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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전후 유럽경제
찰스 페인스틴 & 피터 테민 외 1인 지음, 양동휴 외 2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1년 1월
평점 :
대공황의 원인은 1차대전의 충격 때문이엇다고 이책의 저자들은 말한다. 두 번의 대전 모두 전비지출이 GDP의 반 이상이었고 막대한 파괴가 있었다. 그러나 2차대전의 충격은 더 컸는데 왜 2차대전 이후엔 전무후무한 황금기가 왔고 1차대전 이후엔 대공황이라는 재앙이 왔는가? 이책의 질문이다. 저자들은 전쟁의 충격에 대한 대응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사상최초의 총력전이었던 1차대전의 결과 세계경제의 수요와 공급 질서가 교란되었다. 먼저 전쟁준비로 동원된 산업의 생산설비가 폭증된 상태였다. 그러나 전쟁수요가 사라지면서 전시에 증설된 설비는 과잉설비가 된다.
또 다른 문제는 전쟁기간 동안 미국이나 일본과 같이 전장에서 비켜있던 나라들이 유럽의 시장을 잠식해들어가 전쟁이 끝났을 때는 시장 자체가 줄어 있었다.
그러나 전장에 대규모로 징집되었던 “남자들은 참호 속에서 전투하는 동안 전례 없던 다양한 종류의 대중선동에 노출되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다수의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방법을 습득햇다. 종전 후 지배계급들이 대중운동의 실체를 무시하고 과거의 안이한 엘리트 정치로 복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햇다.” 그 결과 노동계급의 과격화, 노동운동의 확대가 있었다. 줄어든 수요에 공급이 조정되기는 어려웠다는 말이다.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예산의 폭증이었다. 급진화된 요구에 따라 사회보장비, 실업수당이 예산에 더해진데다 전후복구비용이 얹혀졌지만 세입이 늘어날 길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전시예산으로 풀린 막대한 통화량에 적자예산이 더해졌다.
예를 들어 전후 독일을 초토화시킨 초인플레이션을 촉발한 것은 지폐의 과잉발행이엇고 그 이면에는 거액의 재정적자가 있었다. “문제의 핵심은 정부지출의 대폭 증가에 있었다. 그리고 정부지출 증가는 전쟁 기간 동안 차입에 크게 의존한 것과 전후 경제, 사회적 프로그램들이 커다란 규모의 지출을 필요로 한데서 비롯되었다. 정당들은 힘이 약했기 때문에 이러한 지출 압력을 막아낼 수 없었다. 양쪽 이해당사자들은 완전히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출에 필요한 세금 부담이 노동과 자본에 어떻게 할당되어야 하느냐에 대해 어떤 합의도 이룰 수 없었다. 따라서 지폐를 인쇄하는 것만이 그런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적어도 처음에는 많은 대립적 사회집단들이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비용보다는 이익이 더 크다고 주장 할 수 있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패전국의 초인플레이션은 극단적인 예이지만 당시 전쟁을 치룬 모든 나라에서 인플레이션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본위제로 돌아간 것이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금본위제로 복귀한다는 결정은 통화를 안정시켜 인플레이션을 잡으면서 환율도 안정시켜 전전처럼 무역질서를 회복하여 전전의 번영으로 돌아가려는 의도였다.
“19세기말은 금본위제를 바탕으로 하는 국제지불체계가 상대적으로 제 구실을 하던 시키였다. 런던은 안정화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필요한 경우 서로 협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노동과 자본이 대규모로 이동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생산요소는 국제적으로 거의 완전히 자유롭게 이동하였다. 이것이 19세기의 국제경제질서였다.”
금본위제로 인플레는 잡힌다. 문제는 금본위제가 전쟁의 충격을 증폭했다는 것이다. 20년대 전반기의 불황은 인플레 때문만이 아니라 전쟁의 충격으로 공급 초과상태인 시장상황 덕분이기도 했다. 금본위제는 공급초과로 인한 디플레이션 상태를 더 악화시켜 부족한 수요를 더 줄여버렸다.
“전전 평가 수준에서 금본위제로 조기 복귀하기 위해 디플레이션 조치를 위했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성장이 제한되었다. 그러한 정책을 달성하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높은 이자율은 투자를 위축시키고 생산확대를 방해했다. 그리고 통화의 과대평사로 수입품은 더욱 저렴해지고 수출품의 경쟁력은 약화되었다ㅓ. 물가 하락으로 전시와 전쟁 직후 정부와 민간 기업이 진 대규모 부채의 이자부담은 온전히 유지되었다.”
“1920년대 말부터 유럽과 세계 대부분 지역은 더욱 빠르게 대공황의 수렁으로 빠져 들었다. 계속되는 은행위기, 팔리지 않는 식료품재고의 증가, 수출시장의 붕괴, 버려진 공장, 그리고 일자리나 구호자금을 절망적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의 점점 길어지는 행렬 앞에서 은행가, 정치가, 기업인, 농민 모두 무기력하게만 보였다.”
저자들은 공황으로부터 탈출하려면 금본위제의 포기만이 유일했다고 말한다. 금본위제를 일찌기감치 포기한 영국은 가장 먼저 공황에서 탈출했다. 금본위제에서 어느정도 벗어났느냐에 따라 회복속도와 정도가 결정되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저자들은 전후의 디플레이션이 대공황으로 악화된 원인을 4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가장 근본적으로 전쟁의 충격이 세계시장에 구조적 불균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구조적 불균형은 전전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시절에는 제대로 작동했던 금본위제와는 맞지 않는 환경을 만들었다.
둘째 금본위제는 본질적으로 국제시스템이다. 그러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시스템의 지휘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전후 “런던은 더 이상 아니며 워싱턴은 아직 멀었다.” 말처럼 영국은 전전과 같은 헤게몬의 역할을 맡을 능력이 없었고 그런 능력이 되는 미국은 그럴 의지가 없었다. “리더십 부족의 구체적인 경제적인 함의는 국제적 최종대부자로 행동함으로써 전세계 금융환경을 안정시킬 의사와 능력을 함께 갖춘 나라가 없었다는 것이다.”
셋째 미국, 양국, 프랑스, 독일이 국제적으로 협력하지도 않았고 그들간에 정책 조정에도 실패햇다. 서로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며 제한된 양의 통화용 금을 확보하려 했기 때문에 국제수지가 적자인 나라 뿐 아니라 흑자인 나라까지 통화긴축정책을 쓰게 만들었고 그 결과 디플레이션 압력이 가중되었다. 이기적인 협력 부재는 대공황이 터지고 나서도 사태를 더욱 악화시켜 국제통화체계를 해체시켰고 무역이 붕괴되면서 대공황을 더욱 심화시키고 장기화시켯다.
넷째 전후의 구조적 불균형과는 어울리지 않는 금분위제에 집착한 금융 이데올로기를 지적한다.
그러면 왜 2차대전의 결과는 1차대전과 달랐는가? 저자들은 대공황의 교훈이 위에서 열거한 4가지 조건을 뒤집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2차대전의 전후 처리 가운데 국제적 부분은 전간기를 지배햇던 조건들을 뒤집으려는 미국과 영국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1930년대의 쓰라린 교훈이 생생히 기억되엇다. 이 때의 목표는 완전히 다른 국제경제관계의 틀, 즉 각국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상호 이익을 위해 협조적으로 무역과 투자활동을 하도록 함으로써 국내 경제활동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틀을 만드는 것이엇다. 그러한 협력으로 얻을 경제적 이익은 세계평화 증진에도 기여하리라는 믿음에 의해 증폭되엇다.”
“미국은 현명하게도 베르사이유 이후 자신들이 견지했던 태도에서 벗어나 번영에 이를 다리 역할을 할 책임을 스스로 인식햇다. 원조와 차관 제공 조건에 관한 협상에서 약간의 마찰은 불가피햇다. 그러나 전시채무와 배상금에 관해 1918년 이후에 겪었던 갈등과는 엄청난 대조를 이루었다.”
“20세기 유럽경제사에 관한 우리의 연구에서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 중의 하나는 성장과 번영은 다자간 무역, 조절된 호나율의 유연성, 국제금융협력의 환경이 존재하는 시기에 달성되지 반대로 관세장벽, 무역전쟁, 금융의 경직성, 갈등적 통화지역 등이 존재할 때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