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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평점 :
소련일 때 나라를 떠나, 소련이 없어진 우크라이나 시골 집으로 부모를 찾아간 리모노프는 추운 겨울 난방이 안되는 집에서 가스렌지를 켜둔 노모에게 끄라고, 프랑스에서라면 가스비 폭탄을 맞았을 거라고 말한다. 몽상으로 끝났다고 말하기엔 유례없는 숙청과 학살과 공포로 얼룩졌던 유토피아 실험. 나는 그 곳에 적응하고 숨쉬던 1억 5천만명의 실존이 있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초라한 단칸방에서 구차하고 옹색한 살림들을 떨그럭거리며 사는 춥고 배고픈 삶이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면, 그 절대적 빈곤이 일부만 엄청 부자인 사회보다는 정신적으로 덜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게 그리 낯선 생각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의 엄마는 20년만에 서방세계에서 돌아온 아들이 가스비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찢어지듯 마음이 아파온다. 아니 그 나라(프랑스)는 나라가 얼마나 가난하면 국민에게 가스비를 대주지도 못하는게냐. 여기도 곧 그렇게 한다는구나.
진실이 완벽하게 은폐된 사회에서 바깥 세상의 움직임에 전혀 동요되지 않고 산다면, 그것이 설령 거짓일지라도 바깥 세상이 안쪽 세상보다 더 못살 곳이라고 안다면, 경험해보지 못한 부가 어떤 것인지 모른다면, 모두가 공평하게 못산다면, 현실이 차라리 유토피아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난방조차 되지 않는 추운 겨울 단칸방에서 지내면서 난방기가 없어 하루 종일 빈 공기에 가스 렌지 불꽃이 일게 하는, 다같이 배고프고 똑같이 궁색한 사회에서 뼈가 묻힐 것을 행복으로 아는 노파는 가스비를 걱정하는 서방 세계에서 온 아들이 진실로 진실로 안타깝고 메어진다. 돌아와라 따뜻한 고향으로.
다시 은폐된 진실에 대해 얘기해보자. 서방 세계 정치 역사에도 관심 없는 내가 그쪽 동네 정치에 관심을 가졌을 리 만무인 내가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많은 사실 중 주목한 건 소련의 급작스런 해체와 공산주의의 붕괴가 사실은 고르바초프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저 시류에 편승해서 약간 자유의 제스처를 쓰던 그는 단지 완벽하게 은폐된 사회에 봉인을 조금 해제했을 뿐이었다. 그 작은 틈으로 쏟아져 들어왔던 지식들이 순식간에 사회를 해체시켰다. 금서였던 책이 풀리면서 서방세계에서 들어온 정보들, 이제껐 공산주의 사회에서 진실로 알고 살았던 그 모든 것이 거짓으로 판명나는 순간 이미 학살과 공포와 파시즘으로 버텨가던 거짓된 유토피아의 실험은 막을 내리고 있었다.
리모노프. 이 사람은 전기로 읽을만한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한마디로 개자식이고 상종못할 인간인데, 그의 표현을 빌지 않아도 위험천만한 인물이다. 그러나 책을 읽다 보면 분명 그를 혐오하는 마음을 붙잡기 위해 애를 쓰는 저자, 역시 그의 본성을 끊임없이 독자에게 환기시키며, 그의 매력에 빠질까봐 경계한다. 그렇다면 이 책이 무엇이냐, 전기냐 소설이냐, 다 읽었어도 잘 모르겠다. 앞날개 뒷날개 뒷표지에 역자 노트까지 다 읽어봐도, 한마디로 소설이라는 건지 다큐라는 건지 어떤 장르적 정의에 딱 들어맞는 게 없는 듯하다. 팩션이라는 표현도 보이는데, 소설인 드라마틱함과 다큐적인 현실 고발 참여적 성격이 혼재되어 있으면서, 한 인물이 살아온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이 펄펄 살아 날뛰고 있으니, 어떤 장르에서 읽더라도 만족X2의 효과를 볼 수 있는 책이라는 점만은 누구라도 공감할 책이다.
지난 주 주말부터 틈틈히 읽었는데 평소 읽는 속도보다 서너배는 더 걸려서 이제야 끝냈다. 사진에서 보면 알록달록 스티커를 잔뜩 붙여놓았는데 에쁘라고 붙여놓은 게 아니다. 이 3M 태그 스티커는 책의 난해함 때문에 도입해야 했다. 형광색은 주요 인물이 나타나는 곳에, 오렌지 색은 주인공이 다리를 불태우던 수많은 전환의 순간에, 파란색은 저자가 생각을 정리할 때, 또다른 색은 주요 역사적인 지식이 설명되어 있을 때, 또다른 색은 주인공의 생각과 철학을 그대로 반영하는 글들. 안그러면 계속 누적되는 새로운 이름들, 지식들을 연결해서 다음을 이어가기 어렵기 때문에 이번에 새로 도입된 나만의 책읽기 시스템이다. 이사람 아까 나왔던 사람인데 누구더라 싶으면 뒤적이기 쉽게 표시해 둔 거다. 누구라도, 심지어는 역자조차도 학을 떼며 인정한 사실이지만, 러시아 사람과 지명 및 도시의 사건들의 이름이 길고 비슷비슷한데다가 끊임없이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영화나 연극으로 치자면 지나가는 행인 1, 지나가는 행인 2에 불과한 그의 주변부에 있던 인물들이지만, 저자의 눈을 통해 아주 꼼꼼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그들이 실존인물로서 좋게든 나쁘게든 세계사에 나름대로 한 획씩 그어왔고 그의 인생을 이해함에 있어 시대적 배경 삶의 환경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물론 줄리안 반스 같은 대문호에게조차도 이름이 생소한 리모노프의 삶에 조연으로 등장한 이들이 솔제니친, 브로드니스키 등의 노벨상 수상자에서부터 미국의 대부호와, 20세기의 끝날과 21세기의 첫날을 피로 물들여온 세르비아 전범들, 여가수와 모델 등 다양한 부류의 유명인들이며, 그의 삶 자체를 설명하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역사서로서의 가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술집의 바텐더를 비롯한 책 속의 다른 모든 인물들처럼, 모든 인물들은 실존 인물 아니면 중간에 죽은 역사적 인물이고, 어떤 식으로든 그의 인생 행로에 영향을 주고 받았다. 추리소설을 읽을 때 사건의 단서를 잡기 위해 꼼꼼히 읽듯 그가 걷고 있는 길 자체를 그의 철학 속에서 이해하기 위해 즉, 역사 속에서 때를 다르게 만났다면 난폭한 지도자 혹은 학살자로 존재했을 수도 있었을, 그런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단서로서 그를 이해해기 위해 그의 주변 인물들을 역사의 한 장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 책은 한권의 민중 역사서로 읽을 수도 있겠다. 책을 오래도록 읽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적 인물과 사건 배경에 대한 저자의 저자의 평론이 빼곡히 전체를 관통하며, 그것이 꽤 읽을만하고 흥미롭다.
또한 이 책은 흥미로운 소설책 이상 흥미롭게 읽히는데 그 이유는 물론 드라마틱한 리모노프 실존의 삶 자체가 몇 권의 연작 소설 분량만큼 역동적이기도 하기 때문이지만 저자의 문체 자체도 한몫한다. 복잡한데 유려하다. 문장 하나를 읽으려면 일단 주어찾기부터 해야 되고 문장 내에 모르는 러시아어의 단어, 사건명, 인명, 지명, 책이름 등등을 해독해야 한다. 그럴 가치가 있는 책이다. 여기서 독자는 가끔 갈팡질팡한다. 주인공 리모노프의 입장과 그를 기술하는 저자의 입장 즉 서방 세계에서 태어났고 러시아를 연구하는 엄마를 둔 저자가 그를 보는 입장이 번갈아가며 한 사람의 인생을 양쪽에서 조명하기 때문이다. 영웅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났던, 죽는 것보다 무명으로 안락하게 사는 것이 더 싫었던 리모노프에게 이입되려고 움찔거리는 사이 저자가 나타나서 서구 민주주의에서 교육받은 한 저널리스트의 시각으로, 그를 평가하고, 주변 인물들을 탐색한다. 스스로를 괴롭히는 주인공, 그 주인공과 교감하지 못하도록 독자를 괴롭히고, 또한 그 스스로를 괴롭히는 저자. 이러한 삼각관계가 팽팽하게 긴장감을 형성하며 속도감있는 한 사람의 실존적 역사가 광대하게 펼쳐진다.
학창시절 <베르사이유 장미>라는 만화책을 봤을 때가 생각난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상의 인물과 역사적 인물들이 마구 섞여 온갖 로맨스와 시련을 겪는 이야기인데 주요 관심 사항인 로맨스를 이해하려면 당시의 역사를 A부터 Z까지 이해해야 했다. 따로 공부를 해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배경 자체가 역사이므로 루이 14세인지 16세인지하는 왕과 마리 앙뜨와네트의 모습, 스페인과 프랑스 서유럽 국가들의 각축전, 혁명의 열기와 가난한 민중의 생활상 등, 세계사 시간에는 배우지 않은 역사의 안쪽 진짜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 싸고, 생각하고 했는지를 통해 역사의 흐름을 조금이나마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라는 것이 암기를 통한 지식의 습득에 불과할 때에는 앵무새처럼 의미없는 단어의 나열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작은 부분의 역사라도 이해 속에 편입되었을 때, 앎이 감정과 교감하면서 파생되는 효과를 처음으로 알게 해준 책이었다.
이 책의 배경은 우크라이나 시골에서 리모노프의 삶이 시작된 1930년대쯤의 러시아로부터 시작해서 공산주의 소련이 해체되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이후 현재까지를 배경으로 그가 지나온 공간, 오크라이나, 모스코바, 뉴욕, 파리, 보즈니아, 다시 러시아까지 광범위하다. 스탈린의 망령을 쓰고 반체제 세력을 규합하여 권력을 꿈꾸는 희극적이리만큼 어리석고, 희극적이리만큼 명민한 인물 리모노프를 이해하려면 그가 거쳐간 수많은 실존인물, 그가 살았던 시대를 통치했던 권력자들, 세계사의 흐름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를 통치 권력으로 만나는 것이 아닌 맨 밑바닥 맨발로 서 있는 사람들, 그 짐승처럼 딱딱하고 우악스러운 민중의 발끝으로 만나는 생생한 경험이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에는 깡패로, 그 다음에는 조폭 지망생으로, 그리고는 뜬금없이 시인이 되었다가 미국 이민후 '검둥이 노숙자와 붙어먹는 호모'에서 부잣집 집사를 지내고, 미국에서는 출판사를 찾을 수 없어 버려진 자신의 자전적 소설이 프랑스에서 출간되는 계기를 따라 파리로 가서 문인 대접을 받게 된다. 스탈린주의자인 리모노프는 과거 소련의 영예(?)를 회복하고자 옐친과 고르바초프에 반대하는 반체제인사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과 서가 선택한 시스템이 가져온 크나큰 경제적 낙폭, 허접 쓰레기같은 생활용품들을 사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며 아귀다툼을하는 모습을 지켜보지만, 그가 선택한 길은 단 하나 영웅이 되는 길이었다. 영웅이 되려면, 다른 영웅 밑에서 얼쩡이기 보다는 스스로가 세력을 형성해야 한다. 그 무모한 선택, 세 사람으로 출발한 민족볼세비키당과 창당신문, 그것을 역에서 배포하여 시골로 실어나르면서 형성된 추종자들. 그는 그렇게 파시즘과 반체제인사, 부카상 후보 문인과 락스타와 히피족 이미지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대중을 선동한다. 대소련으로의 귀환이라는 허황된 구호가 러시아 젊은이들에게 꽂힌 이유는, 그들을 절망시킨 자본의 논리였을 것이다. 여전히 못살지만, 대부분은 구체제소련에서보다 더 못살고 아주 극히 일부는 상상도 못하게 잘살게 된 현실.
러시아의 근대사를 불꽃처럼 살고 싶었던 어떤 개자식의 이야기. 만일 그가 가진 열정이 시대를 조금 달리 만나고, 조금 더 운이 좋았더라면 제2, 제3의 히틀러와 스탈린이 또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 그런 본성은 우연히 작가의 눈에 띈 리모노프만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역사는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우매한 민중은 자신이 누구를 향해 표를 찍고 있는지 무엇을 향해 시간을 거스르고 있는지를 모른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스탈린 집권 25년동안 숙청으로 살해된 사람의 수는 2천만명이라고 한다. 그 전에 독일과의 전쟁에서 죽은 사람의 수도 2천만명이라고 한다. 불과 십이십년 전 우리나라의 총 인구수가 4천만이었던 때를 회상한다면 저 숫자가 엄청난 과장이라고 쳐도, 상상도 불가능한 숫자다. 명민하고 의리있는 리모노프가 그 숫자를 모를 리 없다. 웃을 수도 없게 어리석은 리모노프는 그 시대로의 회귀를 꿈꾸고 있다. 왜. 영웅이 되는 더 가까운 길이라서.
이 책이 슬픈 건 그 이후다. 스탈린의 망령이 사라지고, 자유가 오면 무엇이 복구될까. 쥐어 보면 한 줌도 안될 보상은 조지 소로스 같은 엉뚱한 대자본가에게로 흘러가고, 소련 붕괴후 단 몇년만에 옐친은 서기관 몰래 연방을 해체하고 공산당도 무효화시켰지만, 그 지겹도록 굴려온 파시즘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데 역사의 희극이 있다. 러시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던 나라. 한 어린 소년의 꿈이 마피아인 것이 이상하지 않은 나라. 안락한 삶이 보장될 때마다 절망하고, 수도 없이 다리를 건너고 그 건너온 다리를 불태웠던 사람. 이 책을 통해 참으로 인생동안 모르고 지나갔으면 아찔했을 뻔한 많은 역사를 배웠고 느낀 것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