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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참 행복하다 - 10년의 시골 라이프
조중의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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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자라서 이사 가서도 시골에서 살고 있는 시골 토박이다. 몇 해를 살았는지 세어본다면 나는 글쓴이보다 시골 선배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나는 선배였던 적이 없다. 숫자만 두고 본다면 내가 분명한 선배이지만 양이 아니라 질을 따졌을 때 나는 후배나 다름없다. 나는 글쓴이의 시골생활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시골에 가야만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요강할머니가 있었다. 시골에 남아 혼자 사는 것을 보다 못해 아들이 부산으로 데리고 갔다. 일주일 만에 요강할머니는 돌아왔지만 그러나 곧 앰뷸런스가 와 할머니를 데리고 간 뒤로는 시골로 돌아오지 못했다. "못 간다! 난 못 가!“ 할머니가 넘어야 했던 건 도시의 벽이라고 말한다. 나는 가까운 도시에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가지 않는 성격이다. 귀찮은 게 딱 질색인 나에게 나들이도 딱 질색하는 귀찮은 것 중의 하나다. 그런 내가 특별한 일로 서울까지 가는 날에는 내가 꼭 하는 일이 있다. 고층건물 구경하기. 그리고 몇 층인지 세어보기. 세다가 내 고개가 빠지는 줄 알았다. 바로 그 앞에 서 있는데도 작아보이던 그 건물이 실제로는 20층도 넘었을 때 헉 하는 충격. 부산에는 가본 적 없지만 바로 그런 헉 하는 충격을 받으신 건 아닐까?

같은 시골에 산다는 기분이 드는 이야기도 있었다. 시골마을에서 들려오는 개들의 소리. 우리 집에도 개를 키우고 있다. 시골에 울려 퍼지는 개 짖는 소리에 한몫하고 있는 셈이다. 글쓴이에게도 진진이라는 진돗개가 있었지만 목줄이 풀린 사이 숲 속으로 사라진 진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살구라는 삽사리였다. 그러나 그 아이는 목줄 없는 세상을 바라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뒤로는 더 이상 개를 키우지 않는다고 한다. 가슴 아픈 이야기로 끝이 나서 내 마음까지 아팠다. 지금도 마을길을 걷다보면 우리 집이 아닌 저 멀리서 동네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열어보지 못한 이웃집 대문에도 그런 사연이 숨어있을까?

이웃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무관심했던 나의 마음은 생전 가보지도 못했던 이웃집을 궁금해 하고 있었다. 도시에 살고 있다면 자랑스레 하늘로 뻗어있는 아파트숲에서 자동차연기가 아니라 이웃을 위한 저녁연기가 몽글몽글 피어오를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책과의 교감을 넘어서 이웃집의 문을 두드려 즐거운 웃음을 나누게 하는 정 많은 책이다. 요즘 같이 가족 간의 정도 멀어져간다고 걱정하는 시대에 꼭 읽어야 되는 책이라고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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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눈에서 희망을 본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너의 눈에서 희망을 본다 - '굶는 아이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월드비전 희망의 기록
최민석 지음, 유별남 사진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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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하면 떠오르는 단어들. 여행서, 앨범. ‘너의 눈에서 희망을 본다’에서도 사진이 나온다. 해외취재를 위해 홍보팀이 세운 계획을 덥석 시작했다. 유별남 사진작가도 대륙을 도는 취재에 함께 한다. 말하자면 여행서이자 앨범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단순하게 두 단어로 줄이기에는 내가 받은 감동이 너무 크고 나눠야 할 감동이 너무 크다.

이 책을 쓴 글쓴이는 국제구호개발 NGO 월드비전에 입사해서 홍보팀에서 취재를 했다. 남미에서 가장 못산다는 볼리비아에 도착하면서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남미에서 가장 못사는 볼리비아의 가장 가난한 북부 오루로의 치얀타. 빼어난 자연경관은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가난한 곳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짓말로만 느껴지게 했다. 사진은 없어서 상상으로밖에 못하지만 자연이 있어야 될 자리에 잠이 든 아이의 사진이 있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적은 돈이라도 벌기 위해 학교가 아닌 광산으로 향하는 아이. ‘꿈은 가난한 자의 빵.’

부를 떠올리게 되는 유럽에서는 보스니아라는 곳이 숨어있었다.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은 발칸반도에 위치한 보스니아. 사라예보 시내를 걷게 되면 보게 되는 사라예보 장미. 전쟁 때 생긴 포탄 자국을 메운 흔적이 꽃처럼 피었다. 사라예보 장미처럼 꽃이 되지도 못한 채 그대로 전쟁의 흔적들은 사람이 사는 집에서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무런 지원과 군사력도 없었던 말그대로 힘이 없는 보스니아에서 일어난 학살. 아이들도 피해갈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다. ‘우리는 아직도 전쟁 중이예요.’

가난을 이기기 위해 배움이 필요하지만 가난해서 배울 수 없는 사람들. ‘여성차별금지법’을 모르는 곳에서는 아직도 아이가 아이를 낳는다. 15살 엄마 싼티. 인형을 주자 환하게 웃었지만 꿈을 묻자 자식의 꿈을 이야기한다.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는 아이 중에는 싼티의 친구도 있었다.

나였다면 어땠을까라고 생각되는 많은 이야기들을 읽었다. “너의 눈에서 희망을 본다.” 월드비전 같은 NGO에서는 어떤 일을 하는지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대해야 하는지 그리고 희망을 읽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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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주례사>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스님의 주례사 -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남녀 마음 이야기
법륜스님 지음, 김점선 그림 / 휴(休)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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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남녀마음 이야기”라는 문구를 보고 나는 약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나이를 생각하고 요즘 시대의 흐름을 생각하면 결혼하려면 십년은 족히 남았기 때문이다. 강산도 십년이면 변한다는데 책 한 권이 세월의 흐름을 비껴가지 못하고 종이색이 누렇게 변하고 찢어지고 먼지를 먹을 수도 있다. 십년이면 너무 위험하기만 해보였다. 그런데 내 걱정은 너무나도 쉽게 해결되었다. 책을 펴고 책을 읽고 그러다 책에 빠져버리고 그렇게 한숨소리가 감탄사로 바뀌게 되었다.

 ‘스님의 주례사’는 결혼생활 하기 전부터 결혼한 후에까지 좋은 지침서가 되어주고 있다. 결혼생활 전에 사랑하는 동안만이 포함되는 게 아니라 나처럼 결혼과는 먼 사이의 사람에게도 생활필수품처럼 챙겨야 되는 지침서다.

 평소에 내가 쉽게 생각하는 것들이 얼마나 큰 오류를 가지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남편이 외도를 해서 화가 난다고 ‘짐승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지금까지 자신은 짐승하고 살아온 것이고 자신의 아이들도 짐승 자식이 되고 만다고 말한다. 나도 동생과 싸우는 날이면 겉으로는 아니라도 속으로는 ‘짐승 같은 인간’ 같은 말을 하곤 한다. 나도 결국은 내 가족을 짐승으로 만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나는 짐승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짐승을 만드는 나도 결국은 인간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말하고 싶은 걸 단 한 마디로 표현하면 내려놓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의 약점을 쥐고 있어도 그것을 이용할 생각 하지 말고 내려놓는 것, 종교가 서로 달라 결혼이 고민한다면 그 고민 자체를 내려놓는 것,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한다면 허락받을 생각을 내려놓는 것. 스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내가 낑낑대며 욕심 부리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으라고 말한다.

 ‘스님의 주례사’에서 보여주는 시선은 어느 한 입장에서만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남녀노소 나이불문하고 공감하고 도움이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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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가는 길>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산티아고 가는 길
세스 노터봄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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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산티아고’라는 곳을 자주 들어보았다. 도서관에 꽂혀 있는 책의 제목에 쓰여 있는 산티아고와 그 책에서 실려 있는 산티아고를 담은 사진들. 정작 산티아고가 이 지구상에서 어디에 위치했는지는 모르고 지나갔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받고 나는 제일 먼저 표지에 그려져 있는 지도에서 산티아고를 찾아보았다. 산티아고는 스페인에 있다. 칠레의 수도 이름도 산티아고이지만 다른 곳이라고 한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1980년에서 1990년 초까지 쓰인 글이라고 한다. 책을 보면 사진이 많이 절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진이 있다고 해도 모두 흑백이다. 흑백과 과거라는 두 단어가 어울려 나는 몽환적인 느낌을 받았다. 익숙한 이름이지만 밟지는 못한 미지의 곳에 대한 환상의 느낌이 더욱 부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잊지 못할 특별한 느낌을 기억에 남겼다.

 이 책을 번역한 사람도 ‘산티아고 가는 길’을 단순한 여행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디에서 묵어야 하고 어디에서 먹어야 되는지를 가르쳐주지 않는 여행서라고 말했다. 나는 거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누군가는 소설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여행서라고. 위험하다는 건 농담이지만 농담을 뺀 나머지 말은 모두 진심이다. 나는 여행서를 읽을 때 주로 인상 깊게 남거나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꼽으라면 사진을 주로 뽑는 편이다. 하지만 이 책만큼은 다르다. 인상 깊고 기억하고 싶은 것을 꼽으라면 세스 노터봄이 이 책 안에 담아놓은 문장들을 꼽을 것이다. 심지어 “파리들은 다시 시체에 내려앉아 노동을 재개한다”는 문장마저도 챙기고 싶다.

 길을 가는 것뿐이지만 “길은 간다”고 달랑 한 마디만 하지 않는다. 마치 이 곳은 소설 속의 스페인이라는 듯 자신의 작은 마음 눈 앞의 작은 풍경도 놓치지 않고 갈고 닦아 간직하고 싶은 문장으로 만들어낸다. 그의 이러한 섬세한 관찰력과 그것과 어울리는 섬세한 표현을 이 책을 보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소설이 사진 한 장 없이 빨려들게 하는 것처럼 이 책 역시 사진도 많지 않고 흑백사진이지만 빨려들게 된다.

 소설 한 권을 읽듯 에세이 한 권을 읽듯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두 권의 책을 읽는 것 같은 일석이조의 매력은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처음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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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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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럽게 흩어진 방황들 속에서 나도 갈피를 잃고 헤매었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라는 소설을 작가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을 때 가슴이 콱 막히며 아무 이름도 불러주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이름을 찾아 헤매다가 책을 뒤집었다. 제목은 사라지고 노을빛의 세상에 검은 색 인물들 그리고 가을빛 나무들이 그려진 그림이 등장했다. 그림 위에 살포시 쓰인 말은 그림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성장소설, 청춘소설, 연애소설’...그렇구나, 이 소설을 부를 때 세 이름으로 불러주면 되는구나.

성장이라는 말을 나는 왜 다 자라지 못한 어린 사람에게만 썼을까? 사람을 볼 때 겉만 보지 말라는 말을 열심히 들어왔고 마음으로도 겉만 보지 말자고 다짐했으면서도 왜 나는 어린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했을까? 옛말에서 쓰이는 어리다는 ‘어리석다‘라고 한다. 사람의 속을 보고 할 수 있는 말, 어리석다. 나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

이 소설에서 성장을 하는 인물은 어리지 않다. 호적상으로 보나 타인의 눈으로 보나 그들은 어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성장은 몸만 키워놓았지 마음까지 키워놓지 못했다. 이 세상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마음까지 완전한 성장을 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때로는 마음의 미성숙은 젊다는 말을 들어서 좋지만 또 때로는 철없는 사람이라고 꾸중을 들을 수도 있다. 나는 신경숙의 이 소설에서 성장하는 사람을 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띈 사람은 단이였다. 단이는 말한다. “거미가 시위대진압군보다 더 무서워.” 그가 군인이 되어 다시 윤을 만났을 때 단이는 말한다. “이젠 거미 따위는 무섭지 않아.” 어느새 자란 단이는 더 이상 거미를 무섭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 명서에게 단의 죽음을 꺼내는 윤의 사촌언니는 의문스러운 점들이 있다고 말한다.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단이의 성장은 어린 나무가 꿈꾸는 그 튼튼한 성장이 맞는 것일까?

단이의 성장을 넘기자 미루의 성장이 보였다. 미루 역시 성장 중이었다. 아니 성장이 필요했다. 언니 미래와 언니의 그 사람을 인해 미루의 마음은 성장을 필요로 했다. 윤과 윤 교수를 만나면서 불 속에서 일그러진 손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미루의 성장은 다행히도 해피엔딩으로 끝이 날 것만 같았다. 단이가 이루지 못한 성장을 이룰 것만 같은 미루의 성장은 돌연 멈췄다. 미루는 명서와 윤과 단이와 언니와 함께했던 그 때의 빈 집을 청소했지만 부모님에 의해서 빈 집은 다른 사람의 집이 되고 만다. 사라지고 만 미루의 성장은 멈추었다.

단이의 성장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결말을 맞았다. 사회에서의 나약한 자신을 피해 도망 온 군대에서 영영 져버린 단이. 그들의 성장은 튼튼한 나무가 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들의 성장기를 다시 돌아보면 그들은 혼자였다. 안타까운 그들의 성장의 결말로 치닫고 말 때 그들은 혼자였다는 것이다. 미루는 같이 있을 공간이었던 ‘빈 집’을 잃었고 단이는 ‘군대’에서 혼자 있었다. 윤이 면회를 왔지만 그의 마음을 다 잡기에는 역부족이었을지 모른다.

혼자의 성장은 이렇듯 안타깝다. 서로가 있었다면 달려졌을지도 모르는데.

청춘하면 떠올리는 단어들을 적어본다. 사랑 그리고 또 방황. 청춘은 어른인 척 해도 아직 질풍노도의 시기인가 보다. 사랑은 나중에 하라고 교복 입은 학생들에게 어른은 말한다. 그 학생들은 방황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자꾸만 간섭을 하게 되고 보호가 필요하다. 사랑을 허락받으면서 방황도 하는 청춘은 두 얼굴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청춘은 조금은 손을 잡아달라고 해도 좋다. 노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문제를 혼자 짊어지려고 하면 둘이 할 때보다 더 오랜 시간과 더 많은 아픔을 겪을지도 모른다.

단이는 사회에서 나약한 자신에게 도망쳐 군대로 왔다. 단이는 혼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그래서 처음에는 면회도 오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같이’ 있었다면 어쩌면 좋았을 텐데. 청춘에서도 ‘같이’가 보인다.

연애도 말할 것도 없이 둘이다. 상대가 사람이건 사람이 아니건 ‘서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소설 속의 사랑은 이루어질 것처럼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이라고 하길래 이루지기를 바랬지만 작가는 둘로 두지 않고 혼자로 남겨두었다. 그런 생각에 점점 빠져갈 때 찾은 ‘같이’가 있다. 윤 교수의 책장에 꽂힌 미루의 노트. 노트에 밥을 먹을 때마다 자신이 먹은 것을 적으며 살아있는 걸 느낀다던 미루. 노트에 ‘인사를 한다는 것이 그의 손을 잡아버렸다’고 고백하던 미루. 야위었지만 거친 연장 같은 윤 교수의 손을 적은 미루의 노트는 윤 교수의 책장에 꽂혔다.

같이 있어야 되는구나. 같이를 찾자 곳곳에 숨어있던 ‘같이’들이 보석처럼 드러났다. 윤이라고 미루라고 서로를 정윤이 아니라 윤미루가 아니라 이름만을 불러 주었을 때. ‘깻잎이 소통의 도구 같았다.’ “밥을 맛있게 먹네.“ “밥 더 먹자.“ 같이 얼굴을 맞대고 먹을 때 더 맛있는 밥을 그래서 한 그릇 더 먹게 되는 밥을 먹을 때. 성장도 청춘도 연애도 ‘같이’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소설은 ‘같이’를 느끼게 하면서 정작 ‘같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속에서 사회가 ‘같이’가 되지 못해 어둑어둑해진 시대 때문이라고 괜히 투정을 부려보지만 이미 정윤은 학생에서 젊은 크로스토퍼를 외치며 강의실에서 학생들 앞에 섰다. 젊은 크로스토퍼! 시대가 그렇든 청춘이 그렇든 무엇이 그렇든 모두가 등에 짊어져야 할 무거운 아기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크로스토퍼라고 되라고 말한다. 프랑시스 잠의 말을 빌어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나는 가겠나이다.’라고 말한다. ‘같이’가 필요하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벨소리가 울리고 나는 음악 감상에 빠진다. 고르고 골라 넣은 벨소리가 오랜만에 울리는 것을 반가워하며.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화를 잘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전화 올 곳도 딱히 없기도 했다. 외로운 나는 ‘같이’, ‘서로’에 의미를 두고 싶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벨소리가 울리고 그 벨소리에 우리가 “내가 그 쪽으로 갈게”라고 말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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