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 - 상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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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眞相)’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어 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사건의 진상을 버거워하기도 한다. 우리들 각자의 주변에는 진상이 밝혀졌으면 하는 일도 많지만 굳이 진상을 알고 싶지 않은 일들도 많다. 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비밀과 오해로 둘러싸인 어떤 불합리한 사건이 있다. 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수반한다. “밝혀진 진상을 감당할 용기가 내게 있는가?”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 오해를 푸는 과정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밀과 오해가 없는 인생은 없다. 겉으로 내보이는 나의 상()은 그런 비밀과 오해를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다. (로맹 가리의 소설 제목이 보여주듯) ‘가면의 생인 것이다. 하지만 이 가면을 벗을 수 있는 것일까? 가면 뒤의 진상-진실은 존재하는 것일까?

 

 

그때 오고간 말들은 형이나 저나 흥분한 상태에서 뱉은 거였어요.”

그러냐? 내가 보기에는 본심 같은데.”

본심이란 것도 다 허상이죠.

오호? 재미난 말을 하는군.

속에 담고 있을 때는 이것이 바로 진짜 자기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입 밖에 내는 순간부터 이상해지죠. 본심이라 믿고 싶은 생각만 남아서 고집이 됩니다. 제가 그랬듯이 아마 형도 그랬겠죠.”

뭐든 규정을 지어 버리면 거기에 미처 담기지 못하는 부분이 남게 마련이다. (, 481)

 

 

우리들 각자는 ‘이거야 말로 나의 진짜 모습이라 여기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상을 품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스스로에 의해 왜곡된 하나의 '(허)상'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가면을 벗어던졌다고 생각한 순간, 그 안에 있는 또 다른 가면이 발견된다. 아니 실은 가면을 쓰기 전과 가면을 벗어던진 후의 내 모습 자체가 달라진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계속 변화하는 무엇이다.

 

<진상>은 사건의 이면과 사람의 이면을 바라보는 게 어떤 것인지를 말하는 작품이다. <진상>의 원제는 오마에상(당신)’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우리는 이 호칭을 쓴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것은 과연 당신자체인가? ‘당신이 내게 보여주고 싶은 일면인가, 아니면 당신의 본모습까지를 포함한 모든 것인가? 우리는 당연히 사랑하는 대상과의 사이라면 비밀이 없기를 바란다. 겉으로 연출된 모습이 아니라 본모습을 확인하고 그것까지를 사랑하고자 한다. 하지만 문제는 당신의 본모습(진상)을 알아가는 동안 나 자신의 본모습, ‘나 자신진상역시 드러난다는 데 있다. 양쪽의 경우 모두 다 본모습은 실망스러운 것이지만 우리가 더욱 깊이 실망하는 것은 단연 나 자신의 본모습이다. 사랑 앞에서 우리가 망설이고 두려움을 품는 이유다. "나는 나의 진상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렇듯 <진상>은 이면을 바라보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면표면을 분리하는 게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는 화자인 헤이시로에 의해 외양 묘사가 자주 이뤄진다. 젊고 촉망받는 마치 순시관이지만 '어디에도 비할 바 없는 극강의 추남인 마지마 신노스케의 얼굴이 점점 변해가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 좋은 예다.

 

 

사람 얼굴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곳은 역시 눈이리라. 헤이시로는 심심풀이 삼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저 얼굴에서 다른 부위는 그대로 두고 최소한 눈이라도 제대로 생겼다면 조금은 보기가 낫겠지, 그렇다면 이 얼굴에 어떤 눈을 달아야 여자들의 심미안이라는 엄격한 잣대가 다만 얼마라도 값을 매겨 줄까, 하고 말이다. 참으로 쓸데없는 걱정이구나. 더구나 자신의 말상 얼굴은 제쳐 놓고.

하지만 헤이시로도 마냥 장난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마지마 신노스케의 인품은 선량하고 성실하며 두뇌는 명석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 얼굴이라는 간판은 하늘의 장난이랄까 천부의 재앙처럼 느껴진다. 아니, 그렇게까지 말하면 지나친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오호 통재라. 하고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68)

 

상대는 매혹적인 아가씨다. 기량과 미모가 뛰어난 아가씨가 눈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헤이시로는 늦기는 했지만 깨달았다. 마지마 신노스케의 외모가 나아 보이는 까닭은 상투나 옷차림을 바꾼 탓만은 아니다. 후미노의 눈물이 신노스케의 얼굴 분위기를 바꾼 게 아닐까. (, 419)

 

지금 마지마 신노스케는 좋은 얼굴을 하고 있다. 옴팡눈에 코도 납작한 생김새는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좋은 얼굴로 변했다. (, 525)

 

후미노에게 면전에서 살인자라는 비난을 들었다. 그보다 더 나쁜 일은 신노스케에게 있을 수 없다. 그것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일 각오가 있었기에 후미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던 것이다. 신노스케는 한없이 무참한 심정으로 고개를 넘었다. 이제 같은 산에서는 길을 잃지 않으리라. (, 530)

 

 

추남마지마 신노스케는 약방 주인 신베의 딸 후미노와의 일을 통해 좋은 얼굴관리의 얼굴을 얻는다. 물론 이 얼굴 역시 하나의 가면이다. 하지만 신노스케가 얻은 이 가면은 단순한 가면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소설 말미에 묘사된 신노스케의 얼굴은 사건에 연루된 많은 이들의 '가면 뒤 본심'을, '사건의 진상'을 목격한 후에 얻은 얼굴 표정이기 때문이다. 가면 뒤 본심과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신노스케는 그가 마음속에 품은 당신에게 살인자라는 비난을 듣는다. 하지만 그 비난을 한 당사자가 살인자. 그리고 그녀가 살인자가 된 것은 그녀 마음속에 아버지가 비열한 살인자라는 ‘()()’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의 배후에는 자신이 설 자리를 잃은 마쓰카와 뎃슈라는 젊은이의 실의가 존재했고 그를 향한 후미노의 사랑이 존재했다. 각자가 마음속에 품은 애증의 화살줄은 각자가 마음속에 품은 '허상'들을 매개로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다. 어딘가에서 매듭을 지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관리의 얼굴, 법의 얼굴이 필요한 것이다.

 

 

마고하치가 저지른 악업은 밝혀졌고 그에 걸맞은 벌을 받았다. 지금도 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죄는 일단 깨끗이 청산되었. 그렇다면 이제 아무 문제도 없어야 할 텐데, 어째서 또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가슴은 여전히 텁텁했지만 마침내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죄를 청산했어도, 그 사실을 주위에 널리 알리지 않으면 청산한 것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일러주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이다. 나랏법은 그러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 245)

 

 

물론 법의 한계도 뚜렷하다.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다보면 인간다움을 잃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헤이시로의 아내가 말하듯 인연이란 어디선가 끊어 내거나 풀어 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재앙을 불러들이며, “죄라는 것은 아무리 괴롭고 슬프더라도 한 번은 깨끗이 청산해야 하며, 눈처럼 시나브로 녹아서 없어지는 일은 없다.” (, 128) 여기서 법은 인연과 마음속에 맺힌 괴로움과 슬픔의 상()을 포함한다. 마음속의 여러 감정들사랑인지 증오인지 집착인지 질투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이 얽히고설켜 맺힌 상을 일단 매듭짓기 위해서라도 법의 얼굴은 필요하다. 어디서 어떻게 매듭을 지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참조점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마지마 나리.”

허락이나 마나 나는 그런 걸 결정할 위치도 아니다, 라고 말하려던 신노스케의 머릿속에 뭔가가 퍼뜩 스쳤다.

매듭이다. 오신을 위해 오토쿠는 그걸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알겠습니다.”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오토쿠를 오신의 보증인으로 인정하겠습니다. 오신, 무슨 일에서나 오토쿠를 따르며 열심히 일하도록 해라.”

, 감사합니다.”

[...]

죄송합니다. 이렇게 고마운 일도 없는데, 왜 자꾸 눈물이 나는지, 저도 알 수가 없네요. 제가 저를 모르겠어요. 너무나 바보 같고 분별이 없어 눈앞이 캄캄합니다. 뭍으로 떠밀려 와 이제 물로 돌아갈 수 없는데도 여전히 팔딱거리는 물고기처럼, 마음이 전혀 가라앉질 않아요.”

당연하지. 너는 오랜 세월 동안 혼자만의 연심을 품고 살았다. 그 마음이 하루 이틀 만에 지워진다면 세상에 괴로울 일이 뭐가 있겠나. 너만 바보인 것은 아니다. 너 혼자만 분별없는 게 아니다. 너 하나만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 게 아니야. (, 455-6)

 

 

그렇게 지은 매듭이 반드시 옳은 방식으로 지은 것이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매듭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매듭을 짓는 최선의 방식이 아니라 그 타이밍이 아닐까. 어떤 방식으로든 매듭을 지어야할 순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닐까. 매듭을 지어야할 타이밍을 놓칠 때 사건이 발생한다. 그때 법이 개입하는 것이다. 물론 법의 얼굴을 한 자도 캄캄한 어둠 속에 있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는 어쨌든 매듭을 지어야만 한다. 그것이 법의 얼굴을 한 자의 사명이다. ‘과 통하는 것은 학문이라는 점에서 이는 학문의 일이기도 하다.

 

 

너는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사람이 제 이름을 쓸 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제 이름을 쓸 수 있게 되면 자기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자기와 자기 이외의 것을 분간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학문의 첫걸음이다. 전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학문에 힘쓰면,

힘쓸수록 사람이라는 존재의 모호함, 혼돈의 깊이를 알게 된다. 동시에 사람이 학문이라는 정밀한 체계를 만든 까닭도 그 모호함과 깊은 혼돈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

그래서 흥미롭다. 그래서 그 길은 멀다. (, 462)

 

 

마지마 신노스케의 종조부이자 가문의 곁가지 모토미야 겐에몬은 사건의 말미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젊어서 그는 결혼을 했고 처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갔지만 아내가 젊은 무사와 도망을 치고 만다.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마주한 그는 그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고자 학문의 세계로 뛰어든다. 하지만,

 

 

역시, 모르겠더구나.”

학문을 계속할수록 오히려 모르는 것이 늘어만 갔다고 한다.

그래도 나는 학문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라는 존재의 혼돈이, 그 혼돈을 해결하고자 만들어 낸 학문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늘 그걸 기쁨으로 알았다.

[...]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겐에몬이 말했다. “하지만 그래서 좋았다. 아직도 더 배울 수 있다. 앞으로 내가 배울 것은 사람이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다. 배울 가치가 있는 문제지.

오래 살길 잘했다. 겐에몬은 다시 한 번 말했다. (, 464-5)

 

 

학문은 이런 것이다. 내가 마주친 인생의 문제를 풀 수는 없다. 학문을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역시 모를 일로 이해불가능의 영역에 남는다. 학문은 인간사를 속속들이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인간은 다만, 계속해서 배울 수 있을 뿐이다.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 과정의 연속이다. 이를 두고 허망하다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허망한 것이 어디 학문뿐인가.

 

 

재주가 있는 것과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는 다른 이야기인 듯합니다요.”

그런 말을 처음 듣는데요라고 말하던 준자부로가 유미노스케의 볼에 묻은 밥풀을 알아차리고 얼른 떼어내서 먹는다.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가 아니라, 결국은 장사가 되는 일이냐 아니냐의 차이겠지요.”

준자부로는 허공에 손가락으로 쓰윽 선을 그어 보였다.

장사가 되는 선이란 게 있어서, 그걸 넘을 수 있는 일이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

투미하다, 느리다 잔소리를 들었지만 열심히 만들면 종종 볼만한 물건이 나왔지요. 하지만 제 손에 떨어지는 돈이 늘 쥐꼬리만 해서. 마누라한테 머리빗 하나 사 주지 못했습니다요.”

그렇다면 더 노력해서 수량을 늘리자, 혹은 이름을 알려서 제값을 받도록 해 보자, 라고 생각하는 편이 장인답겠지만, 마루스케의 마음은 그런 쪽으로는 움직이지는 않았다.

허망하다라는 어휘를 마루스케는 모른다. 알았으면 그렇게 말했으리라. (, 329-30)

 

 

이해할 수 없고 허망하기로는 직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인생살이란 게 원래 허망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나의 마음, 나의 본심조차 이해할 수 없다는 게 문제일 것이다. 어째서 마루스케의 마음은 그런 쪽으로 움직이지 않았을까? 재주가 있고 어울리는 일을 했음에도 장사가 되는 선을 끝내 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진상>에서 미야베 미유키는 허망함에 대해 말하고, 그와 동시에 허망함의 다음 단계를 암시한다. 허망함은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삶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건 아니다. ‘매듭을 지어주는 묘를 발휘할 수 있다면 말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이 소설에서 숱한 곁가지인생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데, 생각해보면 한 가문의 장남이 아닌 차남 이하 다른 자식들의 인생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아니 실은 (유미노스케와 그의 첫째 형 사이의 말다툼에서 드러나듯) 가문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인생이 결정된 장남의 인생 역시 허망한 것이기도 하다.

 

마지마 신노스케와 모토미야 겐에몬의 공통점은 당신들이 내게 가한 모욕을 극복했다는 것이다. 아니 극복했다기보다 무시무시하게 육박해오는 모욕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은 감정을 조롱당한 처지이고, 존재를 존중받지 못하는 곁가지이고 떨거지인 처지이지만 그러한 처지를, 그리고 그러한 처지에 있다는 데서 오는 모욕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허망함의 다음 단계로서의 삶은 바로 여기, 모욕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에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쉽진 않다.

 

내 자리가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모욕감과 초조함, 이것을 극복하려 애쓰는 것은 인간이 사회적으로 성장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17-20세기의 기간 동안 일본과 유럽에서는 수많은 차남들이 직인으로, 상인으로, 군인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좁은 가정을 벗어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약탈과 착취의 첨병으로 활약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모욕감의 극복은 쉽게 지배욕의 발현으로 이어진다.

 

<진상>에 등장하는 차남들의 사연은 다양하다. 헤이시로부터 모토미야 겐에몬, 유미노스케, 준자부로, 조카의 몸으로 가업을 계승한 나오미치 도에몬, 강한 어머니 때문에 자기 자리를 굳건히 하지 못한 센조, 그리고 연쇄살인의 주인공 마쓰카와 뎃슈까지. ‘내 자리가 없다는 사실에 초조해하는 것은 차남들뿐만이 아니다. <진상>에 등장하는 많은 여성 인물들 역시 동일한 이유로 초조해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맹렬히 돌진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짱구 산타로의 모친 오키에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여자를 골라 갈고닦아서 자기 취향대로 다듬어 보고 싶은 취미를 갖게 된 센조와 짝을 이룬다. 센조가 그렇게 된 것은 강한 어머니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자리를 갖지 못한 데 있다. 자기존중감이 약한 것이다. 그런 센조를 토대로 오키에는 자기 자리를 구성하려 한다.

 

내 자리란 자기존중감을 기르고 또 확보할 수 있는 자리일 것이다. 이런 자리를 갖는 데는 개인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기반 및 인식도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미야베 미유키가 많은 인물들을 차남 이하의 자식들로 설정한 이유, 그리고 특히 연쇄살인의 범인을 차남으로 설정하고 그가 범죄를 저지르게 된 심리를 묘사하는 데 많은 공을 들인 이유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겠다. 미야베 미유키는 차남의 사정을 적극 끌어들임으로써, 범죄를 범죄자 개인의 원한의 틀 안에서만 다루지 않고, 사회구조적인 문제까지를 건드리는 셈이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거장답다.

 

<진상>은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기서의 사랑은 존중과 결부된 사랑이다.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를 존중할 수 있는 마음 말이다. ‘내 마음의 자리를 탄탄하게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사랑은 집착으로 이어지기 쉽다. 집착으로서의 사랑은 쉽게 모욕감에 시달리게 되고 이것이 증오와 원한으로 발전한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누구든 이면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사람은 또한 상상력을 지녔기에 타인의 이면-본모습-본마음을 부풀려 보고서는 그것을 사건의 진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신베의 딸 후미노가 한 일, 후미노와 함께 마쓰카와가 저지른 일이 여기서 비롯된다. 자기존중감이 결여된 채 상대에게 의존하는 사랑은 쉽게 무너지거나 쉽게 오해를 낳는다. 애초에 신베 역시 장식품이자 그만의 신으로서 사타에를 대우했던 걸 떠올려본다면 그렇다.

 

차남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다. 스스로의 삶을 곁가지’ ‘떨거지인생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상당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 은퇴 직장인, 외국인 노동자, 청년실업 문제 등등.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잉여라 지칭하는 게 하나의 문화가 되어 있는 게 현재의 상황이다. 이른바 잉여 담론(문화)’에서 자조를 넘어선 어떤 역설적 자기존중감이 깔려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내 자리가 없다또는 내 자리가 위태롭다또는 조만간 내 자리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느낌, 위기감, 초조감은 자유 경쟁이 일반화된 오늘날 한국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이것이 오늘날 겉보기엔 발전과 번영을 거듭하는 한국사회가 지닌 이면의 얼굴, 진면목즉 진상일 것이다. 겉보기엔 번듯하고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는(그러려고 애쓰는) 우리 내면의 진상일 것이다. 우리들 중 이러한 진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매듭을 지을 수 있는 자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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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펭귄클래식 15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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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나는 화려한 사교계 생활을 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사람들이 나에게서 기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재능이 엿보이는 작품 한 두 개로 세상에 알려진다. 그뿐이다. 한 인간에게 말할 게 한두 가지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경우에 따라 느긋하게 혹은 고통스러워하며 사양길로 접어든 자신의 경력을 관리한다.

 

- 미셸 우엘벡, <어느 섬의 가능성>, 317-8. 

 

 

1914년부터 1915년 사이에 카프카는 <소송>이라는 작품을 썼다. 이 작품의 원제는 절차, 과정, 소송을 뜻하는proceß(=process)다. 이 작품은 요제프 K라는 주인공이 어느날 갑자기 체포되면서 시작된다. 이 작품의 첫 두 문장,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게 분명했다.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 이날 아침 느닷없이 그가 체포되었기 때문이다"라는 세계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도입부로 꼽힌다.

K가 느닷없이 체포되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일련의 소송 절차에 휘말리게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K가 죄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가 '소정의 (소송) 절차', 즉 '정해진 바대로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송>은 카프카 생전에 출간되지 않았다. 카프카가 죽은 지 1년 후인 1925년에 친구 막스 브로트가 정리, 편집하여 출간했다. <소송>은 미완성이기도 하다. 작품의 시작과 결말은 있는데, 사이 사이 미완성 장(chapter)들이 있다. 막스 브로트는 <소송>의 원고를 정리, 편집하면서 작품 전개상 확실한 부분들만 내용에 따라 순서를 정하여 배열을 했고, '줄거리 전개에 크게 중요치 않은' 미완성 장들은 쳐내버렸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읽는 카프카의 작품 <소송>이다. <소송>의 최초 판본에는 '미완성 장'들이 아예 빠져 있었다. 초판이 나온 이후 막스 브로트는 대략 10년의 간격을 두고 <소송>의 새로운 편집본을 낸다. 두 번째 편집본에는 초판에서 빠졌던 미완성 장들이 포함되고, 세 번째 편집본에는 막스 브로트가 쓴 편집 후기가 붙는다.

이런 걸 보면 막스 브로트는 '소정의 절차'를 밟을 줄 아는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카프카가 미완성이라 판단한 글 묶음을 가지고 브로트는 하나의 작품으로, 판매가능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고, 나아가 세계문학의 걸작으로 만들었다. 그는 그러는 데 필요한 '소정의 절차'를 알았고 그것을 차근차근 밟아 나갔다.

그렇다면 정작 카프카의 경우는 어땠을까? 여기서부터는 나의 짐작이 들어가는 서술이니 감안해서 읽기를 바란다. 카프카는 아마도 책을 완성하고 출판을 하기 위해선 소정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사실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생전에 십 수편의 단편을 지면에 발표한 작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쓴 대부분의 글에 대해서는, 그 앞에 놓인 소정의 절차를 밟아나가는 대신, 스스로를 끝없는 심문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 이해하기 어렵고 옆에서 보기에 답답한 태도로 일관했다. 말하자면 그는 다른 누군가--독자, 출판시장--의 심문 받기를 거부하고(감당할 자신이 없었거나 다른 이의 심문을 받을 필요를 못 느꼈거나, 둘 중 어떤 이유로든), '자기가 자기를 (끝없이) 심문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답답함. 이것이 카프카 문학을 이해하는 핵심 정서일 수 있다. 가령 <소송>을 읽노라면 요제프 K를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들이 답답하게 구는 데 짜증이 난다. 엄숙하고 엄격한 법-절차 앞에서 깐족대는 것이 뻔뻔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법-절차를 단호한 태도로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소송>에서 카프카의 인물들은 되지도 않는 편법을 쓰려하기도 하고, 사소한 말꼬리를 잡기도 하고, 하나마나한 추측과 짐작들을 장황하게 늘어놓기도 한다. 요제프 K는 소송에 휘말렸으므로 그의 앞에는 그가 밟아야 할 일련의 (소송) 절차가 놓여 있다. 그렇다면 절차를 밟으면 될 문제 아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명확한 문제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K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소송>의 모든 인물은 K의 분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두들 말이 많고 그 말들은 나름 논리적이기도 한데, 거기엔 명확한 결론이 없다--자꾸만 중요하지도 않은 것에 집착하거나 다른 길로 빠지거나 하면서 간단명확한 것을 불명확하고 미심쩍은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물론 이것이 소송의 본질이다. 소송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중요해지며, 단순한 의도가 곡해되며, 명확한 것이 의심쩍은 것이 되기 일쑤다.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모든 게 의심스럽다. 심문을 받은 피의자들은 말한다. 오랫동안 심문을 받다 보면 나중에는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게 된다고. (난 아무런 죄가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실은 큰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닐까?) 법정에서는 모두가 서로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다. 사소한 꼬투리만 잡아도 의심이 끝도 없이 부풀어오른다. <소송>의 등장인물 모두가 비슷비슷해보이는 것처럼, 법정에 선 사람들도 모두 서로 비슷해진다. 법앞에 선 사람들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자기 자신조차도 믿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웬만하면 소송에는 휘말리지 않는 것이 낫다.
하지만 카프카는 ‘소정의’ 소송 절차는 이 핑계 저 핑계로 거부하면서도, 자기가 자신을 심문하는--자기가 심문자인 동시에 피의자인--정말이지 끝이 없는 소송 절차 속에 스스로를 밀어 넣었던 것이다.

무엇이 카프카로 하여금 '소송의 세계--자기 심문의 무한 루프'를 벗어나 도약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무익하고 무용하며, 동시에 끝도 없는 소송 절차 속에 밀어 넣도록 했느냐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그 이유를 나름나름대로 짐작하는) 많은 연구들이 이뤄진바 있다. 그 수많은 연구들을 따로 살펴보지 않더라도, 애써 쓴 작품을 출간 시도조차 하지 않다니 굉장히 답답하고 바보 같은 짓이라 할만하다. 카프카는 <소송>을 1914-1915년 사이에 썼는데, <소송>이 출간된 것은 그가 죽고 1년 후인 1925년이다. 10년 동안 원고를 묵혀두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카프카가 출판되지 않은 자신의 원고를 모두 불태워 없애고(여기에는 <아메리카>, <성> 등 카프카의 장편이 모두 포함된다), 이미 출판된 것은 재판 발행을 중지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쓴 글들이 밟아야 하는 '소정의 절차' 앞에서 카프카가 취한 태도는 이러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일이지만(카프카의 태도가 관철되었더라면 내가 그의 글을 읽을 수조차 없었을 것이므로), 글쓰기라는 활동 앞에서, 글쓰기라는 활동 앞에 놓인 '소정의 절차', 즉 '상품자본주의 사회에서 글쓰기가 처한 필연적 운명' 앞에서 카프카가 취한 이러한 태도야말로 카프카 문학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최대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사실 그것은 단호한 거부와는 거리가 먼,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회피하는,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결정 내리기를 계속해서 미루는, 망설이고 주저하는 소심한 비겁자의 태도에 가깝다. 글을 쓴다. 하지만 끝내지는 않는다(또는 못한다). 당연히 출판을 못 한다. 작품(<소송>)을 끝내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작품(<아메리카>)에 착수한다. 이것 역시 끝내지 않는다(못한다). 그런 채로 10년의 세월이 흐른다. 죽음이 다가옴을 감지한다. 카프카는 자신과 자신이 쓴 글들이 밟아야 할 절차에 대해 생각한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한다. 만약 그가 원고를 없애기로 단호하게 결정을 내렸다면 본인 스스로 태워 없앴을 것이다. 하지만 카프카는 친구에게 부탁을 한다. 부탁을 받은 친구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 생전에 <소송>을 읽어본 적이 있었고 내심 '끝내주는 작품'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는 카프카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자네의 <소송>을 내 손으로 마무리 짓겠네." 그 말대로 되었다. 카프카는 미완성이라고 여겼지만 막스 브로트가 보기에 그것은 이미 완성된 작품이었고, 단지 소정의 절차를 밟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막스 브로트에겐 비교적 손쉬운 절차였지만, 카프카로선 밟기를 끝까지 망설이고 주저할수밖에 없었던 소정의 절차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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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구매욕을 자극하는 표지 디자인의 세계문학 작품 판본들이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일단 독자들을 가장 열광케하리라 짐작되는 것은 플로베르의 대표작 <마담 보바리>입니다. 펭귄클래식에서 <보바리 부인>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네요. 포인트가 디자인인 만큼, 펭귄클래식을 비롯, 각 출판사가 펴내고 있는 세계문학 시리즈의 디자인 및 만듦새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뭐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건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을 밝히는 글이므로 그 점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그 동안 펭귄클래식은 일명 블랙 펭귄이라하여, 바탕은 검은색에 위쪽 면에 큰 그림이 들어가고 중간에서 약간 아래(3/4 지점)에 흰 띄가 가로지르는 표지 디자인을 고수했었죠. 그런데 이번에 <보바리 부인>을 내면서 펭귄북스의 오리지널 표지 디자인을 채택했습니다.

 

펭귄북스의 오리지널 디자인은 초창기 펭귄의 판매 전략과 관련이 있습니다. 펭귄은 표지 디자인에서 각 책의 성격을 드러내기보다 출판사를 드러내는 데 집중합니다. 수평으로 3분할--3단 그리드--해서 로고, 책 제목, 저자 이름만 넣었는데, 이 단순한 디자인은 당시 많은 책들이 화려한 일러스트와 장식으로 꽉 찬 표지를 내세운 것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이후 수요가 다양해지면서 펭귄의 디자인도 다양해집니다. 한국의 펭귄클래식이 채택한 디자인인 '펭귄 블랙 클래식'은 '고전(classic)' 작품들에 적용되는 디자인입니다. 이 '블랙 펭귄'은 책장에 꽂아두었을 때도 남다른 맛이 있습니다. 반면 민음사나 문학동네, 그리고 창비는 작품마다 다른 색깔을 입혔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어떤 걸 더 선호하는지는 독자마다 다를 듯합니다.

 

한국에서 '블랙 펭귄'의 예외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입니다. (보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번역되는 제목인데, '시간'을 '시절'로 바꿨습니다.)

 

 

 

 

 

 

 

 

 

 

 

 

 

 

 

 

 

그 이전에 톨스토이의 <크로이체르 소나타>,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 파티>의 경우에는 '블랙 펭귄' 디자인 말고도 따로 양장본 표지 디자인을 선보인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같은 작품을 다른 디자인과 제책으로 선보이는 것은 한국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고, 펭귄 UK나 펭귄 USA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펭귄북스의 디자인적 측면(표지 디자인, 로고, 제책 등)에 대해서는 <매거진 B>10호에서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잡지 자체가 디자인, 만듦새의 측면에서 꽤 훌륭한 잡지이기도 합니다. 디자인, 기능, 가격의 측면에서 '균형잡힌(balanced) 브랜드(brand)'를 매월 하나씩 다루는 월간지입니다.  

 

 

 

 

 

 

 

 

 

 

 

 

 

 

 

 

<매거진 B>가 소개하는 펭귄북스 소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1935년 영국에서 시작한 펭귄은 가격을 낮추고 휴대성을 높인 문고판 발행, 시대적 요구를 놓치지 않는 기획, 그리고 북디자인을 통한 브랜드 아이덴티티 확립 등 현대 출판사가 가야 할 길을 줄곧 제시해왔습니다. 펭귄은 값싼 책을 만들더라도 최고의 작가를 섭외하며 결코 내용까지 가벼운 책이 되지 않도록 노력 했습니다. 이는 '책은 읽는 것'이라는 단순한 신념을 지닌 창업자 앨런 레인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펭귄하면 유명한 오리지날 디자인, 펭귄 로고와 수평 3단 그리드 표지디자인이 떠오릅니다. 책 표지 자체로 하나의 아이콘이 된 경우라 하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가벼운 페이퍼백, 문고본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페이퍼백이 대중화되는 데 큰 역할을 한 출판사가 펭귄입니다. 20세기 들어서 독서 인구가 늘고 또 여행 인구가 늘면서, '부담 없이 싼 가격에 구입해서 들고 다니며 읽기 좋은 책', 즉 접근성과 휴대성이 높은 책에 대한 수요가 생겼는데 그러한 흐름에 영리하게 편승했다 하겠습니다.

 

(* 펭귄하면 또 떠오르는 건 <채털리 부인의 연인>입니다. D. H. 로렌스의 이 작품은 로렌스의 모국인 영국에서 '외설물'로 간주되어 오랫동안 출판 금지였는데(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출간), 로렌스 사후 30년을 맞아 펭귄출판사에서 20만부를 찍습니다. 이에 검찰이 출판사를 기소하고 법정 공방 끝에 출판사가 승소합니다. 그리고 찍어 낸 20만부는 하루 만에 매진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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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세계문학은 페이퍼백보다는 ('고전'으로서의 그 위상에 걸맞게) 장중한 하드커버가 제맛이라고 여기는 독자들도 상당수 있을 듯합니다. 8-90년대에 나온 세계문학 전집들은 하드커버인 경우가 많았죠. 책 외판원이 각 가정을 돌아다니며 세일즈(방문판매)를 하던 시절이었죠. 웬만한 집 책장에는 계몽사나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세계문학 전집이 꽂혀 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세계문학 전집은 인터넷 주문이나 홈쇼핑(!)을 통해 판매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페이퍼백(혹은 반양장)이네요.

 

세계문학 전집을 일관되게 하드커버로 내고 있는 출판사는 을유문화사와 열린책들 정도가 있습니다. 문학동네에서는 모든 작품을 양장과 반양장, 두 가지 종류로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장과 반양장의 차이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양장과 문고본, 이렇게 두 종류로 내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을유문화사 세계문학 전집은 만듦새가 꽤 좋은 편입니다. 표지 디자인도 괜찮고, 본문 편집에도 일관성이 있습니다. 분량이 많은 책도 웬만해선 분책을 하지 않고 한 권으로 낸다는 것도 이 출판사의 특징입니다. 들고 다니기 무겁다는 단점이 있으나 1권만 갖고 다니면서 책을 다 읽어버린 경우, 2권을 읽다가 앞의 내용을 확인할 일이 생기는 경우에는 유용하다 하겠습니다.

 

 

 

 

 

 

 

 

 

 

 

 

 

 

 

 

 

 

 

 

 

 

 

 

 

 

 

 

 

 

 

다만 각주가 아니라 미주를 달고 있고, 이 미주가 일련번호로 표기되지 않고 별 갯수로 표기되어 있어서 다소 불편한 면이 있습니다. 뭔가 있을 것 같아 애써 찾아봤는데 별 내용이 없으면 독서 흐름이 끊기고 맥이 빠진달까요.

 

각주와 미주, 이것도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텐데요, 저는 각주를 더 선호하는 편입니다. 빨리 눈만 움직여 확인을 할 수 있으니까요. 미주를 선호하는 분들은, 각주가 독서의 흐름에 방해가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특히 저자가 달아놓은 '원주'가 아니라 역자가 달아둔 '역주'의 경우에는, 뭐랄까요 '원문'에 일종의 '이물질'이 '끼어든' 것처럼 여겨질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시대적, 장소적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거나 어떤 단어나 표현의 숨겨진 뜻, 그러한 표현을 쓴 저자의 의도를 알려주는 '역주'가 고맙게 여겨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무조건 배척할 수만은 없을 듯.  

 

열린책들 W 세계문학 시리즈는 싼 가격, 그리고 나름 신경을 많이 쓴 티가 역력한--열린책들 디자인팀의 노동강도가 짐작되는-- 표지 디자인이 인상적입니다. 하드커버이고 판형은 을유문화사 판형과 비슷합니다(어째서 하드커버들이 반양장본보다 더 판형이 작은 건지는 모를 일이네요). 한 가지 불만은 본문에 여백이 별로 없고 줄간격도 좁아 너무 빽빽해서 가독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것입니다(읽었던 줄을 다시 읽고 있는 경우가 많이 발생...). 예전에 열린책들에서 미스터 노(Mr. Know) 시리즈를 낸 적이 있는데, W 세계문학 시리즈는 제책과 디자인 레이아웃만 바꾸고 본문 편집은 거의 손을 대지 않은 듯합니다. 미스터 노 시리즈는 가격이 싸고 가벼워서 부담없이 사서 읽기 좋았죠. (펭귄 북스의 원래 컨셉을 따라한 듯?) 하지만 이제는 모두 절판이 되어 '레어템'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미스터 노 시리즈에 대해서도 불만이 하나 있었는데, 너무 가벼운 데다 판형도 작아서 책상 위에 두고 읽을 경우 책이 쉽게 닫혀버리는 게 불만이었습니다. 독서대에도 잘 고정이 되지 않아 읽을 때 반드시 손으로 잡고 읽어야 했죠... 덧붙여 종이가 다소 두껍고 마찰력이 적어서 (손에 땀이라도 쥐지 않으면)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도 불만이었습니다... (거 참, 불만도 되게 많네요. 하지만 펭귄클래식은 정말 종이가 손에 닿는 느낌부터가 다르다는...)

 

카프카 <소송>의 표지디자인, 판형 등을 출판사별로 비교해봐도 재밌습니다. 카프카 전집은 '솔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이 '솔 판본'은 하드커버에다 판형도 커서 묵직합니다. 그런가 하면 펭귄클래식은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사진을 표지에 집어 넣었습니다... 표지 그림만 놓고 봤을 땐, 을유문화사가 가장 나은 듯하네요. 열린책들은 디자인팀에서 따로 제작한 표지를 썼습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송>과는 어울리지 않아...!). 표지에 사진이나 그림을 넣을 때는 해당 사진과 그림의 작가에게 (저작권이 살아 있는 경우) 저작권료를 따로 지불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비용 절감이 되려나 싶습니다(하지만 디자인팀은 잦은 야근을 하겠죠).

 

 

 

 

 

 

 

 

 

 

 

 

 

 

 

 

 

 

 

 

 

 

 

 

 

 

 

 

 

 

 

 

 

그나저나 <마담 보바리>는 워낙에 김화영 교수의 번역본(민음사)이 '정본'처럼 통용되고 있었는데, 새로운 디자인에 끌려서라도 펭귄클래식 번역본을 선택할 독자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실은 저도 그 중의 한 명이 되었네요.

 

 

 

 

 

 

 

 

 

 

 

 

 

 

 

 

 

 

솔직히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의 표지는 마음에 드는 게 거의 없습니다. 좀 지나치게 세로로 긴 '타워' 판형--마치 아이폰 5를 연상시키는--도 개인적으론 불만입니다. 판형이 세로로 길다보니 책을 펴서 본문을 읽을 때도 위 아래 여백이 지나치게 넓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앞서 언급한 미스터 노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책이 잘 펼쳐지지 않는다는 것도 불만입니다. 책이란 게 내용이 중요하지 외양이 뭐가 중요하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번역 퀼리티 만큼이나 신경이 쓰이는 게 책의 만듦새이기도 합니다.

 

표지 디자인, 판형, 여백, 글씨체, 줄간격 등 본문 편집, 종이, 제본 상태, (손에 잡았을 때의 그립감을 결정짓는) 볼륨감, 표지의 질감 등등. 사실 이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운 책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혹 가다 그런 책을 만났을 땐 무척 기분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하드커버보다는 반양장이나 페이퍼백을 선호하는 편이고, 작은 판형의 문고본도 좋아합니다. 세계문학 문고본으로는 책세상 문고, 문지 스펙트럼 문고가 있습니다. 이런 문고본들은 여행 갈 때나 예비군 훈련 갈 때 아주 유용합니다. 실은 유용하고 말고를 떠나 문고본에 대한 무조건적 애정이랄까 하는 게 있어서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이라도 문고본이 있으면 따로 사둡니다.

 

 

 

 

 

 

 

 

 

 

 

 

 

 

 

 

 

 

 

세계문학 시리즈 중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선호하는 것은 펭귄클래식입니다. 심플한 표지 디자인이나 펼쳐놓고 읽기에 적당한 판형도 맘에 들지만, 좀 더 디테일하게는 표지나 본문 종이가 손에 닿을 때의 촉감도 좋습니다. '책이 손에 딱 잡히는' 느낌이 든달까요. 표지나 본문 종이가 너무 매끈거려서(빤딱거린다, 고도 하죠) 손끝에서부터 거부감이 드는 책들도 있거든요. 뭐 너무 민감하게 굴고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앨리스 먼로의 작품들은 <뿔(웅진)>에서 나왔는데, 펭귄클래식코리아와 같은 계열(웅진씽크빅)이어서 그런지 만듦새가 펭귄클래식과 비슷합니다. 표지만 봐서는 물론 알 수 없지만, 책을 만져보면 비슷한 그 느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앨리스 먼로가 단편 작가여서 생각 났는데, 최근에 현대문학에서 눈길을 끄는 디자인의 세계문학 단편선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표지 디자인도 예쁘지만 '하드보일드 스쿨의 교장' 대실 해밋의 단편선이 들어있다는 점이 또 한 번 눈길을 끕니다. 데미언 러니언은 어디서 들어본 적이 없는 작가라 깜짝 놀라기도. 브로드웨이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의 기둥 줄거리가 된 단편을 쓴 작가라고 합니다. 출간 예정인 작가로는 모파상, 오 헨리 등 이미 일반에 널리 알려진 단편 작가들도 있지만, H. P. 러브크래프트, 허버트 조지 웰즈 등 이른바 '본격문학'판에서는 소외되었던 작가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단편하면 떠오르는 작가는 역시나 체홉인데요, 최근에 시공사에서 체홉 단편선이 새로 출간되기도 했지만, 현대문학 시리즈로도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네요. 체홉 단편선도 어느 덧 이렇게나 많은 종이 출간됐네요. 아래의 책들은 수록된 작품들이 저마다 다릅니다. 표제작도 다들 다르죠. 나름 '대표' 단편선으로 기획해서 내놓은 것일 텐데, 각 출판사마다 '대표'가 다릅니다. 해서 체홉의 작품 세계를 일별하려는 독자라면 일일이 목차를 확인해가며 책을 구매하고 또 읽어야 한다는 난점이 있습니다. 체홉 정도의 작가라면 단편 '선집'이 아닌 '전집'이 나올 때도 됐는데 말입니다.

 

 

 

 

 

 

 

 

 

 

 

 

 

 

 

 

 

 

 

 

 

 

 

 

 

 

 

 

 

 

 

 

 

2000년대 후반들어 본격화된 세계문학 출판 붐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전반적인 불황 속에서도 여러 출판사들이 세계문학 쪽에 공을 들이고 있는 덕에 디자인과 만듦새 측면에서 훌륭한 책들을 접할 수 있는 건, 일단 독자로서는 큰 행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고생하는 편집자, 디자이너분들의 입장은 또 따로 들어봐야 할 듯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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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기(평전critical biography) 작가로 무척 유명하죠. 그런데 그 많은 평전들을 그저 무턱대고 써낸 것이 아니라 나름의 체계를 염두에 두고 썼습니다. 이 점이 다른 평전 작가와 그를 구분하는 점일 것입니다.

가령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는 [세계의 거장들/대가들(Baumeister der Welt)] 시리즈의 세 번째 권에 속합니다. 이 책의 원제는 <Drei Dichter ihres Lebens : Casanova, Stendhal, Tolstoi> 번역하면 '세 명의 자서전 작가'가 되겠네요. 하지만 국내 번역본에서는 이 제목을 빼고, 대신 <츠바이크가 본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국내에서 츠바이크에 대한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음을... 감안한다면, 굳이 이렇게 제목을 변형시킬 필요가 있었나 싶어요. 하긴 <세 명의 자서전 작가>란 제목 역시 구매욕구를 상승시킬 만한 제목은 아닙니다......

 

 



 

 

 

 

 

 

 

 

 

 

[세계의 거장들] 시리즈의 원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사노바...> [서문] 첫머리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권 <마신(데몬)과의 싸움(Der Kampf mit dem Damon)> : 횔덜린, 클라이스트, 니체
- 마성적인 힘에 쫓겨(붙들려) 자신과 현실세계를 뛰어넘어 무한의 세계로 들어선 유형

2권 <세 명의 거장들(Drei Meister)> : 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
- 현존하는 현실 곁에 소설이라는 우주를 만들어 제2의 현실을 구축한 유형, 즉 '서사적으로 세계를 재창조한 사람'의 유형

3권 <세 명의 자서전 작가(Drei Dichter ihres Lebens)> :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 (대우주를 있는 그대로 그리기 보다) 자아의 소우주를 세계 속에 펼쳐나간 유형. '주관주의적 예술가' '자서전'이라는 예술 형식은 어떤 것인가를 탐색.

[세계의 거장들] 시리즈는 <천재, 광기, 열정(1,2)>(세창미디어, 2009)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구성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어요.

1권 : 발자크, 디킨스, 스탕달, 카사노바
2권 :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클라이스트

순서가 뒤죽박죽이고, 횔덜린은 아예 빠져 있습니다. 또 츠바이크는 각 권 첫머리에 [서문]을 써두고 있는데, 이 [서문]들 역시 번역본에서는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츠바이크가 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를 한 권의 책에 묶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텐데요. 특히 도스토예프스키가 톨스토이와 묶이지 않고 얼핏 봐도 결이 무척 다른 발자크-디킨스와 함께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하지만 구성부터 다른 한국어 번역본을 읽어서는 이런 궁금증을 해소할 수가 없다는..... 아니 번역본만 접해서는 (원래 츠바이크의 구성을 알 수 없으니) 애초에 "어째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발자크-디킨스와 함께 다뤄진 거지?"하는 궁금증을 가질 수조차 없다는.....

이런 궁금증이야말로 (발자크,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크가 대표하는) 19세기 유럽 문학 전반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데 어떤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천재, 광기, 열정>의 본문은 (간혹 등장하는 오표기들이 번역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무리 없이 읽히는 편입니다. 하지만 어째서 원래 구성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서문]들은 왜 다 빼버렸는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수십 편의 츠바이크 평전들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을 느낀 것이 이 [세계의 거장들] 시리즈인데, 한국어 번역본은 여러 모로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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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섬의 가능성
미셸 우엘벡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사랑은 없다
(진정한, 충분한)
우리는 기댈 데 없이 살아가고,
버려진 채 죽는다.
...
연민을 구하는 외침이
허공에 울려 퍼진다.
우리의 몸은 망가졌지만
우리의 살은 여전히 탐욕스럽다.

젊고 싱싱한 몸의
약속들은 사라지고,
우리는 노년으로 접어든다.
아무것도 우릴 기다리지 않는

사라진 우리의 나날에 대한
헛된 기억 외에는,
증오의 소스라침
그리고 적나라한 기억 외에는.

- 미셸 우엘벡, <어느 섬의 가능성>

섹스와 광고가 판치는 우리 사회는 욕망의 충족을 개인적인 영역에 묶어 두면서 욕망을 어마어마한 규모로 발전시키는 데 몰두하고 있어. 사회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경쟁이 지속되어야 하고, 경쟁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욕망이 증가하고 확대되어야 하는 거지. 그 욕망이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어.

- 미셸 우엘벡, <소립자>

아감벤에 따르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사회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모든 사회계급이 용해되어 있는 단일한 행성적인 '소시민계급'만이 존재하게 된다. 이 소시민계급은 자신의 이해(권리)에 민감하지만 다른 이해를 가진 집단과의 차별화에도 민감하다. 그들은 기업이 저지르는 부정에 항의하기도 하지만, 기업이 제공하는 자본의 판타스마고리아(환영극)에 깊이 도취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체제의 저항자라기보다는 수호자에 더 가깝다. [...] 정치가 소멸될 때, 그 뒤로 어른거리는 것은 '분노의 그림자'이며 도래하는 폭력에 대한 예감이다.

- 강경미, <'도래하는 폭력'에 대하여>, <<말과 활>>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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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지니는 현실규정력이 있다. 그냥 마음속에 할 말을 품고 있는 것과 그것을 입 밖에 내는 것, 문장으로 쓰는 것은 차이가 크다. 예를 들어 ‘XX 죽이고 지옥 가겠습니다’라는 맹세를 입 밖에 내는 건 효과가 크다. 말에 마음이 구속된다고 할까, 그런 효과가 생긴다.

우엘벡 같은 경우는 대놓고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세계는 지옥이다. 그런데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이 지옥은 바로 우리 손으로 만든 것이니까.’ 굉장히 기분 나쁜 선언적 메시지다. 근데 이게 또 설득력이 있다. 작가로서 당대를 바라보는 통찰이 돋보인다고 할까.

물론 당대에 대한 통찰은 웬만한 작가라면 다 갖고 있는 것(이라고들 말해진다). 우엘벡의 특별한 점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통찰보다 단연 묘사가 앞선다. 무슨 얘기냐면, 다른 작가들의 경우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어떤 '윤리적' 통찰을 앞세우느라 묘사가 희생되곤 하는 걸 자주 보게 된다. 묘사를 아낀다고 할까 아니면 겁낸다고 할까. 특히 감정 묘사, 심리 묘사에서 그런 느낌을 자주 받는다. 묘사된 현실은 지옥인데 작가(화자)는 자꾸 거기서 희망을 찾으려한다.

감정이나 심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건 사실 무척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포장을 한다. 귀에 괜찮게 들리는 표현들,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적(인 동시에 진부한) 표현들을 동원해서 말이다. 가령 ‘모모 작가가 모모 소설에서 제시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겉보기엔 파국적이지만) 인간이 사랑의 가능성을 끝까지 추구해야 함을 보여준다’ 라거나 ‘모모 작가의 모모 작품은 죽음과 광기에 맞서 (작가는 결국 미쳐서 죽었지만) 그가 끝까지 추구하려 했던 진실의 기록이다’와 같은 표현들이 그렇다. 일단 '사랑'이니 '진실'이니 '가능성'이니 하는 단어가 등장하면 독자는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작가 본인도 마찬가지고. 광고의 3요소, 3B(beauty, baby, beast)가 고객들에게 부담없이 어필하는 것과 비슷하다.

작가가 작품을 쓴다는 건 자기 자신의 내면을 불특정 다수의 독자에게 드러내는 일이니 위험 부담이 매우 크고 또 때에 따라선 굉장히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당대 사회를 치밀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성실하게 묘사하는 것이 '우리는 지옥에 살고 있고, 그 지옥은 우리가 만든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우리 중 누구도 이 지옥만들기를 그만 둘 생각이 없으며, 또 그만둘 수도 없다.'라는 파국적 통찰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작가들이 거기서 한 발짝 물러서는 건, 그렇게 물러섬으로써 명백한 결론 내기를 유보하는 건,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불가능한 희망을 위치시키려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엘벡은 그런 ‘한 발짝 물러섬’이 없다. '진격의 우엘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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