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에서 부친 편지
경봉 스님 외 지음, 정성욱 엮음, 명정 옮김 / 노마드북스 / 2005년 10월
품절


가을바람이 펼쳐져 있는 책갈비를 넘깁니다.
문 밖에 낙엽 지는 소리가 사락사락 귓가를 간지럽힙니다.
만행 끝에 잠시 머문 이 해인사 문지방에는
가을이 때늦은 봇짐을 풀어놓고 나를 유혹하는 듯합니다.
붓을 꺼내 그 가을의 향기를 그리려 하나
흰 종이에 그린 것은 오로지 점 하나뿐입니다.
이런 날이면 무엇 때문인지 자꾸 마음이 흔들립니다.
아마 번뇌가 내 몸속에 남아 있는 탓이겠지요.
탐욕과 노여움, 어리석음의 삼독번뇌를 벗지 못하는
이 중생의 모몰염치冒沒廉恥 때문이겠지요.
시냇물에 몸을 씻어 번뇌를 지우다가 지우다가
끝내 다 지울 수 없어 망연히 지는 잎을 바라보지만
부끄러운 생각에 그만 등줄에 땀만 흐릅니다.
아마 아직도 수행히 부족한 탓이겠지요.
스님 이만 허튼소리를 줄이겠습니다.-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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