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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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글은 존재를 고정하지 않는다. 상처와 고통을 정직하게 직시하고 글을 쓰고 나면, 그다음을 살아갈 힘을 갖게 된다고 나는 믿는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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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본 듯 반가운 손님









 타인을 공감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을 공감하는 일이다. 자신이 공감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 누구든 타인을 공감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문제가 자극돼 떠오르고 뒤섞이면 혼란에 빠진다. 그때의 혼란은 자기 치유와 내면의 성숙을 위한 통과 의례 같은 반가운 혼란이다. 어떤 종류이든 혼란은 힘들다. 에너지 소모가 극심해서다. 그럼에도 나에 대한 혼란은 반가운 손님이다. 꽃 본 듯 반겨야 한다. 그 혼란에 주목하고 집중해야 한다.
-당신이 옳다, 274p


 <당신이 옳다>는 정혜신 선생님이 세상에 더 많은 '다정한 전사'들이 태어나고, 그 전사들이 자기 자신을 먼저 지킬 수 있기를 바라며 쓴 책이었다. 그래, 그래도 니가 그렇다하면 다 옳다~ 고 온 몸으로 받아들여질거라 기대하고 들었던 책. 이런 책을 보는 게 부끄럽고 창피해 오랫동안 목록에 담지 않고 머리속에만 기억해둔 책. 나는 나보다 더 힘든 사람에게 공감하고 살 힘을 주고 싶었던 게 아닌데. 나는 지금 내가 좀 살아나야겠는데. 


 참 기가 막히는 삶들 앞에 선 선생님 얘기를 글로 들으며 한장 한장 지날수록 아주 느리게 책장을 넘겼다. 꾸밈없이 오직 쓰고자 한 의도만을 날것 그대로 담아 전달하고자 한 글.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자책할 만한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같은 말도 빠뜨림 없이 반복하는 글. 남 이야기네 거리를 두고 갑자기 흐르는 눈물에 몇 번이나 당황했다. 자식이 없는 나, 부모에게 불만이 없는 나와 상관없는 부모가 겪은 자녀와의 관계, 다 큰 자녀가 털어놓은 부모와의 관계였는데 눈물은 해도 자주 났다. 천천히 더 천천히 읽어가던 중간쯤에야 단단히 세운 방어기제에 선생님의 글이 문을 달아주고 문고리를 돌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거의 모든 쪽에 택을 달다 다 읽고 정리하기 힘들 것 같아 천천히 타이핑하고 또 읽고 타이핑하고 한 게 도움이 된 것 같다.


 상담자가 되고 싶은 사람을 위한 글이네ㅡ나도 당장 치유상담해주고 싶다 누구 없을까ㅡ아 근데 이 부분은 나도 해당되는 거 같다ㅡ내 안에도 공감과 인정이 필요한 부분을 찾아야겠다ㅡ잘 모르겠는데ㅡ아 보면서 눈물이 흘렀던 부분들이 힌트일 것 같다ㅡ스스로 생각하면서 찾아보는 일은 정확하겠지만 힘들고 오래 걸릴 것 같다ㅡ다빈도 상처들 목록이 있으면 보면서 찾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점점 달라져갔다. 마지막 에필로그까지 선생님은 책으로 전하려던 마음을 다 옮겼고, 내가 해야 할 부분은 남았다. 

 1. 눈물났던 힌트들을 주워담기 

 2. 다른 사람 이야기에서 비추어 힌트들을 더 수집하기 

 3. 공감의 언어 주머니 만들기

 

 인정하지 못하는 타입은 깨달음이 늦다. 공명이 느껴지는 남의 사례에서 헤매야 한다. 는 바로 나.



 같이 보려고 아껴뒀던 <시녀 이야기>를 읽었다. 넷이서 함께 팔을 넓게 벌린 페미니즘 보고 놀기. 사람이 넷이라 하나하나가 핵심 멤버다. 핵심멤버가 출산을 준비하게 되면서 잠시 쉬어간다. 나도 초여름부터 늦여름까지 몸이 고장나서 겸사 조금 일찍 쉬게 되었다. 끝내지 않고 멈춰둔 거지만 한참 지나야 가능하니 그동안 혼자 공부를 이어간다. 

 

 나는 전에 예술을 표현하는 말로 00의 실험, 00의 탐구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얼마전 이수지의 그림책을 보며 00의 탐구라는 말을 벼락맞은 듯 온전하게 이해하게 됐다. 읽고 한참 시간이 지나서 소설에서의 실험이란 이런 것이구나 깨달음의 형태를 구체화해줬던 건 <야자나무 도적>. 역대 작가들의 수작만을 모은 점. 단편이라 아이디어가 압축되어 펼쳐진 점. 그걸 한데 뭉쳐놓은 점. 마지막으로 페미니즘과 SF라는 고의가 폭발하는 두 개 장르의 교차점인 점. 때문 같다. 오랫동안 읽어온 사랑하는 SF가 현재의 대안과 미래의 실험이라는 칼 세이건의 말에 그치그치 내가 그래서 본능적으로 좋아했나보다 역시 난 최고야 말로 할줄 몰랐지만 좋아한거야 내 마음이 이거였어 하고 이해한 뒤로. 시간이 흐르면서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일부 변색되고 하지만 그 과정과 지금 모두가 여성주의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데 둘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글이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지겠지만, SF와 페미니즘 글은 특히 더 목적 달성을 위해 내달리는 경주마 같은 느낌. 노골적이고 반복되는 주제의 묶음에서 실험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애호하는 귀한 책을 본 독자는 슬그머니 책 편을 들고, 그러다 보면 아리송해질 때가 있다. <야자나무 도적>은 덜했지만 마거릿 애트우드의 책을 볼 때 특히 그렇다. 아 <밀크맨>을 볼 때도 그랬다. 이게 그니까 페미니즘이 담겨서가 아니라 작품 자체로 치밀하게 대단해서 좋다 고 말하고 싶다. 근데 그럼 또 맨눈으로 이 작품을 봤을 때 결정적으로 좋은 두 가지 점 중 하나를 의도적으로 가리고 숨긴 게 된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추천사는 세가지로 나뉜다.

 - 주제에 맞게 배열된 작품들은 각각의 작품을 가장 선명하게 조명해내는 도발적이고 극적인 배치를 통해 서로 흘러들고 또 반발한다. - 퍼블리셔스 위클리

 - SF 소설이 가진 남다른 정치적 힘을 보여주는 꼭 필요한, 잘 가려 뽑은 선집 - 커커스 리뷰

 -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우리가 원했던 바로 그 일을 해낸다. 진부한 설정들을 찢어발기고, 젠더와 그 함의에 의문을 던지고, 풍자와 유머와 사회적 징후와 규정들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분석을 동반한 의도적 무지를 이용하여 정체성을 들여다본다. - 마베쉬 무라드(토르닷컴)

 치밀하게 대단하게 좋다는 1번 추천사. 장르적 성공에 대한 2번 추천사. 1+2를 잘 섞은 3번 추천사. 나는 참을성있게 1번 타입으로 말하고 싶고, 팬심을 담아 절절하게 2번 타입으로 말하고 싶고, 능력만 된다면 3번 타입으로 쿨한척 절절하게 말하고 싶다.


 싶었다. <시녀 이야기>는 

① 회상은 손쉽게 활자 위에서 이미지를 상영한다. 건조하게 그려진 끔찍함은 효과적이다. 액자식 구성은 거리감 주기와 설명 덧붙이기를 모두 해결한다. 현실인듯 미래인듯 그 경계에서 춤을 추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걸작.

② 마거릿 애트우드는 미쳤다. 숨막히는 피범벅 디스토피아가 나타났다. 다음 이야기는 34년 뒤에. 천천히 태어나서 행운이다.

③ ...

 

 그녀는 개수대로 가서 수도꼭지 밑에 손을 대는 둥 마는 둥 하더니 행주에 손을 닦는다. 행주는 하얀 바탕에 파란 줄무늬가 있다. 행주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가끔 이렇게 문득 비치는 정상적 삶의 흔적이 매복하고 있던 병사처럼 옆에서 나를 덮칠 때가 있다. 평범한 것들, 일상적인 것들, 세찬 발길질처럼 과거를 환기시키는 것들. 문맥에서 떨어져 나온 행주 한 장을 보며 나는 그만 헉 하고 숨을 멈춘다.                                      -시녀 이야기, 87p


 산책을 하다 그만 헉 하고. 시녀 이야기에 당신이 옳다를 포개 읽는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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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공감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을 공감하는 일이다. 자신이 공감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 누구든 타인을 공감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문제가 자극돼 떠오르고 뒤섞이면 혼란에 빠진다. 그때의 혼란은 자기 치유와 내면의 성숙을 위한 통과의례 같은 반가운 혼란이다. 어떤 종류이든 혼란은 힘들다. 에너지 소모가 극심해서다. 그럼에도 나에 대한 혼란은 반가운손님이다. 꽃 본 듯 반겨야한다. 그 혼란에 주목하고 집중해야 한다.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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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이야기라도 털어놓다 보면, 적어도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기 있어서 내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구체적인 사실로 믿을 수 있다. 이 이야기를 당신한테 털어놓음으로써, 당신이 존재할 것을 의지로 명하는 바이다. 나는 이야기한다. 고로 당신은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계속할 생각이다. 그래서 스스로 견뎌낼 작정이다. 이제부터 이야기할 부분은 결코 당신의 마음에 들 리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착하게 굴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무엇 하나 빼먹거나 생략하지는 않으려 한다. 아무튼 당신은 이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어왔고, 내가 빠뜨린 이야기들, 별 건 아니라도 진실을 내포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들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 P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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