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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 1
장미셸 게나시아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시간은 순환한다. 현재는 과거로 흘러가고 미래는 현재로 다가온다. 그러나 과거가 현재 속에 뒤섞이고  그 뒤섞임은 미래와 함께 엮인다. 우리가 사는 세계다. 너무나도 쉽게 피흘린 역사가 가르쳐준 것들을 잊는다. 어렵게 쟁취된 것들은 그것 자체의 혼란 속에서 다시 뒤집어지고 또 뒤집어지며 비극을 되풀이한다. 수없이 많은 살상과 파괴를 낳았던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의 정신은 망각 속에 갇히고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숫자와 이름들로 된 쪼가리 지식들만 넘쳐나며, 네트웍을 타고 날아다닌다. 


앞서간 혁명가들의 피와 뼈를 갈아 세운 발판을 딛고 드디어, 기어코 해낸 혁명이 역사에서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굵직한 러시아 귀족들은 혁명 이전에 재산을 빼돌려 일찌감치 편안한 망명가로서의 법적 지위를 얻었을 것이다. 혁명에 동참한 사람들은 하나 둘씩 그 자신이 인민의 적이 되어 숙청의 칼날을 피해 달아난다. 디아스포라가 슬픈 건, 단지 가족과 고향에서 멀어진 것 때문이 아니다. 망명자로서의 지위를 얻기 위한 한 장의 문서를 챙길 틈도 없이 서둘러, 아내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아이의 뺨 한 번 맛대보지 못하고 빠져 나와 얻은 목숨이 그대로 살아서, 그 위대하고 원대한 꿈들이 산산조각나듯 흩어져 없어지지 못하고, 낯선 땅 낯선 말을 쓰는 사람들 속에서 이방인이 되어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아무 꿈도 없었던 사람처럼, 세상의 시선에서 멀어지고 잊혀져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구제불능 낙천주의자 클럽은 망명자들이 함께 체스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비스트로(식당) 안쪽의 폐쇄된 공간이다. 그들은 법적 망명자로서의 지위를 얻기 위해, 누추하고 구차스런 삶의 한 자락을 붙들고 분투할 때, 다른 세계에서 온 다르면서도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었다. 당에 충성하고 묵묵히 의사였던 사람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숙청대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말린 생선 한 마리를 손에 쥐고 국경을 넘어 와서 택시 운전사가 되었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쟁의 트라우마를 이겨낸 파일러트는 사랑을 위해 친구를 배신했지만 끝내 혼자가 되어 뼈속까지 공산주의자로 남아 있다. 


헝가리의 국민오빠였던 남자 배우는 부다페스트에서 공산당 독재 타도를 외칠 때 한 편이 되었다가 미국과 서방이 자신들을 돕지 않게 된 걸 깨닫고 자신의 파트너와 국경선을 넘었고, 독일 출신의 레지스탕스였던 한 남자는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가 깨어난다. 체코의 한 외교관이었던, 최고 위치의 당 간부였던 사람은 줄을 잘못 선 대가로 숙청의 칼날을 피해 겨우 피해 달아났다. 이렇게 각기 다른 사람들, 어떤 사람들은 뼈속까지 공산당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공산당을 혐오하는 그 이질적인 사람들이지만 한 때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그게 옳던 그르던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며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다. 이 클럽에 열네살 미쉘이 합류한다. 


미쉘의 가족은 엄마와 아빠의 혈통을 중심으로 이분법처럼 쫙 갈라진다. 그 둘은 원래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프롤레타리아 출신으로 미쉘의 외할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장의 직원이었을 때, 그집 딸과 교제를 하다가 엄마의 임신을 모른 채 군복무를 채웠다. 엄마의 가족은 전형적인 브루주아 출신으로, 미쉘의 엄마가 미쉘의 형인 프랑크를 임신하지 않았다면 미쉘의 아버지를 사위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질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프랑크가 없었으면서로 잊혀질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결혼은 프랑크의 태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일이었던 데다가 업친데 덥친격으로 결혼식 날에는 신부쪽 형제의 전사소식을 받게 된다. 미쉘의 집안은 그렇게 우울한 날 그렇게 축복받지 못한 채로 탄생된다. 


나는 내 진영을 선택한 게 아니야. 그냥 내 진영 안에서 태어났지. P18


미쉘 가족의 에피소드와 망명자들의 에피소드들이 번갈아가면서 서술된다. 현재는 샤르트르의 장례식장에서 미쉘이 이미 그 클럽에서 나와 십여년이 흘러 성인이 된 후 클럽의 한 멤버를 우연히 만나는 시점이고, 이야기는 미쉘이 그 낙천주의 체스클럽을 다니며 중학교를 다니던 시점을 회상하며 쓰여진 성장담이다. 가족의 이야기이자 한 아이의 성장담이고, 아이가 그 짧은 몇 년의 시간동안 한명씩 한명씩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가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과정을 그리면서 동시에 낙천주의자 클럽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전개 시점은 미쉘이 소년이었던 시절 1950년대의 프랑스이고, 또다시 미쉘이 그 낙천주의자 클럽에서 만난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는 그들이 어떤 한 족의 사상에 빠져 충성하고 성취하고 배반당하고 배반하다가 목에 칼이 들어오기 바로 직전 빠져나오기까지의 시점이 서로 오간다. 이렇게 쓰니까 소설의 구성이 몹시 복잡하고 어려울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작품성이 높다고 평가받은 권위있는 문학상 수상작 소설들은 소설의 참목적이라고 할 수도 있는 오락성과 재미를 간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드문 케이스의 소설이다. 그냥 재미있다라고 하면 재미라는 것의 기준이 모호하지만, 일단 아직은 그리 어려운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단순한 소년의 시각으로 쓰여져서 가독성이 좋으면서도, 그 소년이 소설책에 완전히 집착적으로 빠져 있어서 작위적인 천진난만함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가독성과 작품성의 균형있는 조정을 보여주었다. 


두번째는 역사적으로 다른 두 시점(즉 망명자들의 과거와 미쉘의 현재)의 이야기가 평행하게 진행되지만 매우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고,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헷갈리지 않게 한 명씩 한 명씩 연극배우처럼 등장했다 사라지는 방식으로 과거를 이야기 하기 때문에 헷갈리지 않으며, 독자들은 한 소설 속에 많은 사람들의 각기 다른 사연을 독립적인 이야기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한명 한명의 이야기는 모두 미쉘이 그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이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독재적인 공산정권을 수호하기 위해 훗날 그것이 나쁜 짓이었음이 판명되는 일을 했던 사람도 있고, 한 때 영웅이었던 사람도 있다. 독립된 체제였다면 그렇게 한데 섞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마치 미쉘의 가족이 프랑크가 아니었다면 섞일 수 없었을 가족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알제리의 독립을 바라는 프랑크는 아버지가 한편이 되고, 물질적인 것에 현혹되는 여동생은 어머니와 한편이 되어 집안은 베를린 장벽처럼 커다란 장벽 앞에서 위태롭게 대치한다. 미쉘은 아버지와 정신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만 이혼과 더불어 집에서 나가는 방법으로 미쉘에게는 커다란 배반감과 상처를 주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상의 실현을 믿던 순박한 공산주의자들과 그들 편에 섰던 인민들에게 가해진 폭압과 폭정으로 얼룩진 배반처럼, 정서적으로 따스하게 매만져준 아버지의 떠남은 미쉘에게 있어 그 어떤 것보다 용서하기 힘든 배반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런 날들을 보내면서 아이는 자랐다. 


알제리의 독립이라는 상황은 당시 프랑스를 또다시 두 편으로 갈라놓는다. 알베르트 카뮈는 샤르트르의 친구였으나, 알제리의 독립을 반대함으로써 그를 믿은 지식인들을 배반한다.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샤르트르의 장례식은 한 시대의 멸망을 의미한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몰락을 의미함과 동시에, 그 상반된 이념이 피로 서로를 찌르고 공격했던 그 아픈 역사가 아무 의미없이 공허하게 사그라드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치 없었던 사람처럼 사진 속 숙청자들을 지워 없애던 사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전체 2/3가 지난 지점에서 등장한다. 그가 지닌 사연, 그가 구제불능 낙천주의 클럽에서 폭력을 당하고 배척을 당하는 이유 등이 미스테리처럼 비밀을 숨기고 있다가 막판에서 그 이유가 추리 소설의 끝처럼 밝혀지며, 우리는 한숨을 쉰다. 


오늘 우리는 한 작가를 땅에 묻는다. 시위를 하듯이. 그 작가와 더불어 시위를 벌이듯이. P13


*알라딘 독자 신간평가단에서 선정하고,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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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6-12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체제 안에서 섞일 수 없던 이들이 체스 클럽에서만큼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게 프랑스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소한... 하지만 현실은 ㅠㅠ

CREBBP 2015-06-12 20:53   좋아요 0 | URL
그러는 동안 그들 양쪽 모두가 목숨을 걸었던 그 체제라는 것은 완벽하게 박살나버렸죠. 샤르트르의 죽음처럼 묻혀질 사상들.. 참으로 이렇게 허무한 것들을 이렇게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작가가 있다니 대단해요.

에이바 2015-06-12 21:28   좋아요 1 | URL
프랑스 소설은 실험적인 작품이나 문학상 위주로 소개되다보니 지루하다는 이미지가 있는데요. 기네스님 말씀대로 오락성과 작품성의 균형을 잘 유지한, 무지 재미있는 소설이니 많이들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ㅠㅠ 게나시아가 이 소설만 6년 반 넘게 썼다니... 지금 5년째 접어드나요? 작업 속도 제맘대로 상상해서 지금쯤이면 다음 소설 나올 때 되지 않았나.. 기다려집니다ㅎㅎ 이 소설 판매량 엄청 늘어서 다음 소설은 빨리 소개됐으면 해요. 이게 인생 소설이라 더 안쓰려나요..

CREBBP 2015-06-12 21:27   좋아요 1 | URL
저도 엄청 재밌는 책 한권 발견하면 동네방네 그 책 전도사가 되는데 에이바님도 비슷하시네요 찌찌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