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 허풍담 5 - 휴가
요른 릴 지음, 지연리 옮김 / 열림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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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의 사내들이 순간을 사는 법

- 북극 허풍담 5를 읽고


요른 릴 지음, 지연리 옮김, [열림원] (2022)

 



이른바 문명 세계에서 성장한 한 인간이 북극의 오지를 방문하고 매료되어 16년을 눌러 살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보기 드문 이 경험의 주인공은 덴마크의 작가 요른 릴이다. 그가 19세가 되었을 때 한 탐험가와 함께 방문한 그린란드에 매료되어 그대로 16년을 눌러 살았다고 한다. 북극 허풍담은 작가의 이런 경험이 바탕이 되어 쓰인 소설이다. 북극 허풍담 5를 읽으면서 줄곧 작가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가 지구의 외딴 곳에서 발견한 매력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먼저 나온 북극 허풍담네 권을 아직 읽지 못했지만, 번역가가 직접 그린 재미있는 삽화를 보면서 각 인물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하며 읽었다.


 

보급 물자를 실은 배가 그린란드 북동부의 항구 톰슨 곶에 들어오면, 이곳 사내들 사이에는 기대와 흥분이 감돈다. 배가 이 오지에 닿는 일은 일 년에 한 두 번이다. 누구는 거대한 사향소 사육장을 만드는 데 필요한 철망을 기다리고, 다른 이는 새 파이프 담배 하나가 도착하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린다. 또 어떤 시인은 반년 전 혹은 일 년 전에 자신의 원고를 문명 세계의 출판사로 보내 그 결과를 기다리기도 한다. 각자 하는 일이 어떻든지 간에 이 곳에 사는 사내들은 모두 사냥꾼들이기도 하다. 또 이들은 자연이 만들어 놓은 수도원에서 침묵이란 기도를 배우는 수도승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문명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놀라운 일과 불가사의한 일이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었다.


 

아마 앞부분에 자세한 내막이 나와 있을 테지만, 북극 허풍담 5에서는 어떤 실수(?)로 닐스 노인을 먹어버린 할보르 로네센이 다른 사내들보다 주목을 받고 있다. 그린란드 북동부의 항구로 들어오는 배를 타고 돌아온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한 남자가 얼떨결에 식인을 해버렸다는 소설의 설정부터 충격적이지만, 이 곳의 도덕은 오히려 실수로 벌어진 일인데 어쩌랴에 가깝다. 문명 세계에서 통용되는 상식이 이곳에서는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소설에서 재미있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지만, 무엇보다 내 눈에 들어온 건 이곳 사내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이곳에서의 삶을 지배하는 규율은 문명이 만든 형이상학이 아니라, 철저히 경험주의적인 야생의 법칙이었다. 북극의 혹독한 기후와 절대 고독이 만들어낸 삶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선 문명이 만들어 낸 외곬수적이고 편집증적인, 그리고 신경증적인 규율이나 법과 도덕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문명 세계였다면 이곳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띄게 되었을 것이다. 문명 세계에선 사람을 잡아먹은 전적이 있는 사내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신부님이 될 수는 없을 테니까. 아마도 할보르는 식인 살인마라는 오명과 함께 사회로부터 격리되거나, 사형을 당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곳에선 현지의 야생과 집단의 규율이 곧 법이었다.


 

이 소설이 북극 허풍담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아주 중요한 삶의 진실 하나를 담고 있다고 보인다. 그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태도 혹은 철학이다. 기나 긴 겨울이 지배하는 북극 세계에서 봄은 아직 멀었고, 여름과 가을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그러니 이곳에는 대부분 어둠의 시기만이 남는다.

 


이 시기가 오면 말 그대로 순간을 살았다. 하루가 가면 또 하루를 살고, 과거도 미래도 없이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이동했다.”(115)


 

이 부분에서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게 이 대목은 아주 중요한 삶의 철학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순간을 산다는 것 말이다. 어쩌면 이런 삶의 방식이야말로 대부분의 현대인이 잃어버린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인지 모른다. 철학자 마크 롤랜즈가 철학자와 늑대에서 저자는 인간의 삶과 늑대의 삶을 비교하고 있는데, 그가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늑대가 순간을 살아가는방식이었다. 이는 늑대의 본성(nature)이라고 해도 좋겠다. 고통이 닥치면 피하지 않고 그저 견디는 것이다. 이는 하루하루 주어진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반면 인간은 온전히 순간에 머물지 못하고 미래를 걱정하는데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낸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순간을 사는삶의 방식은 무모해보이거나 미개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를 캐내어 스스로를 괴롭히거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리를 줄곧 채찍질하곤 한다. 문명 세계는 사람들에게 더 좋은 삶, 더 안락한 삶을 살기위해 미래에 시선을 맞추게 한다. ‘지금을 희생하도록 무언의 요구를 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인을 길들인 문명의 규율이다. 인간의 문명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양분삼아 유지된다고 볼 수도 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돈으로, 물질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든다. 따라서 문명 세계로 떠나 신부가 된 할보르가 잃어버렸다고 하는 대상은 대부분의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이기도 하다. 작가 요른 릴이 청년기의 대부분을 북극의 오지에서 보내면서 인간이 잃어버린 본성의 모습을 다시 발견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할보르는 눈폭풍 속에서 며칠 동안 나아가다 죽음의 문턱에 서기도 했다. 동상으로 엄지발가락을 잃기도 했지만, 그보다 내면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는 이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고, 미래를 갈망하지 않았다. 대신 깊은 평화가 내면에 자리 잡았다.”(177) 이 경험을 한 직후 그 앞에 구릿빛 피부의 여인 마 킨이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졌다. 할보르는 마 킨과 섬을 타고 사랑을 나누게 된다. 하지만 할보르가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은 마 킨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게 되는 것이다. 잃어버린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허풍 같이 보이는 북극 사내들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문명 세계 사람들이 잃어버린 본성일 것이다. 문명은 사람들을 북극 오지의 사람들보다 더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고립시켜버렸다. 문명인들은 곧 순간을 사는 법을 잃어버린 셈이다. 요른 릴이 줄곧 이야기하고자 하던 것이 바로 이런 삶의 양식이 아니었을까. ‘문명인들의 행복감은 물질에 의존적이고 조건적이며 피상적이다. 반면 엉뚱하면서도 순수한 북극 사내들이 느낀 행복감은 삶에 보다 밀착되어 있고 본질적이었다. 행복감의 결이 분명 달랐던 것이다.


 

할보르는 하늘에서 내려온 구릿빛 여인 마 킨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그린란드를 떠났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두 사람이 다시 문명 세계로 돌아간다면, 그들은 다시 북극에서 느꼈던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또 다시 문명 세계의 규율에 영향을 받고, 여기에 익숙해져가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린란드에는 다시 봄이 오고 북동부 항구 톰슨 곶에는 물자와 소식을 가득 실은 베슬 마리호가 들어왔다. 스스로를 좌초된 인생들이라고 부르는 북극 사내들의 세계에 여전히 커다란 행복과 평화가 깃들 수 있을까? 아직 읽지 않은 앞부분이 궁금하고, 동시에 다음 책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책 속으로]



[1] "봄은 아직 멀었다. 따라서 즐거운 일도 없었다. 여름은 자잘한 기쁨을 몰고 왔지만 황당하게도 왔는가 싶으면 그새 지나갔다. 가을도 마찬가지였다. (...) 그러니 남는 건 어둠의 시기뿐이었다. 이 시기가 오면 말 그대로 순간을 살았다. 하루가 가면 또 하루를 살고, 과거도 미래도 없이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이동했다."(115)

[2] "할보르, 미친 건 우리가 아니야. 오히려 우리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놈들이지. 놀랍긴 하지만 불가사의한 일은 삶에서 언제고 일어날 수 있어. 그런 걸 부정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해."(176)


[3] "그는 이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고, 미래를 갈망하지 않았다. 대신 깊은 평화가 내면에 자리 잡았다."(177)

[4] "안톤에게 그해 봄은 특별한 계절이었다. 젖먹이 송아지가 똥을 싸듯 시가 쉼 없이 쏟아져 나왔다."(215)

[5] "세상에서 가장 멋진 신부님이기도 했지만, 사람을 잡아먹은 전적이 있었다."(249)

[6] "그렇게 그들은 로이비크가 썰매 가득 고철과 강철 케이블, 용접용 램프를 싣고 도착할 때까지 사랑의 시간을 살았다."(250)

[7] "할보르는 행복했다. 행복한 빛에 휘감기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과거가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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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0-07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상 추카!

초란공님은 허풍 1도 없으실 것 같습니다 ^ㅅ^

이하라 2022-10-07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thkang1001 2022-10-07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

새파랑 2022-10-07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mini74 2022-10-07 2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 이렇게 재미있는 글을 저는 왜 못 본거지요 ㅎㅎ
초란공님 축하드립니다 *^^*

그레이스 2022-10-07 2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책
축하드려요~
초란공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