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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평점 :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에는 대체로 꿈꾸듯 몽롱한 이상이 있다. 모든 신화와 실화와 민담 속에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들을 환상적인 요소들 속에서 찾아 위로를 받는다. 그렇지 않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만져볼 수 없는 부는 상상력과 소망과 기적을 동원해 화려한 삶, 영원한 생명, 충족된 사랑, 치유 같은 것들로 대치된다. 문학은 아마도 이야기 속에서 공감이라는 감정적 작용을 통해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하는 데서 출발했을 것이다.
삶이 거대하게 품은 이상 뿐만 아니라 아주 소박한 현실적 소망마저도 거부한다면, 벼랑끝에 아슬아슬 지탱하고 있는 그루터기 마저 흔들린다면, 힘겹게 힘겹게 이어온 우리의 여정이 향할 곳은 어디일까? 신화의 시대를 지나서 과학과 물질 문명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현실적으로 불가능 한 것들, 기적과 마법 같은 것들로 기대할 수 있는 서사는 무엇일까. 도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페이지를 살짝 넘기면 그곳에 환상이 있다. 그것은 바람일까. 소망일까. 일장춘몽의 꿈일까. 도피일까. 혹 죽음일까.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서사는 이미 많이 쓰여왔다. 그림 속으로 발을 딛고 들어가면 그곳엔 온갖 기이하고 신기한 모헙들이 흥미롭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구병모의 소설 속 미연이 들어간 그림은, 거리의 한 구석을 점령한 채 허접하게 걸어놓은 전시회에서 발견한, 루초 폰타니의 공간개념 연작을 모방한 이름 모를 작가의 작품이다. 주워 입은 셔츠를 걷어올려 길바닥에서 젖가슴을 드러내놓고 아기의 젖을 물려야 하는 그녀는 역시 주운 유모차에 아기를 버려둔 채로 그림 속의 칼자국 속으로 들어가버린다. 물론 어린 아기와 미친 시누이에 대한 '의무'로부터 도피하고자 했던 행동은 아니다. 모작이기는 했지만, 어둠이 몰려오자, 그 뚜렷한 칼자국의 명암 사이로 어둠이 만들어 내는 알 수 없는 생명을 느끼고, 암부 깊은 곳의 소실점을 느낀다. 사라지는 지점이라니, 그곳이 자신이 가장 원하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그 그림의 칼자국 속으로 손을 넣어보고, 몸을 넣어보자, 그림 뒤편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었고, 그곳은 대단한 마법이 존재하는 곳이 아닌 캔버스 뒤편일 뿐이다.
살아있는 상태에서라면, 만일 현실에서 빠져나가 봤자, 완전한 소실점은 없다.어디에서나 평범하고 남루한 세계, 보도 블록의 요철 위로 분주한 소음과 무기력이 피어오르는 세계, '언제고 일상에의 대항과 반란이란 이런 식으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확인시켜주는' 그렇다. 그녀가 들어간 곳은 지극히도 현실적인 세계인 것이다. 그곳에서 그녀에게 생긴 변화는 3분마다 한번씩 보인다는 3분백을 들고 있다는 사실과 입어본 적이 없는 까만색 실크 블라우스를 입었으며, 또 어디를 가고 있던 중이었는지를 잊었다는 사실, 아기도 시누이도, 돈이라고는 집에 굴러다니는 동전까지 모두 합쳐봤자 버스비도 나오지 않는 집구석도 모두 잊고, 자신의 화실로 가던 중이었음을 깨닫는다.
젊은 날의 환영이었을까. 젊었었다고 사정이 지금보다 더 나은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미친 시누이와 아기 때문에 미대 졸업생치고는 예술을 포기하듯 내던지고 타협할 수 있는 그 흔한 미술학원 교사나 아동전집의 일러스트 자리마저도 요원하기만 한 그런 현실이 아니었을 테다. 그녀가 아기를 잊고 그림의 칼자국 속으로 들어간 세계가 누추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해도, 어느날 전도유망한 신인작가가 되기 위해 작업실을 다른 세 명의 미술가들과 나누어쓰고 있고 그곳으로 향해 있다고 해서, 그녀는 그곳에서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기억하지 못한다면 다시 또 연애를 하고 남편을 만나서 아기를 갖고, 지울 돈이 없어서 결혼을 하고, 세번의 사업 실패후 가뜩이나 어려운 친정집 재산까지 홀라당 말아먹는 현실이 기다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구병모의 소설집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방식, 즉 소멸점 속으로 사라지는 방식으로 현실을 외면한다. 혹은 극복이거나 타협일 수도 있겠다. 그것이 현실적인 눈으로 볼 때, 만일 정신이상이거나 도피이거나 혹은 죽음이 본 마지막 환영이더라도 말이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 살았대도, 더는 살아갈 방도가 없는 막다른 길이 나타나는 것이다. '꿈이 없다고 해서 현실이 있냐 하면 눈앞에 있기야 있지만, 없는셈 치고 싶은 현실뿐'인 사람들이 그 현실의 연장선에서 일어나는 환상을 다룬다.
그들의 공통점은 소외되고 핍박받는 최하층의 육체 노동자가 아니다. 쓸모 없는 박사학위에 긴 가방끈을 교수들의 잔심부름에 착취당하는 <여기말고 저기, 그래 어쩌면 거기>의 화자는 충격스런 엄마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가진 친구 하이의 건물 기어오르기에 관한 기이한 행동과 그에 따른 사고와 외상을 기록한다. <식우>는 G시에서 일어나는 부식성 비로인해 그 도시의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비정하게 그려내고, <이장>은 학대 의혹을 지울 수 없는 아이의 죽음을 바라본 어느 '폭력적 오지라퍼' 네티즌의 시각을 다루고,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은 도시의 건물마다 억세고도 거세게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는 덩굴식물이 소외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변해서 된 과정과 그 바로 산 사람의 얼굴을 가진 덩굴식물들을 제거해 나가는 비정한 사회의 모습을 담고 있다.
짧은 단편 단편에 개인의 불행을 끝간데 까지 밀어부치는 서사적 힘은 얼마 전에 읽은 천명관의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를 닮았고, 일어날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은 한참 전에 읽은 김중혁 작가의 <B1/F1>을 연상시켰다. 그렇게 완벽하게 다른 두 범주의 소설의 요소들을 하나의 작품집에서 볼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차갑고 비정한 현실 속에 개인의 불행을 환상적인 요소와 결합시킨 그녀의 작품 세계는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