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락산의 유래

수락산은 의정부시와 남양주군을 경계로 위치하고 있다. 산전체가 화강암과 모래로 이루어져 얼핏보기에는 삭막하고 볼품없이 보일 수도 있으나 안으로 들어서면 전혀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락산은 산세가 웅장하고 곳곳에 다양한 볼거리를 지니고 있다. 수락산에는 세상을 등지고 세상을 방랑하였던 김시습의 자취가 어려있다. 세종은 5세때 신동소리를 듣던 김시습을 무척 아꼈다.

당시 세자였던 문종과 어린 세손인 단종을 향해 '너를 귀히 등용할 두 군왕이다'라고 했을 만큼 김시습의 재주를 높이 샀다. 세월이 흐른 후 수양대군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김시습은 3일 동안이나 문을 닫고 통곡했다. 그후 책을 불사르고 머리를 깎은 그는 중이 되어 세상을 떠돌았다. 정처없이 발길 닿는대로 다니던 그의 발길이 이곳 수락산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한동안 은거하였던 김시습은 수락산 정상을 비로봉이라 이름짓고 다른 봉우리들도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온다.

식장산의 유래

옛날 식장산 자락에 어린 아들을 둔 가난하고 효성이 지극한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 젊은 부부는 아들로인해 큰 걱정거리가 있었는데, 산과일이건 나물이건 어머니에게 드리면 어린자식이 먹어치우고 어머니에게 몰래 드리기 위해 아들을 업고 나가면 크게 울어대는 통에 어머니가 마음놓고 그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분 밖에 없는 어머니를 잃게 될 것을 염려한 부부는 자식은 또 낳을 수 있다는 생각 끝에 아들을 숲속 멀리 묻어 없애기로 했다. 그런데 아들을 묻으러 땅을 파던 부부는 땅 속에서 그릇 하나가 나오자 괴이한 생각이 들어 아들은 다른 날 묻기로 하고 그릇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무심코 이 그릇에 담뱃재를 털었는데 다음날 눈을 떠보니 담뱃재가 그릇 그득히 쌓여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음식을 조금 담아놓았더니 그릇의 음식이 가득 불어나 있었다. 이때부터 이들 부부는 근심이 없어졌다.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려던 부부의 크나큰 효에 하늘도 감탄하여 큰 보물을 내렸던 것이다.부부는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 그릇을 산의 어느 곳에 묻었다고 한다. 밥 그릇이 묻혀있는 산이라 해서 식기산 또는 식장산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월아산의 유래
 

월아산은 진주시의 상징적인 산으로 금산면과 문산읍, 진성면에 걸쳐 있다. 월아산의 두 개의 봉우리중 북쪽을 달임산이라 부르고, 남쪽 봉우리는 장군대라고 한다. 이 봉우리를 장군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다. 지리적 특성상 진주는 다른 어떤 지방보다도 치열한 왜군과의 격전지일 수 밖에 없었고 백성들은 그들의 살육과 약탈에 시달려야 했다. 논개가 이곳 진주에서 왜병장을 안고 물에 뛰어들었던 것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당시 김덕령 장군은 왜군이 진주로 진격해 오자 월아산에 목책성(木柵成)을 쌓고 왜적을 무찌르는 본영으로 삼았다. 이런 역사적 사실 때문에 이 봉우리에 장군대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월악산의 유래

충북 제천과 충주에 걸쳐있는 월악산은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예전에는 월형산(月兄山)이라 불렸다. 월악산의 정상을 영봉 또는 국사봉이라 부르는데, 산의 정상을 영봉이라 부르는 곳은 백두산과 월악산 둘뿐이다. 『 비결잡록』에는 '병화불입지지'라 하여 난리가 나도 안전한 땅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그러나 왜 월형산이란 이름을 붙였고 언제부터 월악산이라고 바꿔 부르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길을 없지만 대신 여러 가지 추측이 전해온다. 어떤 이는 월()자가 붙은 산이 대개 인가가 많은 지역의 동쪽이나 남쪽에 있어 사람들이 그 산위로 솟은 달을 보게 된다는 것과 연관짓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근처가 서울이 될 뻔하다가 와락 미끄러져 와락산이라 부른 것이 월악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주왕산의 유래

경북 청송면에 위치한 주왕산은 전설의 산이라고 할만큼 많는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주왕산은 원래 높고 깎아지른 바위들이 골짜기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하여 석병산이라 불렸다. 그후 신라 왕자인 주원이 이 산에 은거하게 되면서 주방산이라 하였고 이후 대둔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신라 때의 일이다. 중국 동진의 왕족인 주도는 스스로 '후주의 천황'이라고 칭하면서 나타났다. 그는 군사들을 이끌고 당나라 덕종 15년에 장안으로 쳐들어간다. 그러나 곽자의에게 패하고 주도는 요동을 거쳐 어찌어찌하여 고려 땅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은신처를 찾던 그는 산 하나를 발견하였다. 지세가 험하고 은거하기에 적합하다 판단한 그는 여기에 머물렀다. 한편 신라 조정은 당의 재촉을 받고 장군을 보내어 주왕을 토벌케 했다. 결국 주왕은 타국땅에서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후 이 산을 주왕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 근거는 찾을 수 없다.  -출처 네이버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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