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에서 부친 편지
경봉 스님 외 지음, 정성욱 엮음, 명정 옮김 / 노마드북스 / 2005년 10월
품절


새벽에 이곳 절에도 하얀 눈이 내렸습니다.
눈길을 더듬어 걷다가 짐승의 발자국을 발견했습니다.
산토끼의 발자국 같았습니다.
눈 위의 첫 발자국을 아마 산토끼가 남겨놓은 듯했습니다.
그 발자국이 너무 곱고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따라갔습니다.
어느 틈에 눈이 다시 내렸는지 발자국은 사라졌지만
나도 모르게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았습니다.
내 발자국도 선명하게 찍혀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토끼의 발자국처럼 그다지 아름답지는 못했습니다.
어찌 내 발자국을 그 작고 아름다운 것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삶은 자기가 살아온 길에 대한 흔적이라 생각합니다.
환경스님이 옥고를 치르는 동안 저는 이곳애서
묵은 세끼 공양과 더불어 차나 즐기고 있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어찌해야 스님의 고통을 더불어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나라를 잃은 슬픔, 민족을 잃은 슬픔, 언어를 잃은 슬픔
제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조차 잃은 지금,
깊은 탄식만 앞을 가립니다.
구구절절이 말을 해본들 죄다 탄식뿐이니
이만 말을 줄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침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햇살을 머금습니다.
동자童子가 빗자루로 토끼와 내 발자국들을 지웁니다.-18~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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