 인생의 레시피지요.

바라건대, 권 셰프도 이야기가 있는 요리를 만들어내길 빕니다. 어떤 이야기요? 당연히 긍정과 행복에 관한 이야기지요.

*김진세의 인터뷰 _ 긍정의 힘 에드워드 권 편을 읽고 애독자 엽서에 소감을 적어 보내주시는 독자 중 10분을 선정해 에드워드 권에게 선물한 「오늘의 레시피」(문학동네)를 보내드립니다.



김진세 박사는…
여자보다 더 여자 마음을 잘 아는 여성 심리 전문가로 잘 알려진 정신과 전문의. 파리6대학의과대학에서 메조테라피 학위를 받은 뒤 모교인 고려대학교에서 강의 중이며, 고려제일신경정신과에서 일상의 스트레스에 지친 이들을 위한 상담을 하고 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취미이자 특기인 그의 또 다른 재주는 글쓰기. 다년간 여러 매체에 메디컬 칼럼을 써왔으며 「마흔의 심리학」(공저)을 쓰고 「뜨겁게 사랑하거나 쿨하게 떠나거나」를 번역했다. 고민 많은 20대 여성에게 보내는 세심한 위로를 담은 「심리학 초콜릿」에 이어 행복한 시작을 위한 심리학 처방 「스타트 신드롬」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타이틀을 더했다.



[출처] ‘영’리하고 ‘민’첩한 세계적인 셰프 에드워드 권 |작성자 빛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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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2일 고(故) 호암 이병철 회장(이하 호암) 탄생 100년을 맞는다. 일본에서는 삼성의 창업자인 호암이 학문의 영역에 올라 있다. 게이오(慶應)대 종합정책학부 야나기마치 이사오(柳町功·49) 교수는 22년간 호암을 연구해왔다.

야나기마치 교수는 “지난 1세기 최고의 경영자”라고 호암을 평가했다. 지난 20일 야나기마치 교수의 연구실에서 2시간 동안 호암의 기업경영과 철학을 들었다.

-호암은 어떤 사람인가.

“호암 같은 경영자는 현재 일본엔 없다. 그런 스케일과 원대한 철학을 가진 경영자는 일본에서는 메이지(明治) 시대 미쓰비시(三菱)의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
郎) 정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개발도상 단계에서 경제가 올라갈 때 그런 대단한 인물이 나타났다.”

-스케일이 크다고 했는데 어떤 특징이 있었나.

“호암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제조업을 일으킨 사람이다. 해방 후 전쟁 전까지는 외부에서 받은 원조가 아니면 무조건 무역이었다. 내부에서 물건을 만든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삼성물산도 무역업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호암은 무역에 머물지 않고 곧바로 제조업을 시작했다. 주변에선 왜 고생해가며 제조업을 하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호암은 ‘무역만 해서는 안 된다. 들여온 재료로 물건을 만들어서 국민에 공급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만든 회사가 제일제당이다. 당시 국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먹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60년대 말 삼성전자를 만들었고, 70년대 중반부터 중화학공업에 들어갔다. 늘 시대적 요청에 부응했다. 나라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야를 만들고 그 다음에 다른 분야로 다각화했다.”

-어떤 철학을 갖고 기업을 경영했나.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는 마쓰시타 고노스케, 혼다 소이치와 호암의 공통점은 사람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천연자원이 없다. 사람밖에 없다. 사람이 기술을 개발하고 제품을 만든다는 것이 이들의 기본 생각이었다. 호암은 삼성사관학교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인재를 키우고 육성했다. 이따금 인재들이 다른 데로 떠나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봤다.”

-일본 재계에선 호암을 어떻게 평가하나.

“호암의 현역 시절을 기억하는 일본의 재계 인사들은 많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삼성이 지금처럼 큰 회사가 되도록 씨를 뿌리고 환경을 만든 것은 호암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80년대 전두환 대통령 때 나카소네 야스히로(中<66FD>根康弘) 총리와 교류했을 때도 호암의 역할이 컸다. 그는 전면에 많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한·일 관계를 뒷받침한 공이 크다.”

-호암이 일본 경영인과 다른 점은.

“일본 대기업 사장들은 대부분 샐러리맨들이다. 이들은 매일 출퇴근해 하루 종일 회의하고 경조사를 쫓아다닌다. 공부할 시간이 없다는 비판이 있다. 이들은 일상 업무에 너무 바쁘다 보니 깊게 공부할 여유가 없다. 큰 비전을 못 그리는 것이다. 반면 호암은 깊고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어떻게 보면 좀 철학적인 구상도 했다. 오너이기 때문에 시간도 공간도 자유롭게 쓰면서 리더로서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경영인들은 그런 식으로 해야 세계 1위까지 올라가는구나 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

-호암 경영의 강점을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한국 기업 전문가인 일본 게이오대 종합정책학부 야나기마치 이사오(柳町功) 교수가 지난 20일 도쿄 게이오대 연구실에서 삼성 창업자 고(故) 호암 이병철 회장의 경영철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호암은 지난 1세기 최고의 경영자”라고 말했다. [도쿄=김동호 기자]
 
“호암은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중앙집권적인 톱다운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만들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호암이 결정하지는 않았다. 상당 부분을 유능한 전문경영인에게 맡겼다. 통상 오너는 모든 것을 챙기고 밑에는 권한을 주지 않는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있는데 호암은 그렇지 않았다. 시스템을 완벽하게 만들었다.”

-경영체제가 세계적으로 성장한 힘이 됐다는 건가.

“성장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오너 경영이니까 그만큼 빠른 성장이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반도체 산업은 일본·미국·유럽 기업들이 진출해 있어서 이미 과잉경쟁 상태였다. 당시 일본 기업들은 대부분 소극적인 태도로 시장에서 빠져나갔다. 반면 삼성은 앞서 있는 일본 기업들이 후퇴할 때를 틈타 과감하게 투자했다.”

-어느새 삼성이 일본의 전기전자 기업을 추월했다.

“삼성이 1등이 된 이유가 있다. 경영적으로는 과감한 의사결정 시스템, 기술적으론 어느 정도 표준화된 기술을 갖고 대량생산 ·대량판매로 연결시킨 것이 삼성의 힘이었다. 당분간 업계 1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새로운 상품 기술을 개발하지 않으면 1위는 위협받는다. 역시 기술적·창조적 힘이 관건이다. 이런 것은 결국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다. 호암이 삼성에 남긴 인재 제일의 경영철학과 도전정신이 필요한 이유다.”

-호암은 이 시대에 어떤 교훈을 남기고 있나.

“앞으로는 창조적 기술, 창조적인 상품이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아이팟과 같은 새로운 개념·상품·시장을 만들어서 슘페터처럼 창조적인 파괴도 해야 한다. 삼성이 투자할 만한 힘이 있었으니까 대규모로 투자했고, 그 결과 성공했다는 게 세상의 시각이다. 하지만 투자할 힘이 있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시 호암이라는 세기의 경영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은 물론 일본의 젊은 세대들도 탄생 100년을 계기로 호암을 공부해볼 필요가 있다.” 

도쿄=김동호 특파원

◆야나기마치 이사오=일본 최고의 한국 기업 전문가다. 일본 게이오대 상학부에서 학사부터 박사까지 공부한 뒤 한국 기업을 연구하기 위해 1988년 연세대 대학원에서 유학했다. 당시 삼성의 성장은 한국 경제 발전의 압축판이라고 판단해 그 뒤 22년간 삼성과 호암을 연구했다. 일본에서 한국 기업의 역사와 지배구조를 전공하는 교수들과 공동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2002년에는 미국 UCLA대 한국학센터에서 2년간 미국의 시각에서 한국 기업을 연구하기도 했다.
 


 

[출처] “호암은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제조업 일으킨 인물”|작성자 빛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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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이 어떻게 갔는지를 모르겠네요.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지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20년이 훌쩍 지나갔어요."

한 프로그램을 20년간 진행한 소감에 대해 배철수(57)는 이렇게 말했다.



배철수, '음악캠프' 벌써 20년
 8일 오후 여의도 MBC 방송센터에서 열린 'MBC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 20주년 기념 100대 음반 및 서적 출판 기자간담회'에서 DJ 배철수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MBC FM4U '배철수의 음악캠프'(오후 6시)가 방송 20주년을 맞았다. 1990년 3월19일 처음 전파를 탄 이래 다른 팝 음악 프로그램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동안에도 꿋꿋이 버텨 어느덧 20세가 된 것이다.

8일 열린 '배철수의 음악캠프' 20주년 간담회에서 배철수는 "20년간 너무 행복하게 방송을 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혼자서만 행복해도 되나' 하는 생각까지 가끔 한다"며 "그런데 내가 초년고생이 좀 심했기 때문에 그 대가라고 내 자신에게 얘기한다"며 웃었다.

 

그는 얼마나 더 진행할 것 같냐는 질문에 "아주 냉정하게 얘기하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내가 스스로 사퇴할 수는 있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뚜렷하게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당분간은 그럴 일이 없을 것 같다"며 "그것은 청취자들이 결정하는 것이다. 청취자들이 내 방송을 계속 듣기를 원하시면 계속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철수는 20년 장수 비결로 '철들지 않음'을 들었다.

"제 데뷔곡이 '세상모르고 살았노라'였는데, 그래서인지 계속 철없이 살고 있어요. '딴따라'는 철들면 안되는 것 같아요. 특히 음악,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진행자가 철들면 재미없을 것 같아요. 전 요즘도 제 또래들보다는 20~30대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는 방송 20주년을 기념해 '레전드: 배철수의 음악캠프 20년, 그리고 100장의 음반'과 기념 서적을 냈다.

배철수는 "내가 굉장히 내성적이고 소심한 스타일인데 20주년 맞으면서 일이 커졌다. '야, 이쯤에서 은퇴해줘야 진짜 멋있는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며 "사실은 지금 그만둬도 '호상()'이라 생각한다"며 웃었다.

그는 자신이 선정한 음반에 대해 "중학교 1학년 때 '실드 위드 어 키스(Sealed with a kiss)'를 듣고 처음으로 내 마음이 움직였다. 그 이후로 평생을 음악과 함께 해왔다"며 "음반을 골라서 내는 것에 대해 고민도 했지만 내가 평생 음악을 한 것을 생각하면 음반 100장 선정한다고 해서 누가 크게 야단치거나 욕하지는 않겠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다만 제목에 '레전드(legend)'가 붙어 처음에는 무척 반대했어요. 너무 건방지잖아요. 그런데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인간 배철수나, DJ 배철수는 결코 전설이 될 수 없지만 이 책에 수록된 100장의 음반은 세계 음악계에서 전설이라 불릴 음반이라 생각됐어요. 또 '배철수의 음악 캠프'라는 프로그램이 처음에 출발한 색을 그렇게 많이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20년 동안 해온 것은 어쩌면 우리 방송사에 전설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제목을 그렇게 지지하지는 않아요.(웃음)"

음반 선정 기준은 평론가와 대중의 눈높이 중간지점으로 택했다고 밝힌 그는 각 음반마다 자신만의 개성 넘치는 선정 이유를 달았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코멘터리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생각했어요. 이 책이 팝 마니아한테는 별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지만, 팝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도 제 코멘터리를 보고 한번 피식 웃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사람도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지난 20년에 대해 매일 최선을 다할 수는 없었지만 항상 즐거운 생각만 갖고 진행하려고 애를 썼다고 말했다.

"제가 정한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일단 내 프로그램에서는 내가 모르는 상태에서 나가는 음악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음반회사 친구들이 미는 음악이라고 틀어 준 적도 없습니다. 제가 들어보고 좋으면 틀어줬습니다. 또 1년 365일 항상 그렇지는 못했지만, 360일 정도는 즐거운 마음으로 앉아있었던 것 같아요. 내세울 게 있다면 공부 못하는 애들이 지각 안 하듯, 저도 우등상은 못 받지만 개근상은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20년간 한 번도 지각하거나 펑크낸 적은 없습니다."

그는 "그러다 보니 생활이 굉장히 폐쇄적이 되긴 했다. 밖에 나가면 마음에 안 드는 사람도 만나는데, 그런 사람 만나기 싫어서 기분 좋은 사람만 만나니 교우 관계도 굉장히 축소되더라"면서도 "하지만 20년간 조금은 성장한 것 같다. 방송을 통해 각 분야 대가들을 만나 그분들의 삶의 철학과 자세를 배우니 느낀 게 많았다"고 말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는 20주년을 맞았지만 지난 20년간 국내 팝 음악 시장은 굉장히 축소됐다.

이에 대해 그는 "팝음악을 안 듣는 것은 우리 가요를 많이 듣는다는 것이니 굉장히 긍정적이라 할 수도 있다. 또 1980년대에 조용필 선배를 비롯, '위대한 밴드' 송골매 등이 열심히 했기에 그때 음악계의 대세가 가요 쪽으로 기운 것이 아닌가도 싶다"며 웃었다.

그러나 그는 "제가 팝 프로그램을 하고 있어서 그러는게 아니고 지금 우리 가요를 이끌어 가는 친구들을 보면 다 팝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다. 그들이 결국 어른이 돼서 좋은 우리 음악을 만들어낸 것"이라며 "세계 음악의 흐름에서 뒤처진다면, 세계로 열린 창을 닫는다면 곧 우리 음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 제 프로가 한국 가요 발전에 굉장히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고 방송을 했습니다. 일반 청취자도 많이 듣지만, 제 프로는 음악 하는 친구들이 굉장히 많이 듣습니다. 그 친구들도 '음악 캠프'를 듣고 있으면 세계 음악계의 흐름에 발맞춰 나가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고 하더군요."


 


[출처] 배철수 “신선놀음 20년…‘딴따라’는 철들면안돼” |작성자 빛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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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노예해방에 앞장섰던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이 12일 200회 생일을 맞는다. 링컨 탄생 200주년을 맞아 미국 전역이 기념 열기로 뜨겁다. 링컨 붐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링컨의 재탄생’으로 일컬어지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그는 취임 연설에서 링컨 대통령의 연설문을 인용했으며 백악관 집무실에 링컨 초상화를 걸어 놓았다. 링컨은 바로 오바가가 닮고 싶어하는 대통령이다. 가난을 딛고 일어나 변호사가 되어 정치적 격동기에 대통령에 취임했다는 점에서 오바마와 링컨은 비슷한 점이 많다.

링컨은 정치인뿐만 아니라 인간 승리의 성공 사례로도 본받을 점이 많다. 링컨의 사진을 들여다보면 매우 심각하고 볼썽 사납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는 탁월한 얘기꾼이었고 천부적인 연설가, 타고난 리더였다. 피를 끓게 하는 원대한 계획를 세우고 이를 하나하나 실천해 나갔다. 다음은 칼럼니스트 로스 보네인더(Ross Bonander)가 들려주는 ‘링컨에게 배우는 성공 비결’이다.

1. 말은 간단하고 직설적으로 하라

미국 하원 의원과 메사스추세츠 주지사, 하버드대 총장을 지낸 에드워드 에베렛(1794~1865)은 남들이 알아주는 유명한 연설가였다. 그가 1863년 게티스버그에서 유창한 언변과 수사를 동원해 두 시간 넘게 연설을 했을 때, 링컨은 바로 그 자리에서 3분도 안 되어 연설을 끝냈다. 에베렛의 연설은 거의 잊혀지고 말았지만 총 266 단어에 불과했던 링컨의 연설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유명한 구절과 함께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되는 예수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을 제외하면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은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연설문일 것이다.

[Tip] 프리젠테이션을 하거나 e메일을 보낼 때 말을 너무 장황하게 늘어 놓지 말라. 그것은 자만심과 고집의 표현이다. 상대방을 무시하는 행동이다. 메시지의 요점을 흐리는 결과를 낳는다. 이와 반면에 진솔하고 간단 명료한 표현으로 전달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말하는 사람이 솔직하고 효율적이며 욕심이 없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2. 협박에 굴복하지 말라



 
 
링컨은 1865년 워싱턴 포드 시어터에서 공연 관람 도중 암살당하기 전 적어도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집요한 살해 협박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살해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소 행동이나 정책 수립 과정에서 이를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Tip] 협박과 위협이 무서워 자신의 결심이나 입장을 바꾸지는 말라. 협박에 굴복하고 나면 자신이 일을 주도하고 협상을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유리한 빌미를 제공하고 만다.

3. 적과 가까이 하라

정치학자들이 대통령의 업적을 평가하는 기준 중 하나가 바로 인사(人事)다. 자신의 정책을 직접 수행해나갈 장관 등 아랫 사람을 어떻게 선별해 임명했느냐다. 링컨 정부의 내각 임명은 빈틈 없는 선택이었을뿐만 아니라 1860년 대선에서 후보로 출마했거나 출마할 가능성이 높았던 사람들을 총망라하다시피 했다. 에드워드 스탠튼, 사이먼 카메론, 샐먼 체이스, 윌리엄 슈어드, 에드워드 베이츠 등 대선 과정에서 자기와 맞서 싸웠던 사람을 무려 다섯 명이나 장관 등 요직에 임명하는 ‘포용 정신’을 발휘했다. 이에 반해 최근 4명의 역대 대통령들은 라이벌 가운데 기껏해야 한 두 명을 기용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지금까지 빌 리처드슨을 포함해 3명의 반대파를 요직에 임명했다.

[Tip] 적과 가까이 하면 그의 동태를 예의 주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팀이나 부서, 회사 등에서 공동 전선을 구축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들의 능력과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도 있다.

4. 변화에 순응하라

미국 컬럼비아대 역사학과 에릭 포너 교수는 명쾌한 정치분석으로 유명한 오피니언 잡지‘국가(The Nation)’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간 링컨은 성장 잠재능력을 지난 위대한 정치가”라고 말했다. 21세기의 기준으로 보자면 링컨은 인종차별주의자다. 하지만 그는 미국 독립선언문에 명시된 평등의 원리에 반하며 인간의 노동에 대한 댓가를 받을 수 정당한 권리를 박탈한다는 이유로 노예제도에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즉각적이고도 전적인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생각을 달리했다. 흑인 노예해방은 점진적으로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미국 남부 지역의 백인들의 ‘재산’손실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남북전쟁이 한참 치열할 때 그는 즉각적이고도 완전한 노예해방이 어마어마한 정치적, 전략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고 즉각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노예해방 선언으로 미국 남부지방의 경제는 피폐해졌고, 자신이 이끌던 북군(北軍)의 병력은 오히려 증강되었다. 20만명의 흑인 노예들이 북군에 가담했다. 링컨은 타이밍의 귀재였던 것이다.

[Tip] 오바마는 시카고에서 행했던 대통령 당선 수락 연설에서“이것이야 말로 미국을 변화시킬 수 있는 미국의 진정한 본질입니다. 우리나라는 완벽해질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변화에 순응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여라. 새로운 변화를 개척함으로써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기회를 발견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도 영감을 줄 수 있다. 변화를 추구하는 한 발전 가능성은 열려 있다.

5. 리더십의 기회를 잡으라

링컨은 대통령의 역할에 대한 정의를 새로 내린 인물이다. 위기 때에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대통령 고유의 권위를 내세웠다. 그 가운데 모두가 대중의 인기를 끈 것도 합법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국회가 휴회 중일 때 군대를 소집해 전쟁을 했다. 이것은 명백하게 미국 헌법 제6조의 위반이다. 인신보호 영장 발부를 연기해 수천명의 적들을 감옥에 넣기도 했다. 이것은 정당한 법 절차를 요구하는, 같은 헌법 조항의 제5 부칙을 위반한 것이다. 링컨에게 의회란 미국 연방이 분열되고 나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대통령을 국정의 최고 권위자로 격상시키고 다른 정부 기관은 대통령의 국정 수행을 돕는 역할로 격하시켰다. 그를 가리켜 독재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가 노예해방이라는 목표를 달성했으며 미국 연방의 분열을 막아낸 데 대해서는 아무도 할 말이 없다.

[Tip] 직무내용 설명서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리더십을 맡기려고 하는 위기 상황에서는 특히 그렇다. 법규를 위반하거나 회사 정책에 반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되겠지만, 에이브러햄 링컨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가능한 해결책이 떠오를 것이다. 비현실적이거나 낡아빠진 정책에 얽매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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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계에서도 대폭발 일으킨 빅뱅

 

데뷔 후 1년 만에 ‘거짓말’이라는 노래가 인기를 끌면서 대중은 빅뱅이 그저 그런 아이돌 그룹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다. 빅뱅은 스스로를 ‘자기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자가 발전형 아이돌’이라고 표현한다. 다섯 명의 멤버들은 그룹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솔로가수, 작곡가, 배우, 예능인으로 활동하며 숨은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래도 성에 안 찬 모양인지 이 다재다능한 다섯 남자는 출간 보름 만에 17만 부의 판매고를 올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지난 1월 말 출간된 ‘세상에 너를 소리쳐’는 다섯 명의 빅뱅 멤버가 지은 ‘자기계발서’다. 그들은 이 책이 어쭙잖은 자서전이나 성공담을 엮은 책이 아니라고 재차 강조한다. 자신들이 데뷔 과정에서 겪은 고난과 역경을 솔직히 써내려갔을 뿐이라고. 그리고 자신들처럼 ‘꿈을 향해 매진하라’고 소리친다.


빅뱅은 아이돌 그룹의 전형적인 요건들을 갖추지 못했다. 눈을 뗄 수 없는 환상적인 외모의 ‘얼굴마담’도 없고, 폭발할 듯한 가창력의 소유자도(?) 없다. 하지만 발표하는 곡마다 인기를 끌며 지난해 음반 판매량이 50만 장에 달했다. 이에 힘입어 멤버들은 솔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구수한 매력을 가진 대성은 ‘날 봐 귀순’이라는 트로트를 발표해 주목받았고, 태양과 승리 역시 솔로 활동을 통해 가려져 있던 개성을 마음껏 표출했다. 그룹 내에서 가장 준수한 용모를 가졌다 할 탑(T.O.P)은 드라마에 출연해 배우로서 신고식을 치렀고, 리더인 G-드래곤은 빼어난 작곡 실력으로 빅뱅을 싱어송라이터 그룹으로 등극시켰다.


가요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는 평가가 과하지 않은 빅뱅이지만 그들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집안의 반대, 주위의 불신, 불투명한 미래 등 가수가 되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게다가 빅뱅은 서바이벌 형식의 오디션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데뷔 과정이 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 힘든 시기를 견디게 한 힘은 가족들의 응원, 음악을 향한 열정과 고집 그리고 상투적이지만 언제나 고결한 꿈과 희망이었다. 함께 혹은 따로 있어도 여전히 근사한 다섯 남자 빅뱅, 그들의 오늘이 있기까지.


실력은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G-드래곤


빅뱅의 리더 G-드래곤은 스무 살 청년이지만 여전히 소년의 외양을 갖고 있다. 깨물어주고 싶은 순한 미소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돌려 말하는 것 같다. ‘거짓말’ ‘하루하루’ 등 빅뱅의 대표곡들을 작곡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마냥 해사하게 웃고 있을 때면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란 도련님’ 같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빅뱅을 갑자기 뜬 별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저희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쳤는지 책에 자세히 적었습니다. 저희를 제대로 알리고 싶었거든요.”


무엇이든 확실한 게 좋아 놀 때는 여한 없이 놀고, 일할 때면 또 온 신경을 집중해 매진한다는 G-드래곤은 대충주의를 끔찍이 싫어한다. 그런 성정은 하루 12시간 춤과 노래, 운동과 외국어를 배우는 혹독한 연습생 생활 6년을 버티게 한 동력일지도 모른다.





▲ 빅뱅은 멤버들 스스로 만든 아이돌이라고 말하는 팀의 리더, G-드래곤.

1995년 ‘꼬마 룰라’로 방송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YG엔터테인먼트와 인연을 맺은 G-드래곤의 미래는 마냥 밝아 보였다. 낙천적이고 맹랑했던 꼬마 권지용(G-드래곤
의 본명)은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빅뱅의 멤버를 뽑는 서바이벌 오디션이 진행되면서 그는 노력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을 음악 작업으로 달랬고, 양현석 대표가 내준, 일주일에 한 곡씩 작사·작곡을 해오라는 숙제도 꼬박꼬박 하면서 실력을 쌓아나갔다. ‘빅뱅은 실력파라기보다 노력파에 가깝다.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아이돌이라기보다는, 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발전하는 자가 발전형 아이돌이라고 할 수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G-드래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꿈을 키울 청소년들에게 조언할 수 있는 위치에 섰다.


“저희가 선배 가수들을 보며 꿈을 키웠듯이 어디에선가 빅뱅을 보면서 꿈을 키우는 친구들이 있길 바랍니다. 꿈을 향해 앞만 보고 달린다면 지금의 빅뱅보다 더 나은 위치에서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자신을 믿고 꿈을 믿어라, 대성과 태양


지금은 누가 뭐래도 국내 최고의 인기 그룹이지만 한때 빅뱅의 멤버 중 두 사람은 집안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패밀리가 떴다’에 고정 출연 중인 대성과 솔로 활동으로 자신만의 확실한 매력을 선보인 태양은 데뷔 전 부모님을 설득하면서 자신들의 꿈을 향한 열정을 재확인했다.


예능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달리 집에서는 그저 조용한 아들이었다는 대성은 특히 부모님과의 갈등이 심했다. 애초에 그의 부모님은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바라셨다. 대성(大聖)이라는 이름마저 ‘큰 목소리로 말씀을 전파하라’는 뜻을 담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 같던 완고한 아버지도 결국 아들의 황소고집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부모님을 설득하기 전에 ‘과연 내가 음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여러 차례 자문해 봤어요. 자신감을 바탕으로 자기 확신이 생겼기 때문에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었죠. 이번에 출간된 책에서 가수 되기를 반대하던 시절의 대목을 읽으신 부모님이 뒤늦게 미안하다고 하시더라고요.”


힘든 시간 동안 대성을 견디게 한 또 하나의 버팀목은 긍정의 힘이었다. 그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역시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 데뷔 전에는 집안의 반대, 데뷔 초에는 성대 결절 때문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마음고생이 심했던 대성. 그래도 그는 언제나 웃고 또 웃었다. 그 모든 것이 꿈 하나만 좇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좌)부모님의 반대에도 꿈을 포기하지 않은 대성. (우)앞으로 더 멋진 음악을 선보이겠다고 자신하는 태양.

“빅뱅은 지금까지 쉴 새 없이 달려왔어요. 그 시간들이 너무 힘들었지만 꿈을 잃지 않았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지금도 자신을 믿고 꿈을 향해 나간다면 무슨 꿈이든 다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리더 G-드래곤이 ‘죽을 때 마지막으로 그 자리를 지켜줄 단 한 명의 친구’로 꼽는 태양 또한 집안의 반대라는 난관에 부딪쳤다. 가수가 되기 전까지는 미덥지 못한 아들이었던 태양. 책이 출간된 후 그의 어머니는 “책에 나온 대로만 열심히 살아간다면 엄마는 아무 걱정 없겠다”며 이제는 아들을 든든하게 생각한다.


“막연히 ‘하고 싶다’는 의욕과 희망적인 생각만 갖고는 안 돼요. 부모님을 설득할 만한 계획을 세우고 의지를 보여드리면 부모님도 언젠가는 허락하실 수밖에 없죠. 저는 절대 포기하지 않고 제 꿈과 그 꿈을 어떻게 이루어갈지에 대해 계속 말씀드리면서 설득했어요.”


그리고 이제 태양에게는 함께하는 멤버들이 있는 한 앞으로 더 멋진 음악을 보여줄 자신감까지 생겼다. 


“가수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정말 음악을 좋아해야 한다는 거죠. 그냥 가수가 아닌 진정으로 음악을 좋아하고 즐길 줄 아는 가수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가족이 있기에 지금이 있다, 탑과 승리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고현정이 ‘뭘 좀 아는, 느낌 있는 매력남’으로 추켜세웠던 탑(T.O.P). 그는 빅뱅의 맏형이면서 뚜렷한 이목구비와 강인한 눈빛, 탁월한 목소리로 팀에서 가장 먼저 대중에게 주목 받은 멤버다. 2007년에는 드라마 ‘아이 엠 샘’에서 ‘학교 짱’ 역할을 맡아 배우 신고식을 치르기도 했다. ‘언더그라운드의 유명한 래퍼’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탑은 ‘랩을 실컷 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YG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이 되었고, 빅뱅에 합류해 바람대로 실컷 랩을 하고 있다. 그룹 내에서 확실히 자리매김하고 있는 탑이지만 그 역시 혼란스러운 시절을 겪었다.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반항하고, 술과 담배로 이성을 마비시키며, 형체도 알 수 없는 세상의 불의와 싸우기 위해 두 눈에 독기를 품었던 지난 기억들’이 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청소년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정해진 나 자신은 없다는 것을요. 누군가 다른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겁니다.”


흔들리던 탑을 붙들어준 또 다른 이름은 가족이다.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항상 응원하고 뒷바라지해주신 부모님이 계셨기에 힘들어도 앞만 보고 달려올 수 있었죠.”





▲ (좌)자신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조언하는 맏형, 탑.(우)‘타고난 자신감’으로 역경을 이겨낸 팀의 막내, 승리.

얼마 전 솔로 활동을 시작하며 숨겨진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팀의 막내 승리는 언제나 자신감이 넘친다. 나머지 멤버들이 ‘도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지’ 의아해 할 정도. 수많은 취재진 앞에서 처음 기자회견을 갖는 거라는데 가장 여유로운 사람 역시 승리다.


“저희가 이렇게 많은 취재진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갖기까지는 멤버들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어요. 정말 노력 면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형들이 있어 다행이에요. 형들이 잘할 때마다 저 역시 뒤쳐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죠.”


YG엔터테인먼트의 한 관계자는 ‘태양이 부정적인 평가를 자양분으로 삼는다면, 승리는 칭찬을 동력으로 삼는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타고난 자신감’으로 무장한 승리이지만 그도 한때는 심한 열등감에 시달렸다. 고향 광주에서는 알아주는 재주꾼이었는데, 서바이벌 오디션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가뜩이나 부족한 실력을 절감하며 좌절한 그에게 주위 사람들은 가수 되기를 포기하라고도 했다. 승리는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다. ‘오늘 이 눈물을 쏟게 한 사람들한테 떳떳하게 보여줄 거야. 내가 그렇게 형편없는 놈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밥은 못 먹어도 자존심은 있어야 사는 놈’이라고 말하는 승리의 자신감은 부모님의 응원 속에서 지금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부모님께서 책을 보고 ‘아들이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엄마, 아빠도 분발할게’ 하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를 보면서 더욱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하셨다니 뿌듯했죠. 그런데 죄송하게도 엄마, 아빠 더 분발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앞으로 더 열심히 할 거거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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