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는 행위가 내가 아닌 것에 피해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적어도 <책과 세계>라는 강유원의 책에서 두어 문장 얻어 읽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 문장을 살펴 보면 이렇다.'지구가 원하는 것은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순환의 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인데 그들은 - 책 읽는 사람들(유랑 첨가) -나무를 베어 그걸로 책을 만들고 한쪽 구석에 쌓아 놓는 이른바 순환의 바퀴에서 이빨을 빼내는 짓'을 한다는 문장과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오늘날의 사람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책을 읽는 이는 전체 숫자에 비해서 몇 되지 않는다는 문장이다. 결국 책을 읽는 이는 지구의 순환 톱니 바퀴의 이빨을 빼내는 병든자들이 책을 읽는 자들이라는 소리다. 책을 읽으며 그 책들이 만들어내는 세계 속에서 소요유하며 살아오던 책읽는 자들에게는 어느 한 세계가 무너지는 청쳔벽력 같은 소리다.

 

강유원의 책은 <책과 세계>가 내가 읽는 강유원의 두 번 째 저작이다. 첫 번 째 저작은 < 인문 고전 강의>인데 <인문 고전 강의>도 <책과 세계>와 궤를 같이 한다. 인간의 시대가 시작되고 그 시작을 같이 했을 책들이 수 많은 책들 중에서 시간의 중력을 이겨낸 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강유원의 두 권의 책에서 주로 다루는 내용이다. 두 권의 책은 책과 책 사이의 합집합과 교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과 세계>에서는 <인문 고전 강의>에서 다루지 않았던 부분 - 일리아스 이전 부분- 이 등장하고 <책과 세계> <인문 고전 강의>에서 일리아스와 군주론'까지는 큰 맥은 같이 하고 그 지엽적인 이야기는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책의 출간 년도에 대한 지식이 내게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연표를 만들어 제시하면 좋겠지만 아직 나의 책읽기는 병들지도 않았고 지구의 이빨에 충치를 남길 정도도 아니어서 연표로 만들어 다루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강유원의 언급하는 책들이은 어쩌면 일반적인 교육과정을 거친 자들이라면 책명 정도는 들어봄직한 책들이다. 어떤 학문을 공부하다 보면 처음 접하는 것이 총론이거나 개괄서이고 그 다음이 전문 이론서의 수순으로 나아가는데 <책과 세계>가 개괄서의 성격이 강하고 - <책과 세계>에서는 이미 호명된 이름들이 왜 호명되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통시적 흐름에 따라서 - <인문 고전 강의>는 그 책들의 해설서 즉 주석서의 성격이 강하다. 주석과 해설을 겸하고 있지만 여타의 이론서나 학술서와는 판이하게 다른 대중에게 좀 더 다가가는 방법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책과 세계>에서 처음을 여는 책은 '길가메시 서사시'다.<인문 고전 강의>에서 처음을 여는 '일리아스'보다 시대가 앞선다. '일리아스'가 문예사조 중 고전 주의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길가메시 서사시'는 로마시대 이전의 기록이다. 수메르인들의 기록- 수메르인들은 로마인들보다 앞선 기록자들이다. 상업에 관한 자료들이 많이 전해진다. 수메르에 관해서 궁금한 점이 있다면 가볍게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이나 소설 <수메리안> 정도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수메르 문명에 대해서 우리나라와 연관성을 주장한 학설들이 쏟아져 나온 때가 있었는데 보통 수메르가 단군 시대의 위성국으로 소머리국의 변형이라는 설이고 소머리는 아직 살아남아서 미국의 소호거리의 소호도 소머리에서 변형된 것이라는 설이 있는 것으로 읽은 적이 있다 - 이다

 

<책과 세계>라는 책 제목 자체가 내게는 생각해 볼 화두로 다가온다. 아주 단순하고 간명한 물음 앞에서 나는 나아가지 못하고 허덕인다. 그 물음은 '책과 세계와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해보기로 한다면 세계 속에 책이 존재하는 경우가 있고 그 반대의 경우 책 속에 세계가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어느 것이 어느 것을 반영하는가에 있어서 조금 미묘한 문제가 발생한다. 생각을 거듭하던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어떤 관계인가를 규정하는 것보다는 개별의 인간들에게 어떤 식으로 인식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내 경우는 세계 속에 책이 아니라 책 속의 세계가 있는 편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자에 속한다는 말 - 보르헤스의 경우 도서관을 우주로 인식하는데 도서관의 경우 질서정연하다. 우주도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질서정연한 논리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말이다. 거대한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은 작은 책들이고 책들이 세계를 이룬다는 말과 치환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보르헤스 전집 <픽션들>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 이다.

 

<책과 세계>에서는 책 뿐이 아니라 그 외의 것들도 논의의 대상으로 끌어들이는데 텍스트와 컨택스트의 문제와 책과 매체의 문제가 그것이다. 텍스트야 흔히 쓰이는 말로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데 컨텍스트는 사전적 의미로라면 문맥 맥락이라는 말이다. 텍스트를 읽을 때 문맥 맥락을 이해한다는 말을 조금 확장해서 생각해 본다면 - 사실 나는 이렇게 읽었다 - 텍스트를 읽을 때는 꼭 그 시대 상황을 알고 읽어야 한다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다. 군주론이나 통치론을 혹은 공자나 맹자를 읽을 때 재미가 없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 시대 상황을 이해히면 , 이해하기 전보다 좀 더 재미가 있는 것과 같다. 결론적으로 말해보자면 텍스트들을 읽을 때 컨텍스트의 사전 학습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작업의 순환 - 순환논증의 오류와도 같은 -을 열망하는 지구의 이빨을 왕창 뽑게 만들고 점점 사람을 병들게 만든다. 결국 책을 읽으므로써 치유가 되거나 해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병이 깊어지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이름하여 하이퍼 텍스트적 책읽기다.

 

책과 매체의 경우는 책이라는 것이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고 언어는 어떤 표면에 쓰여져야 인식되는 - 언어의 경우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로 나뉘는데 책이라는 것은 문자 언어를 기반으로 하고 문자는 표면에 적혀야 인식이 된다는 것을 부언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 데 그것이 고대 시대에는 점토판이기도 했고 죽간이기도 했고 파피루스 이기도 했다. 점토판이나 죽간은 쓸 수는 있었는나 무게에 취약했고 파피루스는 무게는 극복했으나 이집트 정부가 생산법을 독점하였으므로 가격이 비쌌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해결된 것은 인쇄술의 발명이었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바다. 그렇다면 인쇄술의 발명은 어떤 의미일까? 혁명일 수 밖에 없는데 산업혁명에서 혁명을 이끌어낸 것은 증기기관인 것과 마찬가지로 책의 혁명의 기저에는 인쇄술의 발명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제지술의 발달과 인쇄술의 발달로 책의 혁명은 완수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식상한 말이지만 꽃은 피어나게 마련이고 핀 꽃은 또 지게 마련이다. 이름하여 화무십일홍이라 했는데 , 책도 조심스레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아마도 인터넷이 왕성하게 보급된 때에 나온 이야기인데 , 책이 정말 종말을 맞이할까? - 자 다시 여기서 나눠야 할 것이 있는데 책이라는 큰 틀은 그대로 두고 종이로 만들어진 고전적인 의미의 책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자 - 이러한 문제는 시간이 증명해 주고 있지만 책은 종말을 고하지 않고 일종의 발전 - 개인적으로 발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과 변이를 겪고 있는 중인 것처럼 보인다. e-Book의 출현은 지구의 순환 운동에 전혀 무해한 형태인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 종이를 넘기는 맛이라든지 , 눈이 종이보다 더 쉽게 피곤해지는 등의 문제들도 있다. 책의 종말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다면 책세상 문고 우리시대 11 <인터넷 , 하이퍼 텍스트 그리고 책의 종말>정도를 읽어보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인문 고전 강의>로 돌아가보면 처음 시작은 '일리아스'로 시작해서 공교롭게도 마지막은 동양 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공자'로 마무리한다. 서양의 사유체계의 변화를 살펴보고 마지막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동양 철학이다. 근대국가의 한계에 대한 대안으로 공자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강유원은 말한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문득 언어와 책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언어가 고착화되어 책이 되는 것은 사실 별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시간의 더깨와 중력을 이기고 살아남아 전해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지는데 이것은 역사의 일부가 되고 허구라도 진실의 일부이거나 진실인 것처럼 포장되고 인식될 수도 있다는 생각-내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구효서의 <비밀의 문>이라는 소설을 읽게 되면서다. 어떤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는 살아남느냐 살아남지 않느냐의 문제다 - 을 해보게 되는데 이것은 정말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다는 것에 수행되어야 하는 자세는 무조건적 수용이 아니라 비판적 수용일 것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 살림지식총서 364
오은 지음 / 살림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유원 씨의 <인문학 고전 강의>와 막스 베버 씨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읽기까지 숨가쁘다면 숨가쁘게 읽어온 읽으면서 고통스러웠고 고통스러웠음으로 즐거웠던 시간이었습니다. 이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강유원 씨의 <책과 세계>를 만난 것은 어쩌면 우연 같은 필연이었겠습니다만 <책과 세계>를 읽기 전에 읽어보고 싶었던 일련의 책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쉬어가는 읽기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제가 선택한 책은 오은 씨의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입니다 (오은 , 살림) 오은 씨는 - 이런 표현이 그다지 정겹지는 않지만 - 제 블로그 이웃의 이웃이라고 들었습니다. 한 다리 건너라는 말입니다. 물론 오은 씨가 제 블로그에 실수로라도 놀러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 오은 씨는 시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저자 소개에도 시인이라고 되어 있는데 제가 읽은 인쇄물에 오은 씨의 형이 오은 씨의 글을 출판사에 보내 등단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인 오은 씨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 이것은 편견입니다. 편협하지요. 서로 연관성이 그다지 없어보이는 소재인 듯하여 그러합니다. - 로봇을 주제로 이제껏 영화에서 이루어진 로봇의 서사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뭐 자세한 내용이야 아주 얇은 100 쪽도 넘지 않는 문고판이니 마음만 있다면 몇 시간 안에 독파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자 지금 이 순간부터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아시모프라는 사람을 여기서 처음 만났습니다. 과학자인줄 알았습니다만 소설가더군요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를리 없는 SF계의 서태지 - 빅뱅이라고 해야 좀 어려보이려나 뭐 저는 로봇이 아니니 늙어서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구태여 로봇처럼 늙지 않는 것을 염원하진 않겠습니다 - 정도인가 봅니다. 아시모프가 로봇의 원칙을 이야기 했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1 2 3 원칙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 1 원칙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되며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음으러써 인간이 위험에 빠지도록 방치해서도 안 된다.

 

제 2 원칙

 

 로봇은 제 1원칙을 위배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제 3 원칙

 

 로봇은 제 1원칙과 제 2원칙을 위배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존재를 보호해야한다

 

이 세가지 원칙을 가지고 변주하면서 로봇의 서사가 진행된다고 합니다. 위반은 카타르시스를 동반하는데 이것은 유토피아적이든 , 디스토피아적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만 유토피아적 미래보다는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관한 서사가 무한하게 꿈틀거립니다.

 

  제목을 한 번 보겠습니다.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입니다. 이 구절은 김춘수 시인의 '꽃을 위한 서시'를 패러디 한 것이라고 지인 고냥씨가 알려주었습니다. 원문을 찾아보니 '너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로 시작하는 시입니다. 기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볼 것입니다만 시방 위험한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방이라는 말은 지금이라는 말과 바꾸어 쓸 수 있긴 합니다만 맛이 떨어집니다.

 

  로봇으로 어떤 서사를 보여줄 것인가는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금지된 세계> <로보캅> <메트릭스> <바이센테니얼 맨> <블레이드 러너> <스트리머스> <스타워즈> <아이, 로봇> <아이언 맨> <엑스맨> 시리즈 <에이 아이> <월 -E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이티> <터미네이터 1,2> <트렌스 포머> 등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이 영화들을 아시모프의 3원칙과 맞춰서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입니다.

 

  로봇이 지향하는 것은 인간입니다만 이런 생각을 한 번 해봅니다. 어쩌면 인간이 아주 잘 조직된 로봇일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인간만을 중심에 두고 사유하는 인간이란 종의 오만함에 대한 제 나름의 반성입니다. 한창 로봇 기술이 발달하고 있지요 가시화되고 있고 연구 결과물들이 로봇의 진화를 보여줍니다 다시 로봇의 궁극적 결과가 인간과 유사한 - 별 차이 없는 , 분간이 가지 않는 - 것이라면 우리 지구 상에 살아가는 인간들이 모두 잘 조직된 개별화된 로봇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지구가 컴퓨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 와 <메트릭스> - 가상 세계 속에서의 삶 - 혹은 <트루먼쇼> - 한 사람의 생활이 방영되는 - 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모든 것을 사유할 수 있지만 인간이 지닌 아주 잘 조직된 컴퓨터 뇌는 인간이 로봇일것이라는 생각을 차단하는 유전적 프로그램이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뇌의 프로그램 오만함입니다. 생각해보십시요 인간만이 최상위에 두는 인식체계를 누가 만들었을까요? 저는 아직도 의문이고 앞으로도 의문일 듯합니다.

 

  서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번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책에서는 영화의 서사구조를 다루고 있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서사라고 하면 단연 소설의 서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서 생기는 문제가 있습니다. 소설의 서사와 영화의 서사는 비슷한 듯 보이긴 합니다만 좀 다르지 않나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뭐 별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만 언어의 추상성에 기대어 써보자면 이렇습니다. 소설에서의 서사 핵심은 이미지의 생성이고 , 영화에서의 서사 핵심은 장면의 고착화 즉 이미지의 시각화 현실화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 다시 제목으로 한 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시방 위험한 로봇이라고 씁니다. 시방 위험한 로봇일까요? 로봇뿐일까요? 가만 생각해보십시요. 로봇 이거 누가 만드느냐하면 인간이 만듭니다. 저는 감히 단언컨데 시방 위험한 것은 인간입니다. 언론매체를 보십시오. 연일 보도되는 말도 되지 않는 살인과 강간사건들이 흘러 넘쳐나고 점점 엽기적이 - 언론매체의 보도통제와 선정보도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 수 있겠습니다만 이것은 이 번 주제와는 거리가 있으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 되어갑니다. 로봇에게 윤리를 논하기 이전에 인간에게 윤리라는 것이 있는 것일지를 먼저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글쓰기는 죽음에 대한 동경과도 같다. 죽을줄 뻔히 알면서 갈 수 밖에 없는 본능과도 같은 열망이다. 글쓰기의 열망은 점진적으로 점층되어야 나타나는 지독한 금단을 동반하는 중독현상이다. 죽음이다. 스스로 자학하는 자들의 살들이다. 헛으로 쓰여진 글 같아 보여도 낱말이 되고 문장이 되고 문단이 되어 점층된다면 그것은 글이다. 헛으로 쓰여진 글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조그마한 낱말까지도 쓰여진 이상 헛된 것은 없다.

 

  작가라는 일련의 무리들을 설명할 때 수잔 손택은 이렇게 말했다. "저자는 무엇보다 먼저 독자다 광포해진 독자 불량스러운 독자 , 자기가 훨씬 잘 쓸 수 있다고 주장하는 뻔뻔스러운 독자"라고 말이다. 또 한편 해이수 작가의 시상식에서 한영실 씨는 "우리 대신 앓는 천형을 앓는 자"들을 작가라고 했다. 글쓰는 자들은 뻔뻔한 독자이면서 또한 앓는 자들이다. 평생 병에 시달리는 자들이다. 게중에는 병을 잘 다스려 이름을 드러내는 자들도 있지만 수많은 별들처럼 그렇게 빛나다가 사라지는 자들이 더 많다.

 

  얼마전 <라이팅 클럽>을 읽었다. 말그대로 글쓰는 클럽 글짓기 교실이다. 뭐 글짓는 내용 하나도 나오지 않고 글쓰기 전략이나 방법론 나오지 않는다. 다만 두 모녀의 이야기가 라이팅 클럽이라는 장소를 매개로 풀어지는데 공시적 통찰이 아니라 통시적 통찰 - 이게 말이 되는지 모르겠다- 을 통해서 서술된다. 줄거리 뭐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소설은 한 순간이거나 한 생이거나를 서술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크게 보면 모두 대동소이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소설이지 않는가 소설하기의 지난함을 이야기하자면 앉은 자리에서 또 아이의 아이가 나고 그 아이의 아이가 그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해도 다 끝나지 않을 것이다.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체득했지도 모를 것이 바로 지난함이다. 글쓰기의 지난함 지극히 어려움 어려움이라는 말로 경계를 삼으려는 음모가 아니라 해본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글쓰기의 어려움이다. 문학에서는 장편의 서사와 단문의 함축이 어렵고 여타의 글에서는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없어 글을 써서 글에 이르는 길은 멀고 요원하다. 요원한 길은 단기간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 혹여 단기간에 성취하는 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을 일련의 작가라는 호칭으로 불르기에 이른다지만 그들도 몇 십년 씩 글쓰기의 지난함을 몸으로 더 오래 겪은 자들이다. -일생 혹은 이생 - 이생이 있다면 - 을 오롯하게 바쳐서 성취되기에 이른다.

 

    이 소설을 읽다가 보면 소설을 앓는 혹은 소설을 하는 사람들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김작가와 영인의 삶을 따라가다보면 김작가의 삶이 글쓰는 삶인가 싶기도 하고 영인의 삶 또한 김작가를 경멸하지만 김작가와 그리 다르지 않다. 김작가는 말년에 작가로 등단해 작가군에 합류하게 되는데 그 이전의 삶이라는 것이 작가의 삶이 아니라 술꾼의 삶 - 뭐 내가 알기로도 현실의 작가군들이 술꾼의 삶과 그리 멀지 않은 삶을 사는 이들이 여럿 있기는 하다 - 이라고 해야 옳을 이들 뿐이다. 우리의 삶을 대신 앓는 이들이어서인지 술로 연명하지 않으면 그 고통이 막대할지도 모른다고 좋게 생각해주어도 영 이해가 가지 않는 김작가다. 영인은 그런 김작가를 불신하고 경멸하지만 글쎄 내가 보기에는 문학의 신 혹은 소설의 신이 강림은 다른 곳에 하고 옷깃만 스친 불우한 존재다.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것을 생각해서 머리만 복잡한 아직은 완전히 신내림 받지 못한 상태의 이도저도 아닌 상태가 영인의 삶이다. 여기서 영인이라는 이름을 슬쩍 살펴보자 영인본이라는 서지학 용어가 있는데 사실 김작가의 삶을 영인은 그대로 혹은 약간의 변주로 영인하고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대물림이다. 천형이다. 글쓰기의 천형은 산발적으로 유전되는데 이상하게도 세대 유전되었다. 하긴 내가 아는 소설 쓰는 한씨도 아들과 딸에게도 똑 같은 글쓰기의 지난함을 물려주었다.

 

  지금은 인터넷의 시대 여기 저기서 글이 넘쳐난다. 사람의 감성을 마구잡이로 뒤흔드는 게릴라성 게릴라성 폭우 같은 글들이 도처에 폭발물의 파편처럼 산재한다. 더이상 작가들은 저 위 어딘가에 군림하지 않는다. 그들의 권좌는 낮아졌다. 낮아진 권좌에 아래에서 우러러 보던 이들이 올라 앉을 수 있는 시대가 지금의 시대 일상적 글쓰기가 넘쳐나는 개인 블로깅의 시대다. 소설과 시로 대표되고 존재하던 일련의 작가군들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고 다양한 작가군들이 등장하고 나름의 글들을 써 낸다.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귀가 따갑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생애를 관통하는 글쓰기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위대한 작가가 아니더라도 쓰지 않고는 살아있지 못하는 잡스러운 글줄이라도 써야 살아갈 수 있는 천형을 질어진 자들이 세상에는 작가라는 이름을 휘장처럼 단 자들 보다 더 많다는 사실이다. 휘장을 단 작가들도 작가들만이 라이벌이 아니라 초야에 묻혀 전전긍긍하며 글을 쓰는 기인이사들도 라이벌이라면 라이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작가들의 잔치는 이제 끝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여 이 소설을 글을 좀 써보겠다고 생각하는 어린 영혼들이 본다면 글쎄 그 방법을 찾을지 모르겠다만 유랑이 읽기에 강영숙 작가는 교묘하게 그 비법을 숨겨두었는지도 모르겠다. - 이것은 철저히 오독의 결과다 유랑은 발견하였으나 강영숙 작가가 아니거든 이러면 모든게 허사니 오독일 밖에 - 잘 살펴 보면 보일 것이고 보이지 않아도 그만이긴 하다. 모든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법이 없는 법인 것이 철저히 농익어야 한 순간 터질 수 있을 것이고 표면장력의 한계까지 가야 끊어질 수 있다. 끝이라고 생각할 때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 시선 16
김경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유랑에게 시집이란 잘 읽히는 즉 내게 맞는 시집과 잘 읽히지 않는 즉 내게 맞지 않는 두 가지 부류로 나눠진다. 전자는 무난하게 읽혀 무난하게 이해되는 것들이고 후자는 난해하게 읽히며 난해하게 이해되거나 이해를 얻지 못하는 것들이다. 말되어지지 않는 것을 말하기를 즐기지 않는 유랑은 되도록이면 후자를 거론하지 않고 넘어가려 노력해왔지만 외면하기에는 석연함을 떨쳐버릴 수 없을 때가 있다. 이제껏 읽어온 시집들 중에 이러한 것들을 호명해보자면 김민정의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강정의 <키스> 김경주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정도가 될 것인데 평론가 신형철 씨는 이러한 시들을 일컬어 뉴웨이브라고 지칭하고 '새로워서 좋다가 아니라 좋은데 새롭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 시에 문회한인 유랑이 보아도 위에서 거론된 세 사람의 시가 전위적이라기 보다는 - 새로워서 좋다 - 좋다는 것도 알겠고 게다가 새롭다 하지만 새로움이 아직 익숙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이번에 유랑이 읽은 시집은 김경주 씨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라는 시집이다. 김경주 시인은 최근에 <시차의 눈을 달랜다>라는 시집을 내셨던 분이신데 그의 첫 시집이 바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이다. 이 시집 중에서 가장 유명한 시는 아마도 ' 드라이아이스'일 것이다. 모르시겠다면 -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요 - 이 문장 하나 쯤 기억할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라는 고대 시인 침연의 시구절 한 구절이다. 드라이아이스의 부제이기도 한 이 문장은 김경주의 문장이 아니라 침연의 문장인데 김경주가 빌어와 더 유명해진 문장이 되었다.  유랑의 어느 지인2은 김경주의 뛰어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했다. 자신의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찾아내어 쓸 줄 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유랑은 일단 읽었기에 무엇이라도 한 마디 해야하지 않을까 하여 몇 날 며칠을 고민을 하다가 독후감상문의 첫머리를 쓰긴 했다.

 

'계절과 계절 사이에 있던 나는 사이에 있었으므로 존재하지 않을 수 있었다. 구획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이쪽이든 저쪽이든 어느 쪽을 정하지 않으면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가 된다. 귀신이 된다. 이것은 살아있는 귀신에 대한 이야기다 '까지만 쓰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때로는 너무 많은 말보다는 몇 마디의 말들이 더 치명적일 때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시인 강정이 김경주의 시의 해설을 하면서 '시집 뒤를 채우는 일은 시에 주석을 다는 것이 아니라 시의 발생 지점을 밝히는 일이다. 다시 말해 시 속으로 독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바깥으로 시가 빠져 나오는 걸 도와주는 일이라는 소리다. 그럼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싲시집의 처음으로 돌아가게 만들어야 한다. 이때 시집의 처음이란 굳이 시집의 첫 머리가 아니어도 상관없다'3고 쓴다.  이렇게 쓰고 김경주의 시어들이 빛어내는 소리에 주목하고 김경주가 소리에 민감한 청각에 민감한 자라고 쓴다.

 

유랑이 보기에 김경주는 시차와 기미의 시인인듯 싶었다. 이 말은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가 하면 기미라는 말은 그의 첫 시집에서 읽을 수 있는 말이고 시차라는 말은 버젓히 <시차의 눈을 달랜다>라는 시어에 이미 드러나 있다. 기미라든지 시차는 계절과 계절 사이라는 말로 치환하면 어떨까 싶은 것이 사실 유랑의 생각이다. 기미라는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어떠한 기운을 먼저 알아차리는 것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시차 -김경주는 <시차의 눈을 달랜다> 자서에서 너의 수증기가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내가 모르는 마을 속에서 언제나 네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일거야 미안 여기를 시차의 사회라고 부를께라고 쓴다 - 는 한 세계와 한 셰계 같은 공간의 다른 시간 즉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된다. 결국 시인이란 기미를 알아차리는 사람이긴 하다. 그리고 그것을 선취하는 자인데 선취한다는 것은 일종의 천형이다. 먼저 나아가 그것을 말한다는 것 말이다.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들이 알아줄리 만무하다. 시인이라면 짊어져야할 소명이기도 하고 천형이기도 한 예민한 감각 소리에 실려오는 것들을 김경주는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많은 시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유랑이 관심깊게 본 것은 '비정성시'다 이 시는 하나의 글이고 하나의 생명의 나무다. 시인은 초기 작에서 자신이 평생 혹은 일정 기간에 사유해야할 모든 에너지를 응축시킨 시를 터트렸다. 모든 생명 있는 것은 그 흐드러짐에서 생동하는 약동하는 작은 씨앗에서 시작한다. 유랑이 생각하기에 어쩌면 김경주의 모든 것은 이미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서 드러났다. 그렇다면 그 다음 등장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하면 함축적이어서 혹은 너무 전위적이어서 알아차리지 못한 듣는 귀를 가지지 못한 일반인들에게 들려주는 음악의 해설서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다. 유랑은 ......

 

가만 시인들은 관조하는 자들이고 관조하는 자들에겐 이 세상의 모든 비밀들이 스스로 옷을 벗어 드러내기 마련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드러남이라는 것 김경주의 드러남이라는 것이 조금은 달라 보인다. - 이것은 째즈의 즉흥연주와 같은 문장이다. 이 문장들은 원래 유랑의 말의 꿰미에 들어 있지 않았으나 지금 문득 꿰미 속에서 튀어나왔다. 이야 말로 즉흥 연주 - 일련의 시인들이 관조하는 것은 자연이면서 결국은 자신이고 인간이었다. 결국은 내면으로 침참하고 칭강하는 형태로 귀결된다면 김경주는 그렇게 두질 않는다. 내면으로의 침참과 침강을 뒤집어서 세계를 향한 관조를 하고 있는 듯하다. 내면의 것들은 다른 시인들에게 맡겨버리고 외면 세계에 대한 거대한 진실을 언어로 술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도 시를 읽는 기미라면 기미일 듯 한데 잘못된 촉이라고 하는 표현이 더 적당할 듯 하다. 하여간 김경주가 말하는 바람과 음악과 소리의 향연을 귀 귀울여볼만 하다. 비루한 언사를 쓸 수 밖에 없는 유랑은 여기까지다 . 더 이상 할 말도 없고 해서도 안될 말들 뿐 사산된 말들을 주워 기워서 겨우겨우 남루한 문장을 마친다.

 

멸종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종의 울음소리가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나는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 (우주로 날아가는 방 5) 라고 쓴 김경주는 아마도 세상을 앓는 혹은 세상을 읽는 행위는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겠지만 멸종하지 않을 것이므로 시인이라는 종족이 멸종하고 멸절되고 단종되지 않을 것이므로 내면의 상처로 세계의 상처로 울음을 그칠 수 없지만 그 울음이 소리가 되고 음악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지 않을 것이므로 김경주는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뱀소년의 외출 문학동네 시집 87
김근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12일 김근의 <뱀소년의 외출>을 다 읽었고 그것에 대해서 감상평이라도 남겨볼까 해서 생각되는 것들을 적어둔 메모다. 소환해서 이야기해야 할 인물들로 거론된 신형철 박상륭 박민규.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를 통해서 내게 김근의 존재를 알렸고 김근은 자신의 시를 통해서 내가 가장 사랑하고 증오하는 박상륭을 기억나게 만들었고 박상륭에게 찬사하는 표현인 연구의와 개업의란 표현을 쓴 박민규까지 소환되었다.

 

김근의 시에서 어머니와 항아리가 초반에 많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이미지가 박상륭의 저작과 맥이 닿아있고 -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디오게네스의 항아리를 생각나게 만들던 강남장의 독짓는 늙은이의 항아리는 죽음의 유사체험을 하는 장소 즉 묻히지 않은 관이다. 어머니와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세 따님이라는 중단편을 통해 어머니이기도 하고 아내이기도 하고 딸이기도 한 여성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뱀소년의 외출>에서 뱀소년은 김근이 밝히고 있듯이 사복불언에 연관되어 있음을 감안한다면 박상륭의 소설 유리장에서 등장한 사복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김근은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쓴다.

 

3) 뛰며 놀며 자랐던 서울 변두리의 판잣집들과 골목들은 사라져 없다. 배꽃 흩날리던 자리엔 고층 아파트들이 우뚝 우뚝 일어서 흔들리고 있었던 것인데 말에 무엇하랴 사라지는 것들은 다 어미다. 사라진 것들은 그러므로 다 신화다.

 

4) 자연으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들이야말로 세계가 아직도 견고하다고 믿는 자들일 것이다. 어느 틈에 부드러운 피부에 싸여 있는 세계가 제 피부에 생채기를 내어 시뻘건 속살을 보여줄 때 그들은 기절초풍하고만 말 것인가 어미에게 돌아간들 이미 쭈글쭈글 천만 개 주름을 단 자궁일밖에 어하리 넘차 어어허

 

5) 삼국유사 의해편 사복불언 - 사복이 외출을 했는지도 확인할 길 없지만 죽은 어미를 장사지내기 위하여 원효에게 찾아간 것만은 분명한 듯 보인다. 열두 살잉 될 때까지 아비 없이 과부의 몸에서 태어난 이 아이는 오직 바닥에 누워만 있었다. 한데 그가 원효에게 찾아가는 길은 구렁덩덩신선비가 제 아내에게 허물을 맡기고 과거를 보러 가는 길 같지 않았겠는가? 시간이나 공간 따위가 거기 정해져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가 끈적거리는 폐수처럼 사람들이 흘러다니는 종로 바닥을 와보지 않았다고 누가 얘기할 것인가. 그 때 모든 사물과 세계가 제 본디 형상을갖추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사복이 죽은 어미를 지고 띠풀을 뽑아 연화장으로 마침내 들어가기 전까지 구렁덩덩신선비가 뒤늦게 찾아온 본처와 함게 구멍 속 세계에서 행복하기 전까지 딱 그전까지만 시다.

 

유랑의 덧붙이기에 불과한 것이지만 원효는 죽은 사복의 어미를 위해 게송을 지었다. '죽는 것이 고생이다. 태어나지 마라 , 태어나는 것이 고생이다.'라고 게를 설하는데 듣고 있던 사복이 길다고 면박을 주자 한 줄로 죽고 사는 것이 모두 고생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죽살이가 고생인 것은 살아보아야 아는 것이고 죽어 보아야 아는 것이지만 삶이란 것을 살아가는 것에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리고 죽음을 경험하기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한계성에 부딪힌다. 지난한 것이며 지복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현실을 지금 순간에 충실하라는 말로 유랑은 들었다.

 

6) 노래로 가는 길은 멀다. 온통 흐물거린다. 

 

6번을 통해서 김근은 잡설꾼과 패관꾼이기 보다는 오르페우스 즉 가인이 되고자 한다는 열망을 드러내었다. 김근을 읽으면서 박상륭의 흔적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읽은 사람들만이 알수 있는 암호와 같은 문장과 이미지들이 산재하지만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은밀한 종교단체의 비밀 문양처럼 말이다.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에서 이렇게 쓴다

 

  귀신 들린 듯 행복하거나 자멸적으로 불행하거나 둘 중 하나다. 시인에게 중간은 없다. 한 청년이 있어 가인이 되기로 마음먹었으나 애초에는 그도 행복한 오르페우스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선을노래하여 사랑을 얻은 가인오르페우스는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는 찬미의 대가였고 서정의 사도였다. 그러나 에우리디케의 죽음과 더불어 사랑은 몰락했다.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무심결에 배반하는 순간 연인은 두 번 죽었다. 이제 오르페우스의 노래는 충만한 연가가 아니라 참혹한 비가가 되었다. 생의 후반기에 오르페우스는 이보다 더 불행할 수없는 애도의 대가가 되었고 서정의 불구자가 되었다. 오르페우스의 삶은 행복의 시기와 불행의 시기로 날카롭게 절단된다. 중간은 없다. 가인이 되기를 꿈꾸었고 마침내 노래할 수 있게 된 청년이 행복한 오르페우스의 가집을 보내왔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보내온 것은 끝내 불행한 오르페우스가 될 수밖에 없었던 내력이구나. 그이 밖에서 무엇이 몰락했고 그의 안에서 무엇이 배반당했던 것인가 어째서 불행한 오르페우스처럼 저 자신 갈가리 짖겨 죽어야만 끝장날 영원한 애도의 사도가 되었는가 그 내면의 추이를 따라가기 위해선 뒤에서부터 읽어야 한다.

 

신형철의 이 말은 전적으로 맞다. 앞에서 읽게 된다면 그나마 아름다웠던 가인 오르페우스인 김근을 만나지 못하리라. 물론 <사랑>이란 시로 서정성을 보여주려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유혹이며 그로테스크로 진입하기 위한 위장이고 허위다. 아가리를 벌린 거대한 뱀 문두룸처럼 말이다. 섣불리 책장을 넘기지 말아야 한다. 쉬이 무저갱으로 떨어질 것이 자명한 일이다. 조심하라 예방주사처럼 4부를 먼저 읽고 1부를 읽으라 그러면 겨우 함몰은 피하게 될 것인즉 안타깝게도 유랑은 의도된 함몰인지 침윤인지도 알 수 없는 처음부터 읽기를 시작해 김근의 풀어놓은 거대한 시로 꾸며진 아가리에 스스로 몸을 던져버린 꼴이 되었다. 참혹한 비가를 부르는 오르페우스 김근의 목소리는 배를 난파시키는 세이렌의 아름다운 목소리였던 것인데 그 비참함과 그로테스크함이란 아름다움의 일면이었을 따름이다. 서정성이 거세당한 - 혹은 스스로 거세한 - 서사의 나락은 김근의 시의 한 축이다. 오르페우스의 비가다.

 

박상륭은 자신을 소설가라고 칭하지 않고 패관꾼 혹은 잡설꾼이라고 칭하는데 김근의 시들을 읽으면서 나는 김근을 박상륭을 좆아가는 패관꾼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신형철이 말한 오르페우스인가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결국 노래하는자와 말하는자가 다르지 않음을 알게되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노래란 것은 아름다움을 취하고 패관꾼은 그로테스크함을 취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 이건 만고 유랑만의 생각이니 논리를 따지려고 하지 말라 - 그로테스크함이라는 용어를 쓸 때 관문처럼 넘어야 할 시인이 있다.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넘어야 할 산 그렇다. 그로테스크함의 준령인 기형도다. 김현에 의해서 영원히 죽지 못하고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자 기형도다. 김근은 그로테스크함에선 기형도를 넘어서 있다. 여기서 사용하는 그로테스크함이란 개인적 정의로 기괴함에 가깝다. 김근은 음울함에 있어서는 기형도를 넘어서지 못했다. 기형도의 그로테스크함이 음울함이 기준이라면 김근은 그것을 넘어서지 못했고 기괴함이라면 기형도를 넘어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