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히틀러 - 건달에서 총통으로

 

[역사의 해석, 정답이 가능해?]

 

아돌프 히틀러, 그를 모르는 이가 있을까. 스탈린과 함께 세계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이자, 학살자로 그의 이름은 끊임없이 거론된다. 수백만 유태인들을 계획적으로 집단 학살한 그의 죄악에 대해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 히틀러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가 꿈꾸었던 세상, 그가 바라던 독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무엇을 그리고 있었을까.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한 번 읽은 후 그대로 책장에 고이 모셔두고 있던 책이다. 그러다 문득 다시 손을 뻗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을 히틀러에 묘사한 어느 예술가의 그림을 본 기억도 잠깐 들었긴 했지만.

 

저자는 이른 바 정식으로 문학을 배운 이가 아닌 것 같았다. 대학도 이공계열을 졸업했고, 특별히 등단을 했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그런 것을 따지고 있는 내 자신이 먼저 우스웠다. 그런 나는 문학 작품 감상 허가증이라도 취득하고 읽었는가.

 

책은 히틀러의 청년 시절부터 시작된다. 가난한 화가이자 건달이었던 히틀러. 삶에 대한 그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었던 젊은 시절. 부패한 권력에 대한 증오와 가족의 행복을 송두리째 앗아갔던 유태인들에 대한 분노를 갖게 되었던 젊은 시절은 훗날 그를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살인마로 만들고 만다.

 

저자는 히틀러의 인간적인 고뇌와 상처를 소개하려 노력했다. 부모의 비참한 죽음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목격한 전쟁의 광기와 무의미성. 그리고 돈이 없고, 권력이 없는 힘없는 국민들만 죽어야 하는 참혹한 현실을 겪으며 히틀러는 점차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뇌하게 된다.

 

이어 그는 양부모와 사랑하는 여인마저 유태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또 자신도 부패한 유태인 사업가에 의해 죽기 직전까지 폭행을 당한다. 훗날 유태인에 대한 그의 증오는 이렇게 아주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는 1차 세계대전 직후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독일 국민들의 고통과, 동시에 점점 커지는 반유태인 정서를 뚜렷이 목격하게 된다. 전쟁으로 모든 국민들이 고통 받고 있을 때에도 유태인들은 무기를 팔고, 권력을 이용해 더 많은 부를 챙기고 있었다. 물론 대다수 유태인들은 힘없고 선량했지만, 독일 사회에서 점점 유태인은 악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었다. 많은 독일 국민들이 나치당에 협력하고 동조하고 추종하게 된 것은 집단적 광기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역사적 근원이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히틀러가 청렴하고 솔선수범하는 정치가의 이미지를 잘 살려, 결국 국가의 권력을 장악했다고 설명한다. 절대 부정한 이익을 취하지 않았으며, 오직 국민들과 함께 겸손한 자세로 정치를 펴나갔다는 것이다. 히틀러와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 독일 경제는 몰라볼 정도로 발전했으며,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다시 일어선 위대한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전 세계에 과시하게 된다. 아우토반과 폭스바겐도 히틀러 시대의 산물이다.

 

물론 그가 절대 권력을 잡은 후에는 다른 양상이 벌어진다. 철저한 독재를 추구하며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결국 또 다른 세계대전을 일으켜 인류의 또 다른 재앙을 불러온 것이다.

 

어떠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물론 히틀러와 스탈린과 같은 명백하고도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이들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는 없다. 영원히 히틀러는 악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든 것에는 그 원인을 제공하는 계기, 배경, 사건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해 가는 과정,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른바 선진국, 승전국들의 파렴치한 행위들, 제국주의 국가들의 죄악상 등 역사적 배경과 맥락을 넓은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히틀러라는 인물이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역사의 해석은 언제나 승자의 몫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규정되고 단정 지어질 수 없다.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다시 태어난다. 히틀러에 대한 평가, 나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는 없겠지만, 당시 독일의 광기와 집단 최면과도 같았던 모습들은 독일을 넘어 세계사적 차원으로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해석에 정답은 없다. 관점만 있을 뿐이다. 《나의 투쟁》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빵과 장미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3 
캐서린 패터슨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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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제가 일하고 있는 잡지 《민족21》에서 〈저자와의 대화〉라는 연재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매달 한 권의 책을 선정하고 그 저자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이지요. 그 중 창원대 이성철 교수님과 이메일 인터뷰를 했는데, 당시 선정한 책이 《영화가 노동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영화로 만나는 15개의 노동이야기’라는 부제가 있는 이 책은 여러 국가들의 노동을 주제로 한 영화들을 소개하며, 그 역사적 맥락과 의미를 짚어주는 꽤 괜찮은 책이었습니다. 서평도 올렸습니다.

 

그때 알게 된 감독이 바로 켄 로치입니다. 노동자 및 서민들의 삶을 유쾌하지만 현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 꽤 있습니다. 매우 멋진 분이더군요. 켄 로치 감독의 영화 중 이 책과 동명의 작품이 있습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비정규직 미화노동자들의 조직화 사업을 다룬 작품입니다.

 

책을 읽으며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게으름으로 아직까지 미뤄만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죠. 그리고는 폭풍 감동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책은 1912년 미국 메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발생한 섬유산업 여성 노동자들의 전설적인 파업을 다루고 있습니다. 미국 노동사에서 ‘빵과 장미의 파업’이라 부르는 이 사건은 헬렌 켈러도 동참했던 역사적 운동이었습니다. 책은 로렌스 토박이 소년 제이크와 이탈리아 이민 노동자의 딸 로사, 이 두 아이들이 바라본 파업의 모습들, 그리고 너무나 아름다운 연대의 과정이 잘 담겨져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이윤이 창출되는 과정에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이익은 상충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혹한 노동조건에서 살인적인 노동을 감내해야 했던 노동자들은, 그러나 정당한 땀의 대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임금삭감 마저 이뤄지자, 생존을 위해 그들은 파업을 선포합니다.

 

그 치열한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공권력에 의해 폭행당하고, 살해당하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인종과 국적을 가진 노동자들은 단결합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우리는 결코 움직이지 않으리!”

 

당시 미국의 노동자들은 연대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그대로 보여줬습니다. 장기간의 파업으로 추위를 이겨낼 땔감, 당장 먹어야 할 빵조차 구하기 힘들어진 상황에서 타 지역의 노동자들은 모금운동을 전개해 식량과 땔감으로 보냈고, 파업 노동자들의 자녀들을 자신의 집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해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마치 부산에서 파업을 전개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대전, 광주, 춘천, 서울 등 전국의 노동자들이 대신 자녀들을 맡아 보호해준 셈입니다. 이러한 연대의 힘이 바로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아닐까요.

 

소설은 행복한 결말을 맺습니다. 제이크와 로사도 다시 희망을 찾게 되지요. 뭉클한 감동으로 책장을 덮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봅니다. 김진숙 동지의 300일이 넘었던 고공투쟁, 지금도 추운 날씨를 버티며 1500일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투쟁.

 

그런데 다른 편에서는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분노와 환멸로 기억되는 이랜드가 미국의 야구구단을 인수한다고 하고, 삼성은 세계에서 가장 나쁜 기업 3위에 선정되고 있습니다.

 

동네 빵집은 대기업 프랜차이즈와 재발 3세 딸들의 고품격(!) 제과점 겸 커피전문점에 의해 문을 닫고 있습니다. 취업하려고 해도 자리가 없고, 있어도 대부분이 비정규직인 현실. 언제 해고되어도 아무 말 못하고 쫓겨나야 하는 현실.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는 쌍용 해고자들의 죽음.

 

지금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들은 더없이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진정한 ‘빵과 장미’를 전해줄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요. 추악한 대기업의 횡포와 정부의 죄악을 언제까지 바라봐야만 할까요.

 

결국 연대의 힘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들이, 대도시 노동자와 지방 노동자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고 요구해야, 세상은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결국 같은 노동자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있는 자들, 썩은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언론을 끊고, 그들의 똘마니 역할을 하고 있는 정당을 거부하며, 그들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정치인들을 몰아내야 할 것입니다. 한미FTA에 찬성표를 던진 정치인들을 끝까지 기억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총선과 대선에서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해야 할 이유입니다.

 

인간은 빵 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장미도 필요합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아름다움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어진 세상은 지옥입니다. 단 1%의 행복을 위해 99%가 착취당하는 세상은 이미 정당성이 사라진, 없어져야 할 지옥일 뿐입니다.

 

눈물겹게 아름다운 노동자들의 연대를 보여준 로렌스의 ‘빵과 장미의 파업’.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든 노동자들의 투쟁과 절규에 눈 감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용산참사의 아픔, 쌍용자동차의 눈물, 이랜드, 홈플러스,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눈물과 죽음을 잊어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깊은 밤, 기린의 말 - 「문학의문학」 대표 작가 작품집 
김연수.박완서 외 지음 / 문학의문학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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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합니다. 제가 약간 유별나다는 사실을. 책을 읽을 때, 상당히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으로 읽는다는 사실을. 남들이 보면 인생 참 피곤하게 산다고 느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어떤 이는 저에게 ‘활자 중독증’이라는 진단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타당하고, 또 어떤 점에서는 과분한 진단입니다. 일단 제가 그런 진단을 받을 만큼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하다고 느끼니까요.

 

먼저 하는 일이 글을 쓰고 읽고 고치고 다시 고치는 직업이기에 글에 대한 묘한 강박증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식당엘 가서도 벽에 붙은, 혹은 메뉴판에 붙은 음식 이름과 설명, 음식의 유래 등등을 읽으면서 띄어쓰기와 오타를 찾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뭡니까, 이게.

 

또 지금은 그나마 상당히 호전됐다고는 하지만, 잡지를 읽을 때면 표지부터 시작해서, 광고 하나하나 목차 하나하나를 전부 읽고 나서야 다음 페이지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양심적으로 광고는 읽지 않습니다만, 이것도 뭡니까.

 

때문에 때로는 문장을 읽는 것이 아닌 텍스트를 읽어나가고 있는 저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상당히 안 좋은 부작용인 셈이죠. 하지만, 분명 단언컨대 적어도 소설을 읽을 때에는 다른 모드로 들어갑니다.

 

그 다른 모드는 다름 아닌 ‘받아들임’입니다. 무언가 책에서 잘못되고 부족하고 어색한 부분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글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뭐, 어차피 제가 문학작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는 깜냥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소설을 그런 불순한 자세로 읽으면 천벌을 받는다는 어느 소설가의 준엄한 경고(!)가 기억나기 때문에, 그냥 있는 그대로 읽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깊은 밤, 기린의 말》은 한 문장, 한 편을 그야말로 아껴가며 읽은 책입니다. 수록된 작품들도 그렇거니와, 작가들의 내공과 깊이가 절로 느껴지는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우리 곁에 없는 박완서, 이청준 작가의 작품과 김연수, 이명랑 등 비교적 젊은 작가, 그리고 최일남, 윤후명과 같은 깊은 연륜을 가진 작가의 작품까지. 글들의 성찬이었습니다.

 

작품들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매우 불순한 행위라 사료되는 까닭에 담지 않겠습니다. 다만 각 작품에서 받은 느낌이랄까요. 그 정도는 말해도 되겠지요?

 

김연수의 〈깊은 밤, 기린의 말〉은 분명 슬픈 이야기임이 분명한데도 어떤 발랄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뭐라고 할까, 단어들이 톡톡 튀더라고요. 《대책없이 해피엔딩》을 읽은 후여서 그런지, 일단 인상은 좋습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는 중년, 노년 문학의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습니다. 왠지 범접할 수 없는 삶의 연륜도 느껴지고요. 쓸쓸하면서도 무덤덤함이 저는 참 좋습니다. 최근에 선생님의 마지막 작품집 《기나긴 하루》를 아껴두고 있습니다.

 

이청준 님의 〈이상한 선물〉도 매우 즐거운 소설 읽기였습니다. 아직 선생님의 작품을 많이 읽은 편은 아니지만, 선생님 특유의 아련함이 참 좋습니다. 이나미 작가의 〈마디〉, 권지예 작가의 〈퍼즐〉도 인상 깊은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가장 감동을 느낀 작품은 최일남 작가의 〈국화 밑에서〉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예전부터 이런 문장, 문체, 쓸쓸함을 참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깊은 삶의 성찰과 농담이 어우러지는 모습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작가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승우의 〈한 구레네 사람의 수기〉, 윤후명의 〈소금창고〉, 조경란의 〈파종〉, 이명랑의 〈제삿날〉 모두 즐거운 소설 읽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전 여전히 소설은 먼저 읽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 안에 담겨진 내용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답고 애정하다 해도 재미가 담겨 있지 못하면 결국 다음 페이지를 넘길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런 저의 어리석고 독단적인 기준으로 보면 이 책은 상당히 성공한 것이 아닐까, 이 역시 혼자 어리석게 판단해 봅니다. 그렇습니다. 소설 읽기는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대책 없이 해피엔딩 - 김연수 김중혁 대꾸 에세이 
김연수.김중혁 지음 / 씨네21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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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번 설 연휴 때, 아주 오랜만에 영화를 몇 편 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를 나름 좋아한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그리 많이 볼 수 없었거든요. 뭐, 시간이 있음 순서대로 보던 미드나 몇 편 보았고, 또 사람이 어느 때는 영화에 집중하기조차 버거울 때가 있잖아요. 제가 딱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연휴에 모처럼 시간이 생겨서 몇 편은 일부러, 몇 편은 텔레비전을 켜니까 나와서, 그렇게 봤습니다. 나름대로 편안한 연휴였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연휴가 시작될 즈음 읽은 이 책은 뭐랄까, 부럽기도 하고, 또 약간은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킨 책이었습니다. 일단 두 작가의 오랜 우정이 부러웠고, 또 그들의 글 솜씨에 다시 부러웠죠.

 

하지만 우정이라면 저도 뭐 그렇게 꿀리지는 않습니다. 비록 많지는 않지만 나름 십 수 년을 함께 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뭐 그렇게 정답고 살가운 표현은 안 하지만(남자끼리 그러는 건 좀) 말을 안 해도 대충 서로 분위기 파악을 할 수 있는(거의 능력자 수준인가요)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서로 주고받는 칼럼이라, 이건 좀 색다른 것 같았습니다. 이 부분은 솔직히 부러웠습니다. 뭐 스포츠나 게임, 음주와 가무로 서로 자웅을 겨루거나 우정을 뽐내는 것은 해봤습니다만, 글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고, 때로는 유치찬란하게 서로를 공격하는 모습. 요건 왠지 아름답고 거룩해 보였어요.

 

게다가 그 중심의 영화가 있다…. 나름 참신하면서도 나쁘지 않은 기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양 김씨와 같은 글 솜씨가 있는 분들이어야 좋은 그림이 그려지겠죠.

 

영화는 누구나 즐겨보지만, 그 ‘누구나’는 모두 저마다의 눈으로, 저마다의 생각을 하며 영화를 보기 때문에, 사실 영화는 지구상의 인간의 수만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고, 또 해석되고 있습니다. 무슨 교과서처럼 이 영화는 이렇게 보고 해석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이들도 있지만, 다만 부르짖을 따름이죠. 그걸 누가 강요할 수 있습니까.

 

때문에 두 김씨가 한 영화를 보고 난 뒤에 느낀 감정은 어느 부분은 같고, 또 어느 부분은 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점을 바라보는 게 쏠쏠한 재미를 주었고요. 저는 아예 다른 방향으로 본 영화들도 있었다는 점도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이번 연휴 때 본 영화 중 하나는 그나마 최근에 개봉했던 것으로 기억하는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제목이 맞나요) 이었습니다. 인간의 의도된 실수로 태어난 침팬지 ‘시저’가 점차 각성하여 인간과 그야말로 ‘맞짱’을 뜬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동족 원숭이, 고릴라, 침팬지들을 규합하고 선동해서 말이죠.

 

제목부터가 ‘시작’이니 앞으로 후속편들이 나올 것이란 예상을 해봅니다. 그리고 그때는 더욱 스펙터클한 액션과 거대한 스케일로 압도하겠지요. 뭐 대충 그럴 겁니다.

 

그런데 제가 영화에서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은 시저의 눈빛이 변화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시저는 자신을 키워준 인간에게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고, 의지합니다. 하지만 점차 성장하는 과정(이른바 머리가 커지는 것이지요)에서 시저는 자신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다른’ 침팬지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미가 그 과정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도.

 

점차 변해가는 시저의 눈을 바라보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또 하나의 ‘자기반성 강요용’ 영화라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을 매도하고, 그들의 도전을 위험천만한 ‘범죄’로 매도하고, 그 과정에서 꼭 지구를 뒤흔들만한 사건이 터지고, 결국 인간은 ‘함부로 자연의 법칙을 건들면 안 된다’는 숭고한 교훈을 주는 영화들. 이젠 좀 식상하지 않나요.

 

하지만 여전히 이런 부류의 영화들은 만들어지고 또 소비됩니다. 이는 인간 죄의식에 기반한 반성일까요, 반성하는 척 하는 것일까요. 아무 생각 없이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도대체 뭘까요?

 

영화는 단지 영화일 수 없습니다. 그 내용이 아무리 안드로메다까지 가는 허황된 것이라도 말이죠. 현실의 반영, 희망, 반성, 촉구, 이데올로기 등 모든 것이 혼합된 그것이 바로 영화입니다.

 

이러한 영화를 주제로 떠드는 두 작가의 대화는 즐겁습니다. 때론 사소한 듯 보이지만, 찔끔 눈물이 날 만큼 치명적인 영화도 있고, 당최 감독의 면상을 보고 싶게 만드는 영화들도 있습니다. 그 사이를 왕복하며 두 작가가 쏟아내는 주저리 주저리는 지극히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물론 글 솜씨로 어디 가서 주눅 들지 않을 정도의 필력을 가진 두 분이니, 글들이 무척 재미있다는 장점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영화를 통해 삶을 성찰하고, 거대한 담론들이 왔다갔다하기도 하지만, 때론 사소함에 극치를 달리는 모습도 즐거웠습니다. 하긴, 세상에 거대한 것이, 사소한 것이 따로 있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제 나이 사십을 갓 넘기신 두 김씨의 앞날이 더욱 기대됩니다. 뭐 부담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바쁘거든요. 두 분의 미래를 유심히 지켜보느라 제 미래에 눈 감을 수는 없잖아요. 뭐 대충 가끔 들여다 볼 뿐입니다.

 

즐거운 글, 그리고 페이지 넘기는 손가락이 부끄럽지 않을, 그런 글들을 앞으로도 심심찮게 써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저도 영화를 될 수 있는 한 더 자주 봐야겠다는 생각, 더 글을 재미지게 써야겠다는 생각,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이 공부하고 잔머리를 굴려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주 즐거운 책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이상.

 



 
 
 
중국은 북한을 멈출 수 있을 것인가 - 중국과 북한, 애증의 60년을 추적한다 
고미 요우지 지음, 박종철.정은이 옮김 / 코인미디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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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관계는 남북관계와 한반도 문제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더욱이 MB정권 들어 급속도로 경색된 남북관계의 현실에서, 북중 관계를 세심히, 제대로 살펴보는 것은 더더욱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점이 북중 관계를 제대로 보는 데 장애로 작용합니다. 양국 관계가 워낙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기도 하지만, 현실과 희망을 혼동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북과 관련된 연구에 있어 일본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꽤 체계적인 연구가 이뤄지는 것 같다가도, 언론이나 정치인들의 언행을 보면 아주 기초적인 지식조차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아울러 언제나 북 문제는 일본 보수 우익 세력의 편리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는 점도 있습니다.

 

저자는 언론인으로서 오랫동안 직접 보고 들은 것들을 정리해 나름 북중 관계를 진단하고 전망합니다. 오랫동안 북중 문제에 천착해 왔다는 점을 책의 여러 곳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본 언론보다 상대적으로 객관적이고, 비교적 상세하다는 평가를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책은 일본인이 바라본 한반도, 북중 관계에서 크게 탈피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인용 자료들의 객관성이 상당히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고, 이른바 ‘들은 이야기’들도 신뢰성을 주기 힘든 부분이 많았습니다. 또한 이미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부분들을 여전히 사실인양 주장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일본은 몇 차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북과 수교를 맺지 못했습니다. 일본이 가지고 있는 자체적 한계 탓도 있지만, 북을 여전히 잘 알지 못한다는 부분도 일정 작용할 것입니다. 일본 내 수구보수 세력의 만만치 않은 힘과 영향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일본은 북과 관계개선을 추진해야 할 상황에 처할 것입니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일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한반도에 대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는 일본에게 북중 문제는 매우 민감하면서도 관심의 대상입니다. 양국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일본에게는 유리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학자와 언론인을 막론하고 경계해야 할 첫 번째는 바로 ‘이상과 현실’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상황을 해석해버리면 올바로 현실을 직시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될 것’과 ‘그렇게 된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현재 저자는 북중 관계가 과거의 혈맹에서, 철저히 이해에 기반한 일반적 관계로 격하됐다고 분석합니다. 2차례의 북핵 실험 당시 중국의 반응, 혁명 1세대인 북중 지도자들의 퇴장에 따른 유대 관계 약화, 한국, 미국, 러시아 등 주변 국가와의 영향 등으로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서로 필요성에 의해 관계를 맺고 있지만, 과거처럼 단단한 혈맹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일견 타당한 측면이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국가도 자국의 이익이 되지 않는 외교관계를 수립하지는 않습니다. 중국 역시 북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는 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일방적으로 해석되어선 곤란합니다. 국가 대 국가의 관계, 당대 당의 관계, 지도자 간의 관계. 이렇게 세 가지 측면을 동시에 살펴야 비로소 북중 관계의 미래가 보입니다.

 

그리고 현재 북중 관계는 어느 때보다 긴밀하고 원활합니다. 김정일 이후 김정은 체제가 빠르게 안정화된 것도 중국의 신속한 대응이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중국은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호들갑을 떨었던 한국 정부를 자제시키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남북관계는 다시 좋아질 것입니다. 향후 한국에서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MB정부가 망친 현 남북관계를 복원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다시 남북관계가 호전된다면 지금의 북중 관계 역시 일정한 변화의 요구에 직면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동아시아 정세 변화에 높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분단된 한반도에 아직도 많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강대국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다 슬기로워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전반적으로 내용에 대해선 아쉬움이 많은 책입니다. 하지만 북중 관계와 동북아 정세에 대해 한번쯤 고민의 필요성을 준다는 점에선 의미가 있는 책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엔 나쁘지 않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특정 인물이나 사건의 사실 여부에 대해선 각자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