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는 봄
양석일 지음, 김응교 옮김 / 산책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역사를 돌이킬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역사를 되새김해야 한다. [위안부 할머니] 문제는 아무리 아픈 생채기라 해도 칼로 도려낼 수 없는 역사다. 눈을 감는다고 해서 결코 없어지지 않는 선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관심이 없다.

 

 특히 한국 정부차원에서 그렇다. 박정희는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오는 조건으로 일제의 만행을 없는 일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이 두고두고 일본 정부의 공식 핑계거리가 되고 있다. 그렇다 해도 [위안부 할머니]가 아직도 살아계셔서 외국에서 수많은 증언을 하고 인터뷰를 하고 있으면 그 할머니들의 모국이라면 아무리 그들보다 힘이 약하고 이전 사람들의 무식과 자만의 소치로 돈 몇 푼에 눈을 감았다 치더라도 제대로 덤벼봐야 하는 거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도 한 번 해봐야 하는 거다. 가장 친한 친구가 [위안부 할머니]관련된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한 번씩 장례식에 간다고 하면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신 거다. 일본은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기만을 바라고 있다. 어쩌면 한국 정부도 그런지 모르겠다. 정말 짜증나고 화가 솟구친다.

 

 

“작가 양석일이 상정한 이 책의 독자는 일본인이다. 즉 이 소설은 ‘위안부를 소재로 해서 일본어로 쓰인 최초의 소설’이다.” (p.517)

 

재일 조선인 양석일씨의 용기에 먼저 박수를 보낸다. 어쨌든 일본 사회에서 여전한 마이너리티로 살아가는 재일 조선인이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소설을 썼다는 것 자체가 용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 「다시 오는 봄」은 참 읽기가 힘이 들었다. 책이나 언론을 통해 그리고 단체에서 일하는 친구를 통해 보고 들었던 할머니들에 대한 기록과 뉴스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소설 속에 묘사된 폭력이 너무 아팠다.

리뷰에 옮길 수도 없다. 손끝이 떨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할머니들이 겪으셨던 실상이라 생각하니 더욱 힘들었다.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면 희망과 절망의 경계선이 없어진다. 희망이 절망을 절망하게 하는 것이었다.” (p.253)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무작정 끌려왔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는 받아내기 힘든 일을 겪어야 했다.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는 없었다. 내선일체를 강조한 일본의 제국주의는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친 황군의 성적 욕망 해소를 위해 조선인이든 중국인이든 침공한 지역의 현지인이든 여성이면 무조건 징발했다. 그리고 배설의 도구로 썼다.

이것은 어떠한 논리와 전쟁의 광기에 빠져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로도 설명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해서도 안 된다.

 

 

“넌 무슨 생각인 거냐! 넌 천황폐하의 백성이다. 네 목숨은 천황폐하에게 바친 것이야ㅣ 멋대로 죽는 건 허락되지 않아. 이런 병신 같은 년!” (p.337)

“길어지는 전쟁의 실체를 구현하고 있는 위안부들은 일본군이 어느 나라와 전쟁을 하는 건지 몰랐기 때문에 무엇 하나도 자가 판단을 할 수 없었다.” (p.408)

 

자기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다. 10대의 꽃다운 나이에 끌려와 중국으로 남방 아시아로 끌려 다니다 보니 몇 살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일본이 누구와 싸우는지도 몰랐다. 그냥 도구로 철저히 쓰일 뿐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인 순화처럼 많은 위안부들이 임신을 하고 출산을 했지만 자신의 배로 낳은 아이에게 젖 한번 물릴 기회마저 박탈당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사는 거야. 살아나가는 거야. 그게 우리들의 단 한 가지 희망이야.” (p.211)

“이런 몸이 되어버려 이젠 고향에도 돌아갈 수 없어.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p.238)

“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가면 부모님께 밭은 사드리고 싶어. 우리 집은 계속 소작농이었으니까 아무리 일해도 땅을 살 수 없었어. 그래서 나를 내보내 일을 시킨 거야.” (p.389)

 

생과 사를 오가는 하루하루를 견디고 말도 안 되는 학대와 성적 착취를 견디다 못해 정신착란에 까지 이르는 경우도 많았다. 도덕적 잣대와 인간성은 말살 당했다. 적과 동지의 개념도 모호해지고 매일 밤 찾아오는 수십, 수백 명의 일본병사들에 대한 증오와 동정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최소한의 인간 대접조차 받지 못한 그녀들은 오로지 한 가지 소망밖에 없었다.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엄마·아버지·형제들이 있는 그 곳으로 가는 것. 실개천이 흐르고 아름다운 나무와 꽃이 있는 흙비린내 나는 그 곳으로 가는 것.

 

 

“이제부터 너희 한 사람당 여비 천오백 원을 나눠준다. 우리 한국광복군은 너희를 서울로 돌려보낸다. 모레 아침식사 후 광장에 집합해 오전 여덟 시에 출발한다.” (p.497)

 

소설 속 순화는 결국 고향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비록 아버지는 삼년 전 돌아가셔서 뵐 수 없었지만 어머니와 동생들과는 기적 같은 해후를 나눈다.

 

사실, 이 소설에서는 그 뒷이야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 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테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언젠가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될 거야. ‘그 여자는 위안부였대’라고. ‘더러운 여자다, 많은 일본 병사와 잔 여자다. 갈보년.’ 그렇게 욕을 퍼부을 거야. 나는 갈 곳이 없어. 여기서 나가도 자유롭게 살 수 없어.” (p.479)

 

그녀들은 돌아온 모국, 고향땅에서도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일본군의 위안부였다는 것이 주홍글씨가 되어 평생을 따라 다녔다.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다.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모국은 그녀들을 보호해 주지 않았다. 또 한 번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고 모두가 잘살아보자 외칠 때 그녀들의 한(恨)은 돈 몇 푼에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모국이 발전하고 점점 잘사는 나라가 되어가면서 힘이 강해져도 그녀들을 모른 체 했다. 없는 듯 했다.

 

그녀들도 얼마나 잊고 싶었겠나. 칼로 깨끗이 도려낼 수만 있다면 피를 쏟아내면서 도려낼 텐데 그럴 수도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가장 낮은 곳에서 일을 하며 연명해야 했다. 모두가 쉬쉬 하고 알아주지 않는 위안부 문제를 꺼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세상에 알려진 후 부랴부랴 모국에서 설레발을 치고 이곳저곳에서 취재하고 난리를 쳤다. 바뀔 것 같았다. 할머니들은 처음으로 기대라는 것을 가졌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40년 50년 시간은 지나갔고 어느새 꽃다운 소녀에서 흰머리와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가 되어 갔다. 한명 한명 손잡아주던 친구, 언니, 동생들이 죽어갔다. 그들이 바라는 대로.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눈이 오나 햇볕이 내려쬐나 매주 수요일이면 철옹성 같은 일본 대사관 앞에 할머니 들이 모였다. 그것이 1000차를 넘어섰다. 목소리를 내지르지만 들리지 않는다.

 

결코 누군가에게 떠넘길 수 없는 문제다. 허구한 날 제 밥그릇 챙기기에 바쁜 정치인들과 위정자들은 할머니문제에 관심이 없다. TV카메라가 따라와 취재해 주지 않으면 할머니들의 손을 맞잡아주지 않는다.

내가 모르고 있으면 좋겠지만 이런 위안부문제에 대한 소설이 한국에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오히려 재일조선인 작가의 작품을 먼저 읽게 된 것이 낯부끄럽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봐야겠다.

 

 

“일본 정부는 전쟁범죄 인정, 진상 규명, 공식 사죄, 법적 배상, 책임자 처벌, 역사교과서에 기록,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p.525)

 

할머니들의 외침은 이번 주 수요일에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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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루도시의 정치를 구하라! - 다함께 잘사는 법을 알려주는 정치 동화
황근기 지음, 이정은 그림 / 초록우체통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4월11일 총선이 보름 남짓 남았다. 내일부터는 공식 선거운동에 들어간다. 늘 봐왔던 풍경처럼 알바들의 시끄러운 거리 유세가 등장할 것이다. 정책선거가 실종된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후보들의 비방과 흑색선전 따위는 새삼스럽지 않다. 이미 언론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주요 매체들은 연일 이상한 뉴스만 내보낼 것이 확실하다.

 

국민들의 의사를 대신해 국회에 모여 의정활동을 하는 국회의원을 뽑는 가장 중요한 선거인데도 크게 달라지는 판세는 읽을 수 없다. 정당과 후보의 정책의 합리성과 공약의 현실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공천만 받으면 100% 당선이 확실한 지역은 그 아성을 무너뜨릴 여지가 전혀 없어 보인다. 상호 비방과 물고 물리는 개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다.

 

TV는 ‘얼씨구나~!!’하고 그런 장면만 선거 전까지 줄기차게 내보낼 것이다. 왜?? 이상하게도 늘상 ‘투표율이 저조하다. 젊은 층의 정치 무관심이 심각한 수준이다.’ 걱정해 주는 척하면서 결코 젊은 층의 투표율이 증가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전 다른 책의 리뷰에서도 분명히 말했던바 [투표하지 않는 세대는 결코 보호받지 못한다.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

 

이 책 「신기루도시의 정치를 구하라!」는 이런 이상한 현상을 ‘신기루도시’로 표현한다. 그리고 선거를 앞둔 온갖 방해와 공작, 쏟아지는 말들을 ‘검은 연기 괴물’로 표현한다.

 

 

 

 

 

“신기루도시에 갇힌 아이들은 우리를 합쳐서 정확하게 105명이었다.” (p.43)

 

4월11일 선거날 당일 이상하게도 105명의 아이들이 신기루도시에 갇히게 된다. 건너편 동네에서 분명히 구름다리를 건너 왔는데 이쪽으로 건너오고 나니 구름다리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잔소리 하는 어른들도 없고 간섭하는 사람들도 없는 무풍지대(無風地帶)인 것이다. 잠시 동안의 꿀맛 같은 해방과 휴식을 맛본 아이들은 실컷 놀고 나면 다시 건너편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구름다리는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고 불안한 아이들은 정치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된다.

 

 

“내 생각에는 신기루도시에도 정치가 필요해.” (p.59)

 

 

 

“폭력을 쓰지 않고 공공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때 필요한 게 바로 정치야.” (p.63)

 

하나밖에 없는 한마음마트를 힘으로 차지한 광수와 패거리의 횡포, 점점 독재자로 변해가 힘으로 아이들을 제압하는 전교회장 철민이의 철권통치,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신기루도시 정치상황을 혼란에 빠트린 원탁이 등 힘겨운 현실 정치를 맛본다.

그리고 결국에는 ‘검은 연기 괴물’이라는 공공의 적을 함께 힘을 합쳐 물리치고 구름다리를 건너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된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지만 어른들이 읽어도 재미있을 만한 내용과 구성이다. 물론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에서부터 고등학생까지 읽어도 무방할 것 같다.

정치행위의 모범답안을 제시하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국회에 계신 299명의 국회의원님들과 총선을 앞둔 수백 명의 후보자님들은 필히 읽으셔야 한다.

최소한 책에 등장하는 ‘신기루도시’의 아이들보다는 정치를 더 잘하셔야 되지 않겠나.

 

 

“상황이 급박할수록 나와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고,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해. 그게 바로 올바른 정치가 아닐까?” (p.167)

 

어린 아이들도 상황이 급박할수록 더 많은 대화를 하고 더 많은 다른 생각을 받아들여야 함을 스스로 깨달았다. 제발 좀 아이들의 모습 반만이라도 따라갔으면 좋겠다.

갈등과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더 힘이 센 사람이 무작정 깔아뭉개고 겁주는 게 아니라 자기보다 힘이 약한 사람이라도 얘기를 들어주고 입장을 이해해주는 상식이 필요하다.

 

그래야 ‘신기루도시’를 빠져나와 집으로 갈 수 있다. ‘검은 연기 괴물’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예전의 모습처럼 똑같이 선거 이후에도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들만의 ‘신기루정치’가 될 것이다. 건너편에서 ‘검은 연기 괴물’에 둘러싸여 점점 더 그들에게 무관심해 지고 그들을 혐오하는 사람들과는 결코 닿을 수 없을 것이다. 구름다리는 영영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제발 정신들 좀 차리시기를.

 

우리는 반드시 투표 좀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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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왜 싸우는가?
김영미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훈련소에서 받는 많은 훈련 중 훈련병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훈련은 화생방일 것이다. “알아야 산다. 알아야 산다.”를 수백 번을 외치며 얼차려를 받는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니까. 정확한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북한에서 화학무기로 공격을 할 때를 가정해 화생방 훈련을 한다. CS라는 탄을 터뜨리면 순식간에 몸에 있는 모든 구멍으로 가스가 흡입된다. 그러면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또 내가 대비하기도 전에 눈물, 콧물, 또 다른 물들이 온 몸의 구멍으로 흘러나온다. 그래서 화생방 훈련을 하기 전에는 꼭 “알아야 산다!”를 외친다. 알아야 피할 수 있으니까.

 

 

세계 또한 왜 싸우는지 정말 제대로 알아야 한다.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세계 분쟁 지역 전문 PD]라는 직함은 처음 들어 봤다. 김영미PD가 그 직함의 주인공이다.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거의 종군기자 정도의 위험천만한 상황에 뛰어 들었다. 세계의 분쟁지역을 돌아다니며 한국에서는 입시와 공부에 지쳐 세계를 돌아볼 겨를도 없는 아이들의 상황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실제 아이의 엄마의 입장이다 보니 자신의 아들이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세계의 아이들과 진정한 친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가득 담겨 있다.

 

 

“중동의 석유통제권을 장악하려는 미국과 체첸의 석유통제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야.” (p.117)

 

“영국은 인도와 교역하는 데 250년, 점령하고 통치하는 데 다시 250년이 걸렸지만 철수하는 데는 70일이 걸렸을 뿐이야.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영향을 끼쳐 놓고 떠날 때는 나 몰라라 했지. 특히 영국은 카슈미르를 양국에 떠넘긴 채 정확히 누구 땅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떠났어.” (p.131)

 

결국 문제는 세계에서 가장 힘이 강한 나라들 몇몇의 이해관계다. 그들이 그리는 구조에 따라 세계가 움직이는 것이다. 냉전체제가 없어진 후 수면위로 떠다니는 확실하게 보이는 적이 없으니 그간 부풀려온 군수 산업이 감당이 되지 않는 것이다. 미사일과 온갖 첨단 무기들을 시험해 보고 소모할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늘 주고받는다. 결코 한 쪽이 손해 보거나 더 이득을 보지 않는다. 이해관계의 균형추가 한쪽으로 기울면 또 다른 곳의 분쟁지역으로 눈을 돌린다.

하이에나 같은 존재들이다.

 

그래서 책에 등장하는 분쟁지역은 물론 다른 분쟁지역 모두 언론에서 말하는 것에서 그치면 안 된다. 이면의 상황을 찾아보고 예의주시해야 한다. 그래야 전체적인 그림을 볼 수 있다.

대단한 자원이 매장되어 있거나 군사적·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거나 앞서 말했듯이 군수품의 소모가 필요하거나 등의 이유이다.

 

 

“국제사회는 1980년 제네바 협약을 통해 위험하고 잔인한 백린탄을 민간인에게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어. 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2004년, 미군은 이라크 팔루자에서 백린탄을 사용했단다.” (p.223)

 

이라크에 있는 생화학무기를 모두 파괴하겠다는 명목으로 벌인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은 결국 아무런 생화학무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생화학 무기를 직접 사용했다. 겉으로 내거는 목적은 핑계일 뿐이다.

 

 

“러시아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게릴라보다 테러리스트에 가까워. 하지만 체첸 입장에서 보면 독립운동을 하는 독립군이지. 이렇듯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하고, 독립군이 되기도 해.” (p.112)

 

체첸의 상황을 봐도 그렇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들이 게릴라고 테러리스트다. 그리고 그렇게 서방언론과 세계적인 통신사를 통해 전 세계로 뉴스를 퍼뜨린다. 그러나 왜 체첸 사람들이 그렇게 폭력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방법을 사용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다. 그냥 나쁜 놈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체첸 입장에서는 대단한 독립군이다. 예전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던지고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에게 총을 쏜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살 수 있다.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른 것임을 주지해야 한다. 김영미PD가 아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처럼 나도 언젠가 내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다면 ‘틀린 것’‘다른 것’에 대한 이해를 어렵더라도 꼭 시켜주고 싶다.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도 꼭 인식시켜주고 싶다. 가깝게 지내는 몽골 가족이 있는데 세 살 베기 여자 아이가 있다. 그 아이에게 몽골 말도 배우고 어려서부터 함께 놀게 한다면 조금은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유연한 대처 능력과 이해력을 기르게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많은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있을 텐데 그 아이들과의 관계도 잘 맺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일 뿐임을 알 수 있도록 말이다.

 

또 책의 가장 뒷부분에 실질적으로 분쟁지역의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여러 구호단체들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결혼 전부터 월드비전을 통해 몽골의 아이를 후원하고 있는 아내 덕에 나 또한 동참하게 되었다.

 

 

 

 

큰 후원은 아니지만 꾸준히 한 덕에 그 아이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내 아이가 태어나면 첫 생일에 후원계좌를 선물해 줄 생각이다. 내 아이는 함께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서 세계의 사람들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아이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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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돌파력 - 불안한 미래를 개척하는 확실한 힘
이노세 나오키 지음, 장은주 옮김 / 서울문화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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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부제가 조금 바뀌어야 할 것 같다. 「불안한 미래를 개척하는 확실한 힘!」이 아니라 좀 더 범위를 좁혀서 「직장 내 불안한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처세술!」로 말이다.

사실 책을 받아보고는 두께에 적잖이 놀랐다. 적어도 250페이지 중반은 넘겠거니 했는데 150페이지 정도였다. 작년 6월에 출간된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가 준 임팩트가 기억났다. 「분노하라」의 임팩트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루하루 일상에 꽁꽁 묶여 있는 비즈니스맨에게는 어느 정도 위로와 격려는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본의 체감 실업경기가 한국의 그것보다는 나은 탓인지 아니면 출판사에서 홍보문구를 잘못 정한 탓인지 “비즈니스맨을 위한 응원가!”라고만 소개가 되어 있다.

비정규직이 수백만을 헤아리고 청년 실업자들이 넘쳐나는 마당에 “비즈니스맨을 위한”이라는 문구는 자칫 ‘이런~~ 이젠 책까지도 비즈니스맨만 읽어야 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사실 일본의 사정 또한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을 져주던 종신직장의 의미가 퇴색된 지 오래고, 장기 경기침체로 인한 고용불안과 사회안전망 붕괴, 지진·원전 등의 악화되는 환경에 대한 우려 등으로 굉장히 불안하고 염려스러운 상황으로 알고 있다. 문득 이 책이 일본에서 먼저 출간이 되었는지? 출간이 되었다면 얼마 정도의 사람들이 읽었는지 궁금하다.

 

 

저자인 이노세 나오키씨는 모두가 가는 길로 가지 않았다. 60이 넘은 나이니 그가 20대 시절이던 40년 전 일본의 경기는 최고의 호황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직장을 골라서 갈 수 있었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 승진하고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좋은 쇼핑센터에서 쇼핑하는 모습이 정형화된 모습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글을 쓰고 싶었다는 것이다. 모두 비웃고 걱정스런 눈길을 보낼 때 저자는 철저하게 혼자만의 외로움을 견딘 채 자신의 꿈을 향해 매진했다.

결국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신화는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모두들 걱정하던 저자는 등단도 하고 여러 곳의 자문도 맡으며 이런 책까지 출간하게 되었다.

 

사실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자기자랑이 좀 많은 편이다. “다들 안 된다고 했는데 결국 나는 이렇게 했다, 다들 못하는 어떤 것을 내 방법대로 했더니 해결됐다.”식의 자랑 정도다. 흔히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들이 예전 젊었던 시절을 회상하시며 손자나 아들뻘되는 사람들에게 얘기해주는 정도 말이다. 그래서 귀엽게 넘어갈 만하다.

더군다나 모두가 뛰어드는 안정적인 직장을 뒤로 하고 30이 훨씬 넘기까지 생활고에 시달리며 자신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는 점은 본받을 만하기에 저자의 자랑은 귀엽다.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자기계발]이나 [처세술] 종류의 책은 읽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으며 조금은 선입견을 버릴 수 있게 된 것 같다.

대단한 성공신화를 이루고 대박(공부, 사업 등으로)을 터뜨린 사람의 아주 성의 없고 무책임한 책 따위와는 분명히 다르다.

얇은 책이지만 직장 내에서 다른 경쟁 상대들 보다 조금 더 인정받고 성공하는 직장 생활을 하기 위한 실제적인 지침과 조언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일일이 소개하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다.

 

 

“‘저 사람한테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라는 말을 들을 만한 특출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무기가 있어야 한다……. 의외로 자신의 약점 속에 힌트가 숨겨져 있다.” (p.45)

 

저자는 아침잠이 너무 많은 것이 약점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일찍 잠이 들려해도 잠이 잘 오지 않고, 아무리 일찍 일어나려 해도 일어날 수 없었다고 한다. 늘 이것이 자신의 약점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난 후로는 이것이 자신의 가장 큰 강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조용하고 집중이 잘 되는 늦은 밤에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남들처럼 잠이 많이 오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신뢰할 만한 사람을 얻으려면 자신이 먼저 신뢰받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p.119)

 

그리고 또 하나, 신뢰할 만한 사람을 얻으려면 내가 먼저 신뢰받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것 또한 참 맞는 말이지만 동시에 참 어려운 말이다. 사람의 신뢰를 얻는 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신뢰라는 것은 결코 가볍지도 쉽지도 않은 가치이기 때문에 쉽게 부여할 수 없다.

요즘 내 고민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인생을 함께 할 스승, 선배가 없다는 것’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고 휴대폰에도 연락처는 넘쳐나지만 내가 정말 힘이 들고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진정한 조언 내지는 꾸지람, 칭찬, 격려 등을 해줄 수 있는 스승이나 선배가 없다. 정말 친한 친구가 두 명이 있다. 그런데 이 친구들에게서는 채울 수 없는 또 다른 결여가 있다. 몇 년 전까지는 두 분이 계셨다. 지금은 두 분 모두 고인이 되셔서 이 허전함이 더한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누군가에게 신뢰받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지적도 일부분 맞는 말인 것 같다.

 

세상에는 공짜란 없으니까.

내가 얻었으면 하는 신뢰의 사람에게 거는 기대만큼 나도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공평한 거니까.

그래도 누군가 갑자기 펑~하고 나타나서

“임마~! 기운 내. 어깨 펴고~!”

라고 말해줬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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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계곡 - 눈을 감고 길을 걷는 당신에게
유병률 지음 / 알투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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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자본주의’시대를 이렇게 간략하고 명확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책은 요 근래 보지 못했다. 최근 10여 년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월스트리트 시위’로 대변되는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뒤덮었다.

 그에 따라 자연적으로 그것에 관한 수많은 책이 쏟아졌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월스트리트 시위’가 일어난 근본 원인과 배경, 과정과 결과, 전망과 해결방안 등 쓰나미처럼 밀고 나왔다.

 

그런데 그런 일단의 책들과는 다르게 이 책 「죽음의 계곡」은 미국의 자본주의에 대한 태동과 시대의 경과에 따른 변천 과정을 스피디하게 다루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미국식 자본주의가 예전처럼 위용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 세기 정도를 끌고 온 힘의 원천과 힘의 이면을 살펴보는 일은 굉장히 의미 있는 과정이다.

미국의 자본주의가 세계 자본주의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준이 되고 잣대가 되어 왔다. 미국경제사에 관한 책을 읽어 이것을 파악하려면 엄청난 힘과 에너지가 필요할 텐데, 이 책을 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을 현재 한국에서 [죽음의 계곡]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청춘을 향한 적용점으로 제시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라는 것이 정치체제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에 따른 분석이 곧 정치체제 변화와 동일선상에 있다.

 

마치 자본주의가 생명력이 있는 존재처럼 표현하고 기술하고 있다. 서커스단의 코끼리처럼 야만적이다가 마당을 나온 암탉처럼 타협적이다가 지킬과 하이드의 극과 극으로 해체되었다가 모든 것을 짓이기는 악마의 맷돌로 은폐되었다.

기승전결은 물론이고 빼어난 멜로디의 명곡 한 곡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포드주의’로 대변되는 자본의 야만에서 루즈벨트의 시장개입과 암탉들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를 쳐준 자본의 타협을 경험하고 레이건 시대 하이에크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로 인해 일방적으로 울타리를 허물어버리고 완전한 경쟁체제로 돌입해 보호·보장 따위가 완전히 해체되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이르러 정치권력과 매스미디어와 야합하여 완전히 말려 죽이는 ‘승자독식사회’를 만들어 버렸다.

 

영화 맘마미아(Mamma Mia)에 삽입된 아바(ABBA)의 [The Winner Takes It All]은 너무나 아름다운 멜로디의 곡이지만 제목만 놓고 보면 무시무시한 곡이다.

사랑도 돈도 권력도 결국 1%가 다 갖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경험하고 미국인들이라면 누구나 정원이 딸린 2층 전원주택을 짓고 2대 정도의 자동차를 보유하며 주말에는 스포츠와 피크닉을 즐기며 사회보장제도의 확립으로 실업급여, 연금제도 등이 튼튼하게 울타리가 되어 주었었지만 모두 다 [죽음의 계곡] 저 심연으로 빠져 버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계곡 저 아래에서는 메아리도 돌아오지 않는다.

 

 

“정치권력은 야만을 통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울타리조차 다 허물어버렸습니다. 결국 모든 보상이 승자에게 집중됩니다.” (p.193)

“‘요람에서 무덤까지 정부와 기업이 책임진다’는 표어는 ‘어떻게 살든 그건 당신들 책임이다’로 바뀝니다.” (p.124)

“1980년대 이후 노동자들은 극심한 임금하락과 고용불안에 직면합니다. 사회의 복지프로그램은 해체되고, 노조가 보호해주던 평생직장은 이제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돌변합니다.” (p.165)

 

1980년대 이후 30년 간 지속되어 온 자본주의의 실상이다. 더 나아진 것이 없다. 오히려 1%에게 더욱 모든 것이 집중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경기침체는 언제 호전될지 알 수 없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파산 직전에 와 있다는 뉴스를 심심찮게 보고 있다. 중국으로 자본주의 체제가 재편된다고 해도 더 나아지리라는 보장도 없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권력은 이미 시장에 넘어갔다.”라는 표현이 더욱 현실화 되고 구체화 되고 있다.

정치권력마저도 견제할 수 없는 시장권력은 독불장군이다. 눈치 볼 존재가 없고 태클 걸 귀찮은 존재가 없는데 폭주하는 시장의 기관차를 막을 수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폭주 기관차로 올라타라고 한다. 저 귀퉁이에 찌그러져 허리 한번 못 펴고 석탄을 삽으로 퍼 날라도 어쨌든 기관차에 올라탔다는 것으로 자위하라고 겁박한다.

 

 

저자도 우리가 어쩌다 이 죽음의 계곡에서 허우적거리게 되었는지 추적하고 벗어나기 위해 제대로 갇힌 이유를 알아보자고 했지만 마땅한 대안은 내놓지 못했다.

하긴 무슨 마땅한 대안을 내놓을 수 있겠나.

워낙 실생활에서 구체화 되어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 오히려 구체적인 대안보다는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합리적일 거라 생각한 것 같다.

 

“열린 플랫폼, 공생의 생태계에서는 창조적인 가치가 공공의 가치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p.236)

 

자본주의체제에서 돌연변이로 툭 튀어 나왔던 애플의 아이폰과 구글, 페이스북의 창조적인 가치를 옹호하며 잘 발전시키고 연구하면 대안이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세상을 바꿨기 때문이다.

첨예한 경쟁과 끝이 보이지 않는 물고 물리는 사다리에서 내려오기를 독려한다.

 

 

 

 

 

 

“귀신고래처럼 폼이 좀 안 나더라도 더덕더덕 나의 상처 남의 상처를 다 끌어모아 훈장처럼 붙이고, 또 내가 보살펴야 할 약한 존재들을 업고 다니며 키워주는 그런 따뜻한 생태계로 말입니다.” (p.222)

 

그리고 귀신고래의 생태처럼 공생과 공존의 가치를 피력한다.

이렇게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대안 제시가 짜증스럽지 않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도무지 어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이 시점에서. 없다. 대안이.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은 물론 사법권력 조차 시장에 넘어간 마당에 누구에게 힘을 빌리고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나. 어림도 없는 소리다.

스스로 해야 한다. 우리끼리라도. 내가 너의 귀신고래가 되고 니가 나의 귀신고래가 되어야 한다. 서로 어깨를 걸고 이인삼각 경기하듯이 함께 박자를 맞춰 걸어야 한다.

‘그런 허황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 할 시간에 토익·토플 공부 더 하겠다~!’ 하는 사람은 같이 안 하면 된다.

 

그러나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연대해야 한다. 공생하고 공존해야 한다.

공감이 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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