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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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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릭 모디아노. 노벨상 수상자의 작품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은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는데, 지난 달에 새 책이 두 권이나 더 나왔다. 과연 노벨상 수상자의 책이라니 갑자기 어수선하게 많이 쏟아지는 건가 싶었는데, 그래도 딱히 내눈에 띄는 좋은 책이 더 많이 있지 않아서 신간평가단 추천 도서로 쏟아져나온 두 권의 소설 중 하나를 골랐다. 다수의 선택은 나의 선택과 반대로 이 책 지평이었다. 이 책의 출판사 제공 소개글에 눈에 띈 '기억에 관한' 글귀를 보고 같은 작가의 동일 소재가 소재가 조금 지겹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 전에 읽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별로였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다만, 읽고 싶은 책이 태산같이 쌓인 마당에 동일 저자라면 새로운 소재를 바탕으로 한 전혀 새로운 소설을 읽고 싶었고, 동일한 저자의 같은 소재의 소설을 읽는다는 점이 좀 낭비같았을 뿐이다. "기억의 예술을 통해 불가해한 인간의 운명을 소환하고 독일 점령기 프랑스의 현실을 드러냈다"는 2014년 스웨덴 한림원의 노벨상 선정 근거로 보면, 그의 전 소설이 기억을 예술화한 듯 하다. 잡담 끝. 


배경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없어서 한동안은 좀 희미하고 답답한 채로 인물의 생각만을 따라 읽어야 한다는 점이 소설을 느리게 읽게 만들고,  그 인물의 생각을 통해 내 생각의 일부를 투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끔 와락 동질감과 공감을 느끼는 류의 소설이다.  결말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뜨문 뜨문 정차하는 야간 열차를 타고 컴컴한 어둠속을 여행하는 듯한 전개에서 뚜렷한 결말을 기대할 것도 없었는데, 뜻밖에도 거기에 정차역이 있었고, 새벽이 밝아왔으며, 불확실하지만 어쨌든 미래인 것, 어둠이 아닌 새벽이 보였다. 

주인공 보스망스는 40년의 시간을 거슬러 기억을 환기한다. 우리들은 살다 보면 어떤 시간의 마디 속에 있는 기억을 통으로 잊는 경우가 있다. 자의이던 타의이던 그것은 아픔과 상처와 상실과 결핍 같은 부정적인 것들과 관계있을 터이다.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 기억이 지워버린 공간과 시간에는 그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었던 청춘의 그림자가 있었다. 깊고 어두운 절망만이 인생의 앞쪽 도로를 향해 나 있는 줄 알고 있었던 그 시절, 그 누구도 의지할 곳 없었던 연인이 아련한 아픔을 공유하며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던 곳에서 사람들은, 도시는, 체제는, 거리는 그들을 배반한다. 희미한 한 줄기 소망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가 지워버린 청춘의 한 페이지였던 그 짧은 시간동안 나눈 두려움, 외로움은 결국 그들의 편이 되어 주지 않았던 운명을 상대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컴컴한 무 속에 40년을 잠겼다. 

그 시절 이후 오랜 세월을 그는 삶의 일상사에 실려왔다.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의 차이를 없애는, 그리고 사람들이 세월이라 부르는 일종의 안개, 그 단조로운 흐름 속으로 서서히 섞여 드는 그런 일상사들에. 그는 그 무감각 상태에서 퍼뜩 깨어난 느낌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저 복도를 따라 프런트까지 가서 마르가레트의 객실 호수를 묻기만 하면 된다. 이 호텔과 주변 거리들에 그녀와 내가 남긴 파장이, 그 메아리가 분명 남아 있을 것이다. 93 


그녀는 그와는 딴 판으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비약과 단절로 이어지는 삶을 살아 왔으며 그때마다 제로에서부터 다시 시작했다 103

나이가 든 이후로는 책을 덮고 난 후에는 책에서 빠져 나와 주인공들과 빠이빠이 하고 바로 빠져나오는 편인데, 그들을 그렇게 아쉽게 보낼 수 없었다. 오랜만의 일이다. 단아하게 늙은 마르가레트가 40년만에 늙은 보스망스를 맞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보스망스는 왜 라고 묻지 않을 것이다. 마르가레트 역시 아무말 못할 것이다. 40년 동안 이루어온 시간도 부정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함께 손을 잡을까. 눈물이 날까. 잊혀진 기억의 마디들 사이에서 빠져나간 것들 때문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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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6-03-05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모디아노도 기억의 소설가였죠. 오래된 상점들의 거리도 기억을 잃은 탐정 얘기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기억을 예술화˝했다는 말씀이 와 닿네요. (정작 소설은 읽지도 않았는데!)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이 소설 읽어볼게요.

CREBBP 2016-03-05 17:4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오래된은 상실된 기억을 찾아가는 여정이고.. 이 책은 잊고 있었던 기억을 소환하는 것이고 .. 비슷하긴 한데 완전 달라요. 문체는 같은 분 번역이라 비슷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