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의 거침없는 태국여행 - 두 남자의 수다액션 블록버스터 여행에세이
김강우.이정섭 지음 / 페이퍼북(Paperbook)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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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참 좋은 것이다. 요즘에야 해외여행이 너무 흔해져 있지만 중학교 시절 미국으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는 녀석의 엄청난 무용담은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악명이 높던 수학 선생님(별명은 사탄의 인형)의 수업시간을 능가하는 집중력과 인기를 불러 일으켰다. 그 녀석의 평소 학교 생활이 잘난 척 많이 하고 있는 체 하는 녀석이었다면 ‘재수 없는 놈! 돈 많은 거 자랑하는 거야 뭐야!’라며 속으로 별의 별 욕을 했겠지만 그 녀석은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고 집도 잘 살고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지내는 지금 말로 ‘엄친아’의 표본이었었다.

그래서 그 녀석의 미국 여행 무용담은 쉬는 시간 마다, 점심 시간 내내, 저녁 시간 내내, 그리고 며칠 동안 반 전체에 회자되었었다.

 

처음 해외 여행을 했던 몽골에 대한 기억이 나에게도 생생하고 가장 인상 깊었었던 여행이었다. 고(故) 리영희 선생님의 책을 처음 읽고 받았던 충격에 버금가는 경험이었다. TV로만 보고 책으로만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사는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하고 밥 먹고 함께 지내며 사람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

꼭 해외여행만 좋은 것은 물론 아니다. 국내 여행 중에서도 나는 전라도 여행을 잊지 못한다. 그 냄새와 느낌과 이미지가 또렷하다.

 

“여행은 비일상으로 떠나는 것이다.‘

 

한 팟캐스트 프로그램에 출연한 여행 프로그램 PD가 한 말이다.

일상에 젖고 찌들어 있는 심신을 비일상으로 치환하는 것. 이것이 여행이라는 것이다.

일상이 즐거우면 굳이 비일상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겠지만 우리 같은 생활인들이야 대부분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두 남자의 거침없는 태국 여행」은 더 의미가 있다. 언뜻 그림이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 두 남자니까. 커플이거나 두 여자의 여행이라면 별로 이상할 것도, 어색할 것도 없는데 왜 유독 두 남자라면 손가락 발가락이 오그라들 준비를 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평소 가깝게 지내는 영화 감독 이정섭씨와 배우 김강우씨가 태국을 함께 여행한 경험을 책으로 담았다.

 

두 사람 다 유명한 사람들이라 여행을 하는 것이 완전한 비일상으로의 치환이었는지 궁금했고 또 하나, 정말 친한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거나 함께 산 결말이 그리 아름답지 못한 사례가 많아 책을 읽기 전 ‘두 남자가 거침없이 여행을 함께 떠났다가 시원하게 연을 끊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랬다면 책이 나올리 만무하니 안심을 하고 책을 읽었다.

태국 하면 나는 [카오산 로드]가 가장 떠오른다. 가고 싶은 태국 여행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말그대로 바다에 위치한 ‘휴양지’를 중심으로 여행한 두 사람의 여행기였다. 개인적으로는 휴양여행 보다는 몸으로 부딪히는 자유여행을 선호하는 터라 그 부분은 조금 아쉬웠지만 영화 감독이고 배우이다 보니 드라마틱하게 전개한 글의 구성은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중간 중간에 실제 여행자들에게는 천금과 같은 도움이 되는 [여행 TIP]이 수록되어 있는데 태국의 식당에서는 어떤 음식을 시켜야 하는지 좋은 호텔은 어디인지 등 구체적이고 상세한 부분을 친절하게 소개해 주고 있다.

 

완전히 다른 성격과 기질의 두 사람이 여행을 하면 으레 갈등이 생기거나 감정이 상하는 있기 마련인데 이 책에서는 그러한 구체적인 사례의 소개는 없다.

하지만 같은 사안이나 사건에 대해서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의 생각을 담는 것으로 귀엽고 편안하게 편집이 되어 있다. ‘무슨 무슨 일에 대해서 우리는 의견이 달라 크게 다투었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끝내 버리면 얼마나 밋밋하고 딱딱한가.

 

 그런데 이 책에서는 마치 영화 「오! 수정」에서 남과 여의 생각이 180도 다른 것을 한 가지 사안에 등치해 화면으로 풀어낸 것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어 신선했다.

 

소소한 갈등이야 없지는 않았겠지만 여행은 그들을 더욱 친밀하고 진지하게 해줬던 것 같다. 책에 싣지는 않았지만 태국의 유명한 맥주 ‘창(chang)’을 마시며 이제껏 하지 못했던 두 사람의 인생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영화 [아저씨]에서 ‘람로완’ 역할을 했던 태국 배우 ‘타나용’을 만나는 장면은 뜻밖의 반가움이었다. 영화 [아저씨]를 너무 재밌게 봤고 특히 ‘람로완’이라는 캐릭터가 너무 멋있어서 나중에 따로 찾아보고 검색해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의 차갑고 잔인한 모습과는 달리 김강우씨기 ‘형아’라고 책에서 표현할 정도로 두 사람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한국에 대해서도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김강우는 영화뿐 아니라 삶의 동료가 되어 오래된 친구처럼 익숙해졌다. 함께 하기에 더 없이 좋은 여행친구이기도 해” (p.11)

 

책을 다 읽고 나니 책을 읽기 전 내가 걱정했던 것은 기우였음이 분명했다. 여행을 하거나 같이 살면서 사이가 틀어지는 관계도 있지만 더욱 끈끈하고 돈독해지는 경우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어제부터 김강우씨가 멋진 형사로 나오는 TV드라마가 시작되었던데 반가웠다. 여전히 멋진 몸매를 유지하는 것도 대단해 보였다.

태국에 다녀와서인지 짙은 색 피부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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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 정치적이다 - 경쾌하게 세상을 움직이는 힘 소셜 센서빌리티
박재희 지음 / 바다출판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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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정치적’이라는 말이 너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곳이다. 인간의 삶에서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얼마나 될까? 어떤 일을 대하는 태도나 사람과의 관계를 맺어가는 것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활동이 ‘정치적’인 것은 아닐까?

 

그런데 우리 사회, 특히 국내의 미디어와 정치적 세력들은 ‘정치적’이라는 것을 핑계로 정략을 짜고 싸움판을 재편한다.

매일의 삶이 ‘정치적’인데 무슨 코미디들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책 「그 여자 정치적이다」는 기업 내에서 그것도 외국계 회사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여성 직장인의 이야기다.

 

“상황과 맥락을 감지하고 유연하게 변화하여 성공하는 능력이 바로 ‘스마트 파워’ 즉 ‘소셜 센서빌리티’이다.” (p.26)

 

저자는 책의 앞부분에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적’이라는 의미를 설명한다. 많은 사람이 쉽게 오해하는 ‘정치적’이라는 것의 의미와는 많이 다른 것이다. ‘소셜 센서빌리티’라는 개념은 처음 들어본 개념인데, 여러모로 동의가 되는 개념이다. 무한한 경쟁과 보이지 않는 창조적 전쟁이 하루 온 종일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셜 센서빌리티’가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저자가 외국계 회사에서 중역으로 크게 성공한 직장인이라는 점과 저자가 여성이라는 점이 저자가 주장하는 ‘소셜 센서빌리티’이라는 개념을 더욱 설득력 있게 한다.

아무리 각박하고 차가운 경쟁의 세계이지만 ‘소셜 센서빌리티’가 가지는 스마트 파워는 분명히 필요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결국 조직을 구성하고 이끌어가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이것에서 나올 가능성이 많다. 무수하게 일어나는 상황에 대한 맥락을 파악하고 그것을 유연하게 대응하여 가장 적합한 것으로 변화하는 것은,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이라는 것은 상황과 맥락을 읽어 자기 위치를 결정할 때 다른 사람의 위치에서 보고 듣는 것이다.” (p.136)

 

또 하나 저자가 소개하는 ‘정치적’이라는 것의 의미는 지금 내가 처한 현실과 상황, 직급에서만 사안과 임무를 보려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위치에서 보고 들으라는 것이다. 상황과 맥락을 읽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뉴스에서 자연재해나 사고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의 인터뷰의 대부분은 ‘내가 이런 일을 당할지 몰랐어요.’이다. 나에게 어떤 일이 닥치면 전체적인 상황과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당장 내 피부에 닿는 피해에 시각이 갇히기 때문이다.

이때도 어김없이 스마트한 ‘소셜 센서빌리티’가 필요하다. 내가 포함된 팀과 부서에 닥친 위험과 어려움은 나를 포함한 나의 팀원과 부서원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것이다. 여기에서는 무엇보다 맥락을 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이 팀과 부서의 리더라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지만 책의 곳곳에 소개된 저자의 실제 경험을 읽어보면 나라고 못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성공하고 승진하게 되는 것은 또 당연하다.

사회생활 중 특히 직장생활에서 ‘정치적’인 능력을 갖췄다면 저자의 구체적인 제안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칭찬은 은밀하게 당사자에게만 하지 말고 공공연하게 확성기를 대고 많은 사람이 듣도록 하는 것이 좋다.” (p.143)

 

나는 칭찬도 비난도 따로 불러 하는 편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자는 칭찬은 공공연하게 하고 비난은 따로 불러 하라고 한다. 가만히 읽어보니 맞는 말이다. 누군들 칭찬 듣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비난 받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공공연하게 많은 이들 앞에서 칭찬 받은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면 따로 불러 듣는 비난에 크게 좌절하거나 마음이 상하지 않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반대로 칭찬은 쥐뿔도 해주지 않으면서 많은 사람 앞에서 공공연하게 비난하고 서류 종이뭉치를 집어 던지면 그 사람은 오래 일하지 못한다.

책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내가 어떤 사람(거래처나 동료 직원 등)에게 도움을 주어서 상대방이 감사의 인사를 했을 때 내가 보이는 반응에 대한 것이었다.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나중에 기억해 주십시오.’

‘좀 힘들었지만 보람이 있네요.’

 

‘제가 신세질 일도 있겠지요. 그때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p.159)

 

기가 막히다!! 간단한 말인데, 왜 나는 저렇게 말하지 못했나 모르겠다. ‘내가 이만큼이나 도와줬는데 고작 인사 한마디야!!’ 속으로 욕하는 것보다 훨씬 솔직하고 ‘정치적’이다. 내가 도와준 것보다 감사의 인사가 적거나 당연히 기대하던 보답을 받지 못하면 짜증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차라리 솔직하게 얘기하고 더 나은 관계를 이어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도 아직 해본 적이 없어서 낯설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저렇게 말해보고 싶다.

듣는 사람도 우물쭈물 속에도 없는 ‘아이고 뭘요~! 당연히 도와야 되는 건데요~!’ 입바른 소리 듣는 것보다는 훨씬 마음이 놓일 것 같다.

 

내게 도움을 준 사람에게 내가 감사의 인사를 했을 때, 상대가 저렇게 말해 준다면 나는 오히려 ‘이 사람 괜찮은 사람인데~’라는 생각을 할 것 같다.

최근에 읽은 자기계발서, 처세서 중 가장 좋았다.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고 많은 것을 자랑하지 않으니 오히려 설득 되는 부분이 많았다. 책 또한 ‘정치적’으로 잘 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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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경제학 - 길가메시에서 월스트리트까지 성장과 탐욕의 역사를 파헤친다
토마스 세들라체크 지음, 노은아.김찬별 옮김 / 북하이브(타임북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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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가 고사상태에 빠진 지 수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근본 원인에 대한 규명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당연히 대책이 세워질리 없다. 미국 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세계경제를 일순간에 아노미 상태로 빠지게 했고 마치 도미노가 차례로 넘어지듯 수 년 사이 각국의 경제를 무너뜨리고 있다.

 

종종 TV를 통해 유럽 몇몇 국가의 경제 위기가 보도되기는 하지만 일부 솔직한 경제학자들의 심각한 현실을 접하게 되면 TV보도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마치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십 년을 떠들어 온 경제학자·관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아~~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며 자신의 책임을 묻어버린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사랑과 칭송은 헌신 짝 버리듯 찰나에 떨쳐버린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경제에 대해서 무지한 무고한 시민들은 작금의 경제적 현실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그런 차원에서 체코의 경제학자이자 관료인 ‘토마스 세들라체크’의 「선악의 경제학」은 좋은 지침서이자 내가 본 유일한 경제학자의 시말서이다.

 

“우리는 경제학이 기초로 삼아야 할 이런 도덕적 원칙을 너무나도 기쁘게 떨쳐버렸다. 그런 원칙에서 탈피한 경제 정책의 결과는 막대한 채무를 낳은 적자병이다.” (p.455)

 

경제학자가 이야기하는 도덕적 원칙이라? 일견 맥이 닿지 않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너무 당연한 말인 듯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하는 경제학자는 많지 않다.

사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이전에도 미국은 물론 EU와 아시아, 남미의 많은 국가들의 채무 상태를 지적하고 심각한 위기의 봉착을 경고했음에도 한 귀로 흘려버렸다.

국내의 경우에도 얼마 전 뉴스 보도에서 가계부채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서 국내 전체 경제를 위협하는 수준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었는데 이것도 이미 수년 전부터 많은 학자들이 경고했던 바다.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길은 기존의 인식을 포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p.425)

“경제학의 조류 곳곳에서 기원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경제학의 기원은 바로 도덕이다.” (p.374)

 

저자는 과감하게 기존의 인식을 포기할 것은 주문한다. 기존의 인식이란 한마디로 신자유주의를 포함한 지금까지 주류 경제학을 주물러 온 모든 개념과 체제 혹은 이론이라 할 수 있다. 경제학이라는 것이 수학 공식에 의한 문제풀이처럼 딱 들어맞는 해답을 내놓을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불완전함에서의 출발이라 저자는 말한다. 이 불완전함을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진화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을 빠뜨렸다고 한다.

 

바로 도덕이다.

 

그러면 왜 이제까지 주류경제학은 도덕을 빠뜨렸는지에 대해 1장에서부터 14장에 이르기까지 흥미롭고 신선한 시도로 접근하고 해석한다.

 

“나는 경제적 에토스(ethos)의 발전 과정을 기록하고자 한다.” (p.22)

“고대의 사람들에게 처음 세상을 설명해준 것은 신화와 종교였으며, 현대에는 과학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p.35)

 

고대의 대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부터 구약의 예언·신약의 서신은 물론 그리스·로마 시대의 철학자들, 중세에서 근·현대에 이르는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경제는 과연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대한 거시적 접근을 시도한다.

 

경제학자의 이런 시도가 자칫 딱딱하고 어려울 것만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일단 전체적인 글이 서사적이다. 경제에 역사(신화와 종교를 포함한)를 뒤섞어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릴 것 같았지만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책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서사적이었지만 굉장히 박학다식한 학자로서의 면모가 책의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구약의 예언에 드러난 경제학적인 접근과 경제사상의 도출은 신선했다. 그리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만들어 낸 이가 ‘맨더빌’이라는 경제학자였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먼저 구약의 예언에 드러난 경제학적인 접근과 경제사상의 도출은 그 시도만으로도 재미있었다.

 

“구약의 예언은 미래를 결정론적으로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반응을 요구하는 경고이자 그 반응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전략적 차이를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p.98)

 

요셉의 꿈과 이집트의 황제 파라오가 꾸는 꿈과 욥의 시련, 잠언과 전도서에서 도출한 경제적 의미는 기독교인인 나에게는 엄청난 지적 유희를 선사했다.

 

그리고 대학 시절 읽고 나서 충격에 빠졌었던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에서 읽었었던 구약의 희년사상과 토지사유화 반대에 대한 개념을 이 책에서도 일부 발견해 읽을 수 있었다.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는 데 49년마다 희년이 돌아오는데, 희년이 되면 처음 상속받았던 주인에게 땅을 돌려주게 된다. 희년에는 빚을 면제해 주어야 하며,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유대인도 모두 해방된다.”

“자산과 권력의 집중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 셈이었다. 50년이라는 기간은 당시 유대인들의 수명과 일치했으며, 이를 통해 대대로 이어지는 부채 문제를 정리하는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p.116∼117)

 

구약에 나타난 희년사상이 단순한 부채 문제 정리가 아니라 현대 주류경제학에서 놓치고 있던 바로 그 문제. 도덕적 차원의 문제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사회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의 확대와 전환은 책의 곳곳에서 드러내는 저자의 생각에서 교차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맨더빌’에 대한 고찰에서 두르러진다.

 

“경제학자들에게 윤리학은 시시하고 지엽적인 존재가 되었다. 경제학은 윤리를 논할 필요가 없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지하는 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p.255)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애덤 스미스에 의해 주창되고 발전된 개념이라기보다 저자는 또 다른 경제학자 ‘맨더빌’에 의해 발전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주장은 차치하고서 어쨌든 애덤 스미스에 의해서건 맨더빌에 의해서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수 세기 동안 주류 경제학의 중심이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현대 경제사상에서는 도덕적 차원이 이미 오래전에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특히 개인의 악덕이 반대로 공익을 이끌어 낸다는 맨더빌의 개념이 보편화된 데 기인한다.” (p.102)

보이지 않는 손을 신봉하고 그것을 가장 머리에 두는 경제학에서는 도덕적·윤리적 차원의 문제는 2차,3차적 메타포의 의미에 불과했다. 상징적 차원의 접근은 실제적 결론에 이를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선악의 경제학과 관련해 맨더빌은 개인의 악덕이 공익에 기여하며 그러므로 이로운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덕성이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며 악덕은 그 반대라는 히브리인들과 애덤 스미스의 생각과 대척점에 서 있다.” (p.266)

 

여기서 더 나아가 맨더빌은 ‘개인의 악덕이 공익에 기여하며 그러므로 이로운 것’이라고까지 믿었다고 한다. 맨더빌이라는 이 아저씨! 순진했던 것인지 순수했던 것인지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찬양이 대단했던 것 같다.

 

사회적인 안전망?? 개나 줘버려!!!

‘보이지 않는 손’ 이 모조리 해결해 주실 거야!!!

 

어쨌든 실패했다. 보기 좋게.

 

그러면 반대편 대척점에 있던 구약의 히브리인들의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에 대한 논의를 구체화하고 현실화하는 것이 작금의 신자유주의 멸망을 목도하고 있는 현대 경제학자들과 관료들이 해야 할 인식의 전환일 것이다.

앞서 저자가 아주 드물게 솔직한 경제학자라고 말했었는데, 저자의 전 세계적인 국가부채의 확대에 대한 지적과 개인적 소유와 충족의 상관관계를 지적하는 것을 보면 내가 왜 저자가 솔직하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더 많이 가질수록 요구나 욕구가 줄어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 요구는 우리의 소유와 함께 증가한다. 우리는 결코 충족될 수 없다.” (p.306)

 

맞는 말이다. 로또 2등에 당첨된 사람들 중 대다수가 받은 당첨금 대부분을 다시 로또를 사는 것에 써버린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는데, ‘숫자 하나만 더 맞췄으면 1등인데 그거 하나 못 맞춰서 2등을 했다.’라는 욕심이 원인이라고 했다.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이 소유와 욕구임은 분명하다.

 

누구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이것을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손’이 끌고 오던 신자유주의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처럼 부채만 늘어나는 사회와 현실에서는 50년이 지나도 150년이 지나도 쌓여만 가는 빚더미에 생매장 당하는 운명에 이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제 정책의 전반적인 목표를 GDP 최대화에서 채무 최소화로 변경해야 한다.” (p.347)

 

실제로 저자는 체코의 경제정책에 참여하고 체코 주요 은행에서 일했다. 그의 확고한 주장대로 체코의 경제 정책의 전반적인 목표가 GDP 최대화에서 채무 최소화로 변경되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너무나도 분명하고 명확한 신자유주의의 멸망에 슬쩍 발 빼지 않고 솔직하게 진단하고 또 신선한 접근방법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저자의 경제적 혜안은 흥미롭고 설득력이 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당이든 야당이든 ‘경제 민주화, 복지의 확대’를 주요 정책적 개념으로 들고 나왔다. 정치적 스탠스가 어떠하냐? 선거용 구호에 불과하다. 내용이 없다 등 많은 비판이 쏟아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반대로 정당과 정략이 각기 다르지만 최소한 큰 틀에서 암묵적 합의가 되어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런 중요하고 시급한 화두가 화두로만 그쳐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말을 한 정치인들의 약속 이행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표를 행사하는 유권자들의 몫이 더욱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선거용으로라도 ‘경제 민주화, 복지의 확대’를 들먹였다면 이 책은 꼭 선거 캠프에서 필독하시기를 바란다.

 

‘각 가정의 채무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국가적 정책으로 입안’해 부채를 앉은 채 살아가는 국민들의 형편을 나아지게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이다.

 

어려웠지만 굉장히 의미 있고 재미있는 책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서평을 쓴답시고 헛소리만 지껄이지 않았나 싶어 비트켄슈타인이 남긴 말로 변명을 곁들인 갈무리를 한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이다.’ (p.409)

 

내 글이 이 책을 이해하는 나의 한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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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권력을! - 대한민국 부모들에 권하는 역할 교환 프로젝트
요한 메츠거 지음, 엄양선 옮김 / 서울문화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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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가져 본 권력을 생각해 보니 장교 생활을 했던 군대 시절 보다 반장이었던 초등학교 시절이 더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선생님 대신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고 칠판에 떠드는 아이의 이름을 적고 수업 시작과 끝에 대표로 일어나 인사를 하는 것 등은 그때에는 꿀맛같은 권력이었다.

 

아직 부모가 아니라 이 책 「아이에게 권력을」의 설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이제껏 살아오며 가장 달콤하게 누렸던 권력을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반장 시절이었다.

저자는 독일의 자유기고가 겸 저널리스트이다. 어느 날 아들과 함께 한 탁구시합 도중 ‘아이에게 부모의 권력을 주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어 실제로 한 달 동안 부모와 자녀의 관계와 지위를 바꿔 생활해 본 재미있는 사람이다.

 

독일과 한국의 상황이 많이 달라 사실 한국의 부모들은 별로 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자식을 부양할 수 없고 당연히 가정교육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공교육의 여러 문제와 학교폭력 문제에 대해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가정교육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교사 1명이 도대체 수십 명의 아이들에게 어떻게 인성교육을 할 수 있겠나!!

최소한 가정의 경제권을 쥐고 있는 것은 독일의 부모나 한국의 부모가 동일하기 때문에 ‘경제권의 위임’ 면에서만 책을 이해해야 했다.

 

“아빠, 지금 아빠가 했던 것처럼 그렇게 정중한 말투로 나를 대하는 어른은 본 적이 없었어. 되게 기분이 좋았어.” (p.16)

 

저자의 아들 조니로부터 듣게 된 말이다.

이 말이 ‘아이에게 권력을’ 위임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몇 주 동안 너희가 집안일을 모두 결정하는 거야. 너희가 대장이 되고, 엄마와 나는 너희가 하라는 대로 하는 거지. 구호는 ‘아이들에게 모든 권력을’이야.” (p.19)

 

단순히 역할을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한 달 동안의 총 생활비 700유로를 큰딸 라라와 막내아들 조니에게 주고 가정의 전 경제권을 위임했다. 그리고 저자와 아내는 아이들에게 용돈을 받아쓰는 완벽한 권력 위임이었다.

 

“그래. 나는 아이 역할을 더 많이 했으면 싶어. 아이가 어른이 되는 일은 잘됐는데, 어른이 아이가 되는 일은 잘 안 됐어. 우리가 진짜 어린아이인 것처럼 행동해야겠어.” (p.132)

“보답이 고작 이거냐? 내가 저를 위해 어떻게 했는데!” (p.184)

 

‘아이에게 권력을’이라는 말이 듣기에는 얼마나 좋은 말인가? 실제로 실천하기에는 무척이나 걱정이 되고 두려움이 생기는 일임은 분명하다.

물론 실험 기간 내내 완벽하게 부모 역할을 마스터해 내는 아이들과는 달리 여전히 어른의 때(?)를 벗어던지지 못한 부모는 더욱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아이들과도 갈등을 겪게 된다.

 

“실험을 하면서 나는 아이들에게 아주 대단한 경험을 안겨줄 거라고 믿었다. 한 달 동안 집에서 놀이공원에서나 할 수 있는 모험을 하게 해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나는 모험은커녕 좌절과 부담만 안겨주고 말았다.”(p.259)

 

실험 초반에 가졌던 장밋빛 전망과 예상은 보기 좋게 날아가 버렸다. 큰 딸 라라는 부모의 역할을 해야 함에도 여전히 철없는 아이에 불과한 남동생 조니와 여전한 잔소리꾼인 엄마로부터 스트레스를 받고 막내 조니는 제대로 된 대장노릇을 하지 못하게 하는 엄마와 아빠가 불만이다. 엄마와 아빠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점에서는 나나 누나가 엄마와 아빠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을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엄마가 짜증을 낼 때가 있잖아. 이제 엄마가 어떤 기분인지 알겠어. 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데 도움이 되었어. 내게 자식이 생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 (p.363)

 

그래도 결국은 더 나은 형태의 역할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 결론이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짧은 시간이 아니지만 결코 길다고만 할 수도 없는 시간이기 때문에 급격하게 바뀌지는 않았지만 평소에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던 가족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사실 책을 읽는 내내 의구심이 계속 생겼다.

 

 

‘과연 한국에서는 가능할까?’

대답은

‘결코 아니다’

였다.

 

 

저자와 아내처럼 시간이 충분하지도 않거니와 라라와 조니처럼 시간이 충분하지도 않다. 한국의 부모와 자식들은 너~무~!! 바쁘다. 할 일이 너무 많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최소한 반 이상 줄이지 않는다면 ‘아이에게 권력을!’이라는 배부른 역할 바꾸기 실험은 요원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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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킨 - 피부색에 감춰진 비밀
니나 자블론스키 지음, 진선미 옮김 / 양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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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피부가 검은 편이다. 남동생은 하얗다. 어릴 때 사진을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오죽하면 동네 친구 녀석은 나와 동생을 가리켜 바둑알의 ‘흰 돌’, ‘검은 돌’이라 했었다.

지난 주 여름휴가를 다녀온 후 나의 피부는 더 검게 되었다. 남동생은 지금도 하얗다.

 

"우리 신체에서 피부만큼 다양하고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은 없다. 그러나 피부를 신체기관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p.8)

"넓이는 약 2제곱미터(약 0.6평), 평균 무게는 4킬로그램이나 된다." (p.9)

 

나도 이 책 「Skin 피부색에 감춰진 비밀」을 읽지 전에는 피부가 중요한 신체기관인지 몰랐다. 뼈나 장기 같은 신체기관은 평소에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구나~’ 생각하지만 피부는 매일, 매순간 보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나는 피부가 신체기관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저 ‘내 피부는 내 동생에 비해 검은 편이다.’ 정도의 인식에 불과했다.

 

"피부는 인체 생물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p.13)

 

만약 피부가 없다면 요즘 같은 불볕·찜통더위에 동반되는 강력한 자외선에 몸의 각 기관은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저자는 인간 피부의 가장 놀라운 특성 중 하나가 털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여기서 털이 없다는 것은 다른 온혈동물들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이 진화를 거듭하면서 털이 없어진 가장 큰 이유는 땀이라고 설명한다. 다른 영장류에 비해서 많은 땀을 흘리는 인간은 털이 없어지는 진화를 하게 된 것이다. 직립보행을 하게 되고 도구와 연장을 사용하게 되면서 털의 부재가 가져올 수 있는 피해를 최소화 했고 이것이 피부색의 다양화를 가져온 결과라 얘기한다.

 

이 책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있고 나 또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인간의 피부색에 대한 저자의 의견이었다.

우리는 피부색이 다른 인종에 대해서는 유독 신경을 쓰면서 ‘왜 우리는 다른 피부색을 가지게 되었을까?’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다. 뭐 돈 되는 일도 아니고 생각해봐야 시원한 답을 내릴 수도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 스타벅스 매장에서 창립 몇 주년을 맞아 모든 음료를 반값으로 판매한 적이 있다. 동료 몇 명과 매장으로 갔는데 줄이 2겹·3겹으로 뒤엉켜 있었다. 그래도 반값이라 하기에 30분을 기다려 평소에 잘 먹지 않는 벤티 크기를 주문했다. 내가 가본 중에 가장 사람이 많았다. 시끄럽고 덥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일순간에 모든 이를 정적에 빠뜨린 사람이 등장했다. 키는 작아도 185cm정도, 몸무게는 적어도 150kg정도가 되어 보이는 흑인아저씨였다. 땀을 소나기처럼 흘리며 등장한 아저씨를 최소한 백 개가 넘는 눈이 일제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정확하게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그 흑인아저씨는 자신에게 쏠린 백 개가 넘는 눈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소나기 수준을 넘어선 호우경보 수준의 땀을 쏟아냈다.

물론, 요즘은 워낙 외국인을 많이 볼 수 있어서 크게 신기하고 낯설 것도 없었는데 덩치도 워낙 크고 흑인 중에서도 아주 피부색이 짙은 흑인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쳐다본 것 같다.

저자는 피부색이 다른 것에 대한 의문에 간단하게 대답한다.

 

[인간이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하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특별한 이유와 신에 의지에 의한 차이가 아니라 인간의 자연에 대한 적응이라 할 수 있다.

 

“일조량이 많은 저위도 지역에서 일조량이 적은 고위도 지역으로 인류가 이주해감에 따라, 순전히 생식과 번식에 유리한 방향으로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피부색이 옅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p.298)

 

또한 인간의 피부색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자외선에 대한 적응이라 주장한다. 위도에 따라 일조량은 물론 노출되는 자외선의 양도 다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인간은 이러한 변화에 따른 자연선택을 결정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피부색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불과 몇 세기 전만 해도 피부색이 다른 것을 신의 저주니, 노예로 타고난 운명이니 하며 같은 인간인 흑인들은 노예로 사고팔았었다. 노예가 해방된 지 수 세기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는 인종차별이 존재한다. 오죽하면 유명한 축구선수도 골세리머니를 하며 “No Racism”이 적힌 티셔츠를 보여주겠나.

 

몇 해 전 모 방송사의 교양프로그램에서 실험을 했다. 백인 남성과 동남아 남성이 지나가는 서울 시민들에게 길을 묻는 설정이었다. 인종·피부색이 다른 것에 따라 반응이 어떨지 조사하는 실험이었다.

실험의 결과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 그대로였다. 백인 남성에게는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던 사람들이 동남아 남성에게는 그렇게 불친절할 수 없었다. (물론, 실험의 한계와 오차는 존재한다)

 

아직도 피부색은 그 사람을 판단하는 유효한 기준이다.

하지만 「Skin 피부색에 감춰진 비밀」을 읽으며 저자의 피부색에 대한 주장을 읽으니 위와 같은 인식이 얼마나 멍청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을 피부색으로 분류하는 방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피부색은 분명히 적응의 결과 이며, 특정 인구집단에서 피부색의 진화는 해당 지역의 환경 조건 -특히 자외선 양- 에 큰 영향을 받는다." (p.132)

 

피부색을 자외선의 양에 대한 적응의 결과로 분석하는 것은 처음 봤다. 그래서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실에서 일어나는 피부에 대한 질병(특히 피부암)과 피부시술에 대한 일부의 언급도 꽤 재미이었다.

 

"오늘날에는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으며, 때로는 선조들의 고향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도 이주하기 때문에 피부가 새로운 지역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피부가 환경 변화를 따라 잡을 시간이 없으며, 새로운 환경에 비해 피부가 너무 옅거나 짙은 경우가 많다." (p.154)

 

우리의 조상 인류는 그 이동과 적응의 기간이 무척 멀고 길었기 때문에 적응하는데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몇 시간 만에 대륙을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의 피부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 서서히 변화하고 진화하면서 선택되어진 피부색과 피부의 특징이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자외선 양이 많아서 짙은 색 피부가 중요한 보호 기능을 수행하는 적도 지역 국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p.217)

"보톡스의 사용은 영장류를 진화시킨 추진력들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p.221)

 

또한 많은 여성들이 화장을 많이 하게 되고 미용시술을 많이 하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얻어진 것들이 균형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선택되고 적응된 피부색임에도 더 옅은 색으로 화장하고 미용용품을 바르고 시술을 하게 됨으로 점점 피부의 균형이 깨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접근도 신선하고 재미있다.

 

너무 많이 맞아 제대로 웃지도 못하는 여자 연예인들을 TV에서 보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가? 로봇처럼 얼굴 근육을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들을 볼 때마다 나까지 불편해진다.

무엇이든 자연스러운 것이 좋은 것이다.

 

억지로 바꾸려 하면 탈이 난다.

 

피부색에 감춰진 비밀이 거창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장 적합한 적응의 결과이고 나의 검은 피부도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적잘한 장치라는 사실에 아주 천천히 잘 적응해 주신 인류의 조상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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