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콜라 게이트 - 세계를 상대로 한 콜라 제국의 도박과 음모
윌리엄 레이몽 지음, 이희정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대학교 입학 때부터 결혼하기 직전까지 10년 정도 자취생활을 했다.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볼꼴 못볼꼴 다봤다.

무개념의 원룸 주인과 밤만 되면 싸우는 옆집 커플과 새벽녘에 만취되어 문 열어달라고 행패부리는 아저씨.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건

“엄마 내일 반찬 들고 올라간다”

였다.

 

 

자취생활을 한 남자들은 많이 공감할 듯한데, 사실 남자 혼자 자취생활하면 아주 가관이다. 구석에 깔아놓은 이불에서 탈피하듯 쏙 빠져나와 옷장에 널브러진 옷을 대충 챙겨 입고 어제 아침 해 놓아 누렇게 변색된 밥과 언제 씻었는지 모를 김치를 냉장고에서 반찬통 채로 꺼내 영원한 자취생의 친구 동원 양반김과 함께 휘리릭 식사완료.

 

그런데 어머니가 오신다니!!!!

이건 전쟁이 나는 것보다 더욱 청천벽력이다.

 

학생이던 때는 수업을 빠져서라도, 일할 때는 조기퇴근을 불사해서라도 어머니가 오시기 전 자취방의 묵은 때와 켜켜이 쌓인 냉장고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얼룩들을 제거해야 했다.

미친 듯이 집단장을 마치고 초조히 어머니를 기다리던 그 시간이 얼마나 억겁 같았는지…….

 

혼신을 다한 청소는 매번 어머니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어쩜 그렇게 내가 놓친 구석만 골라내시는지 어머니는 초능력을 가지신 게 분명했다.

잔소리 17단 콤보를 맞고 그로기 상태에 있는 나에게 마지막 하이라이트.

냉장고~!! 냉장고를 여시고 난후 내 등짝을 후려치시며 하시는 말

 

“또 콜라 먹었어!!!!!!!!!!!”

 

 

 

                                                                                  (나야 나^^)

 

 

그랬다. 코카콜라는 내 애인이자 친구이자 동료였다. 배가 고프면 빨간 마개를 열어 벌컥, 출출하면 빨간 마개를 열어 벌컥, 목마르면 빨간 마개를 열어 벌컥, 친구가 오면 빨간 마개를 열어 벌컥

 

어려서부터 특별히 콜라를 좋아한 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자취를 하면서부터는 늘 냉장고에 콜라가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것을 가장 싫어하셨다. 밥도 안 챙겨먹는 놈이 늘상 콜라 마시고 있다고. 이빨 다 상하고 속 다 버린다고 버럭버럭 소리치셨지만 어쩌나~~ 콜라가 좋은걸. 거사를 치르고 어머니가 내려가시면 바로 슈퍼로 고고씽~! S라인 용기에 담긴 검은색 애인, 친구, 동료를 껴안고 집으로 와 작은 냉장고가 터져 나갈 듯 채워놓으신 어머니의 반찬들을 모두 제치고 코카콜라가 들어가신다.

 

“전 세계 200개국에서 1초마다 7,000병이 판매되는 음료수”

“처음 판매 된 지 120년이 지난 지금, 코카콜라는 하루에 10억 병 이상이 소비된다. 전 세계 인구의 94%가 코카콜라를 안다.” (p.108)

 

전 세계 사람들이 OK라는 영어 다음으로 가장 많이 아는 단어가 ‘코카콜라’라고 한다. 오랜 자취생활을 끝내고 결혼 한 이후로는 신기하게도 콜라를 거의 마시지 않는다. 아주 가끔 사다 먹기는 하지만 자취방에서 마시던 그 맛이 아니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우드러프는 전직 국회의원이나 고위공무원들이 공직을 떠나면 더 높은 봉급을 제안하여 회사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코카콜라의 이익을 추구했다.” (p.215)

 

 

뭐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이다. 수많은 기업들이 관행으로 하고 있는 일이다. 저자인 윌리엄 레이몽은 프랑스인이기 때문에 이런 기업들의 관행이 굉장히 부도덕적인 일로 여겨졌다 보다.

탐사전문 기자라고 하시는 윌리엄 레이몽씨~~!!

언제 한번 시간 내서 한국으로 와 보세요. 여기는 완전히 별천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무엇을 상상하든 무조건!!!! 그 이상입니다.

삼성이라고 아시나요? 슬쩍만 들여다보세요. 이런 「코카콜라 게이트」같은 책이 수천 권은 나올 겁니다.

 

그리고 사실 프랑스가 바라보는 미국의 시각이다 보니 책의 곳곳에서 프랑스인 특유의 자만심이 베어 나왔다. 유일하게 시장 개척을 하지 못한 곳도 프랑스이다 보니 은연중에 우쭐대는 듯한 문장이 나온다.

그래도 뭐 나는 계속 코카콜라를 마실 생각이다.

코카콜라가 없으면 내 10년의 자취생활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비밀유지 관행은 전 세계적인 경제 전쟁에서 살아남고 귀중한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코카콜라가 택한 유일한 수단이다. 코카콜라 제조법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p.29)

“코카콜라는 제조법에 대한 비밀을 계속 유지하면서 제품에 ‘신화’와 ‘마술’이라는 특별한 가치를 덧입힌다. 이렇게 하여 코카콜라는 하나의 상징이 됨과 동시에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아이콘으로 변화했다.” (p.34)

 

이것은 몰랐던 내용이다. 열심히 마시기나 했지 ‘특수한 제조비법’따위에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알아서 도대체 뭘 한단 말인가.

 

자본주의 시대에서 내가 만든 상품을 팔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을 조장하고 방조해 왔다. 물론 그것이 선은 아니지만 악도 아니다. 누구나 사고 싶어 하고 갖고 싶어 하는 아이콘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코카콜라의 대단한 영업 전략이다. 120년 간 독보적 1위의 자리를 지켜온 것이 배신과 음모로 점철된 초기 역사를 철저히 가려온 덕분이더라도, 별 특별할 것도 없는 제조법을 마치 마술인양 포장해온 상술이더라도,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끝없는 로비덕분 이더라도 나는 계속 코카콜라를 마실 생각이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기업들의 행태와 작태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코카콜라의 이면의 모습. 더 악랄하고 더러운 모습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는 별로 그런 모습을 찾지 못했다. 콧대 높은 프랑스 기자의 투정정도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보면 치가 떨리는데, 레이몽씨도 이 책을 좀 읽어봤으면 좋겠다. 그래서 「코카콜라를 생각한다」로 다시 좀 적나라하게 밝혀줬으면 좋겠다. 아~! 물론 가능하다면...

 

 

그때까지는 코카콜라를 마셔야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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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공부 방법을 만드는 공부생 비법 공부생 시리즈
최귀길 지음 / 마리북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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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학시절 유독 특이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공대에서 화학공학과를 전공으로 하고 있는 친구였는데 어느날 그 친구 자취방에 가니 이상한 제목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4차원 수학 풀이], [30일 만에 끝내는 영어 회화], [속독, 남들보다 빠르게] 등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제목의 책들 뿐이었다.

같이 간 친구와 함께 너는 고삐리냐 장사할거냐 수능 다시 칠려고 그러느냐 온갖 타박을 했다.

그 특이한 친구는 특별히 뭘 할려고 그런 책을 산 것은 아니었다. 순전히 제목에 이끌려 샀단다. 푸하하하~! 책이야 많이 보면 좋은 거니까 라고 이해했지만 결국 그 친구는 그 책들을 읽지도 않았다.

지금은 건실한 중소기업에서 연구원입네 하며 잘 살고 있다.ㅋㅋㅋ

 

 

비법은 없다. 노력만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책처럼 학생보다 훨씬 경험과 내공을 쌓은 분들의 선례와 지도를 받으면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은 학생들보다는 더 유리한 위치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보고 '어~! 뭐 그래 다 맞는 말이지 뭐~! 그래서 어쩌라고~' 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책의 중간중간 삽입된 여러가지 예시들을 직접 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책을 읽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15년 간 3500여 학생을 만나 그들의 공부 방법을 변화시키고 학생들이 자신만의 체계적 공부 비법을 만들도록 도와준 저자 최귀길씨의 노력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책을 보고 조금이라도 '어~! 이거 도움이 되겠는데? 한번 해볼까?' 생각이 든다면 당장 해봐야 한다.

 

적어도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이런 책이 없었다. 그냥 학교에서 선생님이 집에서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었지 이런 [비법]들을 소개해주는 친절함은 없었다.

그런면에서 이런 책을 읽는 학생들은 적어도 나보다는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것일테다.

 

머리말에서 저자가 말했듯이 이 책이 단순히 학생들의 점수를 조금 더 올리고 학업 성적에 더 목매게 하려는 의도는 없다.

 

반에서 1등을 하는 학생이든 40등을 하는 학생이든 [자신만의 공부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전교 1,2등을 하는 친구가 어머니와 상담을 하러 왔는데 교육계통 일을 하시는 엄마의 체계적이고 꼼꼼한 교육계획에 맞춰 공부하는 아이의 스트레스가 엄청났다는 것이다. 흔히 그 정도로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은 학업스트레스가 낮은 편인데 이 아이는 [자신의 공부]가 아니라 [엄마가 짜준 공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공부 방법]을 찾아서 그것을 내것으로 완전히 소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단순히 대학수학능력시험 하나를 치기 위해 하는 공부가 아니라 누구나 [자신만의 공부 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같은 신문을 보고 같은 TV뉴스를 보더라도 [나만의 공부 방법]으로 [나만의 정보]를 재생산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를 바라보고 수많은 정보와 자극을 내것으로 처리하는 기술이 바로 [나만의 공부 방법]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책에 나와 있는 여러가지 적용거리 들 중 [학습 유형별 특징]이 가장 재미있었다.

성격유형 검사와 비슷한 종류인 듯 한데 이 책의 주 대상인 학생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풀이해 주고 있었다.

 

 

이 책의 유형분석에 따르면 나는 '별형'이었다.

추가 설명을 보니 거의 맞아떨어졌다.

 

 

 

 

각 유형에 따라 공부하는 포인트를 다르게 잡고 유형별로 강점과 약점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했다.

책에서 분류한 4가지 유형에 거의 다 포함되기 때문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 거 같다.

실제로 아이들을 만나 이야기해보면 가장 고민은 '내가 뭘 하고 싶은 지 모르겠어요'다.

하물며 부모조차도 아이가 정말 뭘 하고 싶은지, 어떤 것에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유형의 학생인지 명확히 안다면 내가 뭘 잘하고, 뭘 못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나만의 공부 방법]을 만드는 출발점이라 생각한다.

 

 

앞서도 분명히 말했지만 이 책은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많은 책이다.

하지만 책에서 제시하는 방법대로 내 것으로 적용해 보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이다.

선택은 책을 보는 자신이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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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날들
성석제 지음 / 강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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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대학 3학년 때 부터이다. 고(故) 리영희 교수님의 「반세기의 신화」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었다.

이전까지 세계문학류와 기독교서적만을 위주로 읽던 독서생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후로 줄곧 사회과학 서적만 찾아 읽었다.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지, 한국의 현대사가 얼마나 창피할 정도로 엉망진창인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부작용이 있었다.

그런 사회과학 서적을 읽기 전에는 학과와 기독동아리에서 밝고 유머 있는 사람으로 통했는데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한 후로는 점점 웃음을 잃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웃을 일이 없었다.

학과 활동과 동아리 활동에서 큰 의미를 찾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개판인 사회를 살면서 그저 취직걱정 하고 기독 동아리에 가서는 열심히 기도하고 하는 일 따위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인간으로 바뀌어갔다.

대학1학년 때 풍물패를 하며 잠시나마 운동권에 몸담기도 했으나 학기 초 열렸던 대동제에 단대 깃발을 들고 참석한 후로 ‘이런 80년대 운동 방식을 그대로 하다간 아무것도 안되겠다.’ 싶었다. 그 큰 노천강당에서 열린 대동제에 참석한 학생수가 200명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길로 운동권(?)에서 몸을 뺐다.

그리고 그 때 선배들이 들려주던 얘기와 책 내용이 구태의연했다.

차라리 혼자서 찾아 읽는 편이 나았다.

 

 

그런 나를 걱정해 주던 친구 하나가 성석제의 책을 선물해 줬다. 그 책은「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였다.

너무 재미있었다.

사회과학 서적을 파고들고 나서부터는 문학류의 서적은 손도 대지 않았었다.

그런데 재미있었다.

딱딱하고 무거운 예의 사회과학 책들과는 달랐다.

 

시대의 고민을 혼자서 짊어진 척하며 두껍고 어려운 책들에 코를 박아온 날들에서 해방된 느낌이었다. 한번 손을 댄 뒤로는 누가 뭐라 그럴 것도 아닌데 ‘맑스니 촘스키니 리영희니 읽다가 소설 읽고 있으면... 누가 보면... 뭐라 할까....’ 혼자 생쑈를 한 것이었다. 누가 상을 준 것도 아닌데 혼자 잘난 맛이었다.

여튼 성석제의 책은 단비 같았다.

 

이후로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 즐겁게 춤을 추다가」읽었다. 성석제 특유의 익살과 위트, 시골에 사는 사촌 형이나 막내 삼촌이 들려주는 이야기 같았다.

 

 

이번에 읽은 「아름다운 날들」또한 그랬다. 주인공 원두가 겪는 성장통을 그린 성장소설이라 봐도 무방할 듯하다. 한 눈에 그려지는 시골 동네와 집들, 너른 들녘을 뛰어다니는 시골 아이들의 모습이 정겹다. 실제로 내가 어린 시절 겪었고 보았던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의 경험들이 그대로 중첩되었다.

 

이전 책들처럼 히죽히죽 거릴 정도의 웃음은 없었지만 남동생이 의경 생활을 해 면회하러 가본 성석제의 고향 상주의 고즈넉한 모습 그대로였다. 당시에도 상주는 시였는데 시내 전체에 신호등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 인상 깊었었다. 동생 말로는 참 조용하고 범죄가 자주 일어나지 않는 고장이라 했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기타리는 내 시골 할아버지 댁에 큰 전축을 틀어 놓고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에 맞춰 춤을 가르쳐 주던 막내 삼촌 같고,

동네 바보 진용이는 할아버지 동네 산 밑 감나무 집에 살았던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형 같다.

그도 진용이처럼 나와 친구들보다 두세 살 위였으나 약간 모자란 탓에 늘 우리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지만 물놀이 가고 미꾸라지 잡으러 가고 가을이면 뒷산에 올라 밤 주워 먹고 겨울이며 썰매 타던 추억을 함께 한 형이었다.

융통성 없는 당숙 어른은 할아버지 동네 이장님이었던 큰 아버지 같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정겨웠다.

지금은 모습이 많이 바뀐 할아버지 댁과 그 동네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들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소설 속 진용이가 축산업으로 큰 부자가 되어 고향땅에서 떵떵 거리며 살고 있는 것처럼 내 어린 시절 추억 속 그들도 그들의 곳에서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소설 속 내용들이 작가 성석제의 어린 시절을 재구성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 과거의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날들을 추억하게 해주어 고마웠다.

 

 

“원두는 고민과 고민의 새끼와 손자와 증손자를 데리고 결국은 기타리를 찾아갔습니다.” (p.62)

 

오후 내내 물놀이를 하고 난 뒤 시골집에 뛰어 들어가면 금세 부엌에서 고슬고슬 맛난 비빔밤을 해주시고, 뒷산으로 저 멀리 개울로 데리고 다니시며 나무이름, 풀이름, 고기 이름 가르쳐 주시고 마이클 잭슨의 춤을 기가 막히게 잘 추시던

 

 

지금은 고인이 되신 나의 ‘기타리’, 내 막내삼촌이 서럽도록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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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작업실 - 물질과 연장 그리고 작가의 영혼이 뒹구는 창조의 방
박영택 지음 / 휴먼아트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대학시절 동양화를 전공하는 친구를 만나러 학교에 있는 작업실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치기어린 청춘남학생들에게 미대란 청순하고 가련한 생머리에다 여리고 새하얀 손가락에 살짝 들려진 붓, 자태마저 영롱하게 의자에 앉아 캔버스를 응시하고 있는 맑고 커다란 눈. 같은 것이었다.

 

(책에 소개된 작가 홍명희의 작업실보다 수십 배는 더욱 더러웠다)

 

그러나, 처음 찾아간 미술 작업실은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친구의 전공이 동양화라 온통 검은 색일 거라 생각했는데 온갖 색깔의 물감과 덕지덕지 뒹굴어져 정말 더러웠다. 청순하고 가련한 생머리 여자 미대생은 모두 어디가버렸는지 꾀죄죄한 외모에 기름에 폭 빠진 듯 한 머리와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혐오스러운 색깔로 뒤덮인 작업용 앞치마를 두른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이후로 그 친구의 작업실에는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물론 이 책 「예술가의 작업실」은 자신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작가들의 작업실을 찾아간 것이 때문에 대학 전공학생들이 열댓명 모여 함께 작업하는 작업실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그때의 큰 실망이 내가 더욱 미술 분야의 문외한이 되는데 한몫 했다고 본다.

 

“그 가운데서 작업실 풍경이 인상적이었고, 엄청난 작업량, 뛰어난 작품성을 지녔다고 생각되는 작가로 한정했다.” (p.293)

“안창홍은 최근 몇 년 동안 쉼 없이 엄습하는 현실에 대한 절망감과 어찌 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대해 자신을 책망하고 괴롭혔다고 한다. 그래서 최악의 컨디션을 견디며 오직 작업에만 매달렸다고 한다. 그것만이 바깥세상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p.58)

 

예술가에게 작업실은 가장 큰 노력을 담고 마음을 쏟아내는 장소일 것이다. 작가 안창홍이 현실에 대한 절망과 무기력을 쉼 없는 작업으로 견딘 것처럼 그들만의 피난처이자 비밀통로인 것이다.

그곳을 들여다본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미술 분야에 관해 문외한이던 내게 미술평론가이자 전시기획자인 박영택씨의 친절한 소개는 예술가의 사적 공간을 들여다본다는 관음증 비슷한 시시껄렁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또한 수많은 작가들 중 엄선한 12명의 작가와 그들의 작품 일부를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내겐 큰 호사다.

12명의 작가들 중 나는 대구에 작업실을 둔 작가 최병소씨가 가장 인상 깊었다.

 

 

 

 

신문지에 모나미 검정색 볼펜으로 사선으로 긋고 그 위에 4B연필로 덧칠하고 또 그 위에 볼펜으로 긋고 연필로 덧칠하는 과정을 하는 작업이다.

단번에 ‘이게 뭐야~!’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캔버스에 점하나를 찍던지 선 하나를 긋던지 아니면 아무것도 그리거나 하지 않고 제목만 ‘무제’로 써 놓은 작품을 보면 평소에도 육두문자를 날려대던 나이기에 최병소씨의 작품 또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그는 좀 달랐다. 출발점이 달랐다는 것이다.

 

“당시 언론은 억압된 침묵으로 일관했고 미술계 역시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흡사 난폭한 검열을 흉내 내듯 거세게 신문을 지워 나갔다.” (p..119)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표현한 것도 아닌, 그래서 작가의 조형 의지란 것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기이한 화면이었지만, 오히려 그 침묵이 더 큰 울림을 주었다.” (p.118)

 

70년대 독재정권하의 어두움을 몸으로 견디며 체득한 행위인 것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몸으로 살아낸 행위를 작품에 그대로 투영할 때 비로소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화려하지도 뭔가 많은 말을 하지도 않지만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강렬하다.

더군다나 내가 살고 있는 대구에서 이런 작가가 있다는 것도 새삼 반갑다

 

 

 

침묵으로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가 수많은 모나미 볼펜과 수많은 4B연필과 수많은 신문지를 몸으로 눌러내며 담아냈을 작업의 고됨이 그대로 느껴진다.

 

‘작가’, ‘예술가’ 라 하면 뭔가 우리들 일반인과는 동떨어진 별나고 특이한 사람으로 인식 된다. 하지만 그들 또한 작업실 대여료나 창작활동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밥벌이 직업을 가져야 하는 현실의 문제를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저자가 줄곧 얘기하는 것처럼 그들의 예술 활동 또한 노동활동에 다름 아니다. 밥벌이가 시원찮으면 예술 활동 또한 시원찮다. 동전의 양면처럼 떨어질 수 없는 현실적 한계이다.

그래서 책에 소개된 작가들의 작업실과 삶이 조금은 애틋하고 살갑게 다가온 듯하다.

 

 

“회화란 일정한 평면에 환영을 주는 행위이다. 외부 세계의 사실적 재현 내지는 눈속임을 불러일으키는 장치이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표면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p.278)

 

회화에 대한 저자의 인식이 깊다. 다행히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울 만큼 평이하게 글을 써내는 능력이 있다. 표면이 주는 2차원과 입체가 주는 3차원의 촉각적 상이함을 글로 표현해 내는 재주가 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소모하고 표현하기 위해 억압하고 희생한다. 페인팅은 결국 주어진 캔버스 표면을 잠식해 들어가는 일이다. 조각은 물질을 제거하고 변질시키고 상실시킨다. 사진은 대상을 납작한 인화지 안으로 불러들여 부동의 것으로 응결시킴으로써 본래의 상황을 희생시킨다.” (p.288)

 

살기 위해 갖은 애를 쓰지만 생각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지치고 고되지만 꾸역꾸역 견뎌 몸으로 살아내는 것이 인생이다. 캔버스의 표면을 잠식하는 페인팅처럼 내 삶을 갉아먹는 시간을 오롯이 몸으로 받아내는 것이다. 때론 아프고 견디기 힘들만큼 슬프지만 예술가의 창조적인 작업처럼 하루하루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야 그나마 살아갈 가치 한 줌이라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거워진 머리로 예술가의 작업실 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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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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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아름다운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의 삶은 영속성을 구가할 만큼 가치가 있는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역사로서의 인간의 삶은 가변하지만 소멸하지 않는다. 끈질기게 맥을 잇고 고꾸라지면서도 바통을 넘긴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p.27)

 

“너는 너 자신의 끔찍함, 기괴함, 악랄함, 능청맞음, 요괴성을 알아라!” (p.93)

 

명확하고 필수불가결한 담보가 보장되지 않는 한 구차한 존재 증명에 다름 아니다.

‘실격’을 당하고도 여전히 필드(경기장) 위에서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에게 ‘실격’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신마저도 그럴 수 없다. 그것은 신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드디어 읽었다. 너무 읽고 싶었던 책이라 진작에 사두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책은 기대 이상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요설체 또한 처음 접했지만 스피디하고 구성을 더욱 옹골지게 한다. 문장이 시원시원하고 멋이 있다. 한국의 작가 중에서는 김훈의 글과 문장이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읽어본 일본 작가 중에서는 다자이 오사무가 최고다.

 

 

작품 전체가 자조적 고백이고 차갑고 습하며 어둡지만 웃음이 나고 소설 속 주인공 요조를 만나는 모든 여인들이 그에게 빠져들었던 것처럼 다자이의 글에 빠져든다.

 

완전한 인격이 완전히 실격되는 과정을 그만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극지대의 크레바스처럼 끝을 알 수 없는 절망이 인격을 완전히 사로잡는다. 그래서 아무리 빠져나오려 해도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완전한 무력을 맛본다. 세계대전의 패배 후 겪었던 일본지성의 속살이다. 부당한 방법으로 대지주가 된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남들이 누리지 못한 삶을 산 것에 대한 자책과 마르크스주의의 대표 선수였지만 사상전향을 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작품에 가득하다.

 

현실의 괴로움과 나 자신에 대한 절망을 못내 감추고자 소설 속 요조는 ‘익살’이라는 무기를 쓴다. 상대방보다 먼저 내가 무장해제를 하는 것이다. 다가오기 전 먼저 엎드려 뒤꽁무니를 살살 흔드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는 나에게 웃음을 던진다. 그것이 비웃음인지 쓴웃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늘 이러한 ‘익살’로 위기를 탈출하고 갈등상황을 만들지 않지만 학교의 어리바리한 친구 ‘다케우치’와 자살방조죄로 심문하던 ‘검사’ 이 두명에게 들키고 만다.

 

“일부러 그런 거지!!”

내가 다 발가벗겨지는 것 같았다. 누구나 숨기고 싶고 감추고 싶은 속내가 있다. 속살이 있다. 그래서 먼저 내가 담을 쌓는다. 꽁꽁 동여맨다. 나만의 세계에 빠진다. 그것을 지켜내려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기별도 없이 들켰을 때 오는 그 황당함과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실격’당하기를 원치 않는다.

 

“저는 소위 장난꾸러기로 보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존경받는 걸 피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p.25)

 

요조의 주위를 뱅뱅 돌며 끝까지 요조와 함께 한 호리키는 친구라기보다는 차라리 ‘내 양심’이다. 때로는 준엄하게 때로는 약 올리며 간섭한다. 때로는 통제하려 한다. 아무리 ‘실격된 인간’이지만 최소한의 가치를 지키게끔 하는 도구다. 그래서 불편하고 짜증나지만 인간은 호리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요 색마” (p.107)

“색마! 있나?” (p.91)

부지불식간에 찾아와 뒤통수를 후려친다.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p.13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황망함. 견딜 수 없는 사유의 무례. 느릿느릿 두꺼비처럼 밑바닥에 달라붙은 실격된 자아.

사실 소설 속 주인공인 요조도 그렇고 다자이 오사무도 왜 그렇게 자살을 하려 했는지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책의 해설을 읽어보고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봐도 잘 모르겠다. 한국전쟁을 겪고 절대적 궁핍에서 벗어난 세대의 심리를 판단하고 재단할 수 없듯이 세계대전 패배의 충격을 겪은 일본의 세대또한 그러하다. 다자이가 겪었을 무게와 절망을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나에게 ‘실격’을 선고하는 것으로 영위되던 비루한 삶에 마침표를 선명하게 찍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함께 수록된 짧은 작품 직소(直訴) 또한 놀라웠다.

가룟유다의 관점에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바라보는 것이 신선했다. 다자이 자신이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으며 신약성서를 깊이 읽었다고 하는데 기독교에 대한 다자이의 인식을 분명히 살필 수 있다.

예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팔아버리는 가룟유다와 실격된 인간을 회복하는 유일한 해결책으로 자살을 택한 선택의 단면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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