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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어지럽게 흩어진 방황들 속에서 나도 갈피를 잃고 헤매었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라는 소설을 작가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을 때 가슴이 콱 막히며 아무 이름도 불러주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이름을 찾아 헤매다가 책을 뒤집었다. 제목은 사라지고 노을빛의 세상에 검은 색 인물들 그리고 가을빛 나무들이 그려진 그림이 등장했다. 그림 위에 살포시 쓰인 말은 그림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성장소설, 청춘소설, 연애소설’...그렇구나, 이 소설을 부를 때 세 이름으로 불러주면 되는구나.
성장이라는 말을 나는 왜 다 자라지 못한 어린 사람에게만 썼을까? 사람을 볼 때 겉만 보지 말라는 말을 열심히 들어왔고 마음으로도 겉만 보지 말자고 다짐했으면서도 왜 나는 어린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했을까? 옛말에서 쓰이는 어리다는 ‘어리석다‘라고 한다. 사람의 속을 보고 할 수 있는 말, 어리석다. 나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
이 소설에서 성장을 하는 인물은 어리지 않다. 호적상으로 보나 타인의 눈으로 보나 그들은 어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성장은 몸만 키워놓았지 마음까지 키워놓지 못했다. 이 세상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마음까지 완전한 성장을 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때로는 마음의 미성숙은 젊다는 말을 들어서 좋지만 또 때로는 철없는 사람이라고 꾸중을 들을 수도 있다. 나는 신경숙의 이 소설에서 성장하는 사람을 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띈 사람은 단이였다. 단이는 말한다. “거미가 시위대진압군보다 더 무서워.” 그가 군인이 되어 다시 윤을 만났을 때 단이는 말한다. “이젠 거미 따위는 무섭지 않아.” 어느새 자란 단이는 더 이상 거미를 무섭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 명서에게 단의 죽음을 꺼내는 윤의 사촌언니는 의문스러운 점들이 있다고 말한다.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단이의 성장은 어린 나무가 꿈꾸는 그 튼튼한 성장이 맞는 것일까?
단이의 성장을 넘기자 미루의 성장이 보였다. 미루 역시 성장 중이었다. 아니 성장이 필요했다. 언니 미래와 언니의 그 사람을 인해 미루의 마음은 성장을 필요로 했다. 윤과 윤 교수를 만나면서 불 속에서 일그러진 손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미루의 성장은 다행히도 해피엔딩으로 끝이 날 것만 같았다. 단이가 이루지 못한 성장을 이룰 것만 같은 미루의 성장은 돌연 멈췄다. 미루는 명서와 윤과 단이와 언니와 함께했던 그 때의 빈 집을 청소했지만 부모님에 의해서 빈 집은 다른 사람의 집이 되고 만다. 사라지고 만 미루의 성장은 멈추었다.
단이의 성장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결말을 맞았다. 사회에서의 나약한 자신을 피해 도망 온 군대에서 영영 져버린 단이. 그들의 성장은 튼튼한 나무가 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들의 성장기를 다시 돌아보면 그들은 혼자였다. 안타까운 그들의 성장의 결말로 치닫고 말 때 그들은 혼자였다는 것이다. 미루는 같이 있을 공간이었던 ‘빈 집’을 잃었고 단이는 ‘군대’에서 혼자 있었다. 윤이 면회를 왔지만 그의 마음을 다 잡기에는 역부족이었을지 모른다.
혼자의 성장은 이렇듯 안타깝다. 서로가 있었다면 달려졌을지도 모르는데.
청춘하면 떠올리는 단어들을 적어본다. 사랑 그리고 또 방황. 청춘은 어른인 척 해도 아직 질풍노도의 시기인가 보다. 사랑은 나중에 하라고 교복 입은 학생들에게 어른은 말한다. 그 학생들은 방황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자꾸만 간섭을 하게 되고 보호가 필요하다. 사랑을 허락받으면서 방황도 하는 청춘은 두 얼굴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청춘은 조금은 손을 잡아달라고 해도 좋다. 노년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문제를 혼자 짊어지려고 하면 둘이 할 때보다 더 오랜 시간과 더 많은 아픔을 겪을지도 모른다.
단이는 사회에서 나약한 자신에게 도망쳐 군대로 왔다. 단이는 혼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그래서 처음에는 면회도 오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같이’ 있었다면 어쩌면 좋았을 텐데. 청춘에서도 ‘같이’가 보인다.
연애도 말할 것도 없이 둘이다. 상대가 사람이건 사람이 아니건 ‘서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소설 속의 사랑은 이루어질 것처럼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이라고 하길래 이루지기를 바랬지만 작가는 둘로 두지 않고 혼자로 남겨두었다. 그런 생각에 점점 빠져갈 때 찾은 ‘같이’가 있다. 윤 교수의 책장에 꽂힌 미루의 노트. 노트에 밥을 먹을 때마다 자신이 먹은 것을 적으며 살아있는 걸 느낀다던 미루. 노트에 ‘인사를 한다는 것이 그의 손을 잡아버렸다’고 고백하던 미루. 야위었지만 거친 연장 같은 윤 교수의 손을 적은 미루의 노트는 윤 교수의 책장에 꽂혔다.
같이 있어야 되는구나. 같이를 찾자 곳곳에 숨어있던 ‘같이’들이 보석처럼 드러났다. 윤이라고 미루라고 서로를 정윤이 아니라 윤미루가 아니라 이름만을 불러 주었을 때. ‘깻잎이 소통의 도구 같았다.’ “밥을 맛있게 먹네.“ “밥 더 먹자.“ 같이 얼굴을 맞대고 먹을 때 더 맛있는 밥을 그래서 한 그릇 더 먹게 되는 밥을 먹을 때. 성장도 청춘도 연애도 ‘같이’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소설은 ‘같이’를 느끼게 하면서 정작 ‘같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속에서 사회가 ‘같이’가 되지 못해 어둑어둑해진 시대 때문이라고 괜히 투정을 부려보지만 이미 정윤은 학생에서 젊은 크로스토퍼를 외치며 강의실에서 학생들 앞에 섰다. 젊은 크로스토퍼! 시대가 그렇든 청춘이 그렇든 무엇이 그렇든 모두가 등에 짊어져야 할 무거운 아기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크로스토퍼라고 되라고 말한다. 프랑시스 잠의 말을 빌어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나는 가겠나이다.’라고 말한다. ‘같이’가 필요하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벨소리가 울리고 나는 음악 감상에 빠진다. 고르고 골라 넣은 벨소리가 오랜만에 울리는 것을 반가워하며.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화를 잘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전화 올 곳도 딱히 없기도 했다. 외로운 나는 ‘같이’, ‘서로’에 의미를 두고 싶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벨소리가 울리고 그 벨소리에 우리가 “내가 그 쪽으로 갈게”라고 말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