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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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행위가 내가 아닌 것에 피해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적어도 <책과 세계>라는 강유원의 책에서 두어 문장 얻어 읽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 문장을 살펴 보면 이렇다.'지구가 원하는 것은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순환의 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인데 그들은 - 책 읽는 사람들(유랑 첨가) -나무를 베어 그걸로 책을 만들고 한쪽 구석에 쌓아 놓는 이른바 순환의 바퀴에서 이빨을 빼내는 짓'을 한다는 문장과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오늘날의 사람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책을 읽는 이는 전체 숫자에 비해서 몇 되지 않는다는 문장이다. 결국 책을 읽는 이는 지구의 순환 톱니 바퀴의 이빨을 빼내는 병든자들이 책을 읽는 자들이라는 소리다. 책을 읽으며 그 책들이 만들어내는 세계 속에서 소요유하며 살아오던 책읽는 자들에게는 어느 한 세계가 무너지는 청쳔벽력 같은 소리다.

 

강유원의 책은 <책과 세계>가 내가 읽는 강유원의 두 번 째 저작이다. 첫 번 째 저작은 < 인문 고전 강의>인데 <인문 고전 강의>도 <책과 세계>와 궤를 같이 한다. 인간의 시대가 시작되고 그 시작을 같이 했을 책들이 수 많은 책들 중에서 시간의 중력을 이겨낸 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강유원의 두 권의 책에서 주로 다루는 내용이다. 두 권의 책은 책과 책 사이의 합집합과 교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과 세계>에서는 <인문 고전 강의>에서 다루지 않았던 부분 - 일리아스 이전 부분- 이 등장하고 <책과 세계> <인문 고전 강의>에서 일리아스와 군주론'까지는 큰 맥은 같이 하고 그 지엽적인 이야기는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책의 출간 년도에 대한 지식이 내게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연표를 만들어 제시하면 좋겠지만 아직 나의 책읽기는 병들지도 않았고 지구의 이빨에 충치를 남길 정도도 아니어서 연표로 만들어 다루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강유원의 언급하는 책들이은 어쩌면 일반적인 교육과정을 거친 자들이라면 책명 정도는 들어봄직한 책들이다. 어떤 학문을 공부하다 보면 처음 접하는 것이 총론이거나 개괄서이고 그 다음이 전문 이론서의 수순으로 나아가는데 <책과 세계>가 개괄서의 성격이 강하고 - <책과 세계>에서는 이미 호명된 이름들이 왜 호명되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통시적 흐름에 따라서 - <인문 고전 강의>는 그 책들의 해설서 즉 주석서의 성격이 강하다. 주석과 해설을 겸하고 있지만 여타의 이론서나 학술서와는 판이하게 다른 대중에게 좀 더 다가가는 방법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책과 세계>에서 처음을 여는 책은 '길가메시 서사시'다.<인문 고전 강의>에서 처음을 여는 '일리아스'보다 시대가 앞선다. '일리아스'가 문예사조 중 고전 주의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길가메시 서사시'는 로마시대 이전의 기록이다. 수메르인들의 기록- 수메르인들은 로마인들보다 앞선 기록자들이다. 상업에 관한 자료들이 많이 전해진다. 수메르에 관해서 궁금한 점이 있다면 가볍게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 이나 소설 <수메리안> 정도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수메르 문명에 대해서 우리나라와 연관성을 주장한 학설들이 쏟아져 나온 때가 있었는데 보통 수메르가 단군 시대의 위성국으로 소머리국의 변형이라는 설이고 소머리는 아직 살아남아서 미국의 소호거리의 소호도 소머리에서 변형된 것이라는 설이 있는 것으로 읽은 적이 있다 - 이다

 

<책과 세계>라는 책 제목 자체가 내게는 생각해 볼 화두로 다가온다. 아주 단순하고 간명한 물음 앞에서 나는 나아가지 못하고 허덕인다. 그 물음은 '책과 세계와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해보기로 한다면 세계 속에 책이 존재하는 경우가 있고 그 반대의 경우 책 속에 세계가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어느 것이 어느 것을 반영하는가에 있어서 조금 미묘한 문제가 발생한다. 생각을 거듭하던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어떤 관계인가를 규정하는 것보다는 개별의 인간들에게 어떤 식으로 인식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내 경우는 세계 속에 책이 아니라 책 속의 세계가 있는 편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자에 속한다는 말 - 보르헤스의 경우 도서관을 우주로 인식하는데 도서관의 경우 질서정연하다. 우주도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질서정연한 논리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말이다. 거대한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은 작은 책들이고 책들이 세계를 이룬다는 말과 치환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보르헤스 전집 <픽션들>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 이다.

 

<책과 세계>에서는 책 뿐이 아니라 그 외의 것들도 논의의 대상으로 끌어들이는데 텍스트와 컨택스트의 문제와 책과 매체의 문제가 그것이다. 텍스트야 흔히 쓰이는 말로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데 컨텍스트는 사전적 의미로라면 문맥 맥락이라는 말이다. 텍스트를 읽을 때 문맥 맥락을 이해한다는 말을 조금 확장해서 생각해 본다면 - 사실 나는 이렇게 읽었다 - 텍스트를 읽을 때는 꼭 그 시대 상황을 알고 읽어야 한다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다. 군주론이나 통치론을 혹은 공자나 맹자를 읽을 때 재미가 없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 시대 상황을 이해히면 , 이해하기 전보다 좀 더 재미가 있는 것과 같다. 결론적으로 말해보자면 텍스트들을 읽을 때 컨텍스트의 사전 학습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작업의 순환 - 순환논증의 오류와도 같은 -을 열망하는 지구의 이빨을 왕창 뽑게 만들고 점점 사람을 병들게 만든다. 결국 책을 읽으므로써 치유가 되거나 해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병이 깊어지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이름하여 하이퍼 텍스트적 책읽기다.

 

책과 매체의 경우는 책이라는 것이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고 언어는 어떤 표면에 쓰여져야 인식되는 - 언어의 경우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로 나뉘는데 책이라는 것은 문자 언어를 기반으로 하고 문자는 표면에 적혀야 인식이 된다는 것을 부언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 데 그것이 고대 시대에는 점토판이기도 했고 죽간이기도 했고 파피루스 이기도 했다. 점토판이나 죽간은 쓸 수는 있었는나 무게에 취약했고 파피루스는 무게는 극복했으나 이집트 정부가 생산법을 독점하였으므로 가격이 비쌌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해결된 것은 인쇄술의 발명이었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바다. 그렇다면 인쇄술의 발명은 어떤 의미일까? 혁명일 수 밖에 없는데 산업혁명에서 혁명을 이끌어낸 것은 증기기관인 것과 마찬가지로 책의 혁명의 기저에는 인쇄술의 발명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제지술의 발달과 인쇄술의 발달로 책의 혁명은 완수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식상한 말이지만 꽃은 피어나게 마련이고 핀 꽃은 또 지게 마련이다. 이름하여 화무십일홍이라 했는데 , 책도 조심스레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아마도 인터넷이 왕성하게 보급된 때에 나온 이야기인데 , 책이 정말 종말을 맞이할까? - 자 다시 여기서 나눠야 할 것이 있는데 책이라는 큰 틀은 그대로 두고 종이로 만들어진 고전적인 의미의 책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자 - 이러한 문제는 시간이 증명해 주고 있지만 책은 종말을 고하지 않고 일종의 발전 - 개인적으로 발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과 변이를 겪고 있는 중인 것처럼 보인다. e-Book의 출현은 지구의 순환 운동에 전혀 무해한 형태인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 종이를 넘기는 맛이라든지 , 눈이 종이보다 더 쉽게 피곤해지는 등의 문제들도 있다. 책의 종말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알고 싶다면 책세상 문고 우리시대 11 <인터넷 , 하이퍼 텍스트 그리고 책의 종말>정도를 읽어보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인문 고전 강의>로 돌아가보면 처음 시작은 '일리아스'로 시작해서 공교롭게도 마지막은 동양 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공자'로 마무리한다. 서양의 사유체계의 변화를 살펴보고 마지막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동양 철학이다. 근대국가의 한계에 대한 대안으로 공자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강유원은 말한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문득 언어와 책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언어가 고착화되어 책이 되는 것은 사실 별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시간의 더깨와 중력을 이기고 살아남아 전해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지는데 이것은 역사의 일부가 되고 허구라도 진실의 일부이거나 진실인 것처럼 포장되고 인식될 수도 있다는 생각-내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구효서의 <비밀의 문>이라는 소설을 읽게 되면서다. 어떤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는 살아남느냐 살아남지 않느냐의 문제다 - 을 해보게 되는데 이것은 정말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책을 읽는다는 것에 수행되어야 하는 자세는 무조건적 수용이 아니라 비판적 수용일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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