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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아이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9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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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발가볏겨진 자신에 대한 수치심보다 더욱 저주스러운 건 먹고 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이었을 게다. 이름도 비슷한 아드함이 대저택에서 허허벌판 사막 한가운데로 쫓겨냈을 때 가장 직면한 문제는 역시 먹고 사는 일이었다.  아담이 어긴 금기라는 것은 겨우, 지천으로 널린 사과 하나를 따서 깨어물은 것 뿐이었다. 아드함이 어긴 금기 역시 언젠가 알게될 유언장의 내용을 미리 훔쳐본 것 뿐이었다. 너무 심한 벌이다. 그깟 사과 한 입 베어물었기로서니, 그깟 유언장의 내용을 살짝 보았기로서니.. 금은 보화를 훔쳐낸 것도 아니고 살인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제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대를 이어야 할 책임과 의무는 무시된 채, 황폐한 사막으로 쫓겨난 것이다.  


"먹고 살려고 일하는 건 가장 지독한 저주야" (p92)



지금의 잣대로 그들의 금기는 신화속에서건 소설속에서건 대수롭지 않았지만, 댓가는 한탄스럽고 저주스럽다. 먹고 살려고 일한다는 것, 아드함의 말처럼, 그리고 아담이 느꼈을 것처럼, 그것은 전 인류를 황폐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환경을 파괴하게 된 저주다. 더욱이, 이제껏 룰루랄라 먹고 마시고 사랑받고 노래부르던 아늑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등지고 혹독한 사막, 쌀 한톨 제스스로 나지 않는 바깥으로 쫓겨나는 일은 태어날 때부터 경쟁사회에 내몰려 있는 오늘날 현실의 우리들보다 더욱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이었을 거다. 


인간이고 짐승이고 태어난 이상 밥벌이의 수렁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먹고 싸는 일. 그것이 먼저고 그 다음에 다른 본성들이, 다른 고상한 취미들이 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생계를 꾸리는 모든 사람들은 밥을 벌어 먹기 위해 힘겹게 아침 잠을 깬다. 빈부 차이와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발생, 어쩌면 필연적으로 보이는 계급적 불평등과 폭력과 착취의 기원이 오늘날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수용하기 어려운 인간의 작은 욕망에 그 원죄를 뒤집어 씌우는 신화에 의지해 왔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오늘날 기준으로 가장 무거운 죄인 살인, 카인과 아벨을 상징하는 두 형제의 엇갈린 운명과 최초의 살인 역시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후맘에 대한 까드라의 질투에서 비롯된다. 그러면 애초 왜 하느님을 대변하는 자발라위는 에두 쌍둥이 아드함의 형제중 까드리 대신 후맘만을 선택했었던 걸까. 불평등은 태고적 신화와 함께 창조되었다. 그 숱한 피의 혁명들이 결국은 불평등을 바꾸지 못하고 무너졌듯,  그것은 운명처럼 존재했다.  태초, 대저택 시절부터 불평등은 존재했다. 그것이 자발라위의 뜻이고 우리 인류가 믿어 온 신의 뜻이다. 선택받은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가 태초부터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창조신이건 메시아건 그 어떤 선구자도 대를 이어 계속될 수 있는 영원한 평화와 영원한 평등과 영원한 자유를 줄 수는 없다는 것이 믿고 의지해온 태고적 신화에 화석처럼 박혀져 있고,  핍박과 억압에 항거하여 만들어낸 피의 쟁취는 반세기가 지나기도 전해 전염병처럼 휩쓸고 간 망각에 의해 다시 또 그자리에 그렇게 똑같이 억압과 지배라는 층위 내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소설에서 아브라함을 상징하는 아드함의 자손들, 최초의 살인자 카인을 상징하는 까드리의 후예들이 대저택 주위에 마을을 이루며 대를 이어 살아가는 모습속에서 되돌아본다. 


자발라위는 아드함에게 모든 재산을 내어주고 대저택에 칩거한다. 자발라위의 자손들은 저택을 중심으로 마을을 이룬다. 자발라위의 부동산을 관리하는 관재인을 중심으로, 우리동네 사람들을 관리하고 통치한다는 명목으로, 구역을 나눠 폭력과 수탈을 업으로 살아가는 수장들이 생겨난다. 수장들끼리 싸워 수장의 수장이 생기고 수장의 수장은 다시 관재인과 협력하여 마을 사람들에게서 약탈한 재물을 나누어 가지며, 우리동네는 마약과 가난과 폭력이 만성화되고, 다만 아드함의 전설은 신화가되어 대를 이어 전해질 뿐이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자발라위 마을, '우리마을'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전설 속의 선지자들이 , 참혹한 우리마을 백성들의 삶이 대를 잇는다.  그리고, 수장과 관재인의 핍박에서  구원을 이끄는 선지자들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서와 코란 속에 등장하는 선지자와 닮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모세, 예수, 모하메드의 혁명적 구원의 일대기를 그대로 알레고리화한 선지자들이 나타나고, 그들을 구원해낸다. 하지만,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그들은 다시 또 똑같은 핍박된 상태로 내몰린다. 


노벨상을 수상한 이집트의 작가 나지브 마흐프즈는 1952년 나세르 혁명 이후 '사회와 나 사이에 간극이 생'겼을 때, 즉, 혁명이 길을 잃고 탄압과 고문, 투옥 등 많은 모순과 오류의 그늘이 드리워졌을 때, 혁명지도자들에게 선지자의 길 아니면 폭력배의 길 둘 중에 어떤 길을 선택하고 싶은지 몯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한다. 선지자의 이야기가 예술적 뼈대를 제공했지만 명백하게 이 책은 사회비판적인 성격을 띈다. 역사는 언제나 똑같이 되풀이된다. 언제나 굶주리고 헐벗고 핍박받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는, 고통받는 대다수 어리석은 민중이 존재하고, 또 거대한 저택과 하렘을 지키며 폭력으로 마을을 다스리며 흡혈귀처럼 마을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소수의 지배층이 존재한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노래에 담아 이야기하고 후세에 전하면서 유일한 희망으로 또다시 그들을 구해줄 구세주를 기다린다. 그들의 바람대로 마을 사람들을 압제의 사슬에서 구원할 선지자들이 각기 전략으로 나타나지만, 유효기간은 한 세대 뿐이다. 정의 사회 구현에 따른 피의 댓가는 망각의 저주속에 쉽게 잊혀질 뿐이다. 


마흐푸즈가 묻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대답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신도 늙는다. 이집트 신화에서, 창조주 아툼은 계속해서 늙어가고 있으며, 그가 완전히 늙어 기력이 다하면 세상이 끝난다(얼마 전 실천문화사의 <세계신화여행>, 신화의 이집트편에서 읽은 내용) . 대저택의 높은 담장 속에서 자발라위 역시 늙어간다. 그의 저택 근처에서 마을을 이루고 그를 떠나지 않는 그의 후손들은 이제나 저제나 그가 모습을 나타낼까 그를 찾고 그를 기다린다. 당신은 어디에 계신가요? 어떻게 지내시나요? 더는 존재하지 않으신 것처럼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세요? 당신의 뜻을 저버린 자들이 당신의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습니다. 비록 이집트가 이슬람 국가이긴 하나, 수천년을 이어온 신화적 가치관이 소설에 투영된 것이 아닐까 했던 것처럼, 하느님으로 상징되는 자발라위는 소설 속에서 계속 늙어가며,  현대 과학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아라파의 침입과 오랜 심복의 살해에 대한 충격으로 자발라위 역시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자리에 올라 그가 되어야 해. 아라파는 자발라위의 죽음 이후, 스스로 마법을 써서 자발라위가 되고, 자발라위의 언약을 지켜, 우리동네 사람들을 해방시키고자 했지만, 자발라위의 살인 혐의를 알아차린 관재인에게 마법의 비밀을 제공하는 댓가로, 결국 그들과 한패가 되어, 치욕스럽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사치와 안락함을 누리다가 도망치지만, 결국 수장들에게 쫓겨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아라파가 남긴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가 끝까지 지키고 간직하려 했던 마법의 레서피들이다. 마법의 레시피는 이제 우리동네 사람들의 마지막 희망이다.  이제 이 마법의 레서피, 과학은 우리동네 사람들의 종교이자 신화가 되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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