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랜덤 시선 16
김경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유랑에게 시집이란 잘 읽히는 즉 내게 맞는 시집과 잘 읽히지 않는 즉 내게 맞지 않는 두 가지 부류로 나눠진다. 전자는 무난하게 읽혀 무난하게 이해되는 것들이고 후자는 난해하게 읽히며 난해하게 이해되거나 이해를 얻지 못하는 것들이다. 말되어지지 않는 것을 말하기를 즐기지 않는 유랑은 되도록이면 후자를 거론하지 않고 넘어가려 노력해왔지만 외면하기에는 석연함을 떨쳐버릴 수 없을 때가 있다. 이제껏 읽어온 시집들 중에 이러한 것들을 호명해보자면 김민정의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강정의 <키스> 김경주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정도가 될 것인데 평론가 신형철 씨는 이러한 시들을 일컬어 뉴웨이브라고 지칭하고 '새로워서 좋다가 아니라 좋은데 새롭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 시에 문회한인 유랑이 보아도 위에서 거론된 세 사람의 시가 전위적이라기 보다는 - 새로워서 좋다 - 좋다는 것도 알겠고 게다가 새롭다 하지만 새로움이 아직 익숙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이번에 유랑이 읽은 시집은 김경주 씨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라는 시집이다. 김경주 시인은 최근에 <시차의 눈을 달랜다>라는 시집을 내셨던 분이신데 그의 첫 시집이 바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이다. 이 시집 중에서 가장 유명한 시는 아마도 ' 드라이아이스'일 것이다. 모르시겠다면 -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요 - 이 문장 하나 쯤 기억할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라는 고대 시인 침연의 시구절 한 구절이다. 드라이아이스의 부제이기도 한 이 문장은 김경주의 문장이 아니라 침연의 문장인데 김경주가 빌어와 더 유명해진 문장이 되었다.  유랑의 어느 지인2은 김경주의 뛰어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했다. 자신의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찾아내어 쓸 줄 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유랑은 일단 읽었기에 무엇이라도 한 마디 해야하지 않을까 하여 몇 날 며칠을 고민을 하다가 독후감상문의 첫머리를 쓰긴 했다.

 

'계절과 계절 사이에 있던 나는 사이에 있었으므로 존재하지 않을 수 있었다. 구획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이쪽이든 저쪽이든 어느 쪽을 정하지 않으면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가 된다. 귀신이 된다. 이것은 살아있는 귀신에 대한 이야기다 '까지만 쓰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때로는 너무 많은 말보다는 몇 마디의 말들이 더 치명적일 때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시인 강정이 김경주의 시의 해설을 하면서 '시집 뒤를 채우는 일은 시에 주석을 다는 것이 아니라 시의 발생 지점을 밝히는 일이다. 다시 말해 시 속으로 독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바깥으로 시가 빠져 나오는 걸 도와주는 일이라는 소리다. 그럼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싲시집의 처음으로 돌아가게 만들어야 한다. 이때 시집의 처음이란 굳이 시집의 첫 머리가 아니어도 상관없다'3고 쓴다.  이렇게 쓰고 김경주의 시어들이 빛어내는 소리에 주목하고 김경주가 소리에 민감한 청각에 민감한 자라고 쓴다.

 

유랑이 보기에 김경주는 시차와 기미의 시인인듯 싶었다. 이 말은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가 하면 기미라는 말은 그의 첫 시집에서 읽을 수 있는 말이고 시차라는 말은 버젓히 <시차의 눈을 달랜다>라는 시어에 이미 드러나 있다. 기미라든지 시차는 계절과 계절 사이라는 말로 치환하면 어떨까 싶은 것이 사실 유랑의 생각이다. 기미라는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어떠한 기운을 먼저 알아차리는 것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시차 -김경주는 <시차의 눈을 달랜다> 자서에서 너의 수증기가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내가 모르는 마을 속에서 언제나 네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일거야 미안 여기를 시차의 사회라고 부를께라고 쓴다 - 는 한 세계와 한 셰계 같은 공간의 다른 시간 즉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된다. 결국 시인이란 기미를 알아차리는 사람이긴 하다. 그리고 그것을 선취하는 자인데 선취한다는 것은 일종의 천형이다. 먼저 나아가 그것을 말한다는 것 말이다.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들이 알아줄리 만무하다. 시인이라면 짊어져야할 소명이기도 하고 천형이기도 한 예민한 감각 소리에 실려오는 것들을 김경주는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많은 시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유랑이 관심깊게 본 것은 '비정성시'다 이 시는 하나의 글이고 하나의 생명의 나무다. 시인은 초기 작에서 자신이 평생 혹은 일정 기간에 사유해야할 모든 에너지를 응축시킨 시를 터트렸다. 모든 생명 있는 것은 그 흐드러짐에서 생동하는 약동하는 작은 씨앗에서 시작한다. 유랑이 생각하기에 어쩌면 김경주의 모든 것은 이미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서 드러났다. 그렇다면 그 다음 등장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하면 함축적이어서 혹은 너무 전위적이어서 알아차리지 못한 듣는 귀를 가지지 못한 일반인들에게 들려주는 음악의 해설서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한다. 유랑은 ......

 

가만 시인들은 관조하는 자들이고 관조하는 자들에겐 이 세상의 모든 비밀들이 스스로 옷을 벗어 드러내기 마련인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드러남이라는 것 김경주의 드러남이라는 것이 조금은 달라 보인다. - 이것은 째즈의 즉흥연주와 같은 문장이다. 이 문장들은 원래 유랑의 말의 꿰미에 들어 있지 않았으나 지금 문득 꿰미 속에서 튀어나왔다. 이야 말로 즉흥 연주 - 일련의 시인들이 관조하는 것은 자연이면서 결국은 자신이고 인간이었다. 결국은 내면으로 침참하고 칭강하는 형태로 귀결된다면 김경주는 그렇게 두질 않는다. 내면으로의 침참과 침강을 뒤집어서 세계를 향한 관조를 하고 있는 듯하다. 내면의 것들은 다른 시인들에게 맡겨버리고 외면 세계에 대한 거대한 진실을 언어로 술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도 시를 읽는 기미라면 기미일 듯 한데 잘못된 촉이라고 하는 표현이 더 적당할 듯 하다. 하여간 김경주가 말하는 바람과 음악과 소리의 향연을 귀 귀울여볼만 하다. 비루한 언사를 쓸 수 밖에 없는 유랑은 여기까지다 . 더 이상 할 말도 없고 해서도 안될 말들 뿐 사산된 말들을 주워 기워서 겨우겨우 남루한 문장을 마친다.

 

멸종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종의 울음소리가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나는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 (우주로 날아가는 방 5) 라고 쓴 김경주는 아마도 세상을 앓는 혹은 세상을 읽는 행위는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겠지만 멸종하지 않을 것이므로 시인이라는 종족이 멸종하고 멸절되고 단종되지 않을 것이므로 내면의 상처로 세계의 상처로 울음을 그칠 수 없지만 그 울음이 소리가 되고 음악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지 않을 것이므로 김경주는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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