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1 - 용의 아들
유재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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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서가 유행이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유형의 책이 범람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자기 계발, 대인관계 등과 같은 분야는 역사소설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역사적 사실로 알고 있는 역경의 순간에 선조들은 어떻게 대처했으며, 어떻게 한 나라 또는 한 그룹을 이끌어 가는지를 사실적으로 배울 수 있다. 초한지의 주인공인 유방과 한우 또한 역사적 사실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 그리고 리더가 갖추어야할 덕목 등을 잘 보여준다.

 

항우는 뛰어난 무용과 용기로 전투에서 언제나 백전백승을 한다. 자칭 전쟁영웅으로 불릴만하다. 반면 유방은 도망하는 것이 취미요, 건방을 떨고 방정맞은 성격이다. 전투에서 승리보다는 패배가 더욱 익숙하다. 그럼에도 항우가 아닌 유방이 초한전의 승리자가 된다. 이유는?

 

1. 자유분방함: 유방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동네 건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형식에 구애받기보다는 상황에 맞는 유연한 대처를 잘 한다. 그러기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시정해 두 번째 기회를 쟁취한다. 반면 초나라 유명한 장군인 향연의 손자로 정해진 규칙과 규범에 얽매여 있다. 또한 상하복명의 원칙을 고수하여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의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 그것은 곧 자신의 능력과 지위의 손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 자신감 : 유방은 자존감이 낮다. 특히 항우에 대한 두려움이 커 그와의 대전에서는 언제나 도망치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린다. 반면 항우는 독불장군이다. 절대 부러지지 않을 것 같은 자존감, 자신감만이 있다. 그러기에 유방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알고 타인에게 의지하고 그들을 믿는다. 반면 항우는 강한 자신에 대한 믿음 덕분에 타인의 능력을 의심하고 자신이 아니면 불안해한다. 작은 그룹을 다스릴 때에는 항우가 적합하지만 한 국가를 다스리는 왕은 유방이 더욱 어울릴 수밖에 없다.

 

3. 우뇌형 지도자: 항우는 전투에서는 항상 승리하지만 전쟁에서는 패했다. 반면 유방은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전쟁에서는 승리를 한다. 유방은 우뇌형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즉 미래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 한 두 번의 패배와 도망은 전쟁의 승리를 이끌기 위한 자양분이 된다.

 

4. 믿음: 유방은 능력의 뛰어남이 부족하고 항우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럼에도 유방이 승리한 결정적 이유는 믿음이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능력을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그의 능력을 믿고 맡길 줄 알았다. 항우 아래에서는 천대받고 무시당하지만 유방편에서는 대원수로 그를 한고조로 만드는 결정적 역할을 한 한신이 좋은 예이다. 반면 항우는 남을 잘 믿지 못한다. 인재가 없다기보다는 믿음과 인정을 주지 못하기에 인재를 제대로 활용할 줄 몰랐다. 책사인 범증을 아부로 칭하며 존중을 표현한 항우이지만 유방을 제거해야 된다는 그의 제안을 여러 번 무시하고 결국에는 장자방의 전략에 걸려 범증을 쫓아내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군막 속에서 계책을 짜내어 승리를 결정짓는 일은 내가 장자방보다 못하오. 또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위로하며 양식을 공급하면서 운송로를 끊이지 않게 하는 일은 내가 소하보다 못하오. 또 군대를 통솔하고 싸움에 임해 승리하는 일은 내가 한신보다 못하오. 내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걸출한 인재들을 거느릴 수 있었다는 점이오. 반면, 항우는 범증 한 사람 있었으나 그마저도 끝까지 신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 잡은 천하를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오. p.5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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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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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에서 우리는 군사독재를 직접 경험했다. 그리고 21세기에는 현대판 독재도 경험했다. 현재 우리는 촛불혁명이라는 용어 아래에서 새로운 변화를 이루는 과정 속에 있다.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시대에는 주로 육체적+물리적+사상적 감시 그리고 교육을 통한 사상의 지배 등이 독재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과학발달의 미비로 개인의 사생활에 해당되는 깊은 부분까지의 지배는 이루지 못했다. 반면 21세기의 독재를 꿈꾸던 정권은 과거 정권 같은 노골적인 폭력과 행포를 감행하지는 못했지만 CCTV, 블로그 등과 같은 실시간 정보수집 등의 기술들 덕분에 반대자들을 관리하고 배제하는데 효율적이었다.

 

조지오웰의 ‘1984’빅 브라더를 꿈꾸는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상적인 독재가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1. 육체적 +물리적+사상적 감시 : 각 가정에 설치된 CCTV와 시간대별로 방송되는 사상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물리적인 변화를 꾀함. 또한 규칙을 어기거나 독재를 거부할 경우에는 고문과 같은 무리적 육체적고통을 가함.

 

2. 정신적 고통 : 자신에 대한 모멸감과 수치심, 그리고 좌절감을 불러 넣음. 삶에 대한 능동

적 자세를 붕괴시켜 수동적으로 따라 오도록 만듦.

 

3. 언어의 소멸 : 자유를 연상시키거나 독재를 방해하는 용어를 제거함으로서 생각의 한계를

인위적으로 가지고 옴. 언어의 한계는 표현의 한계를 가지고 그것은 다시 생각의 한계에 이르게 된다.

 

4. 이중 언어: 궁극적 목표로 아닌 것맞는 것으로 바꾼다. ‘2+3=5’ 을 ‘6’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1984’는 빅 브라더가 어떻게 한 인간을 철저히 파괴하여 자기들 입맛에 맞는 사람으로 개조해 나가는 지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특히 주목해서 봐야 할 부분이 34번이다. 21세기는 분명 정보를 지배하는 사람이 권력(power)을 가질 확률이 가장 높기 때문에, 인터넷과 SNS 을 통한 거짓 정보의 전달 또는 논점을 흐리기 위한 잘못된 방향으로의 정보전달 등은 빅브라더들의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다.

 

반면  정보를 가려 읽을 수 있는 눈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면 빅 브라더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1984’는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들 뿐 만아니라 지배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도 꼭 필요한 교과서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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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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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새로움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일과 속에서 마주하는 것은 지루함과 식상함이다. 하지만 문학이라는 장르는 반복되는 사물과 현상을 다른 시각으로 접하도록 해 준다. 기존에는 느껴보지 못한 것, 생각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 고민을 하게 해준다.

 

이번 책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라는 책 또한 마찬가지이다. 수용소의 삶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무거운 바위를 정상까지 밀어 올리면 바위는 다시 굴러 내려가게 되고 다시 밀어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처럼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한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잠에서 깨어 점호를 하고 밥을 먹고 몸수색과 다시 인원점검을 해 노동현장으로 간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갇힌 그리고 의미 없는 삶.

 

하지만 이 책 어디에서도 수용소의 이런 삶을 스스로 마감했다는 구절은 없다. 오늘 자고 나면 내일도 역시나 추위 속에서의 고단한 노동과 굶주림만이 기다리고 있다. 형량이 기본 10여년을 넘어서고 있는 죄수들에게 석방이라는 희망의 두 글자를 기다리고 생활하기에는 너무나 벅차다.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간다. 눈에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희망에서가 아니라 지금 발붙이고 서 있는 이 자리에, 이 현실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바람 한 점 막아주는 방어물 하나 없는 것에서의 작업을 해야 한다는 실망감과 걱정이 건물 안에서의 작업으로 바뀌면서 기쁨과 즐거움이 생겨난다 . 추위 떨면 욕지거리를 하며 작업을 하지만 식사 시간에 먹는 따뜻한 국물 한 모금, 그 후의 담배 한 모금이 그 모든 것을 만과한다.

 

그렇다. 삶이라는 것은 먼 미래의 희망을 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곳, 이 시간에 일어나는 자잘하고 소소한 일상들이 인간 삶의 원동력이다. 만약 먼 미래의 희망만을 품고 살아간다면 주인공 슈호프와 함께 수용소에서 살아간 많은 죄수들은 스스로 삶을 마감했을 것이다.

 

우선, 한쪽 국그릇에 담긴 국물을 쭉 들이켠다. 따뜻한 국물이 목을 타고 뱃속으로 들어가자, 오장육부가 요동을 치며 반긴다. ,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바로 이 한순간을 위해서 죄수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슈호프는 모든 불평불만을 잊어버린다. 기나긴 형기에 대해서나, 기나긴 하루의 작업에 대해서나, 이번 주 일요일을 다시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나, 아무 불평이 없는 것이다. 그래, 한 번 견뎌보자.... p.175”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먼 미래만을 꿈꾸며 달려가기를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거기에 발맞추어 현실을 미래에 저당 잡혀 살아가는 현대인들. 과연 미래를 꿈꾸는 만큼 지금 우리는 행복한가? 혹시 행복이라는 단어를 너무 먼 곳에서 찾고 있지는 않는가? 

 

아모르 파티. 지금의 내 모습. 지금의 내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거기서 행복을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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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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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화두는 4차 혁명이다. 사물인터넷의 발달로 연결성, 신속성, 전문성을 띄게 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대신해 편리함을 줄 뿐 만 아니라 할 수 없는 영역에도 힘을 발휘하게 되기 때문에 유용성이 크다. 영화에서나 봐 왔던 장면들이 현실로 이어지게 된다.

 

유발하라리의 호모데우스는 이런 긍정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닥쳐올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을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이라는 말로 묘사한다. 인간보다 인간을 더 잘 이해하는 컴퓨터,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게 되는 컴퓨터. 결국에는 인간 사회에서 인간의 역할과 가치는 줄어들고 컴퓨터가 모든 것을 운영하고 그들에 의해 사회의 가치가 부여되게 된다. 그 결과는 호모 데우스라는 새로운 인간의 등장이다.

 

신문매체를 비롯한 여러 방송매체들은 대부분 4차 혁명의 긍정성만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4차 혁명으로 이어지기 전에 먼저 거기에 대한 정확한 정보전달이 필요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스마트 폰이 처음 시작될 시점에 남은 광고에서 그것의 좋은 점을 이야기했다. 반면에 거기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한 지적과 거기에 대한 대응에 대한 정보전달은 없었다. 물론 직접 사용해 봐야 느낄 수 있는 문제점들도 있지만 그 전에 예측 가능한 문제들이 있다. 거기에 대한 문제인식과 해결하려는 노력 등이 없다는 것이다.

 

분명 4차 혁명은 새로운 산업의 원동력이다. 많은 투자와 노력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예측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한 인식과 전달, 그리고 해결책 등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작가가 말한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이 아닌 호모 사피엔스의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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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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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영화를 좋아한다. 현란한 영상도 뿐 만 아니라 와 관련된 대사들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무슨 철학수업을 듣고 있는 듯해서 좋다. 대련할 때 상대와의 간격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상대의 간격 안으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고 나의 간격으로 안으로 상대를 끌어들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나와 상호작용이 가능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같은데 이런 원리는 학문이라는 것에도 적용된다.

교실에서 그리고 문자로 배운 학문의 세계는 현실과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다. 멋진 이론과 원리로 설명을 하고 있지만 실제는이라는 의문이 든다. 열심히 배우고 익혔지만 과연이라는 의구심이 일어난다. 결국 에서처럼 학문에서도 현실과의 간격이 중요하다.

 

세상물정의 사회학의 지은이는 사회학자로서의 세계와 현실 세계와의 간격을 좁히려고 노력한 책이다. 그리고 이야기한다. 모든 배움은 현실이 시발점이자 종착역이라고....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개인, 사회 구성원으로 구조 속의 개인. 지금의 우리는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이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여러 소제목으로 서로 관련성이 없는 듯 보이는 글들이지만 큰 틀에서 하나를 이야기한다. 점과 점으로 흩어져 있는 개개인이 아닌 선분 상의 점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 속의 개인을 강조한다.

 

소비 중심사회, 열정을 먹고 사는 사회. 경쟁을 부추기고 성장만을 추구하는 사회, 행복을 위해 자기계발을 강조하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는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다. 하지만 과연 개인만의 특징과 특성이 행복을 결정하는가? 좋은 간판을 따기 위해 공부한 12년의 학업, 좋은 학점을 따기 위한 치열한 머리전쟁. 다시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취업전쟁. 그 이후에는 자리보존을 위한 자기계발. 그 과정 속에서 라는 존재는 학점이라는 숫자에, 월급을 주는 그 누군가에게 소속되고 저당 잡힌다. ‘내일은 나아지겠지라는 희망만이 지금의 내가 가진 유일한 피난처이다.

지은이는 말한다.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고.... 사회가 그렇게 생겨먹은 거라고 위로해 준다. 그리고 답안을 제시한다.

 

임금노동이 평범한 사람들의 운명과도 같은 무게감을 지닌다면, 그 운명에 맞서는 방법 중 하나는 임금노동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이다. 그것을 거창한 말로 표현하면 연대라 한다. 연대가 지배적인 사회에선 거대한 공통분모에 주목하고 복지라는 수단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압박하고 있는 임금노동이라는 굴레를 헐겁게 해 준다... p.192”

 

사회는 국가는 그 구성원들에게 최소한의 생활이 유지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것이 구성원들이 국가라는 기관에 많은 권한을 이양하고 많은 세금을 내고 있는 이유이다. ‘복지’ ‘같이 잘 먹고 잘 사는 사회이것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바이며 평범한 내가 바라는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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