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읽은 책들을 뒤돌아보는 의미에서 한 달치씩 끊어서 정리하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안쓰기 시작했더랬다. 읽는 책에 비해 리뷰를 쓰는 건수도 줄었다. 책읽고 후기 쓰면서 책방살이 블로그를 시작한지 2~3년 지났다. 삶의 대부분의 생애 동안 읽지 못했던 책들에 취미를 붙여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읽으면 죽기 전에는 살면서 궁금했던 것들이 풀리겠지 라는 희망으로 말이다. 결국 아무것도 모른채 죽는다는 걸 확인하는 작업이란 걸 점점 더 깨닫고 있는 거라고나 할까. 그래도 아무것도 모른채 죽는다는 걸 알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책읽기의 수확이라면 수확이겠다.
최근 글의 양이 줄었는데, 다 이유가 있다. 어떤 책방에서는 자기들이 준 책 혹은 지원금을 자기 책방에만 올릴 것을 강조한다. 어떤 곳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A라는 책방에서 한 달에 서너권 살 수 있는 지원금을 받아 책을 사서 읽고 독후감을 올리면, 그것을 다른 책방에는 퍼올리지 말기를 원한다고 치자. 그렇게 되면 마찬가지로 B라는 서점에서 평가단 도서로 받은 책은 설령 B 서점에서 다른 서점에 올리지 말라고 명시하지 않더라도 A 서점에 올리지 말아야 형평성이 맞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두 개의 다른 서점에 올리는 글들이 싱크가 맞지 않는다.
사실 처음 A 라는 서점의 블로그 살이를 하다가, B 라는 서점으로 이사온 것은 대부분의 서점 블로그들이 서버 관리가 매우 취약해서 언제 글들이 날아갈 지 모르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모든 사회가 그렇듯 둥지를 틀고 나면, 오다 가다 서로 낯을 익히고 인사를 하며 지내듯 자연스럽게 그곳 생태계에 적응하게 된다. 아 무슨 말을 하려다가 이렇게 엉뚱한 말들을 하고 있는 건가..
싱크가 맞지 않는 문제로 돌아와서, 그러하다보니 특정 서점에 책값으로 리뷰를 써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개인적으로 사서 읽은 책들은 리뷰를 미루게 된다. 그나마 신간에 속하는 책들은, 책방 블로그를 하는 분들 대부분이 공통적인 생각이겠지만, 제일 먼저 읽고 먼저 리뷰를 쓰고 싶은 충동 때문에 열심히 리뷰를 쓰지만 고전이나 뒤늦게 읽은 스테디셀러의 경우 그 많고 많은 리뷰 중에 내 글 하나 더 보태는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싶기도 하고, 또 시대가 검증된 고전에 대해 좋으니 싫으니 내 생각을 밝히는 것 자체가 가당찮게 느껴지기도 해서다.
그래도 뭘 읽었는지, 얼마나 (개인적으로) 좋았는지 정도는 기록을 해두는 게 좋겠다.
셰익스피어 400주년이라 축제 분위기에 합류를 했다.
열책 버전의 햄릿부터 조금 읽다가 잘 안읽혀 펭귄 버전으로 마저 읽었다. 멕베드도 열책 버전으로 3막 까지 읽었는데, libribox에서 오디오북을 다운받아 반쯤 알아먹는 극을 청취하며 다시 펭귄 버전으로 읽는 중이다. 문동의 템페스트도 머리맡에 있다. 희곡은 책으로 읽을 때 너무 빠른 진행 때문에 감정 이입이 잘 안된다. 한 마디 말에 담긴 엄청난 양의 감정을 눈으로 휘리릭 읽어버리면 애초 셰익스피어가 의도했던 바를 전혀 캐치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햄릿은 양면적인 감정을 글자로만 파악하기에는 더 어려웠고 맥베스의 경우 독백이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나타나고 있기에 햄릿에 비해 접근하기가 조금 쉬웠다., 오디오북을 읽어주는 사람들이 라디오 방송처럼 여러 사람이 각 역을 맡아서 대본읽기처럼 약간의 연극적인 플레이를 하고 있기에 감정적인 선을 조금 더 파악할 수 있었다. 민음사의 <세계를 향한 의지>도 조금씩 함께 읽고 있는 중인데, 이런 류의 비평과과 전기가 함께 있는 책을 읽으려면 해당 작품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 있어야 더 흥미로울 듯해서 일단 비극 네 개와 템페스트, 그리고 희극도 몇 개 골라 함께 읽으면서 1년 프로젝트로 읽을 작정이다. 문동에서 셰익스피어 전집이 나온 것 같은데. 펭귄북스의 해설과 극적인 번역 다 만족스러워서 일단 있는 거로 읽고, 가끔 오디오북도 함께 듣는 거로.
어떤 계기였는지 모르지만, 맥베스를 읽다가 초서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새치기를 했다. 문예출판사의 <크리세이드와 트로일러스>가 있어서 집어 들었다. 영어의 역사라는 책에서 초서 이야기를 계속 할 때도 읽을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아마도 멕베드와 관련해서 자료를 찾다가 귀가 팔랑거리는 대목을 발견했었던 듯 싶다.
워낙 고전이니 재미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안하고, 당대의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 의의를 갖기로 했는데, 의외로 스토리 전개가 흥미로왔다. 원작에서대로 행을 그대로 떼어놓다보니 번역된 문장이 시적 효과를 간직한 것도 아니면서 문장의 흐름만 자꾸 끊겨서 가독성이 좋지 않았다. 상사병에 걸린 트로일러스가 친구의 중개로 크리세이드를 꼬여내는 로맨스가 트로이전쟁을 배경으로 진행되는데, 사랑의 열병에 걸린 트로일러스도 그렇고, 후에 트로일러스에게 넘어간 크리세이드에게도 사랑은 죽음이다. 한 번 본 여자가 아른 거려 죽을 것 같고, 보고 싶어 죽을 것 같고, 좋아 죽을 것 같고, 우리가 사랑이라는 것이 문학의 주제가 될 때 다채로운 비유와 다양한 언어를 조합하는 것과 달리 당대의 사랑은 죽음이라는 단어로 주로 표현된다. 죽음 아니면 사랑, 혹은 죽음을 건 사랑인 것이다. 이러다 리뷰 쓰겠네.
제임스 조이스는 정말 난해하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뭐가 난해하냐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밖에 없는데, 저자가 단편을 통해 뭘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읽게 된 동기는 <작가란 무엇인가> 류의 책에서 많은 작가들이 제임스 조이스 를 좋아하고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글을 읽고서였다. 단편집 <더블린 사람들>을 시작했는데, 첫 단편을 읽고 나서는 내가 어디 페이지를 빠뜨리고 읽었나, 아니면 제본(아니 이북이므로 편집 상태가)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라고 의심했더랬다. 19세기 더블린이라는 도시가 처한 암울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너무나도 평범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을 포착했다고 보여진다. 거의 모든 출판사가 이 책을 가지고 있는데 열책 전집과 펭귄 시리즈를 가지고 있어 이것 역시 열책으로 읽었다.가독성은 펭귄보다 열책이 조금 나아보였는데, 영문 버전도 gutenburg 에서 다운받을 수 있으므로 비교 가능하다.
러시아 문학. 카프카와 불가코프도 읽었다. 불가코프는 읽은지 꽤됐고, 카프카는 변신만 읽었는데 역시 거장이다.. 당시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 너무나도 많은 방법으로 해석되고 있으므로 콕 찝어서 어떻다라고 말하기 어려운 작품이고. 많은 현대 문학은 카프카에 빚지고 있는만큼 작가의 혁신성과 천재성에 감탄.
쿤데라와 아고타 크리스토프. 구동구권의 문학을 읽을 때 늘 느끼는 거지만, 헛되이 지나간 공산주의 혁명은 문학을 위해서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은 세 번정도 되풀이 해서 읽었다. 술술 잘읽히면서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뜨거운 소설. 쿤데라는 역시 쿤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