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동네의 ’우리들의 행복한 책이야기 - 책과 연애하다’에 참여하려고 추억의 갈피를 뒤적여보니, 가슴을 달뜨게 했던 열정보다는 짝사랑처럼 아슴아슴한 기억들이 밀려든다. 책과의 만남, 그 소중한 추억여행으로 책과의 연애사를 더듬어 본다.

읽을거리에 굶주렸던 유년기 
  격동의 현대사 한복판 60년대에 충청도 시골에서 태어나, 먹을거리보다 읽을거리에 더 굶주렸다. 읽을거리가 변변찮던 환경에서 나는 아버지께 오는 신문과 우편물을 섭렵했으니 초등 3~4학년이나 됐을까? 신문소설의 야릇한 성적묘사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버지가 볼세라 숨어서 되짚어 읽었던 떨림은 지금도 손에 잡힐 듯하다. 엄마에게 오던 ’가정의 벗’이란 잡지를 탐독했기에 가족계획과 피임이란 말도 알았고, 당시의 관념대로 순결과 정조의식에 철저하게 세뇌됐다. 그래서인지 삼남매를 적절한 터울과 사고 없이 자연 분만했으니 어린시절 독서의 덕을 톡톡히 본 듯하다. 시골에서 읽을거리에 굶주렸던 아픔은, 내 아이들에게 최고의 독서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한풀이를 하고 있다. ^^

내 인생의 충동구매는 오직 너뿐이야 
  어린시절 책에 대한 굶주림을 보상하듯 ’내 인생의 충동구매는 오직 너 뿐이야!’를 외치며 경제활동과 동시에 책을 사들이느라, 빛나는 청춘에도 외모를 위해서는 돈을 쓰지 못했다. 그런 나를 딱하게 여긴 아버지가 멋도 내고 옷도 사 입으라고 하셨지만, "아버지 그 돈이면 책이 몇 권인데......" 라면서 외모를 가꾸는데는 인색하고 박절했다. 결혼 후에도 역시 변하지 않은 씀씀이는, 철따라 두벌 옷이면 족하고 살림살이도 바꾸지 않았다. 우리집 살림은 거의가 21년을 함께 했기에 웬만한 건 오래 썼다고 명함도 못 내민다. 이러면서도 책사는 일에는 망설이거나 지체하지 않는다. 나와 가족을 위해서 책을 사거나 누구에게 선물하는 책값은 아깝지 않으니 참 신기한 일이다. 어쩌면 내게 유일한 사치요 허영이라 할 수 있는 책사들이기에, 오늘도 지름신은 망설임 없이 강림해 주신다. ^^

인연의 시작, 처음 만난 자유교양 문고

  초등 5학년으로 기억하는데 ’자유교앙문고’라는 시리즈가 교실에 있었다. 세계명작이 많았지만 유독 그리스 로마신화와 파브르 곤충기, 택리지만 생각난다. 하늘색과 살색 표지의 문고판으로 요즘의 학년별 권장도서라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 나는 그때도 독서편식이 있었던지 세계명작과 ’그리스 로마신화’는 즐겨 읽었는데 파브르곤충기와 택리지는 읽지 않았다. 그런데 6학년 때 책을 좋아하고 잘 읽었던 나를 당진군내의 ’자유교양대회’에 학교 대표로 내보냈는데, 그때 시험에 나왔던 문제가 바로 위의 책 세 권에서 출제되었다. 그리스 로마신화야 너무 재밌어 날마다 꿰고 살았으니 줄줄이 답을 썼지만, 파브르 곤충기와 택리지는 거들떠도 안 봤기에 답을 하나도 적지 못했다. 이 대회는 내 생각의 글쓰기가 아니라 50문항의 주관식 문제만 줄줄이 있었다. 당연히 입상하지 못했고, 독서왕으로 꼽히던 내가 처음으로 자존심에 상처 입은 사건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파브르 곤충기와 택리지는 상처에 소금 뿌리는 쓰라림으로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이런 아픔을 겪었기에 우리 아이들이 독서골든벨이나 글쓰기 대회에 나가면, 반드시 추천도서를 알아내어 사서 읽히는 것에 게으름 부리지 않는다. 덕분에 우리 아이들은 제 몫을 톡톡히 해냈고, 상처받았던 엄마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는 치료제로도 충분했다.

어린시절 역사인식에 눈 떴던 4.19 자료집

  충격이었다. 아버지가 갖고 있던 4.19 자료집은 표지도 떨어져 나가고 몇 장은 너덜거렸지만, 나는 김주열 열사를 비롯한 참혹한 사진을 보고 울면서도 그 자료집을 보고 또 보았다. 왜 그렇게 들여다봤는지 모르지만, 어린 마음에도 의분이 끓었는지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하며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던 그들을 존경했던 듯하다. 그렇게 어린 내게 역사인식을 싹틔우고 눈뜨게 해 준 책이었다. 중학교 때 인천으로 이사와 셋방을 전전하느라 보존하지 못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억울해서 눈물이 나지만, 내게는 충분히 그 역할을 다 했던 책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역사에 관심을 갖고 우리 아이들에게 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기 위해 공을 들였다. 정권이 요구하는 조건에 따라 전천후로 적응하는 역사가 아니라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흘러도 절대불변의 역사적 인식이 중요하다. 요즘같이 역사왜곡이 자행되고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정부에겐 바른 가치관과 역사 인식을 가진 국민들이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열네 살 중학생 ’세계문학’과 만나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언니 친구인 경회언니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바로 그 언니 집에 있던 ’세계문학전집’ 때문이었다. 처음엔 내 언니를 통해 한 두 권씩 빌려봤는데 독서의 목마름은 충족되지 않았다.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아예 언니 집으로 쳐들어가는 뻔뻔함도 불사했으니, 주말이면 경회언니 집으로 가서 책을 읽다가 월요일에 바로 학교로 등교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염치없이 철없었지만, 그런 나를 싫은 내색 않고 받아 준 경회언니 가족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한다. 그때 읽었던 세계문학은 내게 문학적 감성을 일깨웠고 대문호의 작품을 줄줄이 읽는 것으로 어린 마음은 행복했다. 그때의 빚을 갚으려는 듯 우리가 인천으로 이사 온 후 경회언니가 방학이면 우리집에서 며칠씩 머물다 갔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연락하며 지내는 걸 보면 책으로 맺은 인연은 깊고 진하다. 경회언니는 부모님도 해줄 수 없었던 독서환경을 내게 제공해 준 은인이었다.


사춘기 통곡을 쏟아냈던 책읽기

  고등학교 때 경제적 어려움이 극치에 달했던 우리 집, 그런 상황이 참 원망스러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반 없었다. 마음대로 할 수 없던 현실의 도피처로 책읽기에 빠져 들었고, 내 설움이 겹쳐 책을 읽으며 통곡하는 일이 많아졌다. 지금도 기억하기론 김래성의 ’애인’과 박계주의 ’순애보’를 읽으며 어찌나 격렬하게 통곡했던지 놀란 아버지가 내방으로 건너왔고, 책을 보다 엎어져 울고 있는 나를 보곤 "무슨 책인데 그렇게 눈물나느냐?"면서 들춰보셨다. 아버지도 그 책을 읽어서 알고 계신 듯, "그렇게 눈물날 건 아니구먼." 하시며 내 등을 쓸어주곤 건너가셨다.

  그때 ’당진학우회’라는 향우 모임에서 내 눈에 들어왔던 ㅈ 고등학교 오빠를 짝사랑하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작품 속 지고지순하지만 이룰 수 없었던 그들의 사랑에 감정이입이 되었던 듯하다. 지금도 여전히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건 문학이다. 어쩌면 이런 감수성이 내게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잃지 않게 하는 영양제나 청춘회복제인지도 모르겠다.

독서의 내공을 키워 준 독서모임

  가정 형편상 곧바로 대학에 가지 못했던 나는, 우울한 청춘을 책읽기로 위로 받았다. 인천 YMCA  대학 청년부 독서모임에 나가면서 문학에만 치우쳤던 나는, 인문학과 사회적인 이슈에 눈뜨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받은 도움을 나누고 싶어 교회 고등부 학생들과 독서모임을 만들어, 풋풋한 그네들의 눈을 열어 주는데 일조했었다. 그 시절부터 독서모임은 나의 독서내공을 키워준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삼남매 학교의 학부모 독서회와 마을 어머니독서회에 참여한다. 같은 책을 읽고 같거나 혹은 서로 다른 감상을 나누는 독서모임은 책을 보는 넓이와 깊이를 더하게 한다. 게다가 학창시절 읽었던 세계문학의 추억을 더듬으면서 일년에 두어 번은 고전 다시 읽기를 시도한다. 죄와 벌, 부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제인에어, 노틀담의 곱추, 레미제라블 등 수많은 고전을 다시 읽으며 학창시절의 감성과 추억을 되살리기도 한다. 또한 방학이면 장편 읽기로 봄날 5권, 한강 10권, 태백산맥 10권, 아리랑 12권, 토지 21권을 완독한 일은 스스로 자부심을 갖게 했다. 독서모임의 고전 다시 읽기와 장편읽기는 뿌듯한 연중행사로 자리매김 되었다.

삼중당 문고로 다시 만난 세계문학

  주머니가 가벼운 청춘들을 열광케 했던 문고판 도서, 그 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삼중당 문고였다. 작가 공지영도 딸에게 주는 편지인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에서 삼중당 문고의 추억을 이야기 한다. 내게도 삼중당 문고의 도서목록에 읽은 책을 동그라미 치며 미친 듯 읽어대던 시절이 있었다. 중학교 때 한자를 모르면 대충 건너뛰고 읽던 세계문학과는 또 다른 차원의 만남이었다. 지금은 대학생이 된 큰딸이 자기 서가에 꽂아두고 엄마와 추억을 공유하듯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책이 되었다. 모녀가 세대를 뛰어 넘어 삼중당 문고로 다시 만난 세계문학은 우리를 연대감으로 묶어주는 또 하나의 추억이다.

책 읽는 엄마에서 책 읽어 주는 선생님으로 변신하다

 ’책 읽는 엄마가 책 읽는 아이를 키운다’는 나름의 철학과 소신으로 삼남매를 키웠고 그 열매를 달게 따먹을 수 있어 행복하다.  이제는 내 아이를 키우고 책 읽는 엄마에서 책 읽어 주는 선생님으로 삶의 방향을 틀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유아교육만으론 부족하다 생각돼, 아이가 크는 대로 같이 공부하는 엄마가 되었다. 뒤늦게 국문학을 공부하며 열병처럼 앓던 문학에의 갈증도 조금은 해소했고, 내가 모르던 것들에 말귀를 틀 수 있어 좋았다. 지금은 초등아이들의 글쓰기를 지도하며 보람을 느끼고, 아이들이 내게 배운 글쓰기는 잊을지라도 함께 읽은 책은 기억해주길 바란다. 책 읽어 주는 엄마에서 책 읽어 주는 선생님으로 변신했고, 앞으로는 책 읽어 주는 할머니로 또 한번의 변신을 꾀할 것이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독서였다

  시인 서정주는 ’자화상’에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말한다. 서정주 시인을 따라 읊어보자면, 나를 키운 건 8할이 독서였다. 어린 시절 꿈과 희망을 주었던 책, 내 인생길 구비마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좌절을 겪어도 나를 일으킨 것은 책이었다. 공황상태에 버금 갈 충격이나 인간관계에서 배신을 느꼈을 때, 내 마음을 위로하고 다독인 것도 책이었다. 짧지 않은 여정에서 끊임없이 나를 일으켜 세우며 내 인생의 2막을 열어준 것도 책이었으니, 책과 만났던 40여년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음은 오늘의 나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책을 만났는가 보다는 어떤 책을 만났는가가 더 중요하다. 내 인생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낸 독서야말로 진정한 책과의 만남일 것이다. 이제는 다섯 식구가 책에 빠져 그동안 모인 책을 이웃과 나누려고 마을도서관을 꿈꾸기에 이르렀으니, 책과의 연애사는 내겐 소중한 추억이면서 현재진행형이다.

  읽을거리가 늘 고팠던 유년기부터 소중한 인연으로 내게 온 책들과,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는 그날까지 내게 올 책들은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추억의 보물창고에 영원히 남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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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Journey 2008-12-21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추천부터 누르고 이웃동네 공원으로 갑니다~ =33=33

순오기 2008-12-22 10:50   좋아요 0 | URL
후후~ 워낙 잘 쓴 분들이 많아서 마음을 비우고 참여에 의의를 뒀어요.
추천 고마워요~ ^^

hnine 2008-12-22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교양문고를 아시는군요. 그게 아마 학년별로 권장 도서 표지색깔이 달랐었나봐요. 제가 읽던 것은 모조리 초록색 표지였어요. 저도 그 대회 나간다고 엄마께서 무조건 내용을 좔좔 외우라고 시키시는 통에 오히려 책읽기에 학을 띠는 계기가 되었었죠 ㅋㅋ

국문학 전공하셨구나~~ ^^

순오기 2008-12-22 10:52   좋아요 0 | URL
자유교양문고~ 저희때는 초록색 표지는 없었어요. 언제까지 나왔는지도 모르지만 추억의 책이죠.^^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서 대충 알아요~ 아직도 대학원을 꿈꾸고 있지만, 애들도 뒷받침하기 어려운 형편이라 욕심을 못내고 있죠.ㅠㅜ

마노아 2008-12-21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도 책 편력기를 쓰셔야 해요. 감동의 인생사에요~

순오기 2008-12-22 10:53   좋아요 0 | URL
그런 의미로 정리 차원에서 참여했어요.
추억을 더듬는 좋은 기회가 됐지요.^^

쟈니 2008-12-21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소중한 추억을 읽어서 기쁩니다. 순오기님의 글을 늘 읽고 가기만 하다가, 감동적인 글을 뵈어 댓글을 남깁니다~~

순오기 2008-12-22 10:54   좋아요 0 | URL
저도 댓글 덕분에 달려가봤어요.
대단한 독서가던데요. 제가 읽은 책은 한 권도 없어서...OTl

꿈꾸는섬 2008-12-21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의 글을 보니 저도 많이 힘들었던 청소년기를 보냈었는데...이제는 엄마가 되었으니 아이들에게 많은 책을 읽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에게도 최대의 사치는 아무래도 책을 사는일이 아닐까합니다.

순오기 2008-12-22 10:55   좋아요 0 | URL
청소년기 어려움을 겪어봐서 그래도 이만만한 사람이 된 듯해요.
우리가 누리는 최대의 사치는 사는 날까지~~ 계속!!^^

바람돌이 2008-12-22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이에요. 삼중당문고는 저도 생각나네요. 그 작은 크기와 깨알같은 글씨, 그리고 아마 세로쓰기였죠? ^^ 책 가격이 싸서 많이 사볼 수 있었던 우리 시대에 그나마 사볼수 있었던 책이잖아요. ^^

순오기 2008-12-22 10:55   좋아요 0 | URL
삼중당문고 세로쓰기...주머니가 가벼운 청춘들에게 좋은 책이었죠.^^

하늘바람 2008-12-22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여하고 팠는데 끝내 참여를 못했네요. 역시 부지런하셔요. 전 엄마에서 선생님으로의 변신부분이 참 와닿네요

순오기 2008-12-22 10:57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벤트 마감날에야 참여했어요.
엄마에서 선생님~ 그리고 할머니로^^
아마도 10년 정도 지나면 누군가 나를 할머니로 만들겠죠.ㅋㅋㅋ

노이에자이트 2008-12-22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래성으로 쓰셨네요.김래성이 맞지요...그런데 세계문학전집 중에 국한문 혼용의 책이 있던가요? 소설은 한국 것이건 번역물이건 한글전용이던데요.장용학 것은 예외입니다만...

순오기 2008-12-22 18:01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랬네요. 역시 노이에님은 살아있는 백과사전!
얼른 수정해야지.^^ 캄솨~~~~합니다!
제가 읽었던 문학전집이 어디 출판사인지 그때는 그런 것도 몰랐어요.
그 언니 오빠가 대학생이었으니 아마 유명 출판사의 좋은 책이었을 거예요.^^ 국한문 혼용은 다른 책이었나? 하여간 제목은 한자로 되어 있어서 '부활'인지도 모르고 읽었는데 나중에 아하~ 했던 기억이 있어요.ㅋㅋ

2010-01-24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6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