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팅 클럽
강영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글쓰기는 죽음에 대한 동경과도 같다. 죽을줄 뻔히 알면서 갈 수 밖에 없는 본능과도 같은 열망이다. 글쓰기의 열망은 점진적으로 점층되어야 나타나는 지독한 금단을 동반하는 중독현상이다. 죽음이다. 스스로 자학하는 자들의 살들이다. 헛으로 쓰여진 글 같아 보여도 낱말이 되고 문장이 되고 문단이 되어 점층된다면 그것은 글이다. 헛으로 쓰여진 글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조그마한 낱말까지도 쓰여진 이상 헛된 것은 없다.

 

  작가라는 일련의 무리들을 설명할 때 수잔 손택은 이렇게 말했다. "저자는 무엇보다 먼저 독자다 광포해진 독자 불량스러운 독자 , 자기가 훨씬 잘 쓸 수 있다고 주장하는 뻔뻔스러운 독자"라고 말이다. 또 한편 해이수 작가의 시상식에서 한영실 씨는 "우리 대신 앓는 천형을 앓는 자"들을 작가라고 했다. 글쓰는 자들은 뻔뻔한 독자이면서 또한 앓는 자들이다. 평생 병에 시달리는 자들이다. 게중에는 병을 잘 다스려 이름을 드러내는 자들도 있지만 수많은 별들처럼 그렇게 빛나다가 사라지는 자들이 더 많다.

 

  얼마전 <라이팅 클럽>을 읽었다. 말그대로 글쓰는 클럽 글짓기 교실이다. 뭐 글짓는 내용 하나도 나오지 않고 글쓰기 전략이나 방법론 나오지 않는다. 다만 두 모녀의 이야기가 라이팅 클럽이라는 장소를 매개로 풀어지는데 공시적 통찰이 아니라 통시적 통찰 - 이게 말이 되는지 모르겠다- 을 통해서 서술된다. 줄거리 뭐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소설은 한 순간이거나 한 생이거나를 서술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크게 보면 모두 대동소이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소설이지 않는가 소설하기의 지난함을 이야기하자면 앉은 자리에서 또 아이의 아이가 나고 그 아이의 아이가 그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해도 다 끝나지 않을 것이다.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체득했지도 모를 것이 바로 지난함이다. 글쓰기의 지난함 지극히 어려움 어려움이라는 말로 경계를 삼으려는 음모가 아니라 해본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글쓰기의 어려움이다. 문학에서는 장편의 서사와 단문의 함축이 어렵고 여타의 글에서는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없어 글을 써서 글에 이르는 길은 멀고 요원하다. 요원한 길은 단기간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 혹여 단기간에 성취하는 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을 일련의 작가라는 호칭으로 불르기에 이른다지만 그들도 몇 십년 씩 글쓰기의 지난함을 몸으로 더 오래 겪은 자들이다. -일생 혹은 이생 - 이생이 있다면 - 을 오롯하게 바쳐서 성취되기에 이른다.

 

    이 소설을 읽다가 보면 소설을 앓는 혹은 소설을 하는 사람들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김작가와 영인의 삶을 따라가다보면 김작가의 삶이 글쓰는 삶인가 싶기도 하고 영인의 삶 또한 김작가를 경멸하지만 김작가와 그리 다르지 않다. 김작가는 말년에 작가로 등단해 작가군에 합류하게 되는데 그 이전의 삶이라는 것이 작가의 삶이 아니라 술꾼의 삶 - 뭐 내가 알기로도 현실의 작가군들이 술꾼의 삶과 그리 멀지 않은 삶을 사는 이들이 여럿 있기는 하다 - 이라고 해야 옳을 이들 뿐이다. 우리의 삶을 대신 앓는 이들이어서인지 술로 연명하지 않으면 그 고통이 막대할지도 모른다고 좋게 생각해주어도 영 이해가 가지 않는 김작가다. 영인은 그런 김작가를 불신하고 경멸하지만 글쎄 내가 보기에는 문학의 신 혹은 소설의 신이 강림은 다른 곳에 하고 옷깃만 스친 불우한 존재다.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것을 생각해서 머리만 복잡한 아직은 완전히 신내림 받지 못한 상태의 이도저도 아닌 상태가 영인의 삶이다. 여기서 영인이라는 이름을 슬쩍 살펴보자 영인본이라는 서지학 용어가 있는데 사실 김작가의 삶을 영인은 그대로 혹은 약간의 변주로 영인하고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대물림이다. 천형이다. 글쓰기의 천형은 산발적으로 유전되는데 이상하게도 세대 유전되었다. 하긴 내가 아는 소설 쓰는 한씨도 아들과 딸에게도 똑 같은 글쓰기의 지난함을 물려주었다.

 

  지금은 인터넷의 시대 여기 저기서 글이 넘쳐난다. 사람의 감성을 마구잡이로 뒤흔드는 게릴라성 게릴라성 폭우 같은 글들이 도처에 폭발물의 파편처럼 산재한다. 더이상 작가들은 저 위 어딘가에 군림하지 않는다. 그들의 권좌는 낮아졌다. 낮아진 권좌에 아래에서 우러러 보던 이들이 올라 앉을 수 있는 시대가 지금의 시대 일상적 글쓰기가 넘쳐나는 개인 블로깅의 시대다. 소설과 시로 대표되고 존재하던 일련의 작가군들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고 다양한 작가군들이 등장하고 나름의 글들을 써 낸다.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귀가 따갑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생애를 관통하는 글쓰기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위대한 작가가 아니더라도 쓰지 않고는 살아있지 못하는 잡스러운 글줄이라도 써야 살아갈 수 있는 천형을 질어진 자들이 세상에는 작가라는 이름을 휘장처럼 단 자들 보다 더 많다는 사실이다. 휘장을 단 작가들도 작가들만이 라이벌이 아니라 초야에 묻혀 전전긍긍하며 글을 쓰는 기인이사들도 라이벌이라면 라이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작가들의 잔치는 이제 끝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여 이 소설을 글을 좀 써보겠다고 생각하는 어린 영혼들이 본다면 글쎄 그 방법을 찾을지 모르겠다만 유랑이 읽기에 강영숙 작가는 교묘하게 그 비법을 숨겨두었는지도 모르겠다. - 이것은 철저히 오독의 결과다 유랑은 발견하였으나 강영숙 작가가 아니거든 이러면 모든게 허사니 오독일 밖에 - 잘 살펴 보면 보일 것이고 보이지 않아도 그만이긴 하다. 모든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법이 없는 법인 것이 철저히 농익어야 한 순간 터질 수 있을 것이고 표면장력의 한계까지 가야 끊어질 수 있다. 끝이라고 생각할 때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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