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선악의 경제학 - 길가메시에서 월스트리트까지 성장과 탐욕의 역사를 파헤친다
토마스 세들라체크 지음, 노은아.김찬별 옮김 / 북하이브(타임북스)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신자유주의가 고사상태에 빠진 지 수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근본 원인에 대한 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당연히 대책이 세워질리 없다. 미국 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세계경제를 일순간에 아노미 상태로 빠지게 했고 마치 도미노가 차례로 넘어지듯 수 년 사이 각국의 경제를 무너뜨리고 있다.
종종 TV를 통해 유럽 몇몇 국가의 경제 위기가 보도되기는 하지만 일부 솔직한 경제학자들의 심각한 현실을 접하게 되면 TV보도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마치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십 년을 떠들어 온 경제학자·관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아~~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며 자신의 책임을 묻어버린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사랑과 칭송은 헌신 짝 버리듯 찰나에 떨쳐버린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경제에 대해서 무지한 무고한 시민들은 작금의 경제적 현실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런 차원에서 체코의 경제학자이자 관료인 ‘토마스 세들라체크’의 「선악의 경제학」은 좋은 지침서이자 내가 본 유일한 경제학자의 시말서이다.
“우리는 경제학이 기초로 삼아야 할 이런 도덕적 원칙을 너무나도 기쁘게 떨쳐버렸다. 그런 원칙에서 탈피한 경제 정책의 결과는 막대한 채무를 낳은 적자병이다.” (p.455)
경제학자가 이야기하는 도덕적 원칙이라? 일견 맥이 닿지 않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너무 당연한 말인 듯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하는 경제학자는 많지 않다.
사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이전에도 미국은 물론 EU와 아시아, 남미의 많은 국가들의 채무 상태를 지적하고 심각한 위기의 봉착을 경고했음에도 한 귀로 흘려버렸다.
국내의 경우에도 얼마 전 뉴스 보도에서 가계부채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서 국내 전체 경제를 위협하는 수준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었는데 이것도 이미 수년 전부터 많은 학자들이 경고했던 바다.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길은 기존의 인식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p.425)
“경제학의 조류 곳곳에서 기원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경제학의 기원은 바로 도덕이다.” (p.374)
저자는 과감하게 기존의 인식을 포기할 것은 주문한다. 기존의 인식이란 한마디로 신자유주의를 포함한 지금까지 주류 경제학을 주물러 온 모든 개념과 체제 혹은 이론이라 할 수 있다. 경제학이라는 것이 수학 공식에 의한 문제풀이처럼 딱 들어맞는 해답을 내놓을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불완전함에서의 출발이라 저자는 말한다. 이 불완전함을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진화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을 빠뜨렸다고 한다.
바로 도덕이다.
그러면 왜 이제까지 주류경제학은 도덕을 빠뜨렸는지에 대해 1장에서부터 14장에 이르기까지 흥미롭고 신선한 시도로 접근하고 해석한다.
“나는 경제적 에토스(ethos)의 발전 과정을 기록하고자 한다.” (p.22)
“고대의 사람들에게 처음 세상을 설명해준 것은 신화와 종교였으며, 현대에는 과학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p.35)
고대의 대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부터 구약의 예언·신약의 서신은 물론 그리스·로마 시대의 철학자들, 중세에서 근·현대에 이르는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경제는 과연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에 대한 거시적 접근을 시도한다.
경제학자의 이런 시도가 자칫 딱딱하고 어려울 것만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일단 전체적인 글이 서사적이다. 경제에 역사(신화와 종교를 포함한)를 뒤섞어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릴 것 같았지만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책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서사적이었지만 굉장히 박학다식한 학자로서의 면모가 책의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구약의 예언에 드러난 경제학적인 접근과 경제사상의 도출은 신선했다. 그리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만들어 낸 이가 ‘맨더빌’이라는 경제학자였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먼저 구약의 예언에 드러난 경제학적인 접근과 경제사상의 도출은 그 시도만으로도 재미있었다.
“구약의 예언은 미래를 결정론적으로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반응을 요구하는 경고이자 그 반응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전략적 차이를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p.98)
요셉의 꿈과 이집트의 황제 파라오가 꾸는 꿈과 욥의 시련, 잠언과 전도서에서 도출한 경제적 의미는 기독교인인 나에게는 엄청난 지적 유희를 선사했다.
그리고 대학 시절 읽고 나서 충격에 빠졌었던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에서 읽었었던 구약의 희년사상과 토지사유화 반대에 대한 개념을 이 책에서도 일부 발견해 읽을 수 있었다.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는 데 49년마다 희년이 돌아오는데, 희년이 되면 처음 상속받았던 주인에게 땅을 돌려주게 된다. 희년에는 빚을 면제해 주어야 하며,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유대인도 모두 해방된다.”
“자산과 권력의 집중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 셈이었다. 50년이라는 기간은 당시 유대인들의 수명과 일치했으며, 이를 통해 대대로 이어지는 부채 문제를 정리하는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p.116∼117)
구약에 나타난 희년사상이 단순한 부채 문제 정리가 아니라 현대 주류경제학에서 놓치고 있던 바로 그 문제. 도덕적 차원의 문제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사회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확대와 전환은 책의 곳곳에서 드러내는 저자의 생각에서 교차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맨더빌’에 대한 고찰에서 두르러진다.
“경제학자들에게 윤리학은 시시하고 지엽적인 존재가 되었다. 경제학은 윤리를 논할 필요가 없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지하는 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p.255)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애덤 스미스에 의해 주창되고 발전된 개념이라기보다 저자는 또 다른 경제학자 ‘맨더빌’에 의해 발전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주장은 차치하고서 어쨌든 애덤 스미스에 의해서건 맨더빌에 의해서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수 세기 동안 주류 경제학의 중심이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현대 경제사상에서는 도덕적 차원이 이미 오래전에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특히 개인의 악덕이 반대로 공익을 이끌어 낸다는 맨더빌의 개념이 보편화된 데 기인한다.” (p.102)
보이지 않는 손을 신봉하고 그것을 가장 머리에 두는 경제학에서는 도덕적·윤리적 차원의 문제는 2차,3차적 메타포의 의미에 불과했다. 상징적 차원의 접근은 실제적 결론에 이를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선악의 경제학과 관련해 맨더빌은 개인의 악덕이 공익에 기여하며 그러므로 이로운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덕성이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며 악덕은 그 반대라는 히브리인들과 애덤 스미스의 생각과 대척점에 서 있다.” (p.266)
여기서 더 나아가 맨더빌은 ‘개인의 악덕이 공익에 기여하며 그러므로 이로운 것’이라고까지 믿었다고 한다. 맨더빌이라는 이 아저씨! 순진했던 것인지 순수했던 것인지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찬양이 대단했던 것 같다.
사회적인 안전망?? 개나 줘버려!!!
‘보이지 않는 손’ 님이 모조리 해결해 주실 거야!!!
어쨌든 실패했다. 보기 좋게.
그러면 반대편 대척점에 있던 구약의 히브리인들의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에 대한 논의를 구체화하고 현실화하는 것이 작금의 신자유주의 멸망을 목도하고 있는 현대 경제학자들과 관료들이 해야 할 인식의 전환일 것이다.
앞서 저자가 아주 드물게 솔직한 경제학자라고 말했었는데, 저자의 전 세계적인 국가부채의 확대에 대한 지적과 개인적 소유와 충족의 상관관계를 지적하는 것을 보면 내가 왜 저자가 솔직하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더 많이 가질수록 요구나 욕구가 줄어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 요구는 우리의 소유와 함께 증가한다. 우리는 결코 충족될 수 없다.” (p.306)
맞는 말이다. 로또 2등에 당첨된 사람들 중 대다수가 받은 당첨금 대부분을 다시 로또를 사는 것에 써버린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는데, ‘숫자 하나만 더 맞췄으면 1등인데 그거 하나 못 맞춰서 2등을 했다.’라는 욕심이 원인이라고 했다.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이 소유와 욕구임은 분명하다.
누구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이것을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손’이 끌고 오던 신자유주의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처럼 부채만 늘어나는 사회와 현실에서는 50년이 지나도 150년이 지나도 쌓여만 가는 빚더미에 생매장 당하는 운명에 이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제 정책의 전반적인 목표를 GDP 최대화에서 채무 최소화로 변경해야 한다.” (p.347)
실제로 저자는 체코의 경제정책에 참여하고 체코 주요 은행에서 일했다. 그의 확고한 주장대로 체코의 경제 정책의 전반적인 목표가 GDP 최대화에서 채무 최소화로 변경되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너무나도 분명하고 명확한 신자유주의의 멸망에 슬쩍 발 빼지 않고 솔직하게 진단하고 또 신선한 접근방법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저자의 경제적 혜안은 흥미롭고 설득력이 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당이든 야당이든 ‘경제 민주화, 복지의 확대’를 주요 정책적 개념으로 들고 나왔다. 정치적 스탠스가 어떠하냐? 선거용 구호에 불과하다. 내용이 없다 등 많은 비판이 쏟아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반대로 정당과 정략이 각기 다르지만 최소한 큰 틀에서 암묵적 합의가 되어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런 중요하고 시급한 화두가 화두로만 그쳐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말을 한 정치인들의 약속 이행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표를 행사하는 유권자들의 몫이 더욱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선거용으로라도 ‘경제 민주화, 복지의 확대’를 들먹였다면 이 책은 꼭 선거 캠프에서 필독하시기를 바란다.
‘각 가정의 채무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국가적 정책으로 입안’해 부채를 앉은 채 살아가는 국민들의 형편을 나아지게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갑이다.
어려웠지만 굉장히 의미 있고 재미있는 책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서평을 쓴답시고 헛소리만 지껄이지 않았나 싶어 비트켄슈타인이 남긴 말로 변명을 곁들인 갈무리를 한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이다.’ (p.409)
내 글이 이 책을 이해하는 나의 한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