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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1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에밀졸라를 인터넷에 찾으면, 자연주의의 거장이라고 나온다. 나는 처음에 자연주의를 잘못 이해했다. 변명을 하자면 이과 출신이라 문학사와 사조에 대한 기반 지식이 없어서다. 우리에게 '자연'이라고 하면 아름다운 들과 꽃과 나무와 시내와 푸른 하늘 같은 아름답고 건강한 목가적 풍경을 떠올리지만, 문학사조에서 에밀졸라를 향해 말하는 자연주의란 것은 그게 아니다. 자연은 막연히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인공적이지 않은 것. 꾸미지 않은 것. 허세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아름답기만 한가, 꽃들이 활짝 핀 푸른 들판과 새가 지저귀는 숲도 자연이지만, 거센 폭풍우와 사나운 들짐승과 볼모의 황무지도 자연이다. 거기에는 추함과 사악함을 덮는 인공적 미화의 과정이 없다.
대개 소설 속의 압축된 삶에는 작가가 전달하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들만 살아 있고, 나머지 일상은 없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창조한 인물들의 어떤 특정 부분의 삶, 특정 생각의 조각들만을 골라 꿰어 놓은 책을 읽는다는 뜻일 것이다. 거기에는 주제가 있다.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똥을 누거나, 코딱지를 후비거나 하는 별 의미없는 일상들은 생략된다. 사랑, 욕망, 증오 그런 감정들을 녹여낸 감동에는 인위적인 아름다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소설은 생략의 예술이다. 원하는 것만 남기고 생략하는 것. 원하는 부분만 축출해서 강조할 때, 그 소설속 사람들은 나머지 다른 일상들, 그 생각 외의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사는 것 같다. 그걸 독자는 모른다. 그들이 어떻게 똥을 닦는지. 내게, 에밀졸라의 작품 속 자연주의라는 말은, 주제를 부각하기 위해 그 누구도 그 어떤 감정도 미화되지 않았다는 걸로 이해된다. 에티엔과 카트린의 순수한 사랑마저도 누추한 단면이 적나라하다.
19세기 세계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뜨겁게 불타오를 때, 그 불구덩이 역사 속을 통과하던 자리가 배경이다. 혁명으로 이룩해낸 피의 댓가로 탄생한 새 공화정에 대통령으로 앉은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왕정으로 복고한 때다. 억압과 착취의에 대한 자각이 들풀처럼 번질 때, 탄광 노동자의 깊숙한 삶 속으로 파고 들어간 에밀 졸라는 개미집처럼 복잡한 깊고 어둡고 습한 탄광 속 그들의 삶과 사랑과 분노와 체념과 실패와 희망을 적나라하게 캐어내었다. 탄광 깊은 곳에서 몸이 바스라질 때까지 석탄을 캐던 노동 현장에 대한 묘사는 인류 기록 유산에 가깝다. 닭장처럼 좁은 연립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은 그들의 거처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며 아귀다툼으로 가정과 이웃의 일상이 묘사되는 그곳에 사회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숭고한 노동자들의 거룩한 이상은 없다. 하숙생을 포함한 온 가족이 한 방에서 함께 지내며, 사생활 없이 노출된 아이들의 어른 흉내내기 놀이는 그 아이들이 본 모든 것, 탄압과 착취, 섹스와 욕설 폭력 속임수 등 그 모든 어른들의 세계를 담는다. 아직 발육이 끝나기도 전에 소녀들은 시커먼 공터의 으슥한 곳에서 힘센 남자들게 유린당하고 아이가 아이를 가지면 엄마가 되었지만, 하루 일당으로 집에 보탬이 되는 아기의 엄마 아빠가 된 아이들은 분가하지 못하고, 석탄 가루가 날라다니는 공터와 숲에서 섹스를 한다.
전기와 석유가 하던 모든 일을 석탄이 하던 시대에 석탄 채굴은 모든 산업의 기반산업이었다. 체념과 핍박의 수레바퀴 속에서, 탄광의 먼지와 사고로 목숨을 잃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석탄을 옮기던 자식들이 다시 또 아비 어미와 똑같은 생을 반복하면서 가난과 굶주림과 착취와 포기와 체념을 운명으로 안고 살아가던 그들 광산 노동자들이다. 착취가 한계에 달해, 아이들을 포함한 온식구가 죽도록 일해도 굶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더욱 더 열악해지는 환경이 닥치자, 조금씩 흔들리던 굳은 체념은 천천히 자각으로 바뀐다.
깨우쳐주고, 자각하게 하고, 알리고자 한 게 목적이고, 그것에만 충실했다면 그게 어디 예술이겠으며, 왜 에밀 졸라가 위대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소설이 위대한 건 노동자의 삶과 혁명의 과정을 그렸기 때문이 아니다. 비참한 노동자의 현실을 사회에 알리거나, 노동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사회 소설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건 이야기 전체의 일부일 뿐이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짐승같은 삶이 있는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 밖에 없는 부르주아들의 삶도 있다. 언제나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고 광부들을 불쌍히 여겼던, 온실 속 화초, 공주처럼 보호되었던 부르주아의 세실의 짧은 생과 죽음도 있다. 각자 자기가 속한 환경 속에서 그들의 세계관 내에서 그들 나름의 삶이 있다. 부르주아와 노동자가 선과악의 대립적인 구도로 그려지지 않고 인간의 본성이 표출되는 다면적인 양상을 골고루 품는 거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아- 에밀 졸라는 정말로 위대하다. 소설 너무나 완벽하다. 결국 노동자들의 승리로 결말짓지 않았다. 그들은 패배했다. 언제나 늘 그렇듯이. 약한 자, 힘없는 자, 억눌린 자들이 저항할 때는 죽음 말고는 더이상의 바닥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새로 도입된 임금 제도로 인해 1시간의 노동양을 더 착취당하게 된 채로, 아무 득실없이 세 달 동안 배곯아 죽고, 총에 맞아 죽고, 광산 붕괴로 죽었지만, 그 피의 댓가가 더욱 끔찍한 노동 현실에 팽개쳐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 숱한 패배들이 영원한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부딪치고 실패하고 또 부딪치고 실패하고, 그렇게 계속되는 흔들림 속에 조금씩 사회는 변화되고 있을 터였다.
그대의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은 이 세기말의 핏빛으로 물든 어느 날 저녁에 결정적으로 모든 것을 휩쓸어갈 혁명의 붉은 환영이었다. 그렇다. 어느날 저녁 분노가 끓어오르는 민중이 고삐풀린 말처럼 이렇게 길을 따라 달려갈 것이다. 그리하여 부르주아들의 피가 넘쳐흐르고 그들의 잘린 머리가 사방에 나뒹굴며 활짝 열어젖혀진 금고의 금이 길 위에 뿌려질 것이다. 여인네들은 울부짖고 남자들은 늑대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덤벼들 것이다. 그렇다. 지금 저들과 똑같은 누더기를 입고 똑같이 발소리 요란한 커다란 나막신을 질질 끄는, 똑같이 더러운 피부와 악취나는 숨결을 뿜어내는, 저들과 똑같이 끔찍하고 야만스러운 무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이 낡은 세상을 깨끗이 씻어내고 말 것이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서 도시에 돌멩이 하나 남지 않을 것이며 가난한 이들은 하룻밤 사이에 부자들의 여자들을 밟고 그들의 술 저장고를 비워내는 나는 축제가 끝나면 다시 숲속의 야생적인 삶으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아마도 이 땅에 새로운 질서가 자라나게 될 때까지 <제르미널 2권-P95>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