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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기억 비평의 자리 - 프리드리히 횔덜린/요한 페터 헤벨/고트프리트 켈러/카를 크라우스/마르셀 프루스트/폴 발레리/니콜라이 레스코프 외 ㅣ 발터 벤야민 선집 9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12년 12월
평점 :
집에 오는 길. 자주 보이는 고양이를 봤다. 피부병이라도 앓고 있는지 털이 흉하게 숭숭 솟은 노랑+하양 고양이다. 털이 흉하고 얼굴도 좀 지저분해서 한 번 불러본다거나 쓰다듬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 같은 건 전혀 들지 않는다. 뭔가 존재 자체가 슬프달까... 녀석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근데 자주 눈에 띈다. 오늘처럼 추운 날도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슬금슬금 지하주차장 쪽으로 사라진다. 털도 흉하고 못생긴데다 날도 무지막지하게 춥고 당연히 먹을 것도 없을 터인데 움직이는 태가 자못 태연하다. 녀석은 이 혹독한 세상을 그런 태도로 살고 있는 거다. 그게 나에겐 좀 위안이 된다.
워낙에 추운 날씨다보니 길고양이들이 걱정된다. 내가 뭘 해줄 것도 아니면서 걱정만 한다. 길고양이들이 길에 죽어 있는 걸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고양이는 어디서 죽는 걸까? 처음 고양이를 키울 때부터 나는 죽음을 걱정했다. 허클베리 핀 같은 미국 장난꾸러기들은 죽은 고양이를 장난감 삼아 잘도 놀지만, 죽은 고양이를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결국 자기중심적인 걱정이고, 자기중심적인 위안이다.
고양이는 죽을 때가 되면 집을 나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가서 죽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을 듣고 좀 안심했는데, 그러는 내가 실망스러웠다.
요 4-5년 사이 고향집에 내려가면 엄마가 반복해서 하는 이야기가 있다. 친가 외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해서 집안 어르신들 임종을 지킨 이야기다. 돌아가시기 전에 그분들이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그분들에게 엄마가 무슨 말을 걸었고 어떻게 수발을 들었는지, 그에 대해 그분들이 어떤 반응을 했는지, 다른 자녀들과 친척들 태도와 반응은 어땠는지, 전체적 분위기는 어땠는지 등등을 두서없이 이야기한다. 처음 대화를 시작할 때는 분명 다른 주제(예를 들면 내 결혼)였는데, 엄마의 이야기는 마치 깔때기처럼 언제나 임종 이야기로 수렴되곤 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벌써 21년 전 일인데, 엄마의 이야기는 (두서는 없지만) 생생한 디테일들로 가득 차 있다. 나로선 알 수도 없고, 사실 별 관심도 없는 디테일들. 처음 한 3년 동안은 두서도 없고 반복되는 이야기에 짜증이 났다. '왜 이런 얘기를 나한테 늘어놓는 걸까. 작년에도 들었던 똑같은 얘긴데.' 이런 생각들을 했다. 재작년쯤부터는 등장 인물도 익숙해지고 디테일에도 친숙해져서 귀기울여 듣게 됐다. 올해도 집에 내려가면 여느 때처럼 임종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려나.
벤야민의 에세이 <이야기꾼>을 읽었다. 현대인의 생활과 의식 세계에서 죽음이 밀려나고 있다는 논의가 눈에 띄었다. 익숙한 논의다. 근데 벤야민은 이 논의를 '이야기'와 연결시킨다. 인상적인 부분을 발췌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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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죽는다는 것은 각 개인의 삶에서 공적인 과정이었고 또 가장 전범적인 과정이었다. (사람들이 활짝 열린 죽은 사람의 집 대문을 통해 몰려들면서 임종의 침대가 왕좌로 변하는 중세의 그림들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근세가 경과하면서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각 세계에서 점점 밀려나게 되었다. 옛날에는 사람이 죽어 나간 적이 없는 집이나 방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오늘날 시민들은 한 번도 죽음을 접한 적이 없는 공간, 즉 영원성이 거주하지 않는 일시적 삶의 공간에 살고 있고, 종말이 가까워지면 그들은 상속자들에 의해 요양소나 병원에 옮겨져 차곡차곡 안치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가 살아온 삶이 임종에 이른 사람에게서 비로소 전수될 수 있는 형태를 취한다는 점이다. 삶이 마감되는 순간에 인간의 내면에서 일련의 이미지들이―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마주쳤던 자기 자신의 모습들로 이루어진 이미지들이一떠오르듯이, 돌연 그의 표정과 시선에서 잊을 수 없는 무엇인가가 떠올라 그 사람에 관한 모든 것에 권위를 부여하게 된다. 제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도 죽음의 순간에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해 그러한 권위를 갖는다. 이야기의 기원에는 바로 이러한 권위가 있다." (433-434)
20160125
#막독16기 #반항! / 네 번째 책 (니콜라이 레스코프, <왼손잡이>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